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김우중 그가 돌아왔다.
한때 세계경영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그것이야말로 세계인의 존경을 받는 우리민족의 미래라고 자신 있게 외치던 그때 그 사람,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5년 8개월의 기나긴 해외도피생활을 접고 자의든 타의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가 발을 내딛던 넓디넓던 세계경영은 오늘날 한 평짜리 ‘독방경영’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영웅에서 역적으로 전락한 그의 비참한 말로(末路)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시사 하는바는 과연 무엇일까?

역사속 인간 김우중
박철언이 황태자로 노태우 정권시절 권력의 핵심에 있을 때 그는 소위 'GP(Grand Plan)'이라는 정책을 추진했었다. 그 중의 하나가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김대중과 노태우, 다시 말하여 호남 세력과 영남 세력이 합하여 정계를 개편 하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남북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남북한 최고지도자가 만나 통일의 물꼬를 트자는 것이었다. 물론 박철언이 주장하던 이 두 그랜드 플랜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필자가 김우중의 대우 그룹이 좌초 또는 공중분해 된 이 시점에서 구태어 박철언의 이름을 들고 나온 이유는 박철언이 노태우 정권에서 세상을 놀라게 한 것처럼 김우중은 박정희시대에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기 때문이다.
김우중은 1936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교육자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집안과 동생들을 보살피기 위해 신문배달과 열무·냉차 장사를 했고, 학생시절에는 교통비를 아낀 돈으로 책을 사 공부를 했던 일화는 ‘김우중 성공신화’ 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다. 그는 이른바 ‘박정희스쿨’의 경영학과 모범생이었다. ‘하면된다’ ‘중단 없는 전진’이라는 박정희 철학을 기업경영 현장에 적용 해 성공을 거둔 인물이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신세대 경영인들이 회사를 키운 뒤 몇 배에서 몇 십 배까지 비싼 값에 되파는데 익숙한 요즘의 벤처기업인들보다는 상대적으로 국가와 국민, 그리고 회사에 대한 애정이 깊다는게 박정희스쿨이 배출한 졸업생(?)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그러나 그는 박정희스쿨의 부정적인 측면도 그대로 갖고 있는 대표적인 기업인이다. 힘 있는 정치권과의 은밀한 뒷거래에 익숙하고 종잣돈을 빌려 이 사업, 저 사업에 투자하는 차입경영, 팽창주의의 화신이었다. 기업인들은 물론 금융인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금융의 귀재(鬼才)’이기도 했다. 차입 위주의 몸집 불리기식 방만 경영으로 요약되는 그의 경영 패러다임은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새롭게 전개된 글로벌 경영시대에 어울리지 않았다. 내실을 다지지 않은 성장전략의 모순이 드러났지만 그는 시대의 변화에 발 빠르게 적응하기보다는 고집스럽게 자신만의 경영스타일로 사업을 밀어붙였다. 그런 과오가 쌓여 대우는 덜미를 잡혀 결국 파멸로 이어졌지만 그는 분명 고도성장기 한국 경제를 일으킨 드라마틱한 인물이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또 그의 일에 대한 열정은 당시 많은 이들의 귀감을 살만했다. 〈타임지〉가 수 년 전 특집기사를 통해 “김우중 회장이 지난 30여 년간 일을 하지 않은 날은 딸 결혼식과 아들 장례식 등 단 이틀”이 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그는 ‘일 중독증’에 빠져 있던 인물이다. 비록 글로벌경영의 참뜻을 이해치 못하고 몰락했지만 그를 단칼에 매도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성공 없는 신화
서울역 앞에 우뚝 솟아있는 대우 빌딩은 서울역 앞 양동의 사창가 일대를 허물고 21 세기 대한민국의 교통을 집약하여 총괄하는 빌딩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정부가 지은 건물이다. 박정희는 이것을 과거 청년 김우중 아버지와의 인연을 잊지 못하고 그 은덕을 갚기 위하여 김우중에게 불하하여 주었고, 제일은행으로 하여금 그 청년을 물심양면 밀어주도록 하였다. 대우그룹은 박정희가 죽은 후에도 전두환 노태우 시대까지 승승장구하며 국내는 물론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항상 재계 순위 5위 이내, 아니 2-3위 내에서 한국 경제의 선두 자리를 점유했었다. 이는 삼성이나 현대 그리고 LG와는 다른 또 하나의 한국 경제의 신화였다. 또한 그것은 전혀 다른 신화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삼성과 현대, 그리고 LG는 모두 창업자 스스로가 만들어 키운 회사이다. 그러나 대우는 창업자인 김우중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세운 회사라기보다, 남들이 세워 놓았던 회사를 인수하여 '뭉쳐서' 만든 대기업 집단이다. 돈을 번 사람들 중에는 자기가 기업을 세워서 성공한 사람과 남들이 만들어 놓은 기업을 인수하여 성공하는 경우가 있다. 이 둘 중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자기가 회사를 세운 사람은 '세움의 어려움'을 알고, 남의 회사를 인수한 사람은 세움의 어려움보다 '재건의 기쁨'을 안다. 따라서 회사를 세우고 돈을 번 사람은 그 세움의 어려움이 너무나 쓰디썼기 때문에 돈을 쓸려고 하여도 쉬이 쓰기가 어렵지만, 재건의 기쁨으로 번 돈은 너무나 달기에 서슴없이 투자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필자는 김우중에게 그러한 면이 있었다고 본다. 김우중은 한국에서 재건 기업 집단으로 대우 그룹을 형성한 후에, 그 맛에 끌려 그런 걸음을 멈추지 않고 '세계는 넓고 할 일도 많다'며 세계로 나갔다. 그리하여 세계 도처에서 쓰러지고 있는 쓸만한 기업들을 골라 인수하여, 국내에서 하던 식으로 재건의 기쁨을 맛보려 했다. 그 결과, 겉으로 보면 세계의 유수한 기업들이 대우의 손에 잡힌 것으로 보였지만, 속으로는 빚이 눈덩이처럼 쌓여 종국에는 몰락의 길을 자초하고 만 것이었다.
대우는 성공 없는 신화로 끝나고 말았다. 대우를 좋아하고 따르던 많은 이들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주었기에 허탈하기까지 했다. 다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희망하기를 당시 대우가 GM으로 넘어가기 전 까지도 항해(航海)의 재개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대우는 한국 경제의 산물 이기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러면 김우중의 대우그룹은 언제부터 부침(浮沈)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와중에서 김우중은 어떤 말들을 토로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자.

정치적 관점에서 본 대우몰락
땀 흘려 모았던 외환(外換)을 다 까먹고 김영삼 정부가 IMF에 구제 요청을 한 것은 1997년 11월이다. IMF 사태가 터지기 직전 한국은행 금고는 거의 바닥이었다. 외화가 거의 없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정부가 나라경제를 매우 방만하게 운영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에 당시 ‘레임덕’ 상황에 몰려있던 김영삼 대통령은 경제 각료의 말을 들어 IMF에 도움을 청했고 IMF는 정부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IMF가 제시하는 국가경제 ‘restructuring'(구조조정)에 몇 가지 동의를 요구했다. 첫째, 금융계 쇄신. 둘째, 재벌 쇄신. 셋째, 관치관행 쇄신. 넷째, 기업의 채무비율을 적정선으로 낮출 것 등 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김대중 후보가 제15대 대통령 당선자가 되었고, 1998년 3월 정식으로 출범한 김대중 정권은 민주 투사로 모든 것을 일소(一掃)하고 한 순간에 IMF 사태 해결사로 등장했다. 그때 대우 호 선주 겸 선장인 김우중은 김대중 정부가 금과옥조로 삼고 있는 구조 조정 해고 등 일련의 IMF 처방전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쩌면 이와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전혀 다른 GP(Global Picture)를 들고 새 정부에 얼굴을 내밀었다. 박철언의 GP와는 전혀 다른 그림이었다. "대한민국 기업이 대한민국이라는 좁은 땅에서만 터전을 잡는 시기는 이미 지났고, 대한민국 기업인이 대한민국 내에서만 경영을 하는 시대도 이미 지났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기업을 세우고 대한민국에서 성공한 기업인이지만, 이제는 세계를 무대로, 세계에서 터전을 잡고, 세계에서 이윤(利潤)을 창출하는 세계 경영을 할 것이다." 이른바 대우의 세계경영선언 이었다. 하지만 그의 앞에는 몇 가지 장벽이 있었다. 한국에서 정치격변이란 기업의 사활을 좌우하는 중대한 사안이다. 김영삼 정권이 들어설 때도 그랬다. 대선당시 김영삼은 대권을 놓고 일대 격전을 벌이던 현대그룹의 정주영을 향하여 가는 곳마다 그를 향하여 “돈으로 정권을 얻으려는 것은 총칼로 정권을 얻는 쿠데타보다 더 나쁜 것”이라고 집중포화를 던졌고, 김영삼이 정권을 잡은 후에는 겁도 없이 돈을 앞세워 자신의 대권가도에 위협을 줬던 정주영에게 모진 매(?)를 가했다. 금융을 제한하고 특혜를 몰수하고 자금을 회수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정주영으로서는 김영삼 정권 5년이 지나간 반세기보다 더 긴 세월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김영삼 정권에 이어 들어선 김대중 정권은 어떤 면에서는 한국 정치에 혁명적인 사건이다. 김대중은 그 동안 역대 정권으로부터 용공주의자 혁신주의자 진보주의자로 지목 지탄받아왔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대통령이 된 것이다. 당연히 옛 정권들의 물주였던 재계 인사들은 그의 의중과 사태의 추이를 세심히 관망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에 김우중은 김대중 정부가 추진중인 IMF 처방전을 가벼이 생각하고 이런 말을 했다. "축소만이 능사가 아니다. 고난의 시기를 맞은 우리는 축소보다는 오히려 수출을 500억 달러로 확대해야 한다. 그 길이 살길이다." 그러나 우리의 정치현실에서 경제인이 국가 경제정책에 제동을 걸고 나선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 이는 정부의 재벌기업 구조조정 정책에 대한 정면 도전장과도 같은 폭탄선언이었다. 한 마디로 IMF 처방전과 새 정부의 정책이 틀려먹었다는 거나 다름이 없는 언사였다.
재벌 개혁을 외친 대통령과 재벌 총수, 얼핏 물과 기름처럼 결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의 관계이기도 하다. 정경유착이란 말이 왜 나왔는가, 경제라는 ‘가교’가 둘을 잇기 때문이다. 김우중 전 회장과 김대중 전 대통령도 그랬다. 특히 DJ정부 출범 직후 재계의 대표격인 전경련 회장을 맡았던 김우중은 DJ와 미묘한 ‘거리’를 유지했다. 말썽 많던 빅딜 등으로 DJ와 매끄럽지 못 한 적도 있었고 5백억 달러 무역 흑자론을 비롯한 기발한 아이디어와 왕성한 활동으로 점수를 따기도 했다. 대우의 몰락 전까지 비교적 잘 지낸 두 사람의 인연은 언제 시작됐을까. 정가에서는 김 전 회장이 다른 재벌 총수보다 DJ에게 호의적이었다고 보고 있다. 김 전 회장이 DJ를 지원한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94년 10월께란 분석이다. 당시 아태재단의 금고가 털리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때 도난당한 수천만원의 양도성예금증서(CD)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그 발행인이 김 전 회장이라는 루머가 퍼진 것이었다. 대우측에서는 김 전 회장이 DJ에게 돈을 댄다는 혐의를 부인했지만 루머는 꼬리를 이었고. 결국 아태재단에 후원금을 준건 사실이라고 밝혀졌다. 이런 인연 덕인지 당장 경제 살리기가 급했던 DJ로서는 경제 경험을 두루 갖춘 김우중을 경제 부총리 물망에 올려놓기도 했다. 98년 1월 대통령 당선자와 5대 그룹 회장이 만날 때도 유럽 출장 중이었던 김 전 회장은 ‘열외’ 인정을 받았다(열흘쯤 후 김우중은 삼청동 대통령직 인수위 사무에서 DJ를 독대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밀월’은 그리 오래가질 못했다. 재계에선 ‘관료 장막’이 두 사람사이를 멀어지게 만든 큰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관료의 미움을 산 게 화근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김 전 회장은 전경련 회장 시절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 오전을 이용, 청와대로 들어가 DJ에게 경제 보고서를 올렸다. DJ가 기업인 입장에서 나온 다양한 아이디어에 만족했었다는 것이 후문이고 보면 국무회의에서 김우중의 아이디어가 장관들에게 그대로 전달되기도 했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었을 듯싶다. 자연히 관료들은 이런 사실을 알게 됐다. 특정인이 대통령과 지나치게 가까워지는 게 관료 집단에선 달갑지 않은 일이었고 그런 까닭에 김 전 회장을 우호적으로 대할리 없었다. 결국 대우와 김 전 회장에 대한 나쁜 보고가 청와대로 올라갔다. 구조조정에 비협조적 이라든지 반개혁적이라든지 등의 내용이었다. 김우중이 어느 사석에서 “(관료들에게) 밥이라도 잘 사줄 걸”이라며 후회했던 것도 이런 일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김 전 회장과 관료 사이에 설전을 벌였던 무역흑자 논란도 관료가 등을 돌리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였다. 김 전 회장이 5백억 달러 흑자론을 주장한 반면 관료들은 20억 달러 선을 얘기했다. 그러나 98년 말 깜짝 놀랄 결과가 나왔다. 97년 84억 달러 적자에서 98년 3백99억 달러 흑자로 돌변한 것이다. 80년대 말 3저 호황 뒤 9년 만의 흑자였고 단군 이래 가장 많은 규모였다. 무역 흑자를 내서 외채를 갚으면 된다던 김 전 회장을 허풍쟁이로 몰던 관료들은 체면을 구긴 셈이었다. 결국 이런 일들로 김 전 회장과 관료 사이는 벌어졌고 공교롭게도 대우가 휘청댈 때 대우의 목을 죄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장·단기 차입금의 만기 연장이 쉽게 이뤄지지 않았고 여기에다 DJ도 차츰 구조조정에 미온적이던 김 전 회장을 곱게 보진 않았다. 따라서 김 전 회장은 재벌 해체 수준의 개혁을 요구하는 정부측과 곳곳에서 충돌하며 대우는 침몰하기 시작 했다. 그 당시 만약 그가 재계의 수장자리인 전경련 회장직을 맡고 있지 않았더라면 대우는 어떻게 됐을까...

대우 식 경영의 특징 그리고 득과 실
대우가 세계경영을 '21세기 생존전략'으로 공식 채택한 1993년은 냉전 종식과 WTO 출범이라는 외적 변화와 달리 내용적으로는 유럽공동체(EU), 나프(NAFTA), 아세안(ASEAN) 블록경제의 심화라는 신보호주의의 등장으로 수출을 통한 지속적 성장이 위협받던 시기였다. 고비용 저효율 구조라는 내적 한계를 안은 채 대외 개방으로 더욱 경쟁이 치열해진 국내 시장만으로는 향후 한국 기업들의 발전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 대안으로 지역별 경제블록 안에 생산기지를 구축하는 '트로이의 목마' 같은 전략추진이 핵심과제로 부상하던 시기였다. 이 같은 수출기지의 현지화 전략으로 대우는 무역 장벽 우회가 용이한 부품공급기지 역할과 함께 연구개발 및 관리업무 등에 치중하는 글로벌 전략의 사령탑 기능으로의 전환을 요구받고 있었다. 후진국에서 개도국까지 올 때와,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갈 때의 성장 모델과 기업 역할은 다르다. 개도국은 자본의 집적을 통한 투자가 중요하나,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갈땐 경쟁력이 우선이다. 대우의 세계경영에는 두 가지 특징적인 요소가 있다. 하나는 우리가 만들어 팔 물건은 하이테크가 아니라 ‘미들테크’(중급기술)라고 상정한 점이다. 다시 말해서 대우전자의 ‘탱크주의’로 잘 표현됐듯 첨단의 복잡한 제품 보다는 우리가 잘할 수 있는 평범한 중급 기술의 중저가 제품으로 승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물건을 내다팔 시장은 선진국이 아닌 이제 막 궤도에 오르는 중국, 인도 등으로 틈새시장을 노려 해외 거점을 구축해야 한다는 전략이다. 이런 전략적 측면을 볼 때 설득력이 있는 대우의‘장사꾼’다운 면모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전략을 추진 할 수 있는 기반이 얼마나 있었느냐다. 자금 조달 문제가 가장 컸다. 우리가 알기로 대우자동차는 5년 만에 해외 공장을 15개나 만들었는데,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때 폴란드 법인인 FSO만 가동률 60%대였고, 나머지는 20% 안팎이었다. 거기서 나오는 손실을 경상이익으로는 도저히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재무구조가 급격히 악화돼 영업 전략을 뒷받침할 파이낸스(자금조달) 기능이 취약해 질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문제는 기업의 의사결정과 지배구조 문제를 꼽을 수 있다. 흔히 김우중 회장을 ‘워크홀릭’(일중독자)이라고 하는데, 이는 어떤 면에서 대우그룹의 모든 정보와 의사결정을 김우중 회장 한 사람이 독점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룹 전체의 경영 상황을 구조조정본부장도 모를 정도로 그의 의사결정권 독점내지 제왕 식 독단경영의 지배구조 문제는 심각했다. 이러한 경영시스템 하에선 위기 징후가 발생했을 때 치명적 일수밖에 없다. 그의 세계경영 전략은 제품 전략이나 마케팅 전략에선 탁월했으나 재무구조의 허술함과 취약한 지배구조가 좋은 전략을 제대로 받쳐주지 못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대우의 경영미스였고 결국 세계경영은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가능성이 농후했었다고 본다.
김 회장을 모델로 삼아 원인과 결과를 뒤집어보자. 해외로 투자해야 독점적 우위가 생긴다는 표준이론의 원인과 결과를 뒤집어보자는 것이다. 대우자동차는 해외에 진출하면서 실제로 현대자동차보다 먼저 해외에 10개 정도의 거점을 찾아 각각 생산기지를 구축했다. 폴란드, 인도, 미국, 루마니아 등에 생산기지를 설립할 계획을 세우고 그 중 5~6군데는 행동에 옮겼다. 이렇게 해외 투자를 하니 그 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세계적인 부품회사들이 갑자기 대우에 ‘러브콜’을 보내기 시작했다. 또 해외 생산기지가 만들어지니 시장도 그만큼 생겨나고 언론과 소비자에게 알려지면서 브랜드 가치도 올라갔다. 해외 투자를 하지 않으면 형성되지 않았을 능력이 생겨난 것이다. 이 경우, 대우 모델은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국제화해서 실패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자금조달의 투명성, 무모한 차입과 투자, 독단적 지배구조 등 이러한 문제점들이 걸림돌이 되면서 실로 좋은 방향(국제화)으로 가려던 것까지 망가져 몰락을 자초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우중은 1999년 11월 해외로 떠나며 임직원들에게 남긴 편지에서 「경영자원의 동원과 배분에 대한 주의 소홀, 용인되지 않은 방식으로 접근하려 했던 위기관리」를 실패의 원인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검찰의 수사 발표 내용을 보면 대우는 97년 이후 회계조작이나 해외 차입금 도입 과정에서 온갖 불법과 편법을 동원했다. 이는 시기적으로 시사 하는바가 크다. 이한구 한나라당 의원(전 대우경제연구소장) 의 지적대로 차입경영으로 몸집을 키운 김우중 식 경영행태는 IMF 관리체제와 같은 위기 국면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IMF 사태를 전 후로 우리의 국가신용등급은 물론 기업들의 신용도 역시 땅에 떨어졌고. 더욱이 대우의 과도한 차입경영 문제점은 국제 금융계에서 널리 인식돼 있을 때였다. 세계경영이란 이름 아래 방만한 경영을 하던 대우로서는 갚아야 할 빚은 많은데 새롭게 돈을 빌릴 곳을 찾지 못했다. 우리 정부도 대우 지원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김우중은 이래저래 코너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부도위기에 몰린 다른 기업인들의 심정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자신이 일구어놓은 거대기업 대우를 파멸의 길로 들어서게 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우중은 여기서 자충수를 두었다. 금융기법, 금융거래에 해박한 그는 이 방면의 귀재로 통했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독(毒)’이 되고 말았다. 김 회장은 부실을 조기 공개하고 축소경영, 구조조정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는 정공법을 택하지 않고 정치권과의 불법적인 로비를 시도하면서 사기 수법과 다름없는 분식회계 조작 등을 통해 부실상태를 감추며 위기를 넘기려다 결국 화를 자초하고 말았다.

김우중의 소리
대우의 멸망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김우중 전 회장이 도피시절 중 베트남의 어느 농촌 지역에 자리 잡은 별장식 저택에서 한국에서 날아간 도올 교수가 그와의 최초인터뷰에서 물은 말이다.
“김대중 정권의 신흥관료체제의 가치관과 나와의 근원적인 갈등의 소산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나는 그 갈등의 고리가 그렇게 깊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질 못 했습니다. 그리고 과거의 파워의 관성에 대한 너무도 막연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들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너무도 성급했습니다. 대우는 죽여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정리되어야 할 우리 한민족 역사의 진실이었다는 사실을 책임 있게 바라볼 수 있는 전체적 안목이 부족했습니다. 그들은 넘어서는 아니 될 선을 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김우중 회장은 뒤늦게 경제 각료들과의 갈등을 못내 후회했다는 후문이다. “왜 그땐 그랬는지 몰라, 사이좋게 같이 밥이나 한번 먹고 보낼 것을…”이라며 “결국 내가 전경련 회장을 맡은 게 후회스럽다”며 때늦은 후회를 했다는 것이 김회장 측근의 말이다.
김우중에 있어 또 다른 치명적인 잘못이 있다면 급작스런 확장세로 인하여 비교적 높은 금리의 과도한 돈을 빌렸던 게 문제다. 또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부의 말에 고분고분했어야 하는데 시대적 배경에 어울리지 않은 무모한 경영으로 정부정책에 재빨리 호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진국 국가가 발전하려면 그런 모험을 감수해 내야 발전할 수 있음을 감안한다면 김우중의 무모한 확장세만 탓할 문제는 아니다. 사실 그런 모험은 박정희의 3공화국 때 재벌들이 단골로 쓰던 방법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박정희 때는 정부가 외화를 철저히 관리해 한국은행 금고에 필요 이하의 달러가 떨어지지 않았기에 율산그룹이나 국제그룹 같은 재벌이 넘어가도 그땐 정부가 감당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는 한국은행 금고를 텅텅 비게 만들어 IMF 사태를 자초했는데도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자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DJ 정부로 넘어 오면서 우리경제는 외화 고갈로 인한 고통을 직접적으로 받을 수 밖 에 없었다.
김우중, 그는 이번 귀국길에 비행기 내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그 때 그 고비만 잘 넘겼으면 모든 게 다 좋았을 터인데”....
과연 이 말이 전하는 진실은 무엇일까. 또 그 말 속에는 무슨 뜻이 숨겨져 있었을까.
 
신음하는 대우가족 - 실직 날벼락…그 고생 말로 못해”
분식회계41조. 200억 달라 외환유출. 사기대출10조...
최근 검찰의 수사 발표를 계기로 김우중 전 회장 주도로 이뤄진 대우그룹의 각종 편법·불법 자금조달 사례가 밝혀지면서 김 씨를 단죄해야 한다는 여론이 거세지고 있다. 그가 해외 도피 중 일 때 국내에선 그를 향해 언론이 십자포화를 퍼부었었고 시민단체들이 들고 일어섰었으며 대우계열사 노조에선 현상금까지 내걸며 공개수배에 나섰었다. 그가 비밀 해외금융조직인 BFC(British Finance Center)를 통해 천문학적인 규모의 불법자금을 관리해왔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그동안 그에게 일말의 동정심을 갖고 있던 사람들조차 ‘알고 보니 사기꾼과 다름없다’는 실망감과 함께 단죄론 의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대우가 남긴 상처는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아픈 상흔으로 남아 있다. 박창근 대우 피해자대책위원회 위원장은 “대우의 분식회계 등으로 피해를 입은 소액주주만 30만명에 달하고 간접적인 피해는 10배도 넘을 것”이라며 “여전히 이들은 피해에 따른 경제적 손실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묵묵히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는데….” 대우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는 대우자동차 노동자 가족들이다. 주요 대우 계열사들이 구조조정에 들어 간지 1년여 만인 2001년 2월16일, 단일 규모로는 사상 최대인 1,750명에 대한 무더기 정리해고가 대우차에서 단행됐다. 김성열 대우차 교선실장은 “GM에 인수되면서 950여명이 복직했으나 800여명은 아직 미복직 상태”라며 “이들 중 복직을 희망하는 520여명 대부분이 자영업이나 야간경비, 막노동 등으로 어렵게 생계를 꾸려간다”고 말했다. 또 대우차 복직투쟁 과정에서 100여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해고노동자 이태수(35)씨는 “10여명은 부상 정도가 심해 평생장애로 살아야할 처지”라고 전했다. 이씨는 2년여 복직투쟁 끝에 회사로 돌아갔지만, 당시 시위 과정에서 다친허리 부상으로 아직도 후유증을 앓고 있다. 대우차 정리해고원상회복투쟁위원회의 박덕재 의장은 “대우사태의 주범인 김우중 씨가 귀국하기도 전에 사면설과 병보석 이야기가 나왔을 때 심정이 어땠는지 아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당시 대우차에 딸린 900여개 부품업체들과 10여만 노동자들도 실직과 임금삭감 등의 직·간접적인 피해를 봤다. 또한 6월14일 새벽 김우중이 해외도피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는 인천공항 입국장 앞에는 누구보다 착잡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우그룹 계열사 주식을 샀다가 하루아침에 휴지조각으로 날려버린 소액주주들이다. 박창근 대우 피해자대책위원회위원장도 대우전자 주식을 갖고 있다가 12억원이 넘는 피해를 입은 사람이다. “피해자들은 보상도 보상이지만, 김우중이 한쪽에서 영웅대접 받는 현실에 더 분노합니다.” 박 위원장은 정치권에서 일고 있는 사면론과 관련해 “김종률 의원이 베트남까지 가서 김우중을 만나고 온 것은 그의 귀국이 여권과의 사전교감으로 이뤄졌다는 걸 보여준다”며 “이런 이상한 방법으로 상황을 돌파하려고 하면 결코 좌시하지만은 않겠다”고 말했다. 그는 “김우중이 입을 열면 피해를 보는 건 호남의 옛 여권 인사들 일 텐데, 여당이 민주당에 호남을 빼앗길까봐 몇 사람 표적수사 하는 것으로 끝내려 하지 않겠느냐”고 의구심을 보이기도 했다. 소액주주들은 휴짓조각이 된 주식을 들고 아직도 울분을 토한다. 함영우(54)씨는 외환위기 때 명예퇴직으로 받은 1억5천만원을 대우에 투자했다가 모두 날렸다. 분식회계라는 말도 그 때 처음 들었다. 김 전 회장의 귀국을 앞두고 지난 10일 서울에서 열린 대우 피해자들의 긴급모임에 참석한 함씨는 그동안의 사연을 설명하다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함씨는 “김우중씨가 국외에서 호화롭게 도피생활을 할 동안 소액주주들은 얼마나 고통의 나날을 보냈는지 아느냐” 고 말했다. 이모(48)씨도 외환위기 직전 제무제표와 실적 보고서만 믿고 대우 주식을 천만원어치 넘게 샀다. 이씨는 “갑자기 회사가 어려워져서 부도가 난 것이라면 투자자 탓이라고 자책하겠지만, 대규모 분식회계로 사기친 것을 알고서는 한동안 잠을 못이뤘다”고 말했다. 이같은 처지의 소액주주는 30여만명, 피해액은 3조원에 이른다. 이 중 소송을 진행하는 주주는 500여명에 불과하다. 정경선 변호사는 “시효가 지나 새로 민사소송을 하기는 힘들다”며 “소액주주들 중 상당수는 소송을 해도 실익이 없어 포기했고, 집단소송법 적용 이전의 사건이라 어려움이 많다”말했다. 소송을 통해 배상을 받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재평가와 공과 논란으로 대우사태의 본질을 호도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그냥 지켜볼 수 만 은 없다는 취지다. 김 전회장의 귀국을 전후로 뿔뿔이 흩어졌던 이들 중 일부는 최근 다시 모여 대우피해자 대책위를 꾸렸다. 대책위의 박 위원장은 “대우의 패망은 결코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한 무모한 기업인이 실정법을 조직적으로 위반하며 저지른 대형 금융 사기이자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범법행위”라고 말했다. 현재 대우와 관련해 민사상 제기된 손해배상 소송은 40여건에 이른다. 서울중앙지법에 2,498억원 규모의 소송 13건, 서울고법에 189억원의 소송 11건이 계류돼 있다. 모두 합쳐 배상 청구액만 6천억원이 넘는다. 당시 금융권이 동반부실화하면서 투입된 공적자금도 30조원에 이른다. 지금 김 전 회장은 강도 높은 검찰조사를 받고 있다. 그러나 건강악화로 인해 병원에 입원하면서 그에 대한 조사는 당분간 난항을 겪을것으로 판단된다.

성공과 파멸의 교훈
“…나는 일벌이기를 좋아한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중략)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을 하려고 하는 그런 사람을 우리는 개척자라고 부른다…”
“...한없는 미안함을 가슴에 담고 오늘 저는 대우가족 여러분께 마지막 작별 인사를드리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소명처럼 추구했던 창조, 도전, 희생의 여정이 이 순간 못내 가슴에 맺혀 옵니다.
우리의 명예는 날개가 꺾이고 말았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했던 꿈과 이상 또한 이제 가눌 수 없는 고독이 되어 제 여생의 반려로 남게 되었습니다...
전자는 지난 89년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펴낸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 나오는 대목이다. 후자는 그로부터 10년 후인 1999년 대우를 떠나며 마지막으로 언급한 회장 고별사이다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 하게하는 대조적인 양면이 아닐 수 없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당시 노사분규 등으로 쓰러져 가던 대우조선을 다시 일으키려고 1년7개월을 옥포에서 먹고 자며 절치부심하던 시절 써낸 공전의 베스트셀러다. 일에 대한 특유의 열정과 함께 그의 진취적이고 개척자적 기상이 물씬 배어 있는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됐다. 당시 그는 성공을 꿈꾸는 이 땅의 모든 젊은이들에겐 녹슬지 않은 우상이었고 수많은 샐러리맨들에겐 영웅의 표상이기도 했다. 단돈 5백만 원으로 기업을 일으켜 30여 년 만에 재계 2위의 거대기업 으로 일궈온 그는 명실상부한 입지전적 성장신화의 모델이었으며 그가 부르짖은 ‘세계 경영’의 이념과 경영전략은 재계는 물론 학계에서도 한때 모범적인 경영학 교과서로 추앙받기도 했다.
김우중은 우리에게 너무나 선명한 두 얼굴의 이미지로 각인돼 있다. 하나는 열성적인 기업가로서 한때 한국경제호(號)의 선장 역할을 했던 이미지다. 대우그룹은 삼성. 현대. LG. SK그룹 등에 비해 후발 주자로 재계에 등장한 이래 경이적인 속도로 성장을 지속해 그룹 해체 직전인 1999년 4월 발표된 공정위 대규모 기업집단 순위에서 삼성을 제치고 2위를 차지했다. '500억 달러 무역흑자론' '세계경영론'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힘을 주었던가. 동시에 김 전 회장은 부실기업의 원흉이라는 또 하나의 얼굴을 하고 있다. 끊임없는 확장 추구로 말미암아 대우그룹의 부채 규모는 99년 당시 68조원으로 97년 위기를 맞은 기아그룹 부채의 7배에 이르렀다. 외형 성장과 차입경영으로 대표되는 한국 기업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대우그룹의 몰락이 작게는 대우를 믿고 따랐던 가족들부터 크게는 국민경제나 국가경제에 미친 파장은 또 얼마나 컸던가. 김 전 회장의 귀국과 함께 그의 사법 처리 수위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다. 국정 조사, 제2의 대선자금 수사로 이어져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사법 처리를 거쳐 사면하거나 건강상의 이유로 병보석을 하게 되리라는 예측을 하기도 한다. 왜 하필 이 시점에서 대우맨들이 김 회장의 재평가 얘기를 꺼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떤 면에서 참여정부의 경제정책, 재벌정책이 그런 배경을 만들어주고 있다. 참여정부가 ‘경제 살리기’라는 단기 목표에 집중하면서 재벌 문제에 손을 놓았다. 재벌의 투자를 구걸하기 위해 경제인들을 사면해주고, ‘삼성공화국’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삼성의 의도대로 경제질서가 만들어지는 상황이다. 이것이 김우중 회장의 귀국을 통해 사회적으로 재평가·신임을 받자는 움직임으로 귀결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김 전 회장은 실정법 위반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거액의 분식회계와 그에 따른 불법 대출 및 해외자금 도피, 또 공금 유용이나 뇌물 제공의 죄목도 추가될 가능성도 있고 각종 민사소송에도 연루돼 있다. 공과를 따지기 전에 대우사태로 인한 충격이 너무 컸던 만큼 김 전 회장을 처벌하지 않게 되면 두고두고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6년 가까이 지나 불을 끄는 마당에 더 이상 불씨를 남겨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불법 행위를 저지른 자로서 그가 최종책임을 지고 세상에 진실을 알리고 모든 문제를 깔끔하게 털고 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의 죄질은 낱낱이 밝혀져야 하고 또 그 죄에 대한 적법한 죄값을 받아야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에게는 분명 과거의 ‘공(功)’과 지금의 ‘과( 過)’가 상존하기에 이에 대한 합리적인 구분 없이 오늘의 잣대에서 경제를 이 꼴로 만든 모든 책임을 그 한사람에게 넘기는 식의 접근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 검찰의 수사나 여론의 방향이 오로지 ‘죄인’ 김우중 한 개인의 문제에만 집중되면 우리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대우 사태의 진정한 해결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그의 과거와 오늘에 걸친 공(功)과(過)를 정확히 구분하는 지혜로움이다. 김우중을 죄인으로 이르게 한 실패담과 한때 영웅으로까지 비쳐지게 한 그의 성공담 역시 연구할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김우중은 철저히 단죄하되 그 분위기에 휩쓸려 과거의 성공신화마저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김 회장은 극과 극의 인물이다. 우리 경제에 긍정적 가치관을 제시해준 동시에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일도 했다. 평균치 하나로 평가할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이번 기회에 공과를 분명히 균형 있게 따져 거기서의 득과 실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또한 대우의 상징인 ‘세계경영’에 대한 재평가 논란도 있다. 외환위기를 불러일으킨 ‘재벌 체제의 모순을 응축한 후진적 경영모델’이란 비판과, 선진국에 뒤처진 한국적 상황에서 ‘해외 경쟁력을 가지려 시도한 의미 있는 모델’이란 옹호가 맞서고 있다. 한때 제계의 수장 이었던 데다 고속성장 시기의 한국 경제를 상징하는 인물이란 점 때문에 김 전 회장에 대한 논란은 오래갈듯하다. 대우 몰락이라는 객관적 사실은 전적으로 김우중의 책임이지만 정부 관료들의 잘못된 현실인식과 그 당시 불리하게 돌아갔던 시장 환경도 대우의 발목을 잡았다는 생각도 든다. 이 같은 생각이 옳을 수도, 틀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일에 대해 정확하게 가치판단을 내려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역사의 진실이라는 것도 사실 흐릿한 이미지의 잔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처럼 김우중의 몰락 역시 오랜 시간이 지나도 제 색깔을 드러내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제 그는 화려했던 옛 기억들을 뒤로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지도 모른다. 지난 15일 그는 건강악화로 서울구치소를 나와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죄의 유무를 떠나 아픈 사람을 놓고 이러쿵 저러쿵 한다는것은 썩 인간적이지 못 한감도 든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을 대하는 국민들의 시선이 뭔가 꺼림칙한 감을 떨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무엇이 두려울까. 법의 심판보다 더 두려워해야 할 것은 국민의 심판이다. 때문에 그는 진실을 위한 진실을 말해야한다. 그리하면 그의 손을 잡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고 그것만이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명심해야한다. 그는 지금 병실 안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또 무엇을 마음속에 담고 있을까? 정말 궁금하다. 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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