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적인 매력과 자극을 넘어서

1948년, 알프레드 킨지 박사가 미국의 남성과 여성을 인터뷰한 뒤 발표한 <남성과 여성의 성행위> 보고서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조사에 응한 남자의 69%가 매춘부와 관계를 맺었고, 여성의 33%가 결혼할 때까지 순결을 지키지 않았으며, 미혼여성 중의 69%가 성 경험이 있다고 대답했다. 킨지 박사의 보고서에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 섹슈얼리티를 노골적으로 표현하는‘플레이보이’잡지다 .


▲ “플레이보이는 신선한 목소리를 냈다. 만약 독자들의 신경을 직접 건드리지 않았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휴 헤프너
각 시대별로 섹슈얼리티에 대한 관점이 달랐고, 사회가 변할 때마다 늘 섹슈얼리티에 대한 개념도 새롭게 변하며, 한 때 금기시 되던 것들이 시대가 변하면서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기도 한다. 전 세계적으로 자유로운 성문화를 이끌고 있는 미국도 한 때, 그 어느 곳보다도 성문화에 엄격한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영화와 자동차 문화, 피임약, 콘돔, 그리고 인터넷과 함께 파티문화로 이어지는 20세기 미국의 성문화는 한층 대담해지고, 그 어느 때보다도 섹슈얼리티가 강조됐으며, 동성연애자들도 자유로운 성문화를 누릴 수 있게 된다. 전 세계적으로 도색 잡지의 대명사로 알려진‘플레이보이’는 토끼 모양의 바니걸을 앞세워 미국을 비롯한 세계 섹스 산업을 주도해왔다. 성인잡지로 출발한 플레이보이는 현재 방송, 비디오, 인터넷을 총망라하는 거대 멀티미디어 왕국으로 성장했다. 플레이보이 잡지는 펜트하우스, 맥심 등 후속 경쟁자들의 등장으로 70년대 전성기보다는 못하지만, 여전히 300만부 이상이라는 기록적인 판매부수를 보인다. 이런 저런 어려움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불혹의 나이를 훌쩍 넘어 50세가 넘은‘플레이보이’는 여전히 건재하여 남성들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남는다.

‘플레이보이’는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다

1953년 12월 스물일곱 살의 한 미국 청년이 자신의 집 부엌 식탁에서 600달러의 빚을 내 어렵게 구한 마릴린 먼로의 누드 사진을 곁들여 잡지를 만들어냈다. 먼로의 누드 사진이 담긴 이 잡지는 순식간에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이 청년이 발행한 잡지는 성장을 거듭, 이후 미국 문화에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당대의 섹스심벌 먼로의 사진으로 미국 성인잡지 시장을 석권한 이 청년은 다름 아닌‘휴 헤프너’이다. 월간 플레이보이 잡지는 단돈 600달러로 초라하게 시작했지만, 이미 전 세계 1500만 명의 애독자를 확보하고, 1953년 미국 창간호를 시작으로 프랑스, 독일, 일본을 포함해 현재 20여 개국에서 발간되고 있다. 이는 플레이보이지가 단순히 야한 사진만 싣는 도색잡지에 머물지 않고, 나름의 고급화와 차별화 전략을 구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플레이보이라는 잡지를 직접 접하기 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가장 흔히 범하는 오해는 우선 이 잡지가 온통 매혹적인 몸매의 반라 또는 전라의 미녀들의 사진만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설혹 기사가 있다고 해도 플레이 메이트나 연예인들의 사생활에 대한 가벼운 가십기사 정도가 아닐까 하는 막연한 편견들로 잡지의 질 자체는 존외가 되곤 했다. 하지만 실제로 플레이보이를‘읽어 본’독자들은 단순히 누드사진으로 도배할 거라는 선입견은 말 그대로 선입견일 뿐이라고 못 박는다. 시각 장애자들이 즐겨 읽는 점자 플레이보이지가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 ‘플레이보이’는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다. 점자로도 소개되고 있다.
플레이보이는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문제들과 시대적으로 가장 첨예하고 논쟁적인 주제들을 다루며 당대 지식인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자유롭게 낼 수 있도록 했다. 이처럼 수준 높은 기사들이 게재되자,“나는 사진이 아니라, 기사를 읽기 위해 플레이보이 잡지를 본다”는 유머가 나돌아‘플레이보이’에 대한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반증했다. 플레이보이는 천박과 고급을 오가는 잡지로 평가되며, 야한 사진 사이사이에 고급 칼럼과 소설을 싣는 편집기법을 펼침으로써 잡지를 구매하는 남성에게 심리적인 정당함을 주는 전략을 구사했다. 마르케스, 보르헤스, 하루키, 필립 K딕, 아서 클라크 등 문학계의 거장들이 플레이보이에 글을 게재하며‘미국의 아이콘’이라는 상징적 의미에 힘을 실어주었다.

휴 헤프너, 저 하늘의 별을 잡다

중국의 경제주간지 비즈니스워치가 3년 전 중국 재계 지도자 200명을 대상으로 가장 닮고 싶은 인물이 누구인지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 당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은 누구든지 고개를 끄덕일만한 재계의 거물,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회장이었다. 하지만 10위권에는 의외의 인물도 있었다. 바로 플레이보이 창업자인‘휴 헤프너’였다.

“이룩할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싸워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소설 돈키호테에 나오는 대목이다. 꿈의 소중함을 역설한 이 구절에서 휴 헤프너의 공통점을 엿볼 수 있다. 당시로선 무모하리만큼 원대한 꿈을 꾸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휴 헤프너는 어려서부터 그림과 만화 등에 관심을 보였다. 고등학교 때는 학교신문의 만화가로 이름을 날렸고, 일리노이주립대 심리학과에 진학한 뒤 대학출판물에 만화와 기사를 기고했다. 대학 졸업 후 백화점 카피라이터, 남성패선잡지 판촉원을 전전하다 시카고의 잡지왕 폰 로젠이 경영하는 여성 누드잡지에서 일하게 되면서 꿈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로젠의 잡지는 엄격한 검열을 피해 반라와 전라의 예술사진을 병행하는 정도였다. 이에 만족하지 못한 헤프너는 53년 자신의 아이디어의 결정체인 플레이보이를 창간한다.

그는 자위적인 사랑을 대량 판매한 첫 번째 인물이었다. 잡지마다 가운데 페이지에‘이달의 여자(플레이 메이트)’사진을 배치해 남자들에게 매혹적인 여자를 얻을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줬다. 창간호 모델은 마릴린 먼로였다. 자신 또는 만화가들의 자유분방한 성 만화를 끼워 넣기도 했다. 헤프너는 매혹적인 글래머들의 사진 사이에 유명인사에 대한 인터뷰를 싣고 그 앞뒤로 최고급 자동차와 패션 광고를 넣어‘돈과 명예와 여자’를 한꺼번에 소유하고자 하는 중산층의 심리를 채워 주었다. 성(性) 혁명의 토대를 닦은 것으로 평가받는 헤프너는“미래 세대들이 50년대와 같은 속박을 겪지 않을 수 있다는 검을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자평했다. NP

<플레이보이, 비하인드 스토리>
- 솔로몬의 판결?
흔하고 흔한 그러나 결코 흔하지 않은 재판 이야기 하나. 미국 유명 성인 잡지 플레이보이(PLAYBOY) 한국어판 발행과 관련하여 1998년 7월 말에 이루어진 재판이다. 전말은 이렇다. 한국브라이트스타그룹(주)이 1996년에 미국 플레이보이 엔터프라이즈사와 한국어판 독점판매 계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플레이보이 한국어판 발행을 위해 정기간행물 등록신청을 했으나, 문화관광부는 이를 거부한다. 이에 따라 한국브라이트스타그룹은 1997년 10월에 문화관광부 장관을 상대로 정기간행물 등록신청 반려처분 취소 청구 소송을 제기하게 된다. 플레이보이 한국어판은 저급한 화보를 무단 게재하는 다른 성인잡지와는 달리 예술적인 화보와 품격 있는 기사들만 전제하는 고급 성인잡지인 만큼, 등록거부는 부당하다는 것이 이유였다.‘뿌리’의 작가로 유명한 알렉스 헤일 리가 인터뷰 전문기자로 일하기도 했고, 대선을 앞둔 지미 카터가 플레이보이 지면을 통해‘마음속의 간음’을 고백하기도 했음을 감안하면, 나름의 근거를 지닌 이유인 셈이다. 그러나 법원은‘이유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이 때 서울 고등법원 특별부가 내세운 불허 이유가 사뭇 걸작이다.“잡지 제호의 선정적인 상징성만으로도 정기간행물 발행을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판결문 일부를 살펴보면 이렇다.‘플레이보이라는 이름 자체가 갖는 음란물로서의 상징성에 비춰 볼 때, 같은 상표가 붙은 의류 등과 달리 건전한 사회질서를 해칠 우려가 크다. 그리고 이를 허용할 경우 외국의 유사한 음란물의 범람이 우려된다. 따라서 출판등록 거부 조치는 정당하다.”이 판결 덕분에 우리는 플레이보이 상표가 붙은 시계와 옷을 착용할 수 는 있어도 플레이보이 잡지를 우리말로 접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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