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요가는 래핑요가의 우리식 표현으로, 지난 1995년 인도 뭄바이 출신의 마단 카타리아 박사에 의해 창시됐다. 이는 뭄바이를 비롯한 남인도 전역에서 행해지는 마인드컨트롤 요가의 일종으로, 현재 인도 전역에 100개가 넘는 래핑클럽이 존재하고 있다. 웃음이라는 도구를 통해 요가의 목표인 호흡과 명상을 이끌어내는 래핑요가는 김영식 교수가 웃음요가 국제지도자 자격증을 우리나라 최초로 획득해 웃음요가 강연으로 한국인물대사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 한국웃음요가문화연구소 김영식 소장
현재 남부대 태권도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대학 내 국제웃음요가문화연구소를 통해 학문적인 체계는 물론, 외부 강연으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는 김 교수. 하지만 웃음전도사로 불리는 김 교수의 반생은 불운의 연속이었다. 중학교 때 폐병을 앓아오던 아버지가 유명을 달리한 후 실질적인 가장의 역할을 도맡아야했던 했던 그는 긍정의 힘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인생역정을 이겨내 왔다. 하지만 교사의 꿈을 안고 수석으로 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고등학생이던 여동생이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후 이번엔 두 살 위의 형이 위암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죽음 자체가 감당하기 힘든 괴로움이었다. 게다가 김 교수의 삶도 매번 죽을 고비를 넘겨야하는 혈투와 같았다. 꿈에 그리던 교사가 되어 발령받은 첫 학교에서의 숙직 날, 학교에 불이나 곧바로 시골학교로 좌천돼야 했고, 그의 집엔 도둑과 강도가 번갈아 침입해 어머니 목숨을 위협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중학생이 저지른 일이라 교사 입장에서 용서했지만, 학생 부모는 몰래 놓고 간 합의금을 빌미로 변호사법 위반 혐의로 그를 고소했다. 학교에 형사들이 들이닥쳤고, 김 교수는 이리저리 끌려 다니기를 밥 먹듯 하며 결국 죽자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과음 후 구토로 털어 넣은 약까지 토해버렸다.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는 삶에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면서 김 교수는 점차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게 됐다. 그때부터 자신감도 따라 왔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시작한 무술은 도합 15단이 됐고, 미친 듯 빠져든 판소리와 민요는 수준급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웃음요가를 만났다. “죽음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으로 시작된 웃음요가를 통해 죽지 않고 영혼이 계속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사람은 그냥 죽어 없어진 게 아니라 가슴 속에서 영원히 살아있다는 것. 고통을 통해 깨달은 것을 세상에 나눠주자는 데 생각이 미치니 크게 웃을 수 있었다.” 즐거움에 대한 엑스터시와 우리의 문화, 그리고 요가를 접목시킨 김 교수는 자료를 정리하고 책을 쓰기 시작했다. 즐거운 요가를 해보자는 생각에 기왕이면 즐거운 수행법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0세부터 100세까지, 태아 때부터 죽을 때까지 웃는 것은 너무나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탄생한 것이 바로‘0100 범국민 웃음운동’, 바로 김 교수만의 웃음요가다. 살기 위해 웃기 시작했지만 웃음으로 삶의 절망에서 희망을 발견했다는 그는 자신을 행복의 메신저라 부른다. 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