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역경의 시간도 감사히 받아들일 줄 아는 진정한 가수

“국민, 팬 여러분의 삶에 희망이 깃들기 위해서,
‘쨍하고 해뜰날’과 같은 희망찬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살자.”


송대관 대한가수협회 회장은 1919년에 태인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해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고 송영근선생의 후손으로 1946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났다. 그는‘세월이 약이겠지요’,‘해뜰날’,‘유행가’,‘차표 한 장’등 다수의 히트곡을 낸, 구수하고 친근한 옆 집 아저씨의 모습으로 대중에게 다가서는 대표 가수로 꼽힌다. 이에 본지는 지난달 21일에 디너쇼를 3일 앞 둔 채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송 회장을 만나고 왔다.

Q. 어릴 적에 가정형편이 어려웠다고 들었는데.
그 시절에는 대부분 가난했다. 그 때는 보릿고개 시절이었다. 가을에 수확한 양식이 바닥 나 보리는 여물지 않은 때 너도나도 먹을거리가 없었다. 나 또한 엄청 가난했지만 어렸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생각을 특별히 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가난으로 인생이 힘들다고 여겨질 만큼 생각이 성숙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떠올려보면 고난스러웠다고 회고할 수 있다. 부모님은 일하러 가셔 늘 바쁘시고, 밥 줄 사람도 없었다. 솥을 열어봐도 먹을 것이 없어 배를 움켜쥐며 토끼 잡으러 들로 쏘다니는 것이 일상이었던 시절이었다.

Q. 학창시절은 어떤 학생이었나.
정읍 태인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 고등학교는 전주로 갔다. 유학은 아니었고 생업을 위해서 가족이 전부 전주로 이동을 했다. 그 때 부모님을 포함해 삼 남매가 전부 일을 했다. 어머니께서는 몸이 아프셨음에도 불구하고 일을 하셨고 그 외의 모든 식구들이 일을 해야 했다. 그 때 돈벌이를 하면서 학교를 다녀야 했는데, 고학하는 상황으로 학교를 굉장히 힘들게 다녔다. 사립학교를 다녔는데 가난해 학비를 제때 내본 적이 없었다. 졸업식에 참석을 했지만 밀린 학비를 내야 졸업장을 준다고 해 정작 졸업장 없이 집으로 왔다. 물론 많은 학생들이 가난했던 시절이었기에 이런 일이 흔하긴 했지만 어린 마음에 상당히 상처를 받았었다. 하지만 모교를 절대 원망하지 않는다. 학교 운영상 학비를 낸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과의 차별화를 두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행히 학비를 내지 않아도 학교 수업은 들을 수 있었고 그러한 점에 있어서 학교에 감사하다.

Q. 어떻게 가수의 길로 들어오셨는지.
어릴 때부터 끼가 많았다. 콩쿠르에서 일등을 하기도 했고, 동네에서는 노래 신동이 나왔다는 소리도 들었다. 이러한 끼는 어머니의 재능을 이어받았는데 그래서인지 여동생도 노래를 잘 한다. 또 이러한 재능이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서서히 두각을 나타냈다. 그 때 이미 전주 지역 방송국에서 가수로 활동을 했었다. 어린 꿈나무를 키우고, 전속가수를 만들어주는 프로가 있었는데 그 곳에서 활동을 했다. 연말 결선 등을 통해서 입상을 하면서 서서히 실력을 인정을 받았고, KBS에서‘신인가수 탄생’이라는 프로그램에서 3회 연속 입상을 하면서 명실공히 신인가수로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후에‘오아시스 레코드사’에서 가수로서 첫 발을 디뎠고,‘세월이 약이겠지요’를 시작으로‘해뜰날’이 1976년도에 히트를 치면서 가수왕에 이르게 되었다. 유명해지기까지 무려 10여년 기나긴 세월이 있었다.

Q. 미국에서 이민생활을 했다. 그 때는 어땠나.
가요 생활 13년 후 가요계의 뜻을 일구고 최정상에 오르고서 갑자기 이민을 생각했다. 또 다른 생활에 도전을 해보겠다는 마음으로 갔다. 어쩌면 처가가 미국에 있어 이민을 더 편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미국에 갔을 때는 영어도 못하고 낯선 환경 때문에 무척 힘들었지만 3~4년 후에 안정을 찾고 가게 사장도 되고 그랬다. 사람들은 속된 말로‘딴따라가 와서 무엇을 하겠나.’하고 바라봤지만 무엇이든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 때 남들은 8시간 일할 때 나는 12시간 일해서 나중에는 슈퍼마켓까지 크게 해 돈도 많이 벌었다. 하지만 후에 음악과 함께하지 못하는 삶에 회의를 느꼈다. 세월이 흐를수록 향수병이 심해져 너무 힘들었다. 병원에 가도 병명을 알 수가 없었고 주치의도 그러한 나에게 향수병을 얘기했다. 그 허무함을 채우려 돌연 귀국을 했고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신기하게 그렇게 힘들었는데 한국 땅을 밟으니 그런 병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 때 느꼈다.‘역시 내 본업은 가수구나! 내가 살아야할 곳은 대한민국이고 내가 활동해야할 곳이 이 곳이구나!’라고. 하지만 지금 떠올려보건대 이민 생활은 좋은 경험이었다. 힘겨운 타향살이였지만 그 기간을 통해 내 노래가 더욱 성숙해졌다고 생각한다. 고생을 했기에 마음에서 나오는 내면의 노래를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Q. 가족에게 어떤 아버지, 남편인가
내가 태어난 곳은 정읍이다. 촌사람이다 보니 가정에서도 시골스럽다. 아이들 교육도 마찬가지다. 현대적인 교육은 많이 못 보여줬다. 구수한 시골 스타일의 가장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자녀 교육에 있어 엄격함은 유지했다. 공인은 제약이 많은데 이러한 면이 자녀들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나는 항상 가족들에게‘송대관의 대리인이라는 생각을 잊지 말라’고 얘기한다. 아이들이 잘못을 하면 공인인 나에게까지 영향이 미치기 때문에 철저히 교육을 시키고 조심히 살도록 가르쳤다. 그렇게 가르쳐 결혼한 첫째가 미국 회계사 자격증을 따서 곧 한국에 와 같이 살게 된다. 20년가량 떨어져 지냈는데 함께 살 수 있어 너무 행복하다.

Q. 24일 하얏트 호텔에서 디너쇼가 열린다. 회장님 공연의 차별화는 어떤 것이 있나.
공연은 관객들에게 현장에서 즐거움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히트곡만 부르면 사람들이 지루해하기 때문에 폭발적인 웃음과 함께 다양한 노래를 들려 드린다. 젊은 층들의 노래, 팝송 등 다양한 노래와 조크를 가미해 공연한다. 이번에는 박상민, 노사연 등이 게스트로 나와 멋과 재미를 부여하도록 했다. 보통 내 공연에 온 분들은 공연이 끝나도 쉽게 자리를 뜨지 않는다. 그러한 점만 봐도 내 공연이 어느 정도의 인기인지 알 수 있다. 나는 하얏트 호텔에서 10년간 디너쇼를 하고 있는데, 나만의 노하우가 있기 때문에 공연이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Q. 한국방송예술종합학교 트로트학부 전임교수로 있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노래를 부르는 것과 또 다른 희열을 느낄 수 있는 분야인가.
교수라는 타이틀이 상당히 부담스럽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학생들이 나의 수업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면 겁이 나기도 한다. 또 나 스스로도 잘 가르쳐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연예인들은 여러 면에 있어 자유분방한 특성이 있는데, 나 역시 학생들 앞에서 습관적으로 사투리와 같은 편한 말투가 나올까봐 자제하게 된다. 이 점은 학생들에게도 양해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나는 이 학생들 한 사람 한 사람씩 창법을 구사하도록 도와주려고 하고 있다. 일대일 강의를 해야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기 때문에 힘들더라도 그렇게 가르치려 노력 중이다. 원래는 20명 강의를 하기로 했는데 현재 50명가량이 수업을 듣는다. 내년(2010년)에는 적은 인원으로 사사하는 식으로 수업을 할 것 같다. 판소리, 민요는 개인 레슨을 받는데 우리도 그런 가르침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트롯을 가르치는 경우는 내가 최초다. 명예나 돈 때문이 아닌 트로트 분야의 후배를 양성하는 의미가 있어 흔쾌히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다. 앞으로 내 후배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면 한다.

Q. 지난해 8월 대한가수협회 2대 회장으로 취임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나.
가수들의 직업적 보호와 가수협회 회원으로서의 신원보증을 하고 있다. 나아가서 가수들이 활동하면서 부딪히는 어려움을 해결해주고 저작권과 같은 법적 제도 문제에도 관여하고 있다. 특히 저작권 문제에 있어 우리는 외국에 비해 상당히 미흡한 면이 있다고 본다. 우리 가수협회에서는 가수들이 부른 노래를 타인이 사용하는데 있어 불이익이 없고, 더불어 소득이 발생하도록 관련 제도를 추진하려고 한다. 또 우리가 한류를 운운하는데 자체적으로 그에 합당한 가요제나 시상식이 없어 우리가 그러한 것을 보완하려고 한다. 이제는 가요 Top10, 인기가요 등의 프로도 사라졌는데 우리가 이러한 프로를 부활시켜 가수들에게 무대를 넓혀주고 활력을 줄 수 있도록 할 생각이다. 책임이 막중하다.

Q. ‘송대관 가요제’를 멋지게 마무리 했다. 막중한 책임감이 느껴졌을 텐데.
정읍에서 송대관 노래비가 세워지고 송대관 가요제도 했다. 처음에 정읍시에서 이를 만든다고 했을 때 반대하지 않은 것은 내가 현역일 때 그 신인 가수들을 키워서 좋은 가수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거기에서 신인들 발굴하면 한국 가요계에 큰 소득일 것이다. 보통 타계한 가수들의 가요제가 많은데 나는 살아있는 사람이 이러한 가요제를 만들어 신인들 발굴에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점에서‘송대관 가요제’는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Q. 굉장히 많은 직함과 역할을 동시에 진행 중이신데, 공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떠나.
공인으로서 사는 것이 상당히 힘들지만 또 한편 너무나 영광스럽기도 하다. 누군가가 알아봐 주는 것은 너무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이것이 지나치거나 연속적으로 이뤄질 때는 나도 인간이라 힘들 때가 있다. 그래도 이렇게 유명한 가수가 될 수 있음에 행복하다. 대부분의 가수들이 이런 위치가 되기 위해 그렇게 힘들게 일하지 않나. 나는 진짜 행복한 사람이다.

Q. 신년을 맞이해 독자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면.
사랑하는 팬 여러분! 우선 새해에는 국운이 좋길 바란다. 나라가 좋아야 국민이 행복할 수 있다. 전 국민이 행복해야 우리 가요계 또한 행복이 온다. 올해(2009년) 한 해도 사랑 많이 주셨고 영광 주셨는데 너무 감사하다. 국민들이 희망을 갖기 위해서 국민들도‘쨍하고 해뜰날’같은 노래를 부르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래는 주술과 같다고 본다. 행복이 가득한 새해를 위해 행복한 생각, 행복한 노래를 부르며 살아야 한다고 본다. 또한 내년(2010년) 한해 국민과 팬 여러분의 아픔과 행복 모두 함께 하는 가수가 되겠다.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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