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법률적 정의를 세우는 것이 법조인들의 역할입니다!”

법조 초대석

법률 사각지대에 놓인 서민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불철주야 뛰고 있는 조현욱법률사무소(www.lawone.co.kr)는 일반적인 법률사무소가 갖는 어렵고 딱딱한 이미지를 벗어 던지고 스스로 문턱을 낮춰 모든 고객들에게 최상의 법률서비스를 제공하고 고객이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기로 정평이 나있다.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법률서비스
1964년 전북 순창에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난 조현욱 변호사는 자식들에게 좀 더 나은 교육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고심하던 부모를 따라 부산으로 이사한 후 그곳에서 성장했다. 대학입학시험에서 부산경남지역 수석을 차지하고 서울대 법과대학에 진학해 대학 4년 때인 1986년에 제 27회 사법고시에서 23세의 나이로 최연소 합격해 세간의 화제가 된 바 있다. 그러나 조 변호사는 곧바로 법관의 길을 가지 않고 대한법률구조공단에서 공익변론에 힘썼다. 그다지 넉넉하지 못한 환경에서 자란 조 변호사는 평소 사회 소외계층의 애환에 대한 진솔한 조력자로서의 삶을 살고자 했던 바람을 공익변론을 통해 실천했던 것이다. 공익변론을 통한 인간에 대한 사랑의 토대 위에 법관의 길로 들어선 조변호사는 전국 각급 법원에서 판사로 일하면서 하나의 판결에 의해 세상의 제도가 바뀌고 새로운 법령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서 판결 하나하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늘 가슴에 새기며 일을 했다. 판사 재직 중에도 미국 duke대학 law school에 방문학자로 체류하면서 대학 교수들과의 세미나, 강의를 통해 자칫 법조인으로서 좁아지기 쉬운 시각을 더 넓은 세계로 향하여 열고 늘 공부하는 자세를 유지했다. 귀국해 각 법원에서 판사로 일하는 동안 조 변호사는 치밀하고 명쾌한 판결로도 정평이 났으며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라는 평을 받으며 주위 선후배로부터의 신망 또한 두터웠다. 그러나 판사로서 열심히 일하던 조 변호사는 인천지방 부장판사직을 끝으로 2008년 어느 날 돌연 변호사로 옷을 갈아 입었다. “이미 만들어진 기록 속에서 무엇이 정의인가를 찾는 것보다, 직접 삶의 현장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같이 울고, 같이 고민하고 싶었다”는 게 조 변호사의 설명이다. 그는 재판에서 만난 수감자들, 그리고 실의에 빠진 이들에게 삶의 새 희망을 주고자 다방면으로 노력을 아끼지 않는,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변호사로 명성이 자자하다. 또 형사사건에서 무죄판결을 많이 받아내는 변호사로도 유명하다.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이 주로 그를 찾고 있으며,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 무죄판결을 받을 때면 그간의 고생이 한순간에 다 씻겨 나간다고 한다. 또 평생의 은인이라고 하며 재판이 끝난 이후에도 가끔씩 전화해 주는 의뢰자들을 볼 때마다 ‘만약 내가 한 사람의 고통을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나 사는 것 헛되지 않으리’ 라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떠올리며 감사한다고 한다. 조 변호사는 “법률전문가는 성실한 연구 자세와 더불어 타인의 아픔을 위로하는 따뜻함이 동시에 필요하다” 고 강조한다. 그리고 스스로 그 두 가지를 겸비하기 위해 늘 노력하고 있다. 작지만 강한 법률사무소, 벌써 인천에서 조 변호사의 성실함과 따뜻함에 대한 소문이 퍼져 조 변호사 사무실은 늘 바쁘고 활기찬 움직임으로 분주하다. <NP>
저작권자 © 시사뉴스피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