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의 한국인 최초 미술총감독’이는 한유정을 설명하는 집약된 말이다. 하지만 최초라는 수식어구 뒤에는 매사 철저한 자기 컨트롤과 불가능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는 의지와 신념이 있었다. 그녀를 두고 혹자는‘독하다’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그녀를 독하게 만든 열정과 꿈, 그리고 여전히 그 꿈을 이루는 과정에 있다는 한유정 감독이 세상에 던지는 메시지를 들어봤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처음 본 그녀는 미인이었다. 마르고 작은 체구였지만 에너지가 넘쳐 보였다. 말끔한 모습을 하고 나타난 한유정 감독과 카페로 이동하면서도 초면이라고는 전혀 느끼지 못할 만큼 친근함이 느껴졌다. 그것은 그녀의 강점이었다. 한 감독은 카리스마와 더불어 친근함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또한 인터뷰에 임해서는 소위말해 식상한 질문에도 열성을 다하는 모습에‘달리‘최초’의 수식어가 붙는 것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또한 그녀와의 인터뷰는 마치 강연회장에 온 듯 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말 그대로 열정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다.
Q. 프로덕션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어떤 일을 하나. 영화나 TV에서 배우를 제외한 전체적인 비주얼을 책임지는 사람이다. 보통 어떤 장소에 가서 촬영을 하는 경우 그 장소를 있는 그대로 쓰지 않고 스크립에 맞게 스토리텔링을 한다. 영화에서는 배우의 행동과 대사를 통해 스토리텔링을 하지만 미술감독의 경우는 비주얼적인 것들을 통해서 스토리텔링을 한다. 이러한 것들을 총괄하기 때문에 감각도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한 노력도 많이 필요하다. 더불어 세트를 만드는 것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 능력 역시 중요하다.
Q. 우리내 인생을 끊임없이 꿈을 찾아 헤맨다. 꿈을 빨리 찾았다.
굉장한 행운이다. 일찍 기회가 왔다. 나도 어떻게 그 꿈을 생각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것을 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알려지지 않은 직업이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나에게 쏟아지는 의심은 이런 거였다. 아주 기초적인 것에서부터 우러나는 것들이었다.“너가 그 직업을 알기나 해? 니가 될 것 같아?”그런 소리를 들으면서도 하루하루 살아왔다. 누구나 다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맞는 직업을 택했는가. 내가 잘 가고 있는가. 하지만 우리는 꿈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는 그 꿈을 찾아가는 과정을 잘 생각지 않는 것 같다. 정해진 틀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많다. 몇 살까지는 대학 다니고 몇 살까지는 결혼하고 그런 룰 안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룰은 누가 정한 것이고 왜 우리가 그것에 맞춰 살아야 하는지 나는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누가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있나. 부모 역시 내 인생을 살아줄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오히려 내 길을 가는 것이 어렵지만은 않았다. 우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가는 길은 결국 우리가 꿈꾸는 그 곳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Q. 유학시절, 동시에 다양한 역할을 소화했었다. 어디에서 이런 열정이 나오나.
상황에 밀렸던 것도 있었다. 일단 가자마자 IMF가 터졌다. 하지만 너무 오래 그리던 공부라 힘들다고 놓을 수도 없었고, 또 생활은 생활대로 해야 했다. 이 모든 것을 충족하는 방법 중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마도 잠을 줄이는 것이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무엇도 놓을 수가 없었다. 직업이 내게는 경력이고 경제적인 수단이기도 했으며, 학교에서도 내가 조교로 활동을 했기 때문에 그 책임도 놓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런 것들을 다 만족시키다 보니까 잠이 점점 줄었고 그것이 나중에는 생활화가 되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하루하루 버티자는 생각이었고 그래서 잘 지낼 수 있었을 거다. 신기한 것은 절대 안 올 것 같은 시간도 하루하루가 모이니까 다다르게 되더라. 또한 내성이 생겼는지 어느 순간부터는 힘들었던 하루하루도 조금은 쉬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Q. 책 속에 한유정, 정말 독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꿈이 간절하면 이렇게 독해질 수 있나. 오로지 미래를 향한 꿈 때문이었나.
나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사람들도 내게 독하다고 한다. (웃음) 처음에는 미국에 가야겠다는 단순한 생각이 많았다. 그리고 그때 내가 원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히 행복했던 것 같다. 힘든 것을 몰랐던 그 시기는 젊음에서 오는 열정이 샘솟았다. 그래선지 피곤하다기 보다는 행복했다. 하지만 때때로 독하게 산다는 것이 자신에게는 상당히 피곤할 수 있다. 나는 스스로에게 엄격한 편이다. 하루의 계획 중에 달성하지 못한 부분에 있어서는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는 편이다. 하지만 이제는 주변도 돌아보고 살고 싶다. 스스로를 못살게 구는 삶을 10년이 넘게 살다보니 내 인생에 있어서 놓친 부분이 상당히 많았다. 물론 그 놓친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자리에 있을 수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순간순간의 즐거움도 챙기며 살고 싶다.
Q 일과 일상의 밸런스 유지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마음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프리랜서의 경우 일이 정말 중요하게 다가온다. 친구들이랑 얘기를 하다보면 일을 하면서도 다양한 경험을 꿈꾼다. 하지만 일을 끝냈을 때 자신이 꿈꾸는 무엇을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프리랜서는 일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있어도 돈 생각에 휴식을 취하지 못하게 된다. 반면, 돈이 있을 때에는 일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된다.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시간과 돈의 고리를 끊어야겠다.‘~걸’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일할 때에는 놀걸, 놀 때에는 일할걸 그렇게 사는 게 너무 싫었다. 놀 때에는 일 생각을 접고 놀아야 하는데 놀면서도 불안하고 그렇다. 하지만 우리가 왜 일을 하나? 잘 살기 위해서 일을 하지 않나. 그런데 우리는 일에 끌려 다니면서 정작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산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 고리를 끊자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러고 나서부터 정말 마음이 편해졌고 정말 일상에도 변화가 왔다.
Q. 이 정도의 열정을 갖고 계신 분이라면 연애할 시간도 없었겠다. 작년에 결혼을 했다. 이 직업이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에 연애를 할 조건이 되지 않았고 또 나는 영화 작업을 할 때 내 영혼을 작품에 쏟는다. 그래서인지 내 모든 시간이 그 작품에 온전히 할애 되었었다. 심지어 잠을 자면서도 작품들이 떠올랐었다. 사실 일에 있어서 상황 상황에 따라 영감이 생기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때도 많다. 그럴 경우에는 온전히 일 생각만 한다. 그래서 연애다운 연애를 못해봤다.
Q. 평소 성격은 어떤가.
꼼꼼한 성격이다. 아버지가 꼼꼼하신 편인데, 유전적으로 그 성격을 닮기도 했고 일을 하면서 그러한 성격이 더욱 형성되었다. 이 일이 아주 작은 실수도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이 정도는 괜찮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현실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이 습관이 되다보니 작은 부분도 그냥 넘기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선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은 모두 가정하고 막아보자는 사고가 많아진 것 같다. 나에게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하는 일이 필요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대비하면 어떤 상황도 최선이 될 수 있다. 최악이 준비가 되어 있다는 소리는 어떤 상황이 닥쳐도 덜 무섭고 덜 힘들 수 있다는 소리다. 때문에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기 위해서 온갖 상황을 계산한다. 이 일이 여러 분야의 사람들과의 합작이기 때문에 내 준비가 완벽했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실수를 할 수도 있다. 그것을 예방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실수도 가정하고 준비했었다. 물론 이러한 부분도 처음부터 잘 했던 것은 아니었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경험하면서, 나중에 비슷한 상황이 생겼을 때‘이럴 수도 있겠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것을 진정한 경험치라고 하는 것 같다.
Q. 어려운 작품을 더 많이 하셨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영화 일을 하면서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 늘 온다. 그럴 때에는 나만의 가치 기준을 정해야 한다. 내가 행복한 것이 진짜인 것이다. 상당한 성공을 이룬 사람도 실제로 자신의 삶에서는 불행을 얘기하곤 하는데 내게는 그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삶은 배우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과목을 정하듯 매 순간 이 프로젝트에서는 이런 것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 그러다보니 알려지지 않고 어려운 작품을 더 많이 하게 된 것 같다. 내 인생은 내가 설계하는 것이다. 남의 기준에 휩쓸리면 어떤 길에서도 흔들리기 마련이다.
Q. 모든 젊은이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린다. 좌절하는 얘기들을 많이 듣는다. 경제적인 이유, 가족사 등 허심탄회하게 자신에 대해 메일을 보낸다. 모 신문기자가 내게“당신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게 아니냐..”고 했다. 하지만 언제나 나보다 잘난 사람이 있고 나보다 어려운 사람이 있다. 그렇게 남들과 비교하는 시간을 오히려 자신이 가진 어떤 능력에 집중했으면 좋겠다. 또한 긍정적으로 사고를 했으면 좋겠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다. 하지만 조급해하지 말고 여유 있는 마음으로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지되 실수를 실패로 이어지지 않도록 늘 배우는 자세를 갖기 바란다. <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