‘인종청소’의 전범 카라지치 체포

[국제] 카라지치는 세르비아민족의 영웅인가 살인마인가?
‘인종청소’의 전범 카라지치 체포
보스니아 내전(1992~95년) 당시 인종청소의 주범으로 13년간 수배를 받아 온 전범 라도반 카라지치가 7월 21일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비밀 요원들에게 체포되었다. 카리지치는 보스니아 내전 종료 후 13년간 서방세계의 추적을 피해 도피 생활을 해왔었다. 라도반 카라지치는 보스니아의 스르프스카 공화국의 정치인이자 시인인 동시에 정신병 의사였다. 그는 1995년 보스니아 내전 중에 대통령직을 수행했으며 인종 청소를 자행해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의 전쟁범죄자로 수배 중이었다.

내전 당시 카라지치는 사라예보를 공격해 1만2천 명을 살해했으며 1995년 스레브레니차에서 8천 명의 무슬림을 무차별 살인하는 등의 만행을 주도해 현상수배 됐다. 13년 동안 카라지치를 체포하기 위해 국제형사재판소(ICTY)는 제61조 규약에 따라 그를 국제 범죄자로 지명했다. 국제형사재판소(ICTY)는 카라지치가 1992년~1995년 보스니아 내전 당시 전쟁 범죄로 학살을 자행했다는 충분한 법적 근거가 확보됐다고 판단했으며 미국 정부는 5백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기도 했다

정치인이 되기 전의 삶
라도반 카라지치는 1945년 6월 19일 유고슬라비아의 몬테네그로의 근처의 Petnjica에서 태어났다. 그는 Niksic에서 유소년 시절을 보내고 1960년에 거주지를 사라예보로 이사하여 정신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1971년 7월 19일 그는 의사가 되었고 정신의학 특히 신경증과 우울증 치료 전문의가 되었다. 1974년부터 1975년간은 뉴욕의 콜롬비아 대학에서 수련을 받기도 하였다. 그 후, 유고슬라비아로 귀향하여 1977년 3월 그는 사라예보의 ‘성인을 위한 교육센터’에서 일을 하였다. 1979년부터 1992년까지 사라예보 국립병원의 정신과 의사로 복무하였다. 이 시기 중 1983년부터 1984년까지 벨그라드 ‘붉은 별’ 축구클럽의 정신 상담의사로도 일했다. 1981년에는 공금횡령혐의로 11개월의 미결구류 선고를 받기도 했다. 1984년부터 1985년에는 징역 3년의 선고를 받았지만 판결은 적용되지는 않았다.

정치인 카라지치
1989년, 카라지치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세르비아인 민주당의 설립 멤버의 한 명이 되었다. 즉, 정치계에 입문을 한 것이다. 이 정당의 주요 목적은 유고슬라비아 공화국내의 세르비아인을 정리하고 세르비아 공화국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1991년 10월 24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세르비아인만으로 구성된 보스니아•세르비아 의회가 설립되었다. 카라 지치는 보스니아 내에 세르비아인 자치구와 그것을 대표하는 의회도 조직했다. 결국 1991년 11월, 세르비아인은 주민 투표를 실시하였다. 결과는 압도적 다수가 유고슬라비아에의 잔류를 요구하였다. 1992년 1월 9일, 보스니아•세르비아 의회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세르비아인 공화국(영어: The Republic of the Serb people of Bosnia and Herzegovina / 러시아어: Republika srpskog naroda Bosne i Hercegovine)의 설립을 선언, 2월 28일에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세르비아인 공화국의 헌법이 제정되어 그 영토는 세르비아인 자치구를 포함하는 것 이었다. 1992년 2월 29일과 3월 1일, 유고슬라비아 공화국으로부터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독립의 가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했다. 세르비아 가까이의 유고슬라비아 정부로부터의 독립을 바라지 않는 세르비아인은 이 투표를 참가하지 않았지만, 보스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은 투표에 참가해, 결과적으로 참정권이 있는 국민의 64%가 투표하였고, 98%가 독립을 지지하는 결과가 되었다. 결국 1992년 4월 6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EU로부터 독립국으로서 인정 받게 되었다. 이것에 불만을 품은 세르비아인 세력의 보스니아•세르비아 의회는 4월 7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에서 세르비아인에 의한 스르프스카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 보스니아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분쟁으로 돌입하였다. 카라지치는 1992년 12월 17일 스르프스카 공화국의 대통령, 12월 20일은 군의 최고 사령관이 되어 보스니아인이 많은 지역에서 세르비아인 이외의 민족인 이슬람계 보스니아인이나 보스니아계 크로아티아인의 살해를 지시했다고 여겨지고 있다. 특히 1995년 7월에 스레브레니차에서 일어난 ‘스레브레니차의 학살’을 지휘했다고 여겨지고 있다. 카라지치는 대 세르비아주의를 지지하고 있었지만 러시아나 그리스 외의 정교회계의 나라들과의 제휴에는 주저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1994년 2월, 카라지치는 그리스 정부와 비밀리에 접촉을 하여 세르비아와 그리스가 동맹을 맺을 것을 제안했다.

도주
1995년 카라지치에 대한 체포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하였다. 1996년 이후 카라지치는 ICTY에 의해 전쟁 범죄자로서 지명 수배되고 있었다. 국제형사경찰기구의 영장에 의하면 폭행, 집단학살, 쥬네이브제조약 위반, 살인, 약탈 등의 혐의로 영장이 발부되었다. 자세한 것은 유엔이 제출한 기소장에 기재되어 있다. 2001년에는 카라지치의 고향에서 그의 무죄를 확신하는 지지자들이 시위를 했다. 카라지치는 10년 이상 도피 중이나 그를 지지하는 세르비아인들은 그의 무죄를 확신하고 그를 영웅시하고 있다. 2003년 3월 카라지치의 모친은 자수하지 말라고 카라지치에게 호소했다. 2004년 11월 영국의 방위 관계자들은 카라지치의 수배를 위해서는 발칸반도 정부들에 대한 정치적 압박이 군사적 행동보다 효과적일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2005년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지도자들은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경제적, 정치적 발전을 위해 카라지치의 자수를 종용하였다. 같은 해 5월 카라지치에 대한 체포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했으며 같은 해 7월 7일 NATO군에 의해 카라지치의 아들이 체포되었으나 10일 만에 석방되었다. 7월 28일, 카라지치의 아내 리리아나는 남편 카라지치에게 그녀와 그녀 가족이 받는 압력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카라지치의 자수를 간접적으로 호소하였다. 2007년 2월 1일, 카라지치가 러시아에 숨어 있다는 기사를 보스니아의 한 신문이 보도했으나 러시아 정부는 이를 부인하였다.

체포
2008년 7월 21일, 세르비아의 대통령 술레만 티히치는 카라지치가 구속되었음을 발표했다. 체포 당시에 카라지치는 베오그라드에 살고 있었으며 백발에 희고 긴 수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드라간 다비치” 라는 가명으로 사설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병원은 대체의학과 심리학에 관련된 진찰 업무를 하고 있었다. 카라지치가 체포된 밤, 사라예보는 대부분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인들이 모여 그의 체포를 축하하는 파티를 열었다.

스레브레니차의 학살
락토 믈라디치 장군이 이끄는 보스니아 세르비아군대에 의해 스레브레니차 도시에 거주하는 보스니아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이 학살은 세계2차 대전 이후 유럽에서 저질러진 최악의 학살사건으로 여겨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약 8000명의 행방불명자가 발생했고 최종 집계된 피학살자의 수는 2000명이 넘어 선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것은 구-유고연방을 위한 국제형벌재판소와 국제법정에 의해 ‘인종학살’로 규정되었다.

► 상황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붕괴와 연이은 전쟁의 결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인들은 지역의 보스니아주민들을 말살하는 소위 ‘인종청소’를 자행하면서 동보스니아 대부분의 지역을 통제하였다. 이 사실은 눈으로 직접 본 수천 명의 증인들과 국제단체들에 의해 세세하게 알려졌다. 스레브레니차 도시는 공식적으로는 비무장을 한 소수의 보스니아계 주민들이 머물고 있는 지역이었다. 주변지역들과 도시의 많은 세르비아인들은 분쟁 초기에 세르비아군대를 규합 조직하였다. 그들은 군수물자와 박격포 등 군 장비들을 세르비아 계 사람들로부터 제공 받아 보스니아인들의 집을 파괴하거나 약탈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공식적으로는 비무장상태 임에도 불구하고 보스니아계 무장세력들도 참혹한 전쟁터가 될 분쟁지역 뒤편에서 전투준비를 하고 있었다. 현장에서 유엔군을 지휘하고 있던 프랑스의 Morillon 장군은 “크리스마스의 전통적이고 신성한 밤에 보스니아 사령관이 세르비아 마을들에 미사일을 운반해 왔다”고 비난하였다. 유엔의 한 보고서에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대통령 Izetbegovic는 나토의 개입이 가능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세르비아인들이 스레브레니차에 무력으로 진입하여 적어도 5,000명을 학살할 겨우 이러한 개입은 즉각적으로 실행할”거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1995년 세르비아 무장세력들은 마을에 공격용 미사일들을 발포하였다. 대략 600명의 네덜란드 유엔 방위군들이 유명인사들의 보호작전에 돌입했으나 소규모 전투에 개입되고 말았다. 1995년 4월 말, 400명의 유엔군들이 보스니아-세르비아 무장세력에 의해 인질로 잡혔으며 나토군의 비행 미사일이 보스니아-세르비아 무장세력의 병영창고를 향해 투하되었다. 1995년 6월 4일, 옛 유고슬라비아 유엔군 프랑스 사령관 Bernard Janvier 장군은 과반수 이상이 프랑스인들인 유엔군 인질들의 석방을 얻기 위해 비밀리에 락토 믈라디치 장군과 회동하였다. 락토 믈라디치 장군은 더 이상 전투기의 미사일 발사가 없기를 Janvier 장군에게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그러고 나서 5일이 지난 후 유엔의 지역 대표인 다카시 아카시는 유엔은 “평화유지 원칙에 즉각적으로 동의한다”고 선언하였다. 1995년 7월 7일, 락토 믈라디치 가 이끄는 보스니아의 세르비아 무장세력들이 마을을 기습 공격하였다. 도시의 대부분의 주민들은 유엔 주군이 주둔하고 있던 포토카리 도시를 향해 즉각적으로 피난 길을 떠났다. 또 다른 시민들은 보스니아 영토로 버스를 타고 피난하였다.

► 도망자들의 학살
군인들 뿐만 아니라 노인과 어른의 대부분의 남자들은 50km 떨어진 보스니아인의 도시인Tuzla에서 재회하기 위해 이동하였다. 그러나 12,500명으로 추산되는 이 무리는 세르비아 무장세력들에 의해 신속하게 포위를 당했다. 세르비아 무장세력들은 방공포와 중화기를 사용하여 그들에게 폭격하였다. 이 갑작스런 공격에 의해 수백 명이 살해되고 많은 사람이 부상을 당했다. 항복하여 포로가 된 자들은 끌려가서 총살을 당했다. 더욱이 세르비아군인들은 나머지 생존자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보스니아 영토를 공격하면서 많은 살상을 자행하였다. 생존자들은 생화학 무기들을 사용 한 세르비아 군인들을 비난하였다. 이 생화학무기들은 희생자들을 몽롱한 상태로 환각현상을 일으키게 하는 제압용 가스로 추정되었다.

► 책임소재
보스니아 세르비아 대통령이었던 라도반 카라지치와 더불어 락토 믈라디치 세르비아장군은 전쟁에 관련한 법과 관례를 위반하고 인간성에 반한 범죄, 인종학살의 혐의로 구-유고연방을 위한 국제형벌재판소에 의해 고발되었다. 2001년 8월 2일, 락토 믈라디치 보좌하며 스레브레니차의 습격을 이끌었던 보스니아 장군 라디스라브 크르스티치는 구-유고연방을 위한 국제형벌재판소에 의해 인종학살과 다른 범죄들의 혐의로 징역46년을 선고 받았다.
2004년 보스니아의 세르비아 공화국(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 자치지역) 대통령 드라간 차비치 텔레비젼 방송에서 세르비아무장세력들은 국제법을 위반하면서 많은 시민들을 학살하였음을 인정하였고 스레브레니차는 세르비아 역사에서 어두운 한 단면이었다고 밝혔다. 2004년 11월 10일, 보스니아공화국 정부는 스레브레니차 학살에 대한 사과를 표명하였고 범죄자들을 법정에 세울 것을 약속하였다. 2007년 5월, 렉토 믈라디치 장군의 측근인 쯔드라브코 토리미르가 세르비아와 스르프스카 공화국 사이 국경 근처에서 체포되었다. 2005년 2월, 구-유고연방을 위한 국제형벌재판소는 스레브레니차 시(市)와 재파 시(市)에 둘러싸인 영토에 정착해 살고 있던 이슬람계 주민들에게 저지른 잔인한 만행과 살인, 추방에 관련된 전쟁범죄와 인륜에 반한 범죄혐의로 쯔드라브코 토리미르를 고발한 바가 있다. 2007년 6월, ‘스레브레니차 학살’의 희생자들의 부모들과 생존자들은 계약에 의한 의무의 불이행, 인종청소 예방실패, 전쟁범죄의 방관의 혐의로 네덜란드와 유엔을 Van Diepen & Van der Kroef 변호사사무실을 통해 고발장을 접수하였다. 이것은 이슬람계 주민들의 내륙영토에 근접해 있었고 그 지역을 보호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지만 천 여명의 세르비아 공격자들을 막지 못한 450명의 네덜란드 유엔군을 비난하는 것이었다.

► 희생자의 수에 관련한 논란
스레브레니차 시가 점령되었을 때 희생자들의 신원과 숫자는 시간의 추이에 따라서 매우 다양했다. 가장 믿을 만한 수준의 평가는 유엔 방위군들이 스레브레니차에서 3만 명의 암살자들을 목격했을 거라고 밝히면서 나토군의 초기 공습 4일 후 1999년 3월 28일 처음으로 이 ‘인종청소’ 문제에 대해서 독일 국방장관 Scharping 언급한 평가였다. 반대로 스레브레니차 에 투입된 460명의 네덜란드 유엔군 브리핑은 군인들은 오히려 백 여명에서 천 여명에 이르는 희생자들을 보았다고 밝혔다. ‘행방불명자 연합회’ 의해 작성된 리스트에는 행방불명자가 8,106명 스레브레니차에서 세르비아 군인들에 의해 살해된 희생자는 2,000명 이상으로 나와있다. ‘적십자사’에 의해 산출된 최근의 숫자는 행방불명자는 7,333명으로 집계되었다.
스르프스카 공화국의회 드라간 칼리니크 국회의장은 행방불명자로 집계된 3,010명의 명단을 ‘유럽안전과 협력기구’ 제출했다. 그러나 2년 후 1997년 ‘유럽안전과 협력기구’ 선거인명부에 이들 명단이 다시 나타났다. 동명이인숫자와 일부의 자료들을 검토하면서 ‘유럽안전과 협력기구’에서 발표된 인구통계학자인 헬즈 브랜보르그의 연구서는 이들 선거인명부에 있는 행방불명자들의 일부만이 실제 인물과 일치한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이 숫자를 반박하였다. 그러나 ‘유럽안전과 협력기구’가 2001년까지 진행된 행방불명자들 찾기에서 스레브레니차 시(市) 주변들에서 명부와 동일한 이름을 가진 2,361명의 시신을 확인하였다. 재판소에 의하면 조사된 무덤들 속에서 몇 퍼센트만 전투에서 죽은 자였을 가능성을 도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의 시신들은 손목에 묵힌 자국들과 눈에 눈가리개를 하고 있었다.

► ‘인종학살’의 명칭에 관련한 논란
구-유고연방을 위한 국제형벌재판소는 카라지치의 소송에서 ‘스레브레니차의 학살’은 ‘인종말살’ 행위로 지칭하였다. 2007년 2월 26일, 유엔 조직 기구인 국제재판소(CIJ)는 “인종말살행위의 학살” 혹은 “스레브레니차의 학살” 이라고 불투명하게 지칭하였다. 게다가 국제재판소(CIJ)는 세르비아 종족들은 이 학살행위를 막기위해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으나 그것에 대한 책임은 없다고 판단하였다. 재판장 Rosalyn Higgins가 낭독한 국제재판소(CIJ) 법령에 따르면 세르비아는 스레브레니차에서 개인이나 조직을 이용해서 인종말살을 저질러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라예보정부가 그것을 선언한 것과 마찬가지로 보상에 관련된 문제는 아니다.

카라지치를 체포한 이유

카라지치의 체포는 세르비아의 벨그라드는 국제재판소에 의해 수배된 범법자들의 도피처가 더 이상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과 죽음에 이르게 한 책임의 혐의를 받은 라도반 카라지치는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을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다. 세르비아 정치 지도자들은 카라지치가 세르비아에 숨어있지 않다고 오래 전부터 판단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벨그라드에서 그는 체포되었다. 예기치 않은 그의 체포 이후에 정부가 그가 체포되던 날 긴급회의가 열렸고 갑작스럽게 2주동안 국회가 열리지않았던 이유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세르비아 근본주의당(극우민족주의)과 세르비아 민주당(민중주의) 연합들은 체포소식이 대중들에 알려지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몰랐다. 일간지 <Danas> 신문은 카라지치의 오른 팔이자 국제사법재판소에 의해 수배 중이었던 도망자 락토 믈라디치에 관련된 새로운 정보들을 처리 중이라고 제일 먼저 보도하였다. 또한 경찰은 다른 정보들도 처리 중이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세르비아는 엄격한 민주주의 정부를 이행하고자 했다: 사실상 법에 근거하여 극도로 위험에 처해있는 자들에게서 자유를 박탈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스니아 세르비아 공화국의 전(前) 대통령을 누가 숨겨주었는지 그리고 반인륜적 범죄의 혐의들과 책임들을 회피하도록 도왔던 정치인들이 누구인지는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아무튼 현재까지 세르비아 정부는 단화하고도 용기 있게 반응을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유럽국가의 노선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현재 세르비아 정부에 대해 크나큰 의심을 품고있다. 확실히 세르비아 정부는 서방 국가들에게서 강한 압력을 받고 있음이 분명했다. 최근에 선거에서 패배한 세르비아의 정치 세력들은 카라지치의 체포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의 정치는 매번 마다 실패를 거듭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Kostunica 대통령 정부가 관대한 시선으로 보았던 코스보의 독립선언을 하고 나서 벨그라드에서 격렬한 시위들을 불러오는 계기가 되었고 Kostunica 대통령은 물러났다. 새 정부는 시민들의 안전에 관련해서 무거운 책임을 지고있다. 이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세르비아인들의 안전과 국가의 안정을 위협하므로 국익을 존중하는 조치들을 적용하라는 의무를 뜻한다. 카라지치의 체포는 벨그라드가 국제재판소의 체포영장이 발부된 사람들을 위해 더 이상 도피처가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Ratko Mladic 와 Goran Hodzic 도 곧 체포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그들이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는 한 세르비아에서는 아무도 마음 놓고 잠자리를 들 수 없다고 한다.

John Laughland(영국의 정치평론가이자 파리에 있는 민주와 협력협회 부회장)의 카라지치 체포에 대한 분석
라도반 카라지치는 발칸반도를 찢어놓았던 전쟁 동안 저질렀던 수많은 범죄들에 대해 책임이 있을 것이며 구-유고연방을 위한 국제형벌재판소에 의해 재판에 회부될 것이다. 그러나 John Laughland의 판단은 카라지치의 혐의가 법적으로 심각한 것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나토의 불공평한 개입을 소급하여 인지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라도반 카라지치의 체포는 옛 유고연방의 세르비아 대통령 Slobodan Milosevic가 2001년 7월 3일 헤이그의 구-유고연방을 위한 국제형벌재판소에 처음으로 출두한 후 거의 정확하게 7년의 세월이 흘렀다. Milosevic의 투옥은 오늘날 카라지치의 체포처럼 벨그라드의 정권교체로 인한 인위적인 결과였다: 카라지치의 체포는 지난 7월 8일 친-유럽, 친-서방 정부가 들어서면서 신속하게 이행된 것처럼 Milosevic의 체포 역시 2000년 12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의 승리의 결과물이자 정치적인 것 이었다. 카라지치의 체포는 카라지치가 형법상 문제로 추격을 당하고 있을 때 정치권력이 극도로 불안해 있음을 증명하는 것 이었다: Milosvic와 마찬가지로 카라지치의 정치지지자들이 벨그라드에서 정치권력을 잃었다는 사실이 이러한 상황을 이끌어 왔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논리가 구-유고연방을 위한 국제형벌재판소에서도 똑같이 적용된 것이다. 6월 말, 구-유고연방을 위한 국제형벌재판소는 스레브레니차의 이슬람계 보스니아의 사령관인 Naser Oric를 석방하였다. Naser Oric는 세르비아군인들이 시민들에게 수많은 만행을 저질렀던 근처의 세르비아 마을들을 밤에 급습하기 위해 유엔안전지대에 엄호대를 파견했다는 죄목으로 구속되었던 것이다. Oric의 석방은 지난 4월전(前) 코스보 수상이자 코스보 해방군 총사령관이었던 Ramush Haradinaj의 무죄석방 이후 이루어졌다. 재판 중 여러 증인들이 증인을 서기 위해 헤이그에 오기 전 알 수 없는 암살을 당하는 해괴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래서 많은 세르비아인들은 구-유고연방을 위한 국제형벌재판소가 근본적으로 반-세르비아 노선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세르비아인들 대다수도 역시 일반적으로 서방국가들에 대해 15년 동안의 적대감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제는 세르비아인들이 서방세력들을 물리칠 수 없다면 차라리 그들에게 동화되는 쪽으로 결정을 한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2월에는 친-유럽성향의 대통령에 그리고 5월에는 친-유럽정부에 찬성투표를 했던 세르비아인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세르비아국민들 혹은 정치지도자들은 적어도 카라지치가 나토와 유럽연합에 가입하는 의미를 가지는 더 큰 국가이익의 희생양으로 삼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런 모순된 구조는 세르비아인들은 거부할 수 없는 것으로 되었고 발칸반도에 대한 서방세계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에서 구-유고연방을 위한 국제형벌재판소가 반-세르비아 노선을 취하는 것을 인정하면서 재판소 조차도 정치적 논리에 지배되고 군사적 그리고 법적 간섭을 확대하는 서방국가들의 새로운 독트린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 독트린에 따르면 세르비아정부가 인권을 위배하는 행동을 취했을 때 그 정부를 향해 군사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르비아국민들은 이 정치적 실험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발칸반도의 전쟁들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여러 만행들에서 보듯이 이런 정치적 시험은 나토군이든 동맹군이든 인륜에 합당한 전쟁은 있을 수가 없다. 역사상 정치지도자의 재판은 절대로 무죄판결이 선고된 적이 없다는 것에서 보듯 새로 집권한 정치세력은 구 정치 세력을 정당화시키려 하지 않는다. 카라지치 경우에서도 정치공학적 측면에서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구-유고연방을 위한 국제형벌재판소 역시 어떠한 증거를 얻기 위해 법정소송들의 가장 중요한 원칙들을 수많이 어겨왔다. 카라지치가 전쟁범죄를 범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발견되지 않을지라도 그의 행위들은 끝까지 추격당하고 법적 책임을 묻게 될 것이다. 구-유고연방을 위한 국제형벌재판소는 이런 방식을 견지할 것이다. 왜야 하면 카라지치에 대한 재판에 계산된 정치적 헤게모니는 세르비아-보스니아 대통령으로서 그는 범죄자로 낙인 찍었기 때문이다. 1995년과 1999년(나토군이 코스보 문제해결을 위해 유고슬라비아를 공격할 때) 발칸반도의 상황은 미국과 영국이 이라크에 유엔안전이사회의 결의문을 요구할 권리를 단지 그들만이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였을 때보다 더 드라마틱하게 전개되었다. 이 전쟁은 거의 백만 명의 인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발칸반도 전 지역이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하였다. 그래서 이제 전 세계는 각성과 반성의 시간이 도래했고 국제적 상황관계를 고려하여 적합한 법률적 기준을 마련하고자 진지하게 모색 중이다.

라도반 카라지치는 국제재판소에 이송될 것이다
세르비아정부 책임자들은 어깨까지 내려진 긴 흰머리와 긴 흰 수염으로 턱을 덮은 놀랄 만큼 야위고 불만으로 가득 찬 얼굴의 카라지치 사진을 언론에 공개하였다. 이 사진이 공개되었을 때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불투명하였다. 전쟁범죄의 소송을 맡은 Vladimir Vukcevic 검사는 세르비아 수도에서 지난 도피기간 동안 살아왔던 카라지치는 가짜 신원증명서를 사용해 왔다고 발표하였다. 카라지치는 Dragan Dabic라는 이름으로 가짜 서류들을 지참하고 있었고 진짜 신분을 은폐하면서 사람들의 눈을 속여왔다.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들의 옛 대통령은 순회의사로 종사하면서 그의 삶을 영위해 왔으며 개인병원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의 최근의 주소는 라 살바 강 좌측의 세르비아 수도지역이었다. Vladimir Vukcevic 검사는 카라지치의 체포는 벨그라드에서 대중교통 수단인 버스 안에서 아무런 문제없이 진행되었다고 발표하였다. 그는 여행용 가방을 소지하고 있었고 아마도 벨그라드를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고 일간지 <Politika>가 인용 없이 보도하였다. 일간지 <Blic>에 따르면 그는 약 한달 전에 벨그라드에 있다는 소재가 파악된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이 소식이 전해진 후 15여명의 극우 민족주의자들이 재판소 앞에 모여 항의를 하면서 카라리치의 ‘인종청소’혐의에 대한 무고함을 알렸다. 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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