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적인 매력과 자극을 넘어서
1948년, 알프레드 킨지 박사가 미국의 남성과 여성을 인터뷰한 뒤 발표한 <남성과 여성의 성행위> 보고서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조사에 응한 남자의 69%가 매춘부와 관계를 맺었고, 여성의 33%가 결혼할 때까지 순결을 지키지 않았으며, 미혼여성 중의 69%가 성 경험이 있다고 대답했다. 킨지 박사의 보고서에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 섹슈얼리티를 노골적으로 표현하는‘플레이보이’잡지다 .
‘플레이보이’는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다
1953년 12월 스물일곱 살의 한 미국 청년이 자신의 집 부엌 식탁에서 600달러의 빚을 내 어렵게 구한 마릴린 먼로의 누드 사진을 곁들여 잡지를 만들어냈다. 먼로의 누드 사진이 담긴 이 잡지는 순식간에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이 청년이 발행한 잡지는 성장을 거듭, 이후 미국 문화에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당대의 섹스심벌 먼로의 사진으로 미국 성인잡지 시장을 석권한 이 청년은 다름 아닌‘휴 헤프너’이다. 월간 플레이보이 잡지는 단돈 600달러로 초라하게 시작했지만, 이미 전 세계 1500만 명의 애독자를 확보하고, 1953년 미국 창간호를 시작으로 프랑스, 독일, 일본을 포함해 현재 20여 개국에서 발간되고 있다. 이는 플레이보이지가 단순히 야한 사진만 싣는 도색잡지에 머물지 않고, 나름의 고급화와 차별화 전략을 구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플레이보이라는 잡지를 직접 접하기 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가장 흔히 범하는 오해는 우선 이 잡지가 온통 매혹적인 몸매의 반라 또는 전라의 미녀들의 사진만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설혹 기사가 있다고 해도 플레이 메이트나 연예인들의 사생활에 대한 가벼운 가십기사 정도가 아닐까 하는 막연한 편견들로 잡지의 질 자체는 존외가 되곤 했다. 하지만 실제로 플레이보이를‘읽어 본’독자들은 단순히 누드사진으로 도배할 거라는 선입견은 말 그대로 선입견일 뿐이라고 못 박는다. 시각 장애자들이 즐겨 읽는 점자 플레이보이지가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플레이보이는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문제들과 시대적으로 가장 첨예하고 논쟁적인 주제들을 다루며 당대 지식인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자유롭게 낼 수 있도록 했다. 이처럼 수준 높은 기사들이 게재되자,“나는 사진이 아니라, 기사를 읽기 위해 플레이보이 잡지를 본다”는 유머가 나돌아‘플레이보이’에 대한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반증했다. 플레이보이는 천박과 고급을 오가는 잡지로 평가되며, 야한 사진 사이사이에 고급 칼럼과 소설을 싣는 편집기법을 펼침으로써 잡지를 구매하는 남성에게 심리적인 정당함을 주는 전략을 구사했다. 마르케스, 보르헤스, 하루키, 필립 K딕, 아서 클라크 등 문학계의 거장들이 플레이보이에 글을 게재하며‘미국의 아이콘’이라는 상징적 의미에 힘을 실어주었다.
휴 헤프너, 저 하늘의 별을 잡다
중국의 경제주간지 비즈니스워치가 3년 전 중국 재계 지도자 200명을 대상으로 가장 닮고 싶은 인물이 누구인지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 당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은 누구든지 고개를 끄덕일만한 재계의 거물,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회장이었다. 하지만 10위권에는 의외의 인물도 있었다. 바로 플레이보이 창업자인‘휴 헤프너’였다.
“이룩할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싸워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소설 돈키호테에 나오는 대목이다. 꿈의 소중함을 역설한 이 구절에서 휴 헤프너의 공통점을 엿볼 수 있다. 당시로선 무모하리만큼 원대한 꿈을 꾸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휴 헤프너는 어려서부터 그림과 만화 등에 관심을 보였다. 고등학교 때는 학교신문의 만화가로 이름을 날렸고, 일리노이주립대 심리학과에 진학한 뒤 대학출판물에 만화와 기사를 기고했다. 대학 졸업 후 백화점 카피라이터, 남성패선잡지 판촉원을 전전하다 시카고의 잡지왕 폰 로젠이 경영하는 여성 누드잡지에서 일하게 되면서 꿈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로젠의 잡지는 엄격한 검열을 피해 반라와 전라의 예술사진을 병행하는 정도였다. 이에 만족하지 못한 헤프너는 53년 자신의 아이디어의 결정체인 플레이보이를 창간한다.
그는 자위적인 사랑을 대량 판매한 첫 번째 인물이었다. 잡지마다 가운데 페이지에‘이달의 여자(플레이 메이트)’사진을 배치해 남자들에게 매혹적인 여자를 얻을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줬다. 창간호 모델은 마릴린 먼로였다. 자신 또는 만화가들의 자유분방한 성 만화를 끼워 넣기도 했다. 헤프너는 매혹적인 글래머들의 사진 사이에 유명인사에 대한 인터뷰를 싣고 그 앞뒤로 최고급 자동차와 패션 광고를 넣어‘돈과 명예와 여자’를 한꺼번에 소유하고자 하는 중산층의 심리를 채워 주었다. 성(性) 혁명의 토대를 닦은 것으로 평가받는 헤프너는“미래 세대들이 50년대와 같은 속박을 겪지 않을 수 있다는 검을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자평했다. NP
<플레이보이, 비하인드 스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