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탄압을 피해 목숨을 건 망명길에 오르는 티베트인-
티베트의 정신, 티베트 불교를 말살하라

티베트를 제대로‘휘어잡아야’중국이 산다?
티베트는 중국 서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티베트족 자치구로 중국에서는 시짱자치구(西藏自治區)라 불린다. 면적은 122만 8400평방km이며 인구는 252만 명 정도로 ㎢당 2명 꼴이다. 주도는 라싸이고 동, 니켈, 마그네사이트와 금 등 풍부한 천연광물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나 현재는 미개발 상태이다. 대개 목축업에 종사하며 티베트 1인당 소득은 중국에서 가장 낮은 2788위안(39만 여원)수준이다. 중국 평균인 1만 494위안에 크게 못 미치는 숫자다. 이렇듯 고립된 지리적 위치를 가진데다 작고 힘없는 소수민족국가인 티베트. 도대체 왜 중국은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며 자유로이 살고자 하는 그들의 독립의지를 탄압하는 것일까. 티베트는 예로부터 중국 영토의 일부분이며, 이 문제는 중국 국내문제로서 외국의 간섭은 내정 불간섭 원칙에 위배한다는 것이 중국의 입장이다. 미국 등 일부 외국의 티베트 담당관 임명도 중국의 내정 간섭행위로 본다. 중국은'티베트 민족은 중국의 법률적 보호 하에 종교의 자유를 향유하고 중앙의 지원 하에 경제 발전 중'임을 강조하며 달라이 라마를'종교를 가장하여 조국을 분열시키려는 정치범'으로 구분 짓고 있다. 명의나 형식에 관계없이 달라이 라마의 초청은 용인될 수 없으며, 정부요인의 달라이 라마 면담은 그를 티베트 국가원수로 예우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초청국과 중국 간의 쌍무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 경고하기도 한다. 이러한 중국의 입장과는 달리 국제사회에서 생각하는 티베트 탄압의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첫 번째 이유로 꼽아지는 것은 티베트가 천연자원의 보고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구는 그리 많지 않으나 그 수에 비해 엄청난 크기의 영토를 가지고 있는데 그곳에는 원유, 석탄, 동, 니켈, 마그네사이트, 금 등 많은 지하자원이 매립되어 있다. 자원난에 허덕이는 중국의'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티베트가 주요 지리적 위치에 있기 때문이라고 보여 진다. 티베트를 점유하고 있음으로 인해서 떠오르는 신흥 경제국인 인도를 견제할 수 있음은 물론 자원과 안보의 요충지인 중앙아시아를 향해 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세 번째 이유로는 중국내 소수민족독립의 발판을 만들기 싫은 것이라 분석 되고 있다. 티베트가 독립을 이루게 되면 대만을 비롯해 조선족도 독립을 꾀할지 모른다는 분석이다. 중국에는 조선족과 아라시족(러시아족)을 포함한 소수민족이 55개나 된다.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단일국가체제인 것이다. 티베트 사람들, 즉 장족은 소수민족 가운데도 인구가 가장 많은 민족에 속한다. 그런 티베트가 분리 독립하게 되면 도미노가 줄줄이 넘어지듯 다른 민족들도 독립을 원할 것이다. 그렇게 되어 원래 한족의 땅을 제외하고 소수민족들의 땅을 모두 돌려준다면 사실 중국은 생각보다 큰 나라가 아니게 된다. 소수민족들을‘제대로 휘어잡지 못해’분열된 구소련의 선례를 답습하지 않으려는 중국의 의도로 분석된다. 이러한 계산 하에 티베트독립에 대한 중국의 무력탄압은 민족의식 말살정책, 무작위 감금과 고문, 경제적ㆍ정치적 차별정책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무차별 수색에 감금, 이어지는 폭행과 고문
-물고문, 전기고문, 성고문에 끓는 물을 들이 붓고 묶어 놓고 불을 대기도
인도 다람살라에는 티베트 망명정부가 들어서 있다. 다람살라에는 조국 티베트에서 중국의 무력탄압을 피해 망명을 택한 이들이 모여 살고 있다.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망명한 티베트인음 밝힌 나왕 상치(34)는 다람살라에서 3년간 감옥살이를 함께 한 사촌동생과 함께 작은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그가 중국 공안당국에 체포된 것은 1996년 8월의 일이다. 당시에 그는 티베트 캄 지역 수도원의 승려였다. 중국 정부의 종교탄압을 견디다 못한 그는 마침내 사촌동생과 함께 수도원 정문에 대자보를 붙이고 유인물을 수도원 곳곳에 뿌렸다. 그와 사촌동생은 곧 중국공안에 체포됐다. 교도소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행해졌던 잔인한 고문과 일상적인 구타로 그의 건강은 극도로 나빠졌다. 그는 만 3년의 형기를 채운 1999년 출옥한 귀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공안의 방문은 매일처럼 계속됐고, 수도원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중국공안은 그가 머물던 수도원을 포함한 다른 수도원에도 그의 이름과 함께 사진을 돌리고 그를 받아들이면 수도원을 폐쇄하겠다고 위협했고 어느 수도원에서도 그를 받아들여 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함께 출감한 사촌동생과 인도로 망명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중국 정부는 티베트를 침공한 1959년부터 불경만 읽던 승려들을 대상으로 마오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강제로 학습시켜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중국 정부에서 최고의 범죄로 규정하는 것은 승려들이 달라이 라마의 사진을 품속에 넣고 다니는 행위다. 달라이 라마의 사진을 소지했다가 적발될 때는 5년 정도의 감옥살이는 물론, 승려가 거주하는 수도원이 경찰의 수색으로 쑥대밭이 되기 일쑤다. 티베트 승려들이 최고의 스승으로 존경하는 달라이 라마의 사진을 품에 넣고 다니는 것은 수백 년간 이어져온 티베트의 전통이다. 또 다른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비구니였던 담최 돌마(35)라고 밝힌 한 티베트 여성은‘애국을 위한 재교육프로그램’의 대표적인 희생자다. 그녀는 17살이 되던 해 비구니 사찰에 들어가 승려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티베트 불교의 상징적인 건물이 모두 파괴됐다. 당시 사찰에선 파괴된 건물들을 새로 지을 계획을 세우고 모금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인근 마을로 다니면서 사찰 재건축 계획을 알리고 모금을 하면서 어느 정도 재정이 확보되자 젊은 비구니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건축에 나섰다. 사찰이 완공될 무렵, 중국 당국에서 기관원들이 사찰로 찾아왔다. 이들은 사찰 재건축 활동이나 이를 위한 모금활동을 모두 금지하고 사찰을 건축하는 대신‘애국을 위한 재교육 프로그램’을 받아야 한다고 통보했다. 한 가족처럼 지내던 사찰 사람들의 정원도 91명에서 85명으로 제한했다. 승려들이 분노에 휩싸인 것은 당연했다. 이 사건 뒤 반중국저항운동의 기운이 무르익어갔다. 1994년 그녀가 있던 사찰 출신의 다섯 승려가 티베트 수도 라싸에서 시위를 벌이다 체포되면서 사찰은 저항운동의 근거지로 낙인찍혔다. 중국 공안당국은 승려들의 가족을 사찰로 불러 모은 후 반중국 시위가 다시 벌어질 경우 가족들까지 모두 체포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종교와 자신, 그리고 티베트의 독립을 위한 돌마를 비롯한 다른 승려들의 정신까지 꺾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승려 8명과 함께 1994년 12월 말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비교적 중국 공안의 경계가 느슨해진 저녁 무렵 라싸의 시장으로 나가 시위를 시작했다.“자유 티베트 만세! 달라이 라마 만세!”를 쉬지 않고 외쳤다. 15분 남짓 시위를 벌이던 이들은 곧 중국경찰에게 체포돼 구금되었고 그날부터 시작된 취조와 고문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었다. 두 손을 천장에 매달고 다리를 동여맨 다음 끓는 물을 퍼붓기도 했고 불을 들이대기도 했다. 전기쇼크를 주기도 했고 물고문도 이어졌다. 여성 수감자에게는 수치심을 주기 위해 성고문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고문과 취조가 계속되는 사이 시위를 벌였던 승려들은 변호사도 없는 상태에서 일사천리로 재판을 받아‘분리주의자’란 죄목으로 각각 6년형에 처해졌다. 돌마가 받은 고문 외에도 쇠파이프로 때리거나 겨울철 살을 에는 추위 속에 담요나 매트리스는커녕 시멘트 바닥에 재우거나 음식을 주지 않는 일도 비일비재 하다고 한다. 티베트의 현실에서 또 다른 큰 문제점으로 꼽히는 것은 중국 공안당국의 직권남용이다. 티베트의 중국 공안당국은 조금의 의심만 있어도 티베트인들을 거리에서 영장 없이 체포해 구금한 뒤 가택수사를 벌인다. 달라이 라마의 사진이나 의심을 살 만한 인쇄물만 있어도 이를 구실로 여러 해 가둬질 수 있는 것이 티베트의 현실이다. 당연히 티베트인들은 공안의 눈에 나지 않게 굽실거려야 하고, 특히 인도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티베트인은 대부분 반혁명 분자로 찍혀 지속적인 감시를 받으며 중국 공안에 체포될 수 있다. 그 예로 루키 삼(39)은 1994년 7월 인도로 건너가 학교에서 1년을 공부하고 티베트로 돌아왔다가 그를 감시하던 중국 공안에 어느 날 체포되어 스파이 혐의와 반혁명 그룹을 이끈 혐의로 8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됐다. 가혹한 구타와 고문으로 몸무게가 30kg으로 줄어들 정도였다. 두 달간 매일 병원으로 통원치료를 받았으나 별 차도가 없어 거의 숨지기 직전의 상태가 되자 중국 당국은 어쩔 수 없이 그를 석방했고 그는 1997년 인도의 다람살라로 망명했다. 한편 팔덴 게야초(75)는 중국이 점령한 티베트의 감옥에서 33년 동안 옥고를 치른 장기수이다. 티베트 점령이 시작된 1959년 3월, 수천 명의 시민들과 함께 거리시위를 벌이다 체포된 그는 감옥에서 청춘을 보낸 뒤 1992년 61살이 되어 석방됐다. 7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탈옥을 시도하다 8년이 추가되었고 15년형을 마쳤으나 강제노동수용소로 이감됐다. 그곳에서 틈틈이 티베트의 역사를 벽돌에 새겨 티베트는 중국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을 전하고자 했다. 이것이 발각되어 형기가 추가되면서 총 33년형을 살게된 것이다.
유혈사태를 일으킨 폭력진압, 이제는 재판 없이 사형까지

중국이 발행하는 티베트뉴스를 보면 여러 가지 정책으로 인해 티베트는 발전하고 있으며 삶의 질이 향상되고 있다고 전하는데 최근 폭로 전문 사이트로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위키리스크에 따르면 티베트인을 놓고 중국과 네팔의 뒷거래마저도 일어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중국 정부의 탄압을 피해 티베트에서 네팔을 경유해 인도로 망명하려는 티베트인들을 막는 대가로 중국이 네팔에 재정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이 밖에도 2009년에는 달라이 라마를 지지한다는 이유로 프랑스 회사가 만든 여객기 구입을 취소하며 프랑스 정부를 압박하는가 하면 남아공에는 무역 압박을 가해 달라이 라마의 방문 비자를 취소시키기도 했다.

박소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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