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과 시간과 순간의 가능

우리가 서로에게 젖어 가다가 서로에게 다시 돌아온다. 당신 속에 들어 있던 당신과 나는 또 다른 당신에게 들어가기 위해 이 거리에 먼저 와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만났던가. 떡잎이 떨어지자마자 소멸되어 버린 전돌 그 자그만 틈새의 흙, 그 내음이 이 거리와 저 거리에서 잇닿아 있음을 아는가. 回歸하는 사람들, 거리와 거리의 소통이 선을 긋고 블록을 깔아놓고, 탑을 세우고, 문을 달아 놓더니 그 문을 열고 닫으며 사람과 사람, 우리가 서로 젖는다. 저녁무렵 내가 이 길가에서 당신을 만났다. 갈대같은 가로등이 지금껏 비추던 거리를 비춘다. 어긋남이 없이 빈틈을 부여하지 않은, 소통의 지속성이 아니라 부재의 지속성이 당신에게 사랑의 벗어날 수 없음을 보장한다.

연가聯街

당신을 원하지 않기로 한 바로 그 순간 나는 떠돌이가 되었다. 당신을 놓았는데 내가 무엇을 원할까. 가지기 싫은 빈 손. 나는 중얼거리며 거리를 걷는다. 사람이 흐르는 길에는 물과 나무의 울음이 만발하였고 우리의 오래된 슬픔이 공중에 매달려 이 봄날 또 다른 너와 나로 피어난다. 몸 안의 길을 따라 몸 밖, 세상을 걸어가는 당신과 나의 한없이 쓸쓸하고 더딘 보행. 더욱 크고 보다 느린 거리에서 한 여자가 스쳐 지나간다. 너와 나 뿐인 줄 알았던 거리에 그녀는 불현듯 아주 낯익은, 얼굴로 뒤돌아본다. 아직 철지난 외투를 걸치고 있던 너와 나의 손이 그 때 갑작스레 주머니 속에서 그녀의 메모를 발견한 것은 왜일까. 메모 속의 그녀는 나의 누이였다. 작은 돌이었고,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이었고, 1960년에 태어나 1974년에 죽었던 나의 너였다. 뒤돌아보는 사이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너와 나와 그녀가 전부였던 몸의 거리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거닐고 있었다.

현은 그대에게서 운다
나는 이대로
숨죽인 절규로 선 채
낭만을 그리는
어느 시인에게
그대가 빚어내는
일몰같은 환희로 슬픔이 아픔이지 않게
잊으라하네
바람소리에 묻힌 그리움
이 남긴 것
나는 그대의 악기위에서
무반주의 바람소리로
아주 먼 그리운 이의 모습과
기쁜 슬픔을 피워내고 싶은
_ 이창숙「쇼스타코비치에게」

연가戀歌

나는 너를 잊었다. 再見… 봄의 태양이 너무 빛난다. 그날, 늦은 추위가 다시 오고 일찍 핀 꽃들이 땅바닥에 떨어져 태양이 베풀어 준 그림자 속에 머물던 날. 세상에 향기만 남아있고, 형체는 없어진 날. 향기를 따라 네가 사라진 길을 걸었지만, 네거리에서 나는 울었다. 당신과 나 혹은 당신의 그림자와 나의 그림자 혹은 당신의 옛모습과 나의 옛모습 혹은 다른 곳에서 웃고 있던 당신과 여기서 당신을 잃어버린 자리에서 울고 있던 나. 당신의 옷과 옷 속의 살에 매달리는 나. 지나가면서 쌓여가면서 등에 와서 달라붙으면서 한 겹 또 한 겹 살갗을 덧대어나가면서 잠시도 쉬지 않으면서 누구도 편안하게 해주지 않으면서…. 사람들은, 너의 또 다른 당신들은 메모와 사진의 기억을 뒤로 한 채 천천히 산책을 즐기고 있다. 몇 번이나 같은 길을 돌지만 끝은 다른 길에서 몇 번이나 당신들은 얼굴로 만나고 몸으로 헤어진다. 다다를 수 없는 거리감. 물이 가득 찬 이 공간에서 유영하듯, 점점 자라는 버스의 길,에서 거리를 타고 내리며 먹고 먹히며, 허우적거리다. 안녕, 그대들의 사랑.

광화문光化門

1974년 그녀가 죽었다. 그를 노렸던 빛나던 침울하고도 소중한 글씨가 그녀의 몸을 관통했다. 거리는 슬픔에 잠겼고 꽃을 달지 못한 목련나무가 앙상한 몸으로 심어졌다. 나는 노래했다 / 그녀를 노래했다 일체가 하늘색이거나 땅색, 공기색 물색 나의 노래를 / 나의노래는 땅을 갈고 씨를 뿌리며 솟아나는 파란 힘을 비 젖은 흙의 부드러움으로 품은 노랗고 빨간 진자줏빛의 해를 달빛 여름 기거가 날거나 뛰는 온갖 숨찬 소리들의 개울을 흘러내리는 노래를 / 나의 노래는 / 그녀 손끝의 여울에서 퍼져 큰바다와 큰 땅을 가르고 마지막 휴식을 취하는 한숨의 미풍으로 눈 내리는 방 안 부엌 아궁이 싸리나무 불씨가 되고 세상 덮는 나지막한 지붕의 꿈의 발자국을 따라 하나하나 이어져 다른 하나를 이어주는 북실이 되고 거듭 이어져 피 돌고 숨쉬는 뼈의 옷을 짓고 우주 교접의 합창으로 은밀한 말이 되어 기억의 광년을 메아리친다 / 그러나 일체의 꿈은 없고 나는 그녀를 쫓아 숨이 턱에 치받는다 그녀는 나에게서 달아나며 깊은 숲 벌거벗은 우리는 둘이었고 하나였다 그녀는 거짓으로 달아나며 낙원의 열매를 웃음으로 던지고 열매는 나의 머리에 이마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져 붉은 즙으로 나의 눈을 광태로 가리고 솟아난 절벽 하늘 무너진 자리로 떨어져 나는 잠에서 깨고 꿈에서 깨니 그녀는 죽었다 _ 배신호「벌거벗은 자의 生을 위한 주머니 속의 詩作 메모」中에서. 광화문은 생각한다 온전한 향기의 목련이라도 그랬을텐데 생각한다.

봄春가능可能

2006년의 봄. 광화문이 열렸다. 그녀가 태어났다.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절없이, 어찌할 수 없이… 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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