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으로 얼룩진 아프가니스탄‘게릴라전을 중심으로 여전히 진행중인 전쟁’

텔레반은 1994년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아프가니스탄 남부 칸다하르에서 결성한 무장 이슬람 정치조직을 가리킨다. 무장 이슬람 정치조직은 1996년부터 2001년까지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한 세력으로 결성 당시부터 군정세력으로 출발하였다.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국토의 80% 정도를 장악한 뒤 수도 카불(Kabul)을 점령, 14년간 계속된 아프가니스탄 내전과 4년 동안의 모자헤딘(Mojahedin:무장 게릴라 조직) 권력투쟁을 종식시켰다. 그러나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미국대폭발테러사건의 배후자인 국제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추종 조직인 알 카에다를 숨겨둔 채 미국에 인도하지 않음으로써 미국과 동맹국들의 반발을 산 끝에 결국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일어났다. 결국 2001년 11월 탈레반 정권이 무너지고 여러 정파가 참여한 임시정부가 구성되었다. 하지만 파기스탄과 접경지역으로 숨어들어 세력을 확장시킨 탈레반은 산발적인 게릴라전을 중심으로 여전히 전쟁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9·11 테러 직후 미국은 안보와 세계평화 및 질서 확보라는 명분아래‘테러와의 전쟁(War on Terror)’을 선포하였다. 미국은 9.11 테러 대참사의 배후로 오사마 빈 라덴과 알카에다를 비호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지목하였다. 이어 미국과 동맹국들은 알카에다에 은신처를 제공한다는 이유로 아프간을 침공했고, 탈레반 정권을 축출하기에 이르렀다. 미군의 지휘하에 지난 2002년에는 대규모 소탕작전을 벌였지만, 알카에다와 탈레반 잔당은 아프간의 험준한 산악지역으로 숨어버렸다. 이후 남부 산악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한 이들은 2005년부터 본격적인 반격에 나섰고, 2006년 봄 대공세를 펼쳐 칸다하르를 포함한 남부 일대를 장악했다. 그해 여름과 가을 나토군이 칸다하르를 탈환했지만, 아프간의 상황은 테러와의 전쟁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처참했다. 탈레반은 이슬람 국가 재건이라는 목표 아래 2007년 화려하게 부활했다. 전투 전술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성장했으며 자살폭탄테러도 탈레반에게 적극 원용되고 있다. 2008년 미국은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서면서‘아프가니스탄 우선정책’을 세워 아프가니스탄에 전력을 집중하였다. 이는 탈레반 세력확대에 대한 조치를 유엔의 승인을 받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작전은 국제법상 적법성을 띄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은 유엔에서 인정한 국제안보지원군의 작전 지역이 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수행
2001년 10월 7일, 미국은 남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군사기지에 대대적인 공습을 개시했다. 9.11테러가 벌어진지 26일도 채 되지 않아 군사작전이 진행 되었다. 우선, 항구적 자유(Operation Enduring Freedom)로 이름 붙여진 이 작전은 미국을 주축으로 하여 탈레반의 본거지인 칸다하르를 비롯해 수도 카불 등에서 진행되었다. 반(反)탈레반 연합전선이었던 북부동맹군에 미국과 영국의 특수부대원들이 합류했다. 이들은 나토군의 지원을 받아 탈레반 병력들을 밀어내는데 성공한다. 대략 18만명의 미군을 포함한 2만의 병력이 작전에 동원되었다. 그리고 국제안보지원작전(International Security Assistance Force)으로 항구적 자유 작전 수행이후 2002년 아프가니스탄의 안정화를 위해 국제사회가 진행시켰다. 나토는 2003년 8월부터, 아프가니스탄 치안유지를 맡아 국제안보지원작전에 지휘권을 무기한 인수해 군사작전을 직접 주도하고 통제를 담당해 왔다. 지난 2008년 5월까지 국제안보지원작전에 나토국가들이 주축이 되어 대략 40개국으로부터 4만7천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다. 미군은 나토와는 별개로 아프가니스탄에 병력을 주둔시켜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탈레반 천하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미국의 대대적인 공습이 있던 2001년 탈레반이 붕괴되면서 아프가니스탄의 정부는 친미 정권인 하미드 카르자이 정권이 출범하게 된다. 그러나 카르자이 정권은 아프가니스탄 전체를 지배하지 못하고 수도 카불 주변만 장악을 한다. 사실상 카불을 벗어나면 탈레반 조직이 행정, 치안, 사법기능을 도맡고 있다. 탈레반은 붕괴 뒤 잠시 수세에 몰리지만 파키스탄 북서부 산악 국경지대에 숨어들어 세력을 확장시킨다. 그 뒤 대공세로 돌아선 탈레반은 8년째 미군과 나토군에 맞서고 있다. 지금 아프가니스탄은 전 국토가 전장으로 그 어느 곳도 안전하지 못한 혼란의 상태에 있다. 정확한 통계가 나와 있지 않지만 미군과 나토군의 피해는 갈수록 늘어 현재까지 1131명의 사상자를 냈다. 민간인 희생자도 1만1천명에 달한다. 더 큰 문제는 탈레반 세력이 미사일강국인 파키스탄 깊숙이까지 영향을 뻗치고 있다는 것이다. 탈레반은 파키스탄 북서변경주(NWFP)와 연방직할부족지역(FATA)을 장악하였고, 지금은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북서쪽으로 160km가량 떨어진 지역까지 꾸준히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파키스탄 정부는 탈레반의 요구에 굴복해 북서변경주의 스와트지역에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 통치를 하는 조건으로 휴전협정을 맺는다. 이 협정에 따라 탈레반은 영화와 음악을 금지하고, 여성의 교육 기회를 박탈하였다. 또 여성에게 전신을 덮는 부르카를 착용하도록 강제하는 등 탈레반의 엄격한 율법 통치 아래 여성과 아동에 대한 인권 침해가 빈발하고 있다. 현재 탈레반의 이러한 상황들을 볼 때 여전히 전쟁은 진행중이고,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승리는 요원한 상태다.


탈레반은 미국이 키웠다?
9.11 테러 대참사의 배후로 미국이 지목한 오사마 빈 라덴과 알카에다를 비호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은 사실상 미국이 키워온 것이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할 당시 미국은 CIA를 통해서 무자하딘(이슬람전사)을 지원했다. 1979년부터 30년 동안 무자하딘은 미국의 지원으로 마약거래, 아프간 반군활동, 테러 등의 활동을 했다. 또 많은 정치적 자금이 무자하딘으로 흘러 들어갔다. 미국의 지원으로 아프가니스탄 내전에서 소련은 밀려났다.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내전과 혼란의 상태가 지속되다가 1994년 탈레반은 첫 군사활동을 시작으로 1996년 수도 카불에 입성한다. 결국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권력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철저히 이슬람 원리주의에 입각한 사상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관통 송유관 건설 협상을 탈레반과 벌였다가 결렬되면서부터 탈레반과 미국의 사이는 틀어지기 시작했다. 이후 빌 클린턴 미 대통령 후임으로 텍사스 석유재벌 부시가 역임하게 된다. 부시 행정부 초기에는 이슬람의 테러 문제보다 전략적 경쟁자라고 생각한 중국을 우선순위에 두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프가니스탄의 전설적인 야전사령관 마수드가 암살되고, 이틀 후 9.11테러를 감행했다. 이후 미국은 공습에 의존해 민간인 희생자를 내면서 알카에다 지도자는 잡지 못했다.


조용하게 시작된‘아프팍 전쟁’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그동안 아프가니스탄 상황 개선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 직후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파병인원을 증파했고, 이는 전 부시 행정부의 외교 노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5월 6일 백악관에서 방미 중인 아프가니스탄의 카르자이 대통령과 파키스탄의 자르다리 대통령을 따로 만나 양자 개별회담 및 3자 정상회담을 진행했다. 이들은 알 카에다 세력을 척결하기 위한 공동대응 의지를 밝히며 확고한 협력을 보여주는 3각 공조의 의미를 강조했다. 지난해 탈레반과 휴전협정을 체결한 파키스탄은 1년 만에 휴전협정을 파기하고, 지난 5월 초부터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는 등 미국 요구에 부응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및 나토군 사령관 데이비드 맥키난 장군을 스텐리 맥크리스탈 장군으로 전격 교체해 한층 강화된 전략을 펴나가기 시작했다. 개전 8년째를 맞아 세력을 점차 확대해 나가고 있는 탈레반을 더는 좌시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수뇌부 교체라는 극약처방을 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전 이라크 철군보다 아프간 상황 개선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오바마 대통령의 전쟁 아프팍(Afpak)전쟁은 조용히 시작되고 있다. 즉,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전쟁으로 탈레반과 이슬람 원리주의자들과의 본격적인 전쟁이이 개시된 것이다.


파키스탄 핵무기 지키기 비상
파키스탄 정부군과 탈레반의 전면전이 지난 5월부터 계속된 가운데 피란민 수가 240만명에 육박했다. 파키스탄에서 발생한 난민 규모로 사상 최대의 규모이다. 이에 파키스탄 정부는 탈레반 소탕작전이 장기화될수록 더 많은 피란민이 발생할 것으로 우려했다. 지난 5월 미국 데이비드 펱, 레이어스 사령관은 파키스탄의 핵무기가 탈레반 세력으로부터 안전하다고 했다. 그러나 탈레반과의 격렬한 전투로 핵보유국인 파키스탄의 정정이 불안해지면서 미국 정부는 파키스탄 핵무기의 안전 문제에 관심을 쏠리고 있다. 미국의 파키스탄에 대한 수십억달러에 달하는 원조가 핵프로그램에 유용되지 않을지 하는 우려에서다. 또 탈레반 세력들이 파키스탄의 핵무기를 탈취한 가능성 때문이다. 이를 막기 위해 파키스탄과 인도 사이의 긴장관계를 완화하는 노력을 기울여 파키스탄으로 하여금 인도의 위협에 대비했던 그들의 군사력을 탈레반과의 전투로 돌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한다. 파키스탄에는 핵무기 프로그램과 관련해 수만명이 일하고 있다. 그중 2천여명은 핵무기 제조와 관련된 핵심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파키스탄 정부는 이같은 핵무기와 관련한 미국 언론 보도를 사실상 시인했다.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이란 3국 정상회담
미국은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탈레반 세력들을 척결하기 위해 이란과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3개 국에 좀 더 지역적인 접근 방안을 모색할 것을 촉구해 왔다. 지난 5월 24일 이란으로 출국한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은 이란과 파키스탄 지도자들을 만나 안보와 대(對)테러전, 경제적 동맹관계 향상을 위한 방안을 회담을 갖고‘테헤란 성언’에 서명했다. 이란과 파키스탄, 아프간 등 3개 국은 지난 수십 년간 지속되고 있는 폭력과 국경지대에서 만연하고 있는 마약 밀매 등의 이해 관계에 따라 지난 3월 매달 회담을 열었다. 회담은 마약 재배와 불법 거래 근절, 아프가니스탄 내 안정을 위한 경제적 협력 강화 등 다양한 방안에 대해 논의키로 합의한 바 있다. 아프가니스탄 외무부는“3개 국은 이슬람의 이상과 믿음, 문화에 대항하는 극단주의와 테러리즘, 마약을 근절하기 위해 논의할 방침이다”고 밝혔다. 이제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이란은 탈레반 세력을 근절하기 위한 대규모 공세에 나섰다.


앞으로 상황과 전망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아프가니스탄의 전략을 살펴보면 조만간 2만 1000명을 증파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전부터 오마바 대통령은 더 많은 군사를 아프가니스탄에 파병해야만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두 나라를 하나의 통합된 과제로 보는 아프팍 전략의 핵심은 파키스탄이다. 지난 5월 6일 자르다리 파키스탄 대통령과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을 따로 만나 양자 개별회담 및 3자 정상회담을 진행했으며, 3개 국은 알카에다 세력을 척결하기 의한 공동대응 의지를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봤을 때 오바마 대통령의 중동 전체에 대한 전략은 미국의 전통적인 외교노선과 크게 다르지 않는 것이다. 현재 탈레반 세력은 아프가니스탄 정부군과의 교전에서 잠재적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협상을 진행 중에 있으며, 이들 탈레반 세력은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의 철군일정을 우선 의제로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이에 오바마 대통령은 탈레반이 무장투쟁을 포기하기로 동의할 때까지 군 증파 등 기존 입장을 내세우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현지 미군 지휘관들은 병력증강을 통해 탈레반에 타격을 가한 후, 그들을 협상으로 몰아 보다 좋은 조건을 끌어낸다는 전략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오바마 미 대통령은 미국의 군사력에 입각한 8년간의 부시 대통령식 일방주의 대외정책을 종식시켜야 한다. 군사력 보다는 외교에 초점을 맞춰 미국의 국제적 리더십에 다시 한번 힘을 불어 넣어야 한다. 지금은 무엇보다 오바마 대통령이 강조한 부드러운 리더십이 필요한 때이다. 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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