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사회, 정치, 경제적 문제가 근원

수습 불능 상태에 빠진 그리스
15세 소년의 죽음에서 촉발된 항의시위는 현재 그리스 전체를 마비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그리스 정부가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나섰지만 여전히 수습불능이다. 지난 12월 12일에도 수백명의 청년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시위진압 경찰과 대치했다. 일부 무정부주의자들은 아테네 산티그마 광장 인근에 위치한 중앙은행 등 은행건물 유리창을 부수고 민영라디오 방송국이 점거해 성명서를 낭독했다. 북서부 이오안니나에서는 시청이 시위자들에 의해 점거됐다. 대도시 많은 중고교·대학 건물이 시위학생들에 의해 점거됐다. 그리스 상공인연합회는 피해액이 아테네에서만 2억유로에 달한다고 집계했다. 민간 부문 최대 노조인 GSEE와 공공노조인 ADEDY는 12월 12일 일제히 파업에 돌입하면서 국제 및 국내선 항공기 운항이 대부분 취소됐으며, 일부 은행과 학교가 문을 닫고 병원도 일부 비상인력만이 가동되고 있다. 노조는 정부의 민영화, 세금 인상, 연금개혁이 경제 상황을 악화시켰으며, 그리스 전체 인구의 20%가 월 600유로 이하의 수입으로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학생들은 공공지출 축소 철회, 내무장관 해임, 체포 시위자 석방 등을 요구하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현재까지 500명이 넘는 이들이 체포되고 70여명이 부상했다. 이 가운데 코스타스 카라만리스 총리가 ‘단호한 지도력’을 강조하며 “자신의 사임과 야당이 주장하는 조기총선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맞서고 있어 시위는 장기화 될 것으로 전망된다. 해외거주 그리스인들을 주축으로 반정부시위가 유럽대륙 전역으로 확산되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12월 8일에는 독일 베를린 그리스 대사관 앞에서 시위대가 모여 경찰차를 부수고 화염병을 던지며 거세게 항의했으며, 다음날인 12월 9일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10일에는 덴마크 코펜하겐과 이탈리아 로마에서 경찰의 공권력남용과 정부의 무능력함을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또 11일에는 스페인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 총 400여명의 청년들이 모여 은행과 상점, 경찰서를 공격하며 시위를 벌였다. 같은 날, 프랑스 보르도의 그리스 영사관 앞에서도 항의시위가 벌어져 차량 2대와 쓰레기통이 불탔다. 13일에는 러시아 좌파 청년단체 회원들이 주러 그리스대사관 앞에서 그리스 정부를 규탄하는 집회를 벌였다.

그리스에서 ‘과격 시위’는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영국 시사지 <이코노미스트>는 12월 9일 인터넷판에서 “그리스 의회 앞에선 일주일에 평균 두어 차례 각종 시위가 벌어지며, 잦은 시위는 종종 폭력을 동반하기도 한다”며 “1년에도 몇 차례씩 ‘무정부주의자’를 자처하는 젊은이들이 얼굴을 가린 채 쇠파이프와 화염병을 들고 거리로 나서, 시위 진압 경찰과 격렬한 충돌을 벌인다”고 전했다. 하지만 그리스 수도 아테네 한복판에서 15살의 ‘무정부주의자’가 공권력의 흉탄에 목숨을 잃은 것은 분명 드문 일이었다. 숨진 알렉산드로스 그리고로 포울로스는 명명 축일(세례를 받은 날)을 기념하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이날 밤 늦게까지 거리를 쏘다녔다. 일행이 사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일부 시위대가 뭔가를 지나가는 경찰 순찰차에 집어던졌다. 순찰차는 멈춰 섰고, 차에서 내린 경찰들은 그리고로 포올로스와 친구들에게 다가와 욕설을 퍼부으며 을렀다. 화가 난 그리고로 포울로스는 빈 플라스틱병을 집어던졌고, 이에 경찰은 총격으로 응수했다. 모두 세 발, 그중 한 발이 소년의 가슴을 관통했다. 병원으로 옮겨지던 중 소년은 끝내 숨을 거뒀다. 일부 언론의 호들갑과 달리 숨진 그리고로 포울로스는 중산층 가정 출신으로, 시위에 나선 ‘무정부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리고로 포울로스의 죽음이 알려진 직후부터 그리스 전역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들불처럼 일어난 성난 민심은 도처에서 차량을 불태웠고, 화염병을 날렸고, 상점의 유리창을 박살냈다. 아테네를 비롯한 전국 10여 개 도시에서 경찰서와 관공서가 시위대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로 포울로스의 장례식이 열린 12월 9일엔 고등학생 수백 명이 아테네 외곽 파리론 지역에서 경찰과 충돌했다. <로이터통신>은 이날 “그리스 전역이 분쟁지역을 방불케 한다”고 전했다.
그리스 폭동은 고질적 문제에 대한 분노 폭발
그리스 폭동 이면에는 뿌리 깊은 정치·경제·사회적 문제가 숨겨져 있다. 지난 2004년 집권한 신민주당은 강력한 긴축정책으로 재정 적자를 유럽연합이 유로화 채택 지역에 기준으로 제시한 ‘국내총생산(GDP) 3%’선으로 줄이는 데 골몰했다. 유럽연합은 당연히 찬사를 보냈지만, 그리스 시민들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유럽연합에서 선두권인 연평균 4% 경제성장률을 유지해온 그리스에서 인구 5명 중 1명에 이르는 200만 명가량이 빈곤층이다. 그리스 통계청이 내놓은 자료를 보면, 30살 이하 노동자 43.6%가 평균 월급 600~700유로를 받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지난해 펴낸 자료를 보면, 2006년 그리스의 평균 실업률은 8.9%다. 그나마 “1998년 이래 가장 좋은 기록”임에도, 유럽연합의 평균인 7.4%보다 1.5%포인트가 높다. 실업자 가운데 55%는 장기 실업 상태이며, 장기 실업자의 40%는 29살 이하 청년층이다. 오늘날 그리스 젊은이들은 목표를 잃고 휘청거리고 있다. 아테네 대학의 페르로스 마지오스 학생은 이번 살인은 단순한 경찰의 우발적 실수가 아닌 고장난 사회에서 불거진 냉정한 살인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경찰은 우리를 보호해줘야 하고 국가는 우리를 교육시킬 의무가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교회, 판사, 정부가 연루된 스캔들이 계속 터져 나오면서 국민들은 방향을 잃고 떠돌고 있다. 또 대학 학위가 있어도 직장을 알아봐 줄 ‘연줄’을 찾으러 다녀야 한다. 그런 직장 월급도 600유로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사망한 알렉시스 그리고로 포울로스의 같은 반 친구인 파나지오티스 수글라코스도 “우리는 미래와 직업을 원한다”면서 “사람들은 우리에게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학위를 얻을 것을 강요한다. 하지만 대학졸업장이 있어도 직장을 찾을 수 없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아테네 부촌인 콜로나키 광장 카페에 앉아서 기업 간부 등 일자리를 줄 수 있을만한 사람과 안면을 트라고 조언하기도 한다”고 그리스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부당함을 폭로했다. 그리스 기업의 공식 근무시간은 그리스 식으로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까지, 또는 유럽식으로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까지지만 오전 8시에서 오후 6시까지 일하고 무보수로 시간외 근무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다. 불법 근로관행에 대한 관리처벌이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집과 자동차, 휴가, 신용소비 등 비교적 평안한 삶을 누려온 부모세대들도 몇 년 전부터 경제가 악화되면서 조부모가 물려준 밭을 밭이나 집을 처분하고도 매달 근근이 생활하고 있다. 자녀가 경쟁력 없는 그리스 대학시스템의 피해자가 되지 않도록 해외유학을 보내기 위해 진 빚도 갚아야 하고 경우에 따라선 35세가 될 때까지 취업을 못한 자녀들을 데리고 살며 계속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 그리스 일간은 “그리스 사태는 예견된 폭발이었다면서 분노가 폭발한 이유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 않고서는 어떤 해결책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12월 15일 프랑스 정부는 2009년부터 시행하려던 고등학교교과 과정 개혁안을 1년 연기하는 이례적인 조치를 취했다. 자비에 다르코스 교육부 장관은 지난 12월 15일 2009학년도 새 학기부터 도입할 예정이었던 고교 1학년생의 교과 개혁안을 1년 연기해 2010학년도 학기에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번 개혁안은 고교생들은 물론 학부모와 교사들의 반발이 수그러들 조짐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취해진 것이어서 반대시위가 개혁안 연기의 주된 이유로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 반정부 시위의 불길이 프랑스로 옮겨 붙을 조짐이 나타나자 자국내 고교생 시위를 방치해서는 곤란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제기됐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과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 등은 사르코지 대통령이 그리스 폭동사태가 프랑스로 확산될 것을 크게 우려해 다르코스 교육장관에게 개혁안 연기를 주문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그동안 평화시위를 해온 학생들은 그리스 시위가 지난 주말부터 과격해 지면서 경찰에 돌을 던지는 등 과격 양상을 보여 왔다. 연일 계속되는 시위로 그리스 내 불안이 고조되는 가운데 혼란이 다른 유럽 국가들까지 번질 조짐이 보여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스페인, 덴마크, 이탈리아 등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는 시위대들이 상점과 은행 등을 공격하고 경찰에 폭력을 행사하는 등의 일이 벌어졌다. 지난 12월 10일 이탈리아 로마의 그리스 대사관 밖에서는 시위가 벌어져 경찰차가 부서지고 쓰레기통이 불타오르는 등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 덴마크에서도 시위가 벌어져 63명이 구류되기도 했다. 프랑스 보르도에서는 그리스 영사관 밖에서 폭동을 경고하는 낙서들이 즐비하고 자동차가 불타오르는 일도 발생했으며 스페인 마드리드에서는 12월 10일 젊은이들이 은행과 상점, 경찰서를 공격했다. 유럽은 현재 경기후퇴로 인한 실업률 증가에 직면했다. 특히 젊은층을 중심으로 한 실업률이 증가함에 따라 젊은 세대들의 불만이 커지면서 시위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시위대의 일부는 인터넷을 통해 조직된 집단으로, 테크놀로지에 대한 흡수가 빠른 젊은 계층이 이를 주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 그리스 시위대의 웹사이트는 현재 약 20여개 국가들이 시위를 격려하고 있다고 밝혔으며 유럽 전역에서 인터넷 사이트나 블로그를 중심으로 시위에 대한 요청이 확산되고 있다. 여러 그리스 웹사이트는 시위 현황을 생중계하고 있으며 항의 행진 또한 웹사이트와 휴대폰 문자메시지 등을 통해 실시간으로 전해지고 있다. 스페인에서는 반(反)세계화 웹사이트에서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에서 계속되는 시위를 지지하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유럽 어디에서든지 그리스의 시위 현황은 시민 기자들에 의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영국의 한 사이트에서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를 따라 거리로 나갈 것을 선동하고 있다. 최근 그리스 내 야권이 반정부 시위를 정치 쟁점화하면서 사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으나 시위대가 시위를 계속한다는 입장이어서 조기 총선 등 정치적 결단이 나오지 않는 한 혼란이 장기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NP
장정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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