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가까워지는 중국과 대만

59년만에‘하늘 길’과‘바다 길’뚫려
전면적인 통신·통상·통항 교류

중국과 대만은 1949년 국공(국민당-공산당)내전 이후 59년만에 처음으로 지난 2008년 5월 말 베이징에서 국공 영수회담을 열었다. 이후로도 3차례에 걸친 양안회담을 통해 중국과 대만은 직항로 개설과 경제협력 등 다양한 합의를 이뤄냈다. 지난 2008년 12월, 통항(해운항공 직항), 통상, 통신이 전면적으로 이뤄지는 대삼통의 밀월 시대를 개막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기업의 대만 투자 허용, 은행간 상호지점 설립 등 다양한 분야의 협력을 실현시켰다. 중국과 대만의 단일 경제권은 이제 시작단계이다. 양안관계가 경제문제를 넘어 정치·군사교류로 확대될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할 것이다.


▲ 중국과 대만은 지난해 12월 전면적인 교류를 뜻하는 양안 대삼통(大三通)시대를 맞았다. 1949년 국공내전 이후 꽉 막혔던 하늘길과 바닷길이 활짝열린 것이다.
1912년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래 중국을 이끌어온 국민당과 공산단이 1949년을 기점으로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을 각각 출범한 것을 계기로 분단이 되었다. 그해 10월 중국 대륙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과 동시에 공산화를 선포하였고, 12월 국민당의 중화민국 정부는 수도를 대만으로 천도하였다. 이로써 중국은 대만해협을 분단선으로 두 개의 중국으로 분리되 양안의 교류를 가로 막았다. 대만으로 옮긴 국민당 정부는 대만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해 행정·입법·사법부 3권을 장악해 일당 독재 정치를 폈다. 또 철저한 반공주의를 내걸고 미국으로부터 군사·경제원조를 받아 경제발전에 주력해 왔다. 반면 중국은 무력을 통한 대만해방을 주장하며 크고 작은 무력충돌을 계속하였으나, 미국의 개입과 중국 내부의 악재로 인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1971년 중국이 대만을 축출하고 UN에 가입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절대우위의 외교적인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 이후 중국의 대만 정책은 양안간의 교류확대와 대만의 국제적 고립유도를 통한 흡수통일을 추구했다. 1979년 중국은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에서‘대만동포에게 고하는 글’을 통해 평화통일 방침을 제기하였다. 또한 3통(통신·통상·통항)의 교류를 제안하는 등 대만 정책의 변화와 관련된 구체적인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다. 대만은 중국의 대만 정책에 대항하여 중국의 무력사용 포기를 요구하는 한편 1991년 중국과 교류를 증대하고‘국가통일강령’을 확정했다. 대만의 입장은 중국의 흡수통일 전략이 대만을 직접적으로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중국과 민간교류 확대를 간접허용하는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다. 대만정부는 대륙과 전면적인 직접교역인 통항(해운항공 직항), 통상, 통신을 의미하는 3통에 앞서, 전방 3개도서에 한해 소규모 직항 등을 허용하는 소삼통(소삼통)정책을 내놓는다. 이후 2000년 3월 국민당의 장기집권이 끝나고 대만출신의 민진당의 천수이볜 총통이 집권하면서 대만 독립을 주장해 양안관계를 일시 긴장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2008년 5월 마잉주 총통이 집권하면서 적극적인 대중 유화정책으로 양안간 밀월 시대를 열었다.

중국…‘일국양제’, 대만…‘3불원칙’
▲ 중국은‘일국양제’의 외교정책을 주장해 줄곧 대만을 공식 국가가 아닌 대륙에 속한 하나의 성(省)으로 간주해 왔다.
미국에 이어 세계강자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의 아킬레스는 대만이다. 중국은 대만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고 있지 않고, 이는 미국의 대 중국 압박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대만 문제를 포기할 수 없다. 대만의 독립은 뿌리 깊은 다민족간의 갈등으로 인한 중국 분열의 우려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의 경제 성장에 대만의 영향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은 1984년 대만에 통일방안으로‘일국양제’를 공식 제의 한 바 있었다. 즉, 일국양제는 하나의 국가에 두 가지 체제가 공존한다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통일방안으로 구상한 정책이다. 이처럼 일국양제는 1979년 이후 양안간 통일문제 논의에 있어 불변의 원칙으로, 이는 상호 평등한 입장에서 두 개의 제도를 운용하자는 취지가 아닌 것이다. 한편 50여년간 대만을 통치했던 국민당이 2000년 민진당의 천수이볜 총통에게 정권을 내주면서 대만 역사상 처음으로 여야 간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하지만 지난해 3월 대만 총통선거에서 마잉주 국민당 후보가 승리하면서 국민당은 8년만에 정권을 되찾았다. 기존 국민당과 마찬가지로 마 총통은 대만의 독립과 통일에 대한 논의보다는 중국과의 경제 교류에 주력해 양안관계 개선을 핵심 정책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이는 중국으로부터 대만의 독립을 주장하는 민진당과의 끊임없는 분열을 거듭하고 있다. 천수이볜 총통 당시 민진당은 탈 중국화를 내걸고 민진당이 구상하였던 중국정책과 대치하였다. 민진당의 양안관계 구상은 그 성격상 국민당과의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국민당의 중국정책기조는 국가통일강령(國家統一綱領)에서 밝히고 있듯이‘하나의 중국’과‘3불원칙(三不原則)’ 고수를 통한 민주적, 점진적 통일방안에 있다. 3불원칙이란 통일도, 독립도, 무력 사용도 반대한다는 것이다. 특히 마잉주 총통은 취임 후 줄곧 중국과 대립상황을 안정적인 평화구도로 관리하며, 경제관계를 강화하는데 주력해 왔다. 마 총통의 중국과의 경제관계 강화정책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양안관계의 소심한‘소삼통’실시
▲ 천수이볜 전 대만 총통 집권기간 정치적으로 양안관계는 심각한 위기국면이 조성되기도 했다.
중국은 1978년 12월 소집된 제 11차 삼중전회에서‘평화통일’, ‘일국양제’를 정책의 기본 틀로 삼고 있다. 대내적으로는 개혁, 대외적으로는 개방정책을 추진하면서 통일 이데올로기의 최고 원칙인‘하나의 중국’을 견지해 왔다. 이는 대만의 독립에 대해서는 무력사용도 서슴지 않겠다는 양면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일국양제를 두고 일부에서는 양안간에 현존하는 정치, 이데올로기, 사회와 경제제도상의 차이, 사회주의 국가내에 자본주의를 허용하는 이론상, 법제상 모순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일국양제의 기본구상을 살펴보면 일국이 의미하는 것은 대만은 중국에 속한 하나의 지방정부가 된다. 분명히 양안간 상호 평등한 입장에서 두 개의 제도를 운용하자는 취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중국은 평화적 통일문제를 구체화하는 방안으로 대만으로부터 쌍방 대표 파견, 통항·통상·통신 등‘3통’ 교류를 요구했다. 양안간 경제교류는 주로 홍콩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뤄졌다. 중국은 3통의 실현으로 제 3국을 경유하지 않고 직접 경제교류가 이뤄지기를 희망하였다. 또한 중국은 대만과의 교역을 국내교역으로 간주하여 대만 상품에 과세를 부과하지 않는 등 특혜를 주었다. 이러한 이면에는 중국경제에 대한 대만경제의 의존도를 높임으로써 대만을 흡수할 수 있다는 전략적 판단이 있었다. 한편 대만은 중국의 대만정책에 대항하여 중국의 무력사용 포기를 요구하였다. 1991년 3월 중국과의 교류를 증대하고, 2000년 민진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과거 국민당 정권때 수립된 국가통일강령을 고수했다. 대만은 중국의 흡수통일 전략에 대해 무력위협을 하지않겠다는 전제하에 중국과 민간교류 확대를 허용하겠다는 입장을 취했다. 결국 천수이볜 정권은 양안관계의 전면적인 삼통 실시에 따른 부작용을 우려해‘소삼통’을 시험적으로 실시하는데 그치고 만다.

‘대삼통’밀월 시대 개막
▲ 천윈린(陳雲林) 중국 해협양안관계협회 회장과 장빙쿤(江丙坤) 대만 해협교류기금회 이사장은 3차례 양안회담을 통해 양안 항공 직항편 운항, 해상 직항편 운행, 우편 교류 실시 등을 성사시키고 중국 기업의 대만 투자 허용, 은행 간 상호지점 설립 등을 실현시켰다.
2005년 4월 29일 중국 국가 주석 후진타오와 대만 국민당 주석 롄잔이 베이징에서 만나 ‘제 3차 국공합작’이 있었다. 불과 한 달 전인 3월 중국의‘반국가분열법’제정 이후 양안관계에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가진 회담으로 예상치 못했던 성과다. 과거 두 차례 국공합작이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대륙의 패권을 차지하는 것에 불과했다. 1949년 중국과 대만이 분단된 이후 처음으로 역사적인‘국공회담’을 하는 자리에서‘양안 경제·무역·문화 포럼’개최에 합의했다. 양안 포럼에서는 양안 간의 평화와 교류, 발전, win-win에 대해 공동노력을 강조했다. 이후 2007년 4월 베이징에서 제 3차 양안 경제·무역·문화 포럼을 열고 양안간의 직항 노선 개설과 대륙 주민의 대만 관광 등에 대한 논의를 가졌다. 중국은 대만에 대한 특혜조치로 인적교류 확대를 위해 양안 직항 전세기 운항을 4개 도시에서 10개 도시로 늘리기로 했다. 또 대만 관광객에 대한 비자 발급 도시도 8개에서 11개로 늘렸으며, 대만학생의 대륙 대학 진학을 적극 지원하기로 했다. 이어 2008년 5월 대만 국민당 주석 우보슝이 중국을 방문했다.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은 우 주석과의 만남에서 대만의 세계보건기구(WHO) 가입을 적극 검토할 것을 밝혔다. 이는 천수이볜 전 정권 당시 경색됐던 양안관계를 한층 더 발전시키는 데 기초적인 틀을 마련했다. 여기에 중국 경제를 디딤돌로‘협력과 이해’의 수준을 넘어‘공생과 공영’의 경제 전략을 내세운 마잉주 총통의 집권으로 중국과 대만은 밀월국면에 접어들었다. 통상·통항·통신이 전면적으로 이뤄지는 이른바‘대삼통’시대를 개막한 것이다. 

“중국 경제를 디딤돌로‘협력과 이해’의 수준을 넘어‘공생과 공영’의 경제 전략을 내세운 마잉주 총통의 집권으로 중국과 대만은 밀월국면에 접어들었다”

중국 국유 자본의 첫 대만 진출
중국과 대만은 1949년 국공내전 이후 59년만에 처음으로 2008년 12월 항공 직항과 해상 직항시대를 열었다. 양안 항공직항 시대가 열림에 따라 중국과 대만을 상호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대폭 늘어났다. 또한 해상 직항이 실현됨으로써 양국의 화물 운송비 절감 등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볼 뿐 아니라 교역량도 늘어나고 있다. 특히 제 3차 양안회담을 통해 중국기업의 대만투자가 허용됨에 따라 중국과 대만간 경제협력이 물적, 인적 교류의 형태를 넘어 상호투자 형태로 발전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4월 29일 세계 최대 이동통신 업체이자 중국의 주요 국유기업인 차이나모바일은 대만의 유력 이동통신 사업자인 파이스톤의 지분 12%를 사들이기로 했다. 양안 분단 60년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 국유 자본의 첫 대만 진출이다. 지난 5월에는 중국의 도움으로 대만이 세계보건총회(WHA)에 옵서버로 참가할 수 있게 됐다. 이제 중국과 대만은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로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양안관계가 경제문제를 넘어 정치문제로 확대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는 시각이다.

남북관계 vs 양안관계
중국과 대만은 하나의 중국 경제권을 향한 역사적 진보의 의미를 지닌‘대삼통’을 실시하였다. 대삼통 실현으로 양안의 교류협력은 더욱 견고해지게 됐고, 경제효과는 양국 공동의 이익을 가져다 줄 것으로 보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남북관계 경색이 지속되고 있다. 북측은 개성관광 중단과 협력사무소 철수에 이어 통행 제한과 체류직원 조사문제, 개성공단 근로자 임금인상과 토지사용료 조기 지급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우리정부는 대북 강경론을 주장하고 있어 남북 합의를 이루어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남한과 북한, 중국과 대만은 반세기에 걸친 분단이라는 공통된 분모를 갖고 있다. 하지만 분단상황 극복의 노력에는 서로 다른 성향을 갖고 있다. 양안간의 통일노력은 양국 정부의 정치논리 대신에 경제분야의 교류확대로 쌍방의 상호의존성을 강화시켜, 결국 정치적 통합의 가능성을 높이게 된다. 반면 남북한의 통일노력은 과도한 정치중심성과 그로 인해 제로섬 게임의 답보적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경제면에서는 양안관계가 남북관계보다 앞서 있었으나, 정치면에서는 남북관계가 두 차례의 정상회담을 통해 급속히 발전하는 데 비해 양안관계는 갈등과 교착 국면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최근 남한과 대만은 비슷한 시기에 정권교체가 이루어 졌고, 이후 정치적인 면에서도 양안관계가 후퇴 국면의 남북관계를 추월하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양안간 통일노력의 핵심은 경제적 교류의 삼통을 넘어 양국간 상호이해와 화해에 있는 것이다. 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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