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 프랑스의 르 끄레지오

2008년 노벨문학상은 프랑스작가 장 마리 귀스따브 르 끌레지오가 선정되었다고 10월 9일 저녁(한국시간) 노벨상을 주간̇선정하는 스웨덴의 한림원이 발표했다. 스웨덴의 한림원은 르 끌레지오를 모험이 동반된 시적이며 관능적인 엑스터시의 작가로 간주하고“인간에 대한 지적 탐구와 새로운 문학적 모험을 실현했다”고 평가하였다. 올해 68세인 르 끌레지오는 이미 지난 여러 해 동안 스웨덴 문단에서 강력한 인상을 남기고 있었으며 올해 그의 이름이 다시 빛나는 계기가 되었다.

르 끌레지오는 스웨덴 프랑스어 공영 라디오방송국과의 인터뷰에서“매우 흥분되고 매우 감동적”이라고 수상소감의 운을 떼면서“이것은 나에게 큰 영광이며 이렇게 권위 있는 상을 준 노벨재단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고 덧붙였다. 현재 세계적인 경제적・정치적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느냐의 언론의 질문을 받고“나의 메시지는 그것은 끝임 없이 소설을 읽어야만 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노벨문학상 선정발표가 있은 후 파리에서 즉석 기자회견 자리에서 읽기는“너무 도식적인 대답을 받지 않으면서 세계에 질문을 던지는 매우 좋은 방식”이라고 작가는 설명하였다. 르 끌래지오는 지난 6월 선정된 또 하나의 스웨덴 문학상인 Stig Dagerman 상을 받기 위해 10월 25일 스웨덴으로 갔었다. 그는 현대문프랑스어 문학의 거장들 중에 한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매우 다양한 그의 작품 속에는 특히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등 여행 및 다양한 문화들이 어우러져 있다.

작가소개
장마리 귀스타브 르 끌레지오 (프랑스어: Jean-Marie Gustave Le Cl&eacute;zio 또는 J.M.G. Le Cl&eacute;zio, 1940년 4월 13일 ~ ) 그는 국적으로는 2000년 가오 싱젠 이후, 언어로는 1985년 끌로드 시몽 이후 첫 번째 프랑스 국적과 프랑스어 작가로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스웨덴 학술원은 노벨 문학상의 수상자를 발표하면서 "르 끌레지오는 새로운 시작과 시적인 모험 및 감각적인 황홀경을 표현하는 작가로 지배하는 문명 안팎을 넘어 인류애를 탐험하였다"라고 평했다. 르 끌레지오는 1940년 니스의 프랑스 리비에라에서 영국계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18세기 브르타뉴에서 일 드 프랑스 (현재 모리셔스)로 이주하였다. 제 2차 세계 대전 중, 르 클레지오와 어머니는 니스에, 그의 아버지는 영국군 외과의사로 나이지리아에 떨어져 있었다. 르 클레지오는 1958년 부터 1959년까지 영국의 브리스톨 대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그는 니스의 문학전문학교 (Institut d’etudes Litteraires)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다. 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미국으로 이주하여 교사로 일하였다. 르 끌레지오는 1964년 액상프로방스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1983년 페르피냥 대학교에서 멕시코 초기 역사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르 클레지오는 열렬한 여행가이며, 7살 무렵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프랑스 문학을 전공한 뒤, 23살에 쓴 첫 번째 소설 <조서 (Le Proc&egrave;s-Verbal)>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조서>는 공쿠르 상에 후보로 올랐으며, 르 끌레지오는 이 작품으로 1963년 르노도 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전 세계 여러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왔다. 한국도 자주 방문하였으며, 2007년부터 2008년까지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그는 1967년 국가 간 협력단체 일원으로 태국에서 군복무를 하였고 미성년매춘을 고발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해 그의 군복무를 마치기 위해 멕시코로 보내졌다. 그는 라틴아메리카의 프랑스교육기관의 도서관 설립에 참여하였고 멕시코대학교에서 원주민 언어인 나우아뜰어와 마야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1970년부터 1974년 4년 동안 파나마에서 앙베라와 와우나나 인디언들의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았다. 지금까지 그가 알고 겪었던 삶의 방식과는 천차만별인 인디언들 삶의 방식의 발견은 나중에 그에게 기막힌 경험이 되어 자신의 삶과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1961년 그는 Rosalie Piquemal과 첫 결혼을 하고 딸 Patricia를 얻었다. 그 후 1975년 그의 둘째 딸 Anna의 어머니이자 서-사하라 출신의 제미아와 재혼을 하였다. 1977년 멕시코 유카탄에서 행했던 작업인 마야문화의 신화집인 <칠람발람>의 예언록을 번역하기도 했다. 멕시코 중앙 <미촤칸> 지역의 전문가인 그는 페르피냔 멕시코연구소에 이 주제에 관련해서 1983년 논문을 제출한 바 있으며 방콕대학, 멕시코대학, 보스톤대학, 오스틴대학, 그리고 앨버커키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그러나 1978년 프랑스국립과학연구소(CNRS) 연구원의 자리에는 임용되지 못했다. 1990년대 말, 르 끌래지오는 그의 작품 속에서 문체의 변화를 실행했고 아동, 미성년, 여행의 주제가 작품의 밑바탕이 된 더욱 차분한 문체와 더욱 가슴 여미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이런 새로운 방식은 많은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1980년 그의 작품 <사막>으로 아카데미프랑세즈에서 수여하는 문학상을 처음으로 받았다. 1990년 그는 쟝 그로시앙과 공동 작업으로 신화·서사·전통 혹은 고대 서적을 전문적으로 기획 출판했던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민족의 여명>이란 총서를 주관하였다. 2000년대에는 소외문화에 대한 그의 관심이 동아시아 한국으로 옮아갔다. 그는 이화여자대학의 초청교수 자격으로 한국에 머물면서 역사·신화·샤마니즘 제식에 대해서 연구도 했다. 2007년 3월, 그는 주변 불어권 작가들의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하나의 세계문학을 위해서>라는 시위의 44명 중 한 사람으로 서명하기도 하였다. 2001년 회견에서 르 끌레지오는 이미 전통적 프랑스주류문단에 대해서 통탄한 바 있다;“백과전서파들의 소위 보편적 사상의 후손인 현 프랑스 문학계는 모든 비주류사상들을 언제나 소외시키는 유감스런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 자신도 프랑크폰느(국적을 떠나 불어로 말하고 쓰는 사람) 작가처럼 비주류작가 임을 밝히고“실제 세계를 이해하는 좋은 방식”으로써 소설문학을 권장하기도 했다. 2008년 10월, 그의 어머니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은 <굶주림의 소악장>이 발표되면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첫 반응은 상을 받는 것이 글쓰기 방식에는 아무런 변화를 주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오랫동안 그는 5개 대륙의 수많은 나라들을 돌아다녔지만 앨버커키와 프랑스의 니스와 파리에서 지속적으로 거주하였다. 그는 40여권의 작품들을 출간하였다: 꽁트, 소설, 수필, 단편소설, 2권의 인디언 신화집 번역본, 이와 더불어 수많은 서문들과 기사들과 여러 권의 공저들이 있다.

그의 문학작품 성향
&#8227; 초기작품에서는 형식주의를 탐구
1960년대 발표한 초기작품들(조서, 열병, 홍수) 속에서 젊은 작가 르 끌레지오는 <누보 로망> 특히 Georges Perec, Michel Butor, Nathalie Sarraute의 형식주의자들의 경향을 추구하였다. 그의 작품 속의 문제의 주제들(고통, 두려움, 도시환경 속에서의 고통)은 실존주의자들 더 나아가 <알베르 까뮈>의 실존적 고발과 문제제기를 담고 있었다. 그의 작품 <조서>는 까뮈의 <이방인>을 떠올리게 하며 미국인 작가 헨리 밀러의 작품 <넥서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8227; 여행의 영향과 문화적 탐험
그러나 1960년대 말부터 르 끌레지오는 저항능력을 잃지 않은 채 형식주의 경향이 덜한 더욱 인간적인 작품들을 구상하였다. 외지의 탐험과 생태학적 관심, 더 나아가 작가의 여행들과 멕시코 인디언들 지역에서의 체류들이 그의 작품들 속에 녹아 있다. 그의 수필들은 범신론적인 인디언 엠베라족의 문화, 인디언 문화, 몽환상태와 마약의 경험 그리고 서구사회와 현대도시사회에서 탈출구 찾기에 대한 일련의 자신의 명상집 이었다. 게다가 르 끌레지오의 문화에 대한 숙고는 다른 영향들을 끼치게 했다. 그 자신이 강의 중에 시인들 John Keats와 Auden를 인용하기도 하였다. 그가 가장 많이 되풀이해서 읽었던 William Faulkner와 Ernest Hemingway의 영향과 특히 J.D.Salinger의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하기도 하였다. 우선, 르 끌레지오는 개인과 사회 간의 대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둘째로 서정주의와 내적독백 그리고 의식의 흐름에 대해서 숙고하였다; 셋째로는 여행자로써 작가자신의 방식에 근거를 두고 작품을 써나갔다. 또한 그는 19세기 작가 로트레아몽의 신비주의에 영향을 받고 그것에 관련하여 논문도 쓰고 수많은 평론과 서문을 발표하였다; 시인이자 화가인 앙리 미쇼의 여러 개념들(사회에 대한 적대감, 의식의 확장을 위한 마약복용)을 통해 그는 연구논문을 썼다; 그리고 프랑스의 극작가·시인·배우이자 쉬르레알리슴 운동에 참가했던 Antonin Artaud의 정신의 파열이란 기법을 통해서도 연구한바 있다. 르 끌레지오는 Antonin Artaud를“모든 것이 가능한 신세계의 꿈; 학문과 지식 그 자체의 원천으로 돌아가려는 꿈; 신비주의와 폭력이 뒤섞여있는 이 꿈”의 선구자로 간주하였다. 종합적으로 보면, 르 끌레지오는 새로운 지평선을 열고자하는 열망으로 폭넓고 깊이 있는 독서를 했던 작가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여행, 몽환상태 그리고 명상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낳게 하였다. 그 예로 1978년 작품<몽도 그리고 또 다른 이야기>와 특히 1980년에 발표한 <사막>은 대중들에게 호의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그렇기 때문에 르 끌레지오는 어떠한 부류에도 속하지 않은 작가로 알려졌고 <금을 찾는 사람들>, <오니샤> 그리고 <황금물고기> 작품 속에서 소외된 외지를 주제로 하여 썼다.


&#8227; 저항력
‘이론(異論)’은 르 끌레지오의 작품의 영원한 성격을 규정짓는 화두이기도 하다. 초창기 발표된 그의 작품 속에 도시사회와 그 사회의 잔인성에 대한 고발을 한 이후, 이것은 그의 최근의 작품들 속에 그가 구상하는 서방세계에 대한 더 일반적인 재검토의 요소가 되었다. 그의 개인적인 경험이 밑바탕이 되어 탐욕스런 세계(<전쟁>)의 추잡한 전쟁과 아동착취의 파렴치한 행위(<우연>)와 소외문화들을 고발하기도 하였다. 환경과 오염에 관련된 그의 관심사들이 자신의 작품 속에 회귀되어 나타났고 이것은 스웨덴한림원이 그를 참여생태주의 작가로 간주하는 계기도 되었다.
그의 저항정신은 1980년대에 많은 독자들이 읽은 작품들 속에서 감각적으로 표현되어 나타났다: 식민지제국주의에 대한 증오(<사막>)와 제국주의 체제들에 대한 증오(<오니샤>), 파괴적인 전쟁의 거부(<금광을 찾는 사람들> 속에서의 제1차대전, <오니샤> 속에서의 Biafra 전쟁), 착취의 새로운 형태들의 거부(<사막> 속에서의 매춘, 인신매매). 이들 모든 관심들은 현대서양세계의 발전에 대한 2000대에 비판적이고 뼈저린 더 순수한 작품들로 귀착되었다. 특히 2005년도에 발표된 소설 <우라니아>에 잘 그려져 있다.

가족과 자서전적 주제
1980대 중에, 르 끌레지오는 더 개인적인 주제 특히 가족에 대한 생각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의 줄거리와 인물은 작가 자신의 가족과 주변 인물들에 대한 영감을 받아 그려졌다. 1985년 작품 <금광을 찾는 사람들>의 화자인 아렉스 역시 작가의 할아버지인 레옹에게 영감을 받은 등장인물이고 단편 <여행>에서도 르드리게 역시 마찬가지다. 이러한 경향이 르 끌레지오의 아프리카에 대한 경의를 표현한 1991년 작품 <오니샤>에서 더 심화되었다. 또 그의 할아버지는 1995년 작품 <섬>에서 또다시 형상화되어 나타났다. 자서전적 경향은 2003년 작품 <혁명>에서 두르러지게 나타났다. 또한 르 끌레지오는 <굶주림의 소악장> 속의 인물인 에뗄 브랭이 르 끌레지오의 어머니에게서 영감을 받아 작품화하기 이전에 2004년 작품 <아프리카> 속에서 그의 아버지의 형상도 작품 속에 그려 넣었다.

그의 인생과 문학
르 끌레지오는 7살 때 자주 만나지 못하던 아버지를 만나러 나이지리아로 떠났다. 그의 첫 여행인 2달 동안 긴 해상여행을 하면서 첫 소설 <긴 여행>을 여객선 객실에서 썼다. 그는 검은 대륙 나이지리아에서 1년을 머물렀다. 세심하고 활동적이며 아침 일찍 일어나는 그의 아버지는 미개간지 삼림지대에서 나병환자들과 병든 가이드들을 치료하곤 했다. 르 끌레지오는 자신의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 그의 소설 <아프리카>(2004년) 속에서 아버지에게 경의를 표하였다. 불면증이 있는 그는 많은 독서를 하며 얻은 영감들을 통해 모험소설들을 쓰면서 밤을 지새우곤 했다. 그는 글을 읽을 줄 알기 전에 글을 썼으며 그 이후에는 1년에 두 권씩 책을 썼다고 말했다:“어머니는 내가 쓴 원고를 모아 꿰어 묶어 주었으며 나는 <검은 늑대 출판사>라는 이름과 발행인의 이름과 함께 판지장정의 책표지를 만들곤 했다.” 가족 도서는 그를 매혹시켰으며 특히 20권으로 엮은 <대화사전>은 그를 더욱 즐겁게 해주었다:“나는 이 어마어마한 책을 내가 만들 수 있도록 해준 내 할머님에게 내 어린 시절의 가장 큰 감성들을 빚지고 있다.” 그는 화가가 되기를 꿈꾸었고 만화들을 그렸다. 그리고 탐정소설도 써보려고 노력한 것 같았다. 훗날 <발라시네>의 작가는 영사기와 흰 영상막 덕분으로 탄생한 일곱 번째 예술장르인 영화에도 눈을 떴다. 나중에 그는 세상에 던져진 오주 야스지로, 겐지 미조구치, 베르그만, 파소리니의 영화들을 탐구하게 되었다. 이탈리아 모더니즘영화의 거장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사랑, 고독...침묵에 관한 주제에 대해서 그는 무척 이나 좋아했다.
17살에 문학학부과정 대학준비시험에 합격하였다. 학사과정을 마치고 앙리 미쇼의 작품 속에서의 고독을 주제로 한 석사논문을 제출했다. 소심한 청년 르 끄레지오는 여전히 자신의 내부와 외부에서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탐구해나갔다. 1963년 <조서>를 쓰고 우편으로 갈리마르 출판사로 원고를 보냈다. 이 책은 삶을 숙고하는 방식의 소개라고 그는 설명한 바 있다. 어떤 이들은 이 작품 속에서 까뮈의 <이방인>의 무의식적 추억의 재현을 보기도 했다.
이 젊은 작가 르 끌레지오의 발견은 <뮤뉘> 출판사의 죠지 랑브리쉬 이었다. 공꾸르 문학상의 심사위원이었던 쟝 지오노와 레이몽 끄노는 23살의 젊은 작가를 받아드리는데 동의하였다. 그러나 아르몽 라누는 로랑 도르저레스의 재청에 영향을 받아 르 끌레지오를 가까스로 여섯 번째로 심사대상에 포함시켰다. 니스에서 그는 자신의 단편소설을 라디오방송국에 소개를 하고 문학적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곧 그의 아버지는 르 끌레지오를 중앙무대인 파리로 올라가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순수한 이 젊은 작가는 성공을 위한 의도적 계획에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파리에서의 문학적 삶은 속물적인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잘생긴 용모 때문에 “플레이보이”라고 불렀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오해이다. 그는 현 프랑스 <르 쁘엥> 출판사 사장이자 세계문화아카데미 회원인 프란츠 올리비에 지스베르에게 털어 놓은 바 있다: “이 상은 모레사장에 무기력하게 다시 떨어지기 전에 부풀어진 어떤 한 줄기 파도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르 끌레지오가 텔레비전 무대와 작가 사인회와 같은 활동을 피하려고 한 점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 사이에 그는 자기 자신을 지켜나가는 법을 배워나갔다:“침묵의 권위들, 인디언 남자는 본능적으로 그것들을 알고 있다. 구어(口語)는 왜곡될 수 있고 자기 자신의 전시가 될 수 있다.” 이것은 그와 연관이 된다:“이것은 내 가족생활의 경험이다. 내 부모들은 매우 과묵한 사람들이었다.” 그의 다음 작품들은 혁신적인 문체로 광기를 탐구하는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많은 대중독자들은 이 유망한 젊은 작가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앞에서 언급한바 같이 1968년 르 끌레지오는 군복무를 위해 태국에 협력관으로 갔다. 그는 태국 전체의 불교승원의 분위기에서 빠져나가고 싶었고 <피가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아동매춘을 고발하면서 추문을 유발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태국에서 추방되어 멕시코로 가게 되었다. 멕시코의 라틴아메리카 프랑스연구기관의 도서관에 배속되어 서류들을 분류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의 작품 <조서> 속의 화자는 작가의 미래를 예고하는 듯 했다:“나는 역시 여행을 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알지 못하는 많은 도시들을 가게 될 거고 여러 도시에서 친구를 사귀게도 될 거야... 탐험할 수 있는 손닿지 않은 어머 어마한 공간들이 있어.”
그의 인생과 문학적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앙아메리카 인디언들과 함께 살았던 그의 인생의 방랑을 알아야만 한다:“1970년에서 1974년 사이, 나는 아메리카 인디언족인 암베라족과 그의 사촌격인 제르멘족 그리고 파나마의 다리엔지역의 와우나족들과 생활할 기회가 있었다. 이 경험들은 모든 나의 삶, 세계관, 예술관, 타인들과 함께하는 방식과 걷기, 식사, 잠자기, 사랑하기 그리고 밤에 꾸는 꿈까지 바꾸었다.” 그는 기자인 프랑스와 아르마네트에게 자신의 경험의 내적 심연에 대해서 공개하였다:“이러한 야인생활은 몇 년 동안 나를 침묵하게 만들었다. 나는 모든 것을 배워야만 했다, 즉 모든 것을 다시 배워야만 했다. 내 자아를 어떻게 없애느냐, 침묵을 어떻게 유지하느냐, 해학의 가장 완성된 형태인 일종의 영속적 이 축소를 어떻게 실천하느냐이다.” 베트남의 참극(베트남 전쟁)에 영감을 받아 구상한 음울한 소설 <전쟁(1970)> 이후, 자신의 내적승원인 파나마로 다시 돌아왔다. 르 끌레지오는 ‘모험가’라는 용어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 점에서는 그는 끌로드 레비 스트로스의 사상에 가장 근접한 작가들 중에 한 사람이다. 그에게 칭하는 ‘여행 작가’라는 명찰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여행이란 자리를 이동하는 것 그것이 전부이다. 머문다는 것은 자신의 시간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는 알려지지 않은 문화들을 만나러 떠나는 것을 좋아한다. 르 끌레지오는 그가 좋아하는 작품들 중에서 2권의 스페인의 아름다운 소설 ‘돈키호테’와 길 위의 어떤 고아 이야기를 작품화한 ‘라자리로 드 또르메스’를 자주 인용한다. 그의 최근의 콜롬비아 북서쪽의 무덥고 습기 찬 열대우림지역인 다리엔을 여행할 때, 꿈에서나 나타날 사건을 보게 되었다: 마약밀매업자들이 강 상류에 생활하고 있던 토속주민들을 학살하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르 끌레지오가 타고 있던 카누는 사격을 받고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는 더 이상 거기로 가지 못하게 되었다.
아메리카인디언들은 그에게 어떤 슬기로움을 가르쳐주었다. 그는 그것을 그의 작품 속으로 옮겨놓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우선‘물질주의’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를 한 바 있으며 1971년 예술에 관련된 놀랄만한 수필 <하이>를 발표하였다:“상인들은 그들의 개척자들을 보낸다... 그리고 거기에서 얻은 모든 자원들은 무기로 변형되어 버린다.”
1977년부터 르 끌레지오는 앨버커키(뉴멕시코)에서 불문학을 가르쳤고 푸에블로족들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나바오> 문화를 배우려 노력하였다. 인디언보호지역들의 불행은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그는 미쵸아칸의 멕시코 주에서 머물면서 마야문명을 찬양한 서적과 원문들에 흠뻑 빠져 있었고 미초아칸의 관계들과 칠람발람의 예언서들을 처음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멕시코에서 대략 200만명 가량이 사용하고 이해 할 수 있는 언어인 나와뜰어 (Nahuatl)로 쓴 시인들을 만났으며 열정적인 연구와 분석을 통해 인류학에 매진하였다. 1978년 그는 프랑스국립과학연구소(CNRS)의 연구원으로 신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그 이유는 아메리카 신화들에 대한 학문적인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 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르 끌레지오 자신의 몸과 피부에 묻어있는 전통아메리카 문명에 대한 산 경험은 그 어느 학자들의 지식과는 비교될 수 없는 산지식이었다. 그의 연구와 탐구의 결실들은 <멕시코인의 꿈 혹은 단절된 과거(1988년)>의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르 끌레지오는 그 어느 누구보다는 그것에 대해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글을 썼다: 아메리카의 정복은 어떤 문명을 사라지게 했고 식민주의시대와 종속주의적 세계화를 이끌어나갔다. 비정형적인 작가인 그는 옛 콜롬비아인들의 신화들과 어떤 장소의 불가사이에 대한 생각으로 다시 돌아갔다. 휴머니즘은 염세관이 아니다. 그는 토착인종들의 후손들을 위한 더 나은 미래를 믿고 있다.
급격한 변화의 시절이었던 사십대의 르 끌레지오는 그의 집안인물들의 과거에 관심을 갖고 작품 속에 그려 넣었다. <몽도 그리고 또 다른 이야기들(1978년)> 덕분으로 대중적 성공을 한 후 그는 아카데미프랑세즈의 <폴-모랑>상을 받는 첫 번째 작가가 되었다.“그동안 내 책들은 잘 팔리지가 않았다, 나는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그는 <파리 마치> 주간지에 털어놓았다. “나는 경제적으로 빈곤한 시절을 보냈고 그래서 나는 선생으로 그리고 가이드로 일을 해야만 했다.”
<사막>은 새로운 축을 연 지리학적 소설 이었다: 1975년 이후 그의 부인인 Jemia의 출신지인 <서-사하라>에서 어떤 젊은 여자이민자의 매우 아름다운 초상에 대한 이야기를 승화시킨 작품이기도 하다. 오세아니아의 섬들을 탐험하면서 그의 할아버지에 대한 환영을 불러 온 작품들을 창작하기도 했다(금광을 찾는 사람들, 로드골드 여행, 섬). <아프리카>와 또 다른 작품들과 그리고 <오니차>(1997)에서는 나이지리아에서의 그의 아버지의 만남에 대해서 회상한 작품들이기도 하다. 방황, 출신, 정체성의 탐구...와 같은 언제나 똑같은 주제를 다루었지만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해 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여 권의 수필과 2권의 회견록의 주제들에서 영원한 청년 르 끌레지오는 비밀 속에 남아있다. 오랫동안 르 끌레지오는 긴 여정에 구두점을 찍고 놀랄만한 문학적 금욕정신을 펼쳤다. 그는 멕시코인들이 ‘혁명’이라고 일컫는 종이 위에 펜으로 글을 썼다. 프랑스작가들 중 가장 영국적인 그는 영어로는 글을 쓰지 않았다. 2005년 그는 태평양 중앙의 잊혀진 종족을 만나기 위해 바다로 향했다. 그는“문학의 목적은 투쟁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명확히 하였다. 그는 세상을 바꾼다는 작가들의 능력들을 절대로 믿지 않았다. 오히려“작가들은 세상에 복종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멕시코만의 고래들을 포획하려는 계획을 실패로 돌아가게 하는데 공헌하기도 하였다. 미국의 문학 비평가들은 정치적으로 그의 신-식민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일본이나 한국에 비해 미국에서 그의 작품들이 거의 번역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르 끌레지오는 어떤 한 장르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문학에는 장르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공책에 스케치의 그림들로 가득하고 수채화도 그려 넣었다.
환영들을 찾아 방황하면서 나이 68세에 받은 노벨문학상이 그의 아픈 가슴을 진정시키지는 못했다:“내가 강렬하게 느끼는 것, 그것은 불안이다.” 1985년 <앨버커키의 편지> 속에서 그의 작가탐구에 관련된 어떤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였다:“내가 찾는 것을 나도 모르겠다. [...] 그것은 아마도 내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고 브르딴뉘와 아프리카에서의 냄새와 소음들에 대한 기억들인 것 같다. 나는 책 속에서 그것을 찾기를 원한다, 내가 쓰는 것 속에서 그것을 찾기를 원한다.” 그의 정서적 고향은 모리셔서 섬이고 브르따뉴의 피니스떼르의 자신의 집에서 휴가를 보낸다 그러나 그가 프랑스 시를 가르치는 한국에서 <굶주림의 소곡>을 썼다. 왜 한국의 서울에 갔을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서울은 자동차의 소음보다 더 시끄러운 매미들이 있는 유일한 수도이다.”
언론에 비친 르 끌레지오의 인상은 폐쇄적 작가로 여기고 있지만 기자이자 전기 작가이며 동시에 소설가인 프란츠 올리비에 지스베르는 그것을 부인한다:“그가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임에는 틀림없지만 일단 사람을 믿으면 재미있고 웃기를 자주하고 많은 농담을 하는 사람이다.” 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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