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뭄바이 테러사건
[국제] 인도판 9·11 테러사건
- 인도 뭄바이 테러사건
구랍 11월26일(현지시간) 인도 뭄바이에서 동시 다발 테러로 수많은 인명사상사태가 발생했다. 2008년 11월 26일 밤, 뭄바이에서 발생한 연쇄 테러 공격으로 4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당시 충격에 빠진 뭄바이 시당국이 27일을 공식 휴일로 지정함에 따라 학교는 휴교하고, 주식시장이 휴장하는 등 인도 경제 중심지는 한순간에 마비됐다. 일부 무장세력들은 타지마할 호텔과 오베로이 호텔 등 뭄바이 최고급 호텔을 점거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며, 타지마할에는 약 15명의 외국인이 인질로 잡혀 있었고 또 다른 3명이 오베로이에 연결된 트라이덴트호텔에서 인질이 된 상태였다. 이번 사태에 대해 인도 현지 경찰은 '조직적인 동시다발 테러'라는 쪽으로 판단을 내리고 있다.
연쇄 테러 공격은 26일 밤 10시30분 전후에 시작됐다. 자신들을‘데칸 무자헤딘’이라고 주장하는 테러범들은 바다에서 보트를 이용해 도심 공격 목표에 접근했다. 공격 목표는 외국 관광객들이 많이 묵는 타지마할 호텔과 오베로이 호텔과 차하트라파티 시바지 기차역, 레오폴드 카페, 카마 앤드 알블레스 병원 등으로 모두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장소였다. 뭄바이 테러를 주도한 세력에 대해선 일부는 데칸 무자헤딘이란 신생 단체가 저지른 테러라고 추측하고 있다. 뭄바이에서 일어난 테러는 60시간 만에 종료되었다. 테러가 끝난 뒤, 테러범들은 원래 5천명을 살해할 것을 목표로 삼았다고 말했다.
타지마할 호텔에서 최후의 격전
11월28일 금요일 초저녁에 붉은 돔 천장이 항구로 기울어져 불쑥 나온 뭄바이의 사치스러운 초특급 호텔인 타지마할 호텔 지붕에서 검은 구름뭉치들이 밖으로 새고 있었다. 아래쪽에서는 불꽃들이 창가의 커튼들을 삼키고 있었다. 희미한 폭발음, 자동화기의 소음도 덩달아 들려왔다. 호텔 코니스 위에서 집을 짓던 비둘기 떼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타지마할 호텔을 다시 통제하기까지에는 인도보안군에게 거의 60시간이 필요했다. 광장을 덮고 있는 어슴푸레한 빛을 헤치며 사람들이 뛰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피를 흘리며 방탄조끼에 철모를 쓴 특수부대원들이었다. 그들은 방 하나 하나 수색하면서 전진하였다. 인질들 대부분은 이미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살아있는 소수의 테러범들은 매우 복잡한 호텔구조의 550개 방 중 몇몇 방에서 사수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포위되어있었지만 중화기로 무장한 상태였다. 그들은 최후의 교전을 하고 있었다. 토요일 아침 마지막 일제사격이 타지마할 호텔로 향해서 빗발쳤다. 3명의 최후의 이슬람교 행동주의자들은 사살되었고 인도경찰은 작전종료를 선언하였다. 인도 언론에 의해“뭄바이 전쟁”이라 불리는 이 교전은 이제 끝이 났다. 그 당시 목격자들은 공포의 도가니의 시간이었다고 한다. 11월26일 수요일 한 밤 중에 뭄바이의 10여 곳에서 총탄을 퍼부으며 여러 조로 나누어진 유탄과 자동화기로 무장한 테러범들은 뭄바이 중심가에서 무모한 살육행위를 시작하였다: Chhatrappi Shivati Shivaji 역, Leopold 카페, 유명한 타지마할 호텔과 오베로이 호텔.

▶ 인질극
이 테러공격은 두 호텔에서 몇 백 명의 인질을 잡아두면서 제일 먼저 시작되었다. 다른 인질들은 유태인 연합회 본부와 수많은 이스라엘 여행자들이 더나드는 접대소에서 발생했다. 뭄바이의 인도에 머물고 있는 1,500명의 유태인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던 랍비인 Gabriel Holtzberg와 그의 부인 Rivka가 테러공격 시 사망했다. 금요일, 교전이 끝난 후 오베로이 호텔 내부에서 30여명의 시신을 발견했다.“이것은 살육이었다: 거기에는 피와 시신조각들이 곳곳에 흩어져있었다”라고 영국인 사업가 Mark Abel이 B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테러범들은 이 호텔의 출입구뿐만 아니라 Tffin 카페와 Kandahar 레스토랑에 방화를 하기도 했다. 타지마할 호텔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구조된 사람들은 인도특수부대원들의 진압을 기다리면서 겨우 물과 비스킷을 먹으며 각자의 방에 갇혀 30시간이상을 버텼다.

▶ 지하드주의자들의 선동
많은 분석가들에 의하면 이들 인도의「무자히딘」(‘성스러운 이슬람의 전사’라는 뜻)들의 출현은 어떤 전환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분석가들은 그 때까지 불안정을 조장하면서 파키스탄 혹은 방글라데시에서 온 지하드주의자들의 테러리즘 토착화의 형태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이슬람교의 급진주의가 힌두교의 근본주의의 거센 공격에 저항하는 인도의 젊은 이슬람교인들의 가슴에 박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약 2000명의 생명을 앗아간 2002년 인도의 구자라트지방의 반-이슬람운동은 대다수의 힌두교인과 소수의 이슬람교인(1억 5천만명, 전체인구의 14%) 사이의 관계단절을 불러왔다. 지하드주의자들의 선동이 토착화되면서 Uttar Pradesh(북쪽지역) 지방의 몇몇 마을들은 인도의「무자히딘」의 산실로 취급받고 경찰조사가 빈번한 지역이 되었다. 그들의 조직망은 견고하고 고도의 기술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하였다. 인도의 Manmohan Singh 수상 자신도 인도의 새로운 테러리스트의 위험을 인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뭄바이테러는 완전히 전대미문의 것으로 나타났다.

파키스탄으로 향한 의심의 눈초리
11월29일 토요일, 인도 전투병들이 타지마할 호텔을 다시 통제하면서 뭄바이의 테러범 공격들을 종결지었다. 인도 정부에 의하면 28명의 외국인을 포함해서 200명가량 숨지고 300명가량 부상을 당했다. 과거 1993년 뭄바이 테러 희생자 257명 이후로 인도에서 가장 많은 테러희생자가 났다. 앞으로 희생자의 수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지금 테러범들과의 치열한 공방은 끝이 났고 그들의 국적, 숫자, 소속단체와 테러방식과 경로를 알고자 인도정부는 집중적으로 조사를 펴고 있다. 테러범들은 누구인지? 마하라슈트라 주(州)정부기관들은 뭄바이의 특급호텔 타지마할, 트리던트-오베로이 호텔, 시내 중앙역, 유태인단체를 보호하는 센터, 병원들, 최소한 6개 지역에 조직적인 공격을 가한 테러범들의 숫자는 25명이라고 비공식적인 발언을 하였다. 다른 공식적인 기관들에 의하면 범인의 수는 10명에서 15명으로 잠정 집게 되었다. 9명이 사살되고 1명이 생포되었다. 테러범들의 신원은 확실하게 밝혀진 바 없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체포된 테러범의 이름은 Azam Amir Kazav이며 영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국적은 파키스탄이라고 보도했다. 인도텔레비전방송은 체포된 테러범이 타지마할, 트리던트와 같은 경제력의 상징물들을 잿더미로 만들어「인도판 9·11」를 재현하려했다고 보도하였다. 일간지「Evenig Standad」는 테러용의자 7명은 Leeds와 Bradford 출신의 영국인들이라고 익명의 인도당국자의 말을 인용 보도하였다. 하지만 이 정보는 인도정부, 잉글랜드 정부와 반-테러정보국에 의해 부인되었다. 그럼 파키스탄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걸가? 유일한 생포자의 심문에서 특히 2001년에 국회를 테러한 바 있는 인도에서 여러 건의 테러들에 책임이 있는 파키스탄의 Lahore에 근거지를 둔 지하드의 한 무리이자 분리주의자단체인「라시카르-에-토이바」소속이라고 자백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알려져 있지 않던 또 다른 테러단체인 인도 데칸의 「Moujardine」가 이번 테러는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밝혔다. 뉴욕타임지에서 인용 보도한 미국비밀정보책임자에 의하면 일차적으로 라시카르-에-토이바 혹은 파키스탄 카라치 지역에 근거지를 둔 또 다른 단체가 이번 테러와의 관계가 있다고 한다. 아프가니스탄의 알카에다는 직접적으로 개입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라시카르-에-토이바 테러단체는 이번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공식적으로 부정하였다. 그러나 미국 반-테러기관의 책임자들은 라시카르-에-토이바가 연관되어 있다는 믿을만한 증거들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지금까지 수집한 정보들은 카슈미르와 관련된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이번 테러의 특징적인 몇 가지는 라시카르-에-토이바가 과거에 저질렀던 방식과 유사한 점이 있다”하지만“확실한 결론을 내리기에는 너무 이르다”라고 미국 반-테러기관의 책임자 중 한사람이 AFP통신에 익명으로 발표하였다. 확실한 것은 현재 많은 사람들이 라시카르-에-토이바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뭄바이 연안만을 통해 침투한 몇몇의 테러범들을 통해서 보면 이 테러단체는 해군력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라시카르-에-토이바 조직은 1990년 말 인도군에 대한 공격 시 고성능 무기로 무장한 자살 폭탄조와 미사일도 보유한 최고의 테러집단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파키스탄 비밀정보부와 이 조직은 과거에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인도정부기관들은 특별히 어떤 집단을 지칭하여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파키스탄 출신의 이 테러분자들을 공식적으로 이번 테러에 책임을 전가했다. 파키스탄 중앙정부는 인도가 파키스탄이 연루되었다는 증거를 제시한다면 파키스탄에 근거를 둔 어떤 단체라도 엄벌에 처할 것이며 이번 테러사건조사에 협력할 것을 약속하면서 파키스탄정부의 무고함을 밝혔다. 호의의 표시로 파키스탄정부는 파키스탄 비밀정보부(ISI)의 밀사를 뭄바이로 파견하였다. 더불어 FBI 수사팀 역시 사건조사에 참여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이 테러공격은 사전에 계획된 것이었다. 인도와 각 국의 언론사들은 동시에 일어난 이번 테러공격들은 미리 세밀하게 준비된 것이었다고 보도하였다.“테러범들은 장소의 위치파악을 완벽하게 알고 있었고 사전에 그것을 철저하게 연구 검토한 것 같다. 그들은 양심의 가책 없이 매우 단호했다”라고 인도해군특수부대장이 밝혔다. 익명의 인도정보요원에 의하면 테러범들 중 8명은 테러공격 준비를 위한 임무를 띠고 이미 한 달 전에 뭄바이에 도착해 있었다고 AFP통신은 인용 보도하였다. 그들은 역시 호텔들 내부에서 위치파악을 실행했으며 무기와 탄약들을 건물 내부에 숨겨놓았고 인도무장경찰보다 장소와 위치를 더 잘 파악할 정도로 반복 숙지를 하였다. 이것은 겨우 3명의 테러범이 타지마할 호텔 안에서 며칠 동안 인도 중무장군들과 어떻게 정면으로 맞서 싸울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 주는 것이다. 테러공격이 있기 전에 몇몇의 테러범들은 인도 트롤망을 끄는 배를 탈취하였다. 테러범 일부는 무차별 사격이 시작 되었던 역과 멀지않은 뭄바이 남쪽 항에 고무보트로 갈아타고 상륙하기 전까지 이 배를 사용하였다. 테러범들의 이러한 종적은 인도정부에 의해 확인되지는 않았다. 작전형태는 거의 전쟁 수준의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다. 테러공격 초기에 인도경찰과 인도군은 테러범들의 준비와 훈련 수준을 가늠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때때로 그들은 전투와 이동에서 우리만큼이나 강했다”고 인도특수요원 한 사람이 설명했다. 인도정부기관들이 기운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장한 특공대가 개입했어야만 했다. 테러범들은 세세한 부분까지 완벽하게 준비하였고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은 것 같았다. 그들은 중장비무기도 손쉽게 다루었고 마른과일을 비축하여 비상식량으로 준비하기도 했다. 그리고 위성전화, 신용카드, 보급품들을 역시 사용하였다.
파키스탄정부는 인도에 대해 우호관계를 주장하다

인도내무부장관 사임
11월30일 일요일, 인도내무부장관 시브라즈 파탈이 사임하였다. 뭄바이에서 이슬람교도들의 테러 발생 후 그는‘도덕적 책임’을 무겁게 느껴왔다. 시브라즈 파탈장관은 이 위기상황을 대처하는 능력에 대해 비판했었다. 수요일 저녁에 시작된 테러범들의 공격으로 28명의 외국인을 포함해서 거의 200명가량 사망했고 특히 8명의 이스라엘 인질들은 살해당했다. 이어서 국가안전위원장 Narayanan 역시 사표를 제출했다. AF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수상참사관 한 사람이“정부의 책임 있는 다른 고위공직자들은 테러발생의 원인을 찾고자 노력할 때”라고 말하였다. 책임회피가 능사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사임들은 인도정부기관들의 대책과 준비부족에 대한 의문들이 증가하는데 한 몫을 하게 되었다.“우리들은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해 테러리즘을 이용하는 정치인들에 진저리가 난다. 우리는 그들의 무능력에 진저리가 난다. 우리들 눈에는 모두가 똑 같다”, 라고 일간지 Hindustan Times의 논설위원이 글을 썼다. 몇 백 명의 시민들이 정부의 미흡함에 항의하기 위해 시위를 하기도 하였다. 인도여당의 책임자들과 회동했던 Singh 수상은 국가중요정치집단의 지도자들과 비상대책모임을 조직하였다. 공식성명에서 그는 인도 반-테러 진압군의 증원과 능력배양을 강화할 것을 발표하였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인도정부는 새로운 반-테러리스트 기구를 창설하고 특별법을 마련할 수도 있다고 보도하였다.
인도 위협에 불안한 파키스탄

그러나 인도는 자신들의 생각을 계속 고집하고 있다. 뭄바이 테러공격을 감행한 범인들 모두가 파키스탄 출신이었다고 Shakeel Ahmad 인도내무부 차관이 BBC방송과 인터뷰를 하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인도정부는 파키스탄 정부와의 평화관계를 잠정 중단할 계획이다.
“인도정부 중심부에 있는 실력가들 몇몇은 인도는 평화진전을 중단해야 할 것 같고 또 뭄바이 살육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대화를 중단할 것으로 판단한다”고 익명을 요구한 어떤 인도정부 관료가 말했다. Manmohan Singh 수상을 포함한 인도정부는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왜야하면 인도정부는 파키스탄정부가 인도에 대한 테러리즘에 종지부를 찍겠다는 가장 높은 수준의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한 유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테러사건 후 인도는 공식적으로 파키스탄에 항의하다

오베로이 호텔 생존자의 증언
"나는 테러범들을 용서한다.“그는 감정이 섞인 목이 멘 목소리로 간단하게 말했다. Charles Cannon, 그는 끝없는 신의 호의를 받으며‘뭄바이의 지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중 한사람이다. 테러범들의 공포가 뭄바이를 덮쳤을 때 영적 집단 싱크로니시티의 수장인 그는 25명의 일행과 함께 뭄바이에서 영적순례를 행하고 있었다. 11월26일 밤 9시경 Charles Cannon은 최고급 호텔 오베로이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저녁식사 후 그는 다음날 뭄바이 북부에 있는 Gneshpuri 힌두교 수도원 방문 준비를 마치기 위해 그의 대리인 두 사람과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입구 홀에서 약간 앞으로 불쑥 나온 곳에 위치한 Tiffin 레스토랑에 아직 저녁식사를 마치지 못한 일행 6명을 남겨두고 자리를 떴다. 첫 번째 폭탄이 진동을 울렸을 때 그는 무슨 영문인지 알 길이 없었다.“나는 폭죽으로 생각했다”라고 그는 회상했다. 그러나 유탄과 자동화기에서 나는 이 소음은 그를 잔인한 현실 속으로 끌고 갔다. 13층에 있던 그는 모든 소리를 들었지만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의 일행들 중 한 사람이 급히 복도로 달려가서 홀 입구 근처로 내려갔다: 젊고, 20대 나이로 보이는, 전투복 바지에 뭔가 가득 넣은 큰 배낭을 멘 두 남자가 분노하며 종업원들과 Tiffin 레스토랑 식탁에 앉아있던 손님들을 향해 총을 난사하고 있었다.
▶ 기다림과 침묵
싱크로니시티 단체의 회식자들은 총격에 쓰러졌다. Alan Sherr와 13살의 그의 딸 Naomi는 쓰러져 목숨을 잃었다. 그룹의 다른 일행 4명 - Michal Rudder, Helen Connoly, Andy Baragon과 Linda Ronsdale -은 식탁 밑에서 부상을 입고 오랜 시간을 머물다가 숨이 끊어졌다. 첫 번째 일제사격 직후, 두 명의 테러범이 부상자들을 확인사살하기 위해 식탁 사이로 지나다녔다. “드러누운 우리 친구들은 큰 걸음으로 걸어 다니는 범인들의 다리를 보고 있었다.” 테러범들이 그들을 보고도 지나친 것은 그들이 죽은 시늉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랜 시간동안 그들은 꼼짝 않고 있으려고 노력했다. 그러고 나서 한참 후 그들은 그 역시 드러누운 자세로 속삭이는 한 웨이트레스를 보게 되었다: 그가”부상자는 나를 따라 오세요“라고 말했다. 테러범들은 각 층들에 피를 흘리고 있는 동료들을 따라 사라졌다. 마침내 살육의 시간이 끝이 나고 부상을 입은 생존자들은 주방 안으로 호텔 종업원들을 따라 들어갔다. 팔과 다리 그리고 배에 총상을 입은 Michael Rudder는 기어갔다. 그러고 나서 주방에서부터 그들은 출구까지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택시들이 즉시 그들을 병원으로 이송하였다. Charles Cannon이 호텔입구에서 비극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았을 때 13층에 위치한 그의 방에서 두 친구들과 함께 들어박혔다.“문 쪽으로 가구들을 밀어놓았다.” 그는 단지 기다리며 숨을 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 후 연기가 문 아래에서 밀려들었다. 아래층에서 화재가 발생하였다.“우리들은 숨을 내쉬기 위해 젖은 수건을 얼굴에 덮었고 창문의 유리들을 깨뜨렸다.”이윽고 위험이 가시기 시작했고 화재도 멈추었다. 그러나 방 안의 3명은 그을음으로 시커먼 얼굴이 되었다. Charles Cannon은 작은 냉장고 안의 사탕과자와 비스킷으로 배를 채우면서 틀어박혀 갇힌 채 40시간 이상을 보냈다. 그는 명상과 그의 친구들이 인도 그리고 외국에서 보낸 메시지 덕분에 두려움을 극복하였다.
11월28일 금요일 초저녁, 그는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 테러범들인지 아니면 인도 특수부대원들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방으로 갑작스럽게 들여 다친 인도특수부대원들이었다. 이것이 악몽의 끝이었다. 홀 입구를 건너면서 Charles Cannon은 파편들을 피해 큰 걸음으로 헤쳐 갔다:“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사방에는 피가 낭자하고 시체들이 깔려있었다, 이것은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Tiffin 레스토랑 식탁아래에서 그는 숨이 끊어져 있는 Alan Sherr와 그의 딸 Naomi의 시신을 확인하였다.
인도의 파키스탄에 대한 범죄용의자들의 인도요구
12월2일 화요일, 인도중앙정부는 인도법원에 수배된 20여명의 범죄자들을 넘기라고 파키스탄 정부에 요청했다. Press Trust of India에 의하면, 인도는 파키스탄에 대한 군사행동은 검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파키스탄은 인도중앙정부가 파키스탄 테러리스트 집단들에 대한 비난이 있은 후 뭄바이 테러사건 조사를 위해 부속조사팀을 만들자고 제안하였다. 사실, 지난 10월 달에 미국비밀정보부가 뭄바이지역에 대한 해상을 통한 테러침투 가능성을 인도정부에 알린 바 있다고 CNN와 ABC News가 보도하였다. ABC에 의해 인용된 익명의 미정보부 책임자의 말에 따르면 타지마할 호텔과 같은 특정지역도 언급했다고 보도했다. 또 CNN에 의하면 인도정부책임자들은 미국비밀정보부가 뭄바이테러 가능성에 관해서 이미 두 번씩이나 알려주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고 한다.
파키스탄과 인도의 긴장완화를 위해 Condoleezza Rice 미국무부장관의 인도방문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고조된 긴장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Condoleezza Rice 미국무장관은이 이미 11월23일 뉴델리에 도착했다. 그녀는 인도정부관들에게 너무 성급한 모든 발표를 경계시키면서 파키스탄정부에 테러범들의 신원조사에 철저한 협력을 요구한 바 있다. 또한 그녀는 미국은 필요한 모든 도움을 제공하겠다고 인도정부를 안심시켰다. 미국무장관의 방문동안 Pranab Mukher 인도외무부장관은 테러행위의 책임자들은 파키스탄 출신자들이라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음을 확신하면서 정부입장에서 분명한 방어선을 그었다. Rice 미국무장관은 인도에 분명하게 협조하고 투명성을 증명하도록 파키스탄에 요구하였다.
유일하게 생포된 테러범의 조사에 근거해서 인도정부기관들은 파키스탄의 테러리스트들과 관련된 특히 전화통화 증거들을 가지고 있음을 확신하였다. 그러나 Asif Ali Zardir 파키스탄 대통령은 CNN와 인터뷰를 하면서 반박하였다.“우리들은 파키스탄인과 관련 있다는 명백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나는 인도가 찾았다는 증거에 대해 의심을 한다”, “파키스탄정부는 분명히 연루되지 않았고 테러범들은 ‘무국적자들’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파키스탄에 근거지를 둔 지하드주의자들의 단체인 라시카르-에-토이바가 이끄는 지역이라는 것을 미국정보부조차도 실제로 인정하고 있다. Mike McConnell 미국정보부장은 이 단체는 뭄바이테러사건에 책임이 있고 2001년 인도국회에서 그리고 2006년 열차에 이와 유사한 테러행위를 이미 행한바있다고 설명했다. 일간지 The Wall Street Journal에 따르면 인도경찰은 라시카르-에-토이바의 작전대장 Yusuf Muzammil를 비롯하여 테러행위 주모자들을 확인한 것으로 보도했다. 게다가 인도경찰은 뭄바이 중앙역에 숨겨둔 폭탄 8kg을 발견하고 뇌관을 제거했다. 상황은 인도경찰 통제 하에 있다고 확신하는 인도정부는 이 폭탄들은 테러리스트 특공대에 의해 가방 안에 숨겨 있었다고 설명하였다. 경찰은 폭탄들을 버려진 가방들을 수거하면서 발견되었다고만 간략하게 설명했다. 적어도 170명의 사망자가 발생 한 테러발생지역 중 하나인 Chhatrapati Shivaji역은 테러범들의 무차별 일제사격이 있은 다음 날 다시 정상회복 되었다. N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