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경이란 고려시대의 찬란한 불교문화로, 부처님 말씀을 금·은·먹·주사 등을 이용해 붓으로 옮겨 적는 것을 의미한다. 사경은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해질 때부터 함께 해온 불교의 역사이자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15년간 고려 사경의 기법을 연구하며 전통문화 계승에 앞장서온 초암(艸菴) 김시운 선생의 예술적 경지는 충청도의 둘레를 넘어 한국 서예 예술의 보고로, 민족의 영원한 자산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2008 대한민국 최우수 신지식인 선정
▲ 2008 대한민국 신지식으로 선정된 초암 김시운 선생은 현재 법화경을 주사로 쓰는 작업을 진행 중에 있다.
1978년 선이 주는 매력과 묵향의 은은함에 반해 서예와 인연을 맺은 초암(艸菴) 김시운 선생은 참으로 열정적인 사람이다. 쓰디쓴 독학의 과정을 통해 충청북도 도전과 국전에서 수차례 특선과 우수상을 수상하며 지역 서예 발전에 헌신해 온 그는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부문 초대작가로 명성을 드높여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기이한 꿈을 꾸었다. 꼬박 15년 전의 일이다. 꿈에서 깊은 산중을 걷던 그의 앞에 장삼을 걸친 노인이 나타나 책 꾸러미를 던지며 ‘넌 이것을 써야한다’라고 소리를 치셨고, 그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고 뒤로 넘어지며 꿈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그 날 등산을 위해 올라간 속리산 관음암에서 노스님을 뵈었다. 먹으로 한지에 손수 쓰신 금강경 한 권을 주셨는데, 얼마나 정성스럽고 아름답게 쓰셨는지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꿈이 나에게 사경을 하라는 부처님의 계시라 여겨졌다”라며 그는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전통사경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다. 과거 약탈로 인해 대부분 일본에 건너가 있거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몇몇 자료뿐이다. 이러한 실정이 안타까워 1994년부터 고려 사경을 공부하고 연구한 그는 현재 이 분야의 권위자로 우뚝 서 있다. 전통사경을 완벽하게 재현하는데 성공한 김시운 선생은 15년에 걸쳐 연구한 사경의 현황과 기법을 담은 자료를 지난해 한국신지식인협회에 제출했고, 그 결과 전통사경의 우수성을 알리고 저변확대에 공로했다는 인정을 받아 2008년 문화예술 분야 대한민국 최우수 신지식인으로 선정되었다. 그는 “대한민국 신지식인으로 선정되어 한국 서예 발전에 좋은 선례를 남긴 것 같아 자랑스럽다.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도움 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라며 소감을 전했다.
청명한 감지에 녹아내린 부처님의 말씀
▲ 묘법연화경 관세음보살 보문품
지역을 대표하는 서예가였던 김시운 선생에게도 사경을 시작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문헌상으로 전해 내려오는 사경의 기법을 알 길이 없다보니 입소문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금니 사경에서 가장 중요한 아교처리방법에 대한 연구부터 시작했다. 민어 부레를 끓여 만든 어교가 좋다는 것을 알아내고 드디어 금니 사경에 성공했으나 6개월 후에 변색이 되고 말았다. 물을 잘못 사용한 것이다. 좋은 물을 구하기 위해 태백산, 소백산, 지리산 꼭대기 등 안 올라가본 산이 없었다. 그러다 물에 있는 철 성분이 변색의 원인임을 알아차리고 볏짚을 태워 물을 내려 보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해봤지만 허사였다. 물과의 사투를 3년 동안 반복한 끝에 알아낸 정답은 의외로 허무하기까지 했다. 어느 날 조카가 콘택트렌즈를 식염수에 헹구는 것을 보고 성분 분석을 했더니 그게 바로 그가 찾던 물이었다. 약국에서 천원을 주고 구입한 증류수를 써보니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각고의 노력 끝에 2005년 4월 인사동 공평아트센터에서 열린 첫 개인전 <사경과 변상>에서는 77점의 사경작품을 전시하며 사경에 대한 인식을 넓히는데 성공했다. 특히 2년 3개월의 제작기간 동안 47미터에 이르는 청명한 감지에 빛나는 순 금니로 <금강경> 원문을 한문예서와 그에 대한 해석을 한글로 쓰고, 32종의 변상도를 그려 넣은 것은 그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도였기에 극찬을 받았다.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은 ‘초암의 <금강경>은 어두운 세상을 비춰 지혜로운 길을 안내하는 이 시대의 법등이 될 것’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또한 지난해 9월 인사동 한국미술관 개관 기념전에서는 천태종의 중심 경전인 법화경 7만자를 2년간 작업한 <감지금니 묘법연화경>을 선보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는 지난해 10월 창립 38주년을 맞이한 천태종 원주 성문사에서 ‘감지금니 묘법연화경 친견 법회’를 봉행하며 다시금 찬사를 받았고, 현재는 성문사에 영구 보존되고 있다.
후학양성을 통해 전통사경의 맥 이을 터 현재 김시운 선생은 후학을 양성하고 사경의 기법을 전승하고자 한국전통사경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비록 혼자 연구하고 터득하며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후세를 위해 지금까지 배운 것을 아낌없이 남겨 주고 가야한다는 것이다. 사경 기법에 대한 철저한 연구와 고증은 후학 양성에 남은 세월을 바치겠다는 그의 간절한 바람이며 꼭 풀어야 할 숙제인 셈이다. 그는 “내 몸이 허락하는 한 사경을 계속 할 것이고, 죽기 전에 화엄경 80권을 포함해서 다 쓰는 것이 마지막 바람이다”라는 말로 다짐을 전했다. 사경이라는 불교의 숭고한 사상과 찬란한 문화의 유산이 잊히지 않고 우리들의 가슴과 정신 속에 영원히 살아 움직이기를 간절히 바란다.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