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미국, 신자유주의 타파를 위한 몸부림

1970년대 초 제1차 세계 석유위기 이후 장기불황을 돌파하기 위해 영국의 대처 총리와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신자유주의를 채택한다. 세계화와 개방화, 노동시장 유연화, 탈규제 등을 골자로 한 신자유주의는 미국 중심의 거대자본이 세계시장을 지배할 수 있도록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다. 그러나 애덤 스미스의 자유주의가 1930년대 대공황과 함께 비극적으로 종결된 것처럼, 미국의 신자유주의는 지금 강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세계화의 가장 큰 피해국은 미국의 뒤뜰인 중남미 국가들이다. 멕시코는 1994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대가로 공기업의 민영화를 허용하면서 통신 철도 공항 전력 석유산업 등 국가자산의 70%를 외국자본이 장악했다. 결국 나라살림은 거덜 나고 양극화로 많은 국민이 절대빈곤층으로 전락했다. 니카라과는 노동인구의 70%가 일자리를 찾아 이곳저곳을 떠돌고, 산디니스타 혁명 이후 한때 12%까지 떨어졌던 문맹률이 다시 40%까지 치솟는 등 세계화 실험의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돈키호테, 차베스

차베스는 19세기 스페인 식민시대 중남미 독립의 전설적 영웅 시몬 볼리바르를 계승해 자주적 진보국가를 건설하고 제2의 중남미 해방을 꿈꾸며 볼리바르 혁명이라는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의 독특한 민중혁명을 추진 중에 있다.‘민중에게 권력을 주지 않는 한 가난을 없앨 수 없다.’는 신념으로 민중의 참여를 볼리바르 혁명의 동력으로 삼고 있다. 차베스의 국내 지지자들은 베네수엘라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서민이다. 1998년 대통령에 당선된 차베스를 끌어내리려고 미국이 공공연하게 지원한 쿠데타에서 차베스를 구해낸 것도 서민이었다. 2002년 친미 보수세력은 차베스의 급진적인 개혁에 반발, 쿠데타를 일으켜 차베스를 군기지에 연금했다. 그러나 그 소식을 들은 서민들이 봉기, 차베스는 48시간 만에 대통령으로 복귀했다. 지난해에는 국민투표를 거쳐 2006년까지 임기를 보장받았다. 차베스가 서민들로부터 지지를 받는 것은 그의 정치가 서민들을 중심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 서민대통령차베스
그가 추진하는 정책은 서민들의 피부에 즉각 와닿는 것들이다. 차베스는 미국과 유럽의 메이저 석유회사들에게서 걷는 로열티와 세금으로 서민들의 주택을 지어주거나 개량해준다. 쿠데타로 연금당하기 전인 2000년 차베스는 15억 달러를 투입, 40만 가구의 주택을 새로 짓게 했다. 또한 아예 정부가 슈퍼마켓을 세워 서민들에게 생필품을 싼 값에 공급하기도 한다. 빈민구호나 의료지원 사업도 열심이다. 이러한 서민 위주의 정책이 서민들로 하여금 차베스를 광적으로 지지하게 한다. 중남미 지역의 고질적인 병폐인 일부 특권층의 토지 과다점유를 해소하기 위해 차베스는 토지를 농민에게 돌려주는 과감한 토지개혁을 시도했다. 차베스는 중남미의 대부분의 반정부 무장세력들이 토지문제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차베스는 21곳의 농장 60만의 땅을 유상몰수하는 ‘혁명적 토지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농장주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차베스는 빈농들이 경작하는 협동농장으로 전환할 경우 일부 소유권을 인정해줄 수 있다고 전제,“개혁에 저항하면 군을 동원해 지주들을 끌어내겠다”며 토지개혁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내비치기도 했다. 차베스의 카리스마가 그의 지지자들을 묶어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탓에 비판자들에게 차베스는 포퓰리즘 정치가라는 얘기를 듣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거침없는 언변, 부시를 흉볼 때 구사하는 말처럼, 은 서민들에게 서민대통령이란 느낌을 갖게 한다.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빨간 베레모의 공수부대 중령 출신. 친미 우익 쿠데타로 집권한 대통령으로 오인하기 쉽지만 그는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한 실업과 생활고에 시달리다 거리로 뛰쳐나와 저항하는 민중의 편에 서서 쿠데타를 시도했다 실패하여 옥고를 치르고 나와 베네수엘라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인물이다. 그가 국민들에게 공짜로 나눠주며 일독을 권한 책이 있다. 올해 출판 400주년을 맞은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이다. 흔히 돈키호테를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주의자, 시대의 이단아, 앞뒤 계산도 없이 이상을 향해 돌진하는 저돌적 인간형과 연결시킨다. 호기심도 많고 고민도 많지만 가는 곳마다 현실세계와 충돌하며 우스꽝스럽게 돌출행동과 돌출발언을 일삼는 돈키호테. 그러나 차베스가 지향하는 것이 돈키호테적인 것만은 아니다.

세계구조를 개편하려 하다

유엔 창설 60주년을 맞아 열린 유엔정상회의에 참가한 차베스는 세계 각국 정상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예 대놓고‘부시는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다. 미국은 테러리스트 국가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부시를 가리켜 국가 재난이 일어났는데도 한가하게 휴가를 즐긴‘휴가의 왕’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그는“부시 대통령은 20분 동안 발언했다.”며 5분 발언 제한시간을 무시한 채 부시와 미국을 공격했다. 연설이 끝나고 그는 유엔 정상회의에 참석한 세계 정상들로부터 가장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부시도 어쩌지 못하는 차베스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차베스에겐 석유가 있다. 베네수엘라는 세계 5위 산유국으로 북중남미 국가 가운데 유일한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이다. 특히 하루 270만 배럴을 생산하는 원유의 60%인 150만 배럴을 미국에 수출한다. 이는 미국 석유 수요의 15%에 달한다. 미국의 베네수엘라 산 원유 의존도가 높다는 것은‘말 안 듣는 나라’, 예를 들어 북한, 이라크 등에 흔히 써먹었던 경제봉쇄를 단행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뜻한다.

차베스는 미국의 경제봉쇄에 대해서도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는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미주자유무역지대(FATT)에 맞서 석유의 힘을 활용, 중남미 경제권을 묶는 작업을 하고 있다. 차베스는 자메이카에서 카리브해 13개국 정상을 초청, 30~40% 정도 싼 배럴당 40달러에 원유를 공급하겠다며“페트로 카리브‘로 명명한 카리브지역 ’석유동맹‘을 출범시켰다. 또 차베스는 그들 나라들이 석유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도록 항구 건설 비용으로 2000만 달러의 장기저리 차관을 제공하기로 했다. 그는 석유동맹이 출범하자 곧 자메이카에 배럴당 40달러에 하루 2만2000배럴을 공급하고 원유대금조차 상품이나 용역, 저리 차관으로 받기로 했다. 초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당당하게 미국의 정책을 제국주의적이라고 공공연하게 비난하고 미국 주도의 정의롭지 못한 세계를 바로잡자고 국제사회에 호소하고 있다. 미국에 종속되고 의존하는 중남미 지역의 경제구조를 개혁하고 경제적 착취의 역사를 종식하기 위해 미국 주도의 중남미 자유무역지대에 맞서 세계 5위의 자국의 풍부한 석유자원을 매개로 한 에너지 협력, 중남미 은행 창설 등 미국의 굴레에서 벗어난 중남미 지역의 독자적 경제협력체제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선진제국 중심의 자유시장, 자유무역, 국영기업의 민영화 등을 기치로 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시대의 거대한 흐름에 대항해”민중의 목소리가 신의 목소리이지, 시장(市場)이 결코 신이 아니다.“라고 주창하며 민중이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한 빈익빈 부익부의 현실에서 벗어나 평등하게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대안의 경제체제를 추구하고 있다.

주변국의 상황

부시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미국과 중남미 관계는 냉전종식 이후 최악의 상태에 빠져 있다. ‘미국의 뒷마당’으로 불릴만큼 전통적으로 친미성향이 강했던 중남미에 최근 들어 반미감정이 급속히 확산되면서 좌파정권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칠레 대선에서 중도좌파연합의 미첼레 바첼레트 여성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으며 중남미에 불어닥친 반미·좌파 도미노 현상으로 앞으로도 대선이 예정된 9개국 가운데 7개국에서 좌파 승리가 점쳐지고 있다. 바첼레트는“나는 칠레 보수 사회가 증오하는 모든‘죄악’을 대표한다. 사회주의자이고 사회주의자의 딸이며, 이혼했고 종교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해 왔다. 결국 그의 당선은 미국 중심의 세계화와 대안 없는 보수주의에 대한 반발로 볼 수 있다.

볼리비아 아이마라족 원주민 출신 에보 모랄레스는 대통령에 당선된 후 첫 대중집회 연설에서“인민들이 신자유주의를 패배시켰다. 우리는 신자유주의 모델을 변화시키기를 원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에 이어 중남미 대표 반미주자로 벌써부터 주목받고 있다. 자신의 당선이 미국에는 악몽이 될 것이라고 공언해온 그는 미국과의 관계와 관련해 굴복과 예속은 단호히 거부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미국의 대(對)중남미 외교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는 마약근절 정책의 핵심인 코카인 재배 금지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있어 향후 상당한 파장이 예상된다. 우루과이에서도 사상 첫 좌파 대통령이 취임했다. 아르헨티나 역시 의회 중간선거에서 중도좌파 노선의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대통령이 큰 승리를 거둬 세력을 확대했다. 중남미의 대국인 멕시코에서도 좌파후보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전 멕시코시티 시장이 여전히 여론조사 1위를 유지하고 있어 금년 7월 좌파의 대선 승리란‘혁명적 정치변동’이 조심스럽게 점쳐지는 상황이다.

▲ 유엔에서연설하는차베스

2005년 4월 친미성향의 꾸띠에르스대통령 축출 사태를 맞은 에콰도르 역시 정정불안이 계속 이어지면서 좌파득세 국가 대열에 합류할 조짐이다. 나아가 중남미 좌파 열풍은 2월의 코스타리카 대선과 11월의 니카라과 대선에도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니카라과의 경우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FSLN)을 이끌고 있는 다니엘 오르테가 전 대통령의 권력복귀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다. 볼리비아 대선으로 더욱 거세진 좌파열풍은 미국의 대(對) 중남미 외교정책에 상당한 타격을 가할 전망이다. 볼리비아 대선으로 중남미 좌파단합은 더욱 가속화하고 중남미국가공동체 추진에도 새 동력을 얻을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의 선택

미국의 대표적 외교·경제문제 평론잡지인 Foreign Affairs는'미국은 중남미를 잃고 있는가'라는 보고서를 통해 양자관계의 붕괴 원인을 워싱턴 지도력의 실패에서 찾았다. 즉,'9·11테러'로 미국의 정책이 테러와의 전쟁에 집중되면서 중남미는 관심 밖으로 밀려난 데다, 두 차례의 전쟁 과정에서 보여준 부시 행정부의 공격적 일방주의와 국제규범의 무시가 중남미에서 커다란 반감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중남미를 방치하고 있을까. 미국은 민주주의의 실험장으로 여기고 있는 중남미에서 최근 10년새 6명의 민선 지도자가 쫓겨나는 등 민주주의가 도전받고 있고, 중남미의 경제가 전반적으로 난관에 봉착하고 있는 데 대해 실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테러와의 전쟁과정에서 드러난 양자간 불협화음에 대한 앙금도 아직 남아 있다. 미국은 2003년 이라크 침공을 앞두고 유엔 결의안을 제출했으나 34개의 중남미 국가 가운데 7개국만 이를 지지했다. 영국 BBC방송은"부시 행정부는 레이건 행정부 때와는 달리 아랍과 중동, 중국, 북한 등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면서"중남미에서 좌파정권이 휩쓸고 있음에도 부시 행정부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방송은 그 이유로 중남미의 좌파정권들은 빨간색(공산주의)이라기보다 분홍색에 가까워 수용할 만하며, 일부 좌파정권 지도자들이 반미를 주창하고 있지만 정치적 수사(修辭)일 뿐 실제로는 미국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있다고 미 행정부가 보고 있는 점을 꼽았다. 미국과 중남미는 많은 가치를 공유하고 있고 아직도 다방면에서 협력하고 있지만 양자간의 미래는 그리 밝지 않다. 양자관계가 머지 않은 장래에 개선되리라는 전망은 거의 나오지 않고 있다. 중남미는 미국에 대해 미국의 농업정책 및 이민정책 개선과 보다 많은 경제지원을 희망하고 있지만 미국이 이를 수용할 가능성은 낮기 때문이다.

미국내 정치역학상 자국민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을 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라크전쟁과 허리케인 피해로 인해 예산의 여유도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뒷마당을 잃고 남쪽 모두를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방치할 여유가 이제는 없을 것이다. 근교원공(近交遠攻)을 거론할 것도 없이 이웃한 나라와도 신뢰관계를 형성하지 못한다면 패권국으로서 자격이 없다. 이제는 근린국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에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근린국과의 우호와 선린은 서로 대등하다고 인정할 때에만 안정적일 수 있기 때문에 미국이 이제껏 견지해 왔던 태도를 바꾸어 꿔야만 한다. 그러지 않고는 진정한 우호와 협력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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