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 미술품 경매사에서 국내 최초 아트 인스티튜트를 설립한 박혜경 대표-
# 박혜경 대표와의 만남을 가지기 위해 들어선 청담동의 에이트 인스티튜트. 부드러우면서도 긴장감 있는 공기, 첨단 장비가 구비된 프라이빗한 강의실, 작품과 서적들이 적절히 어우러진 그곳은 그녀의 섬세함과 열정을 엿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경쾌한 인사와 함께 척 보기에도 에너지가 넘치는 에이트 인스티튜트 박혜경 대표가 들어섰다.
최초, 최초, 최초! 최고가 되고 싶다면 도전을 두려워 하지 말아라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한 박혜경 대표는 대학방송국에서 편성 PD로 활동할 만큼 적극적이고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이다.“당시 인터넷은 물론 이렇다 할 음악ㆍ예술잡지도 없었어요. 세계 유행음악을 소개하고 캠퍼스 내 소식을 전달하는 일이 참 즐거웠죠.”밤을 새며 교지편집 과 대학방송국 일에 매진하며 방학은 반납하고 86아시안게임 등 국제행사시 한국어 방송 일을 하는 등 열정적으로 대학생활을 마친 박 대표.
그녀는 사회생활에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직업을 찾았고, 당시 유수의 대기업 광고홍보팀의 마케터로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딛게 된다. 그녀는“대기업의 광고홍보는 늘 아이템이 바뀌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요구하기 때문에 많은 것들을 접하면서 새로운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어요.”라며 “ 반드시 현장을 살펴보고 그곳의 수요와 반응을 정확하게 읽어내야 하는 것이 마케터로써 첫 번째 자질이예요. 그걸 잊지않으려고 많은 현장을 다녔죠 .”라며 회고했다. 기업에서 그녀는 단과대 교지를 편집하며 캠퍼스 내 여론을 전달하고 소식을 알리는 일을 했던 경험을 살려 사내방송을 만들어냈다. 건설과 유통을 중심으로 하는 회사에서 홍보와 광고를 담당하는 사원으로써 기업의 사내문화를 처음으로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 것이다. 한편으론 사내방송을 만듦과 동시에 보수적이고 통제되어 있는 업계 분위기를 타파하고 창의적이고 활동적인 사내 분위기를 만들고자 유니폼을 벗어야 한다고 주창했고, 그녀의 의지대로 당시 회사에서 유니폼이 사라지게 되었다. 뿐만이 아니다. 우수사원으로 뽑혀 그룹 사보표지에 실리기도 했고 당시 박혜경 대표가 만들어낸 광고는<소비자가 뽑은 좋은 광고 건설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한마디로 탄탄대로였다.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뜻하지 않은 행운이 날아든다. 그룹사보에 나온 박 대표의 사진과 글을 우연히 보게 된 당시 가나아트갤러리에서 “우리 미술계에도 매스미디어쪽에 감각을 가진 사람이 오면 좋을 것 같다.”며 그녀에게 러브콜을 보내온 것. 그룹 내에서 입지를 굳히며 성공가도를 달리던 그녀는 단박에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였다. 이쯤에서 기자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왜? 당시 미술계는 침체일로에 놓여 있었다. 아니 예술의 대중화라는 개념도, 미술시장이라는 개념도 없었다. 업의 개념이 다르고 연봉도 비교가 되지 않았을텐데. 기자의 의문에 돌아온 박혜경 대표의 대답이 걸작이다.“새로운 도전이잖아요!”
# 아직도 어떤 이끌림이었는지 정확히 모르겠다고 말하는 박혜경 대표. 그녀는 다만 30대의 도전으로 새로운 것을 접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결심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녀의 대책 없는 용기를 누가 말릴 수 있을까.
긍정적이고 도전적인 그녀는 어떤 것에든 선입견을 절대 갖지 않는 자세를 가지려고 노력한다고.“미술시장의 개념조차 서 있지 않던 시기였지만 선입견이나 걱정 같은 건 하지 않았어요. 미술계에서도 내가 할 일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했죠.”화랑에 가서 전시를 보고 즐기기만 했던 박혜경 대표였지만 화랑에 입사한 후 박 대표의 태도는 360° 달라졌다.“미술계에 입성해 초기때의 일이었어요. 전시회 준비를 도와주시는 분들이 작가와 작품의 이름은 물론 눈대중으로 그림의 정확한 호수를 짚어내는가 하면 작품이 걸려야 할 위치까지 다 잡아내고 있는 거예요. 큐레이터도, 아트디렉터도 아닌, 작품을 설치하는 작품관리 지원팀의 직원분이었는데도 말이죠. 그때 반쯤 열린 창고 안 가득 실린 미술품을 보면서 소위‘아는체’를 할 만한 그 무엇도 없다는 생각에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어요.”그렇지만 여기서 겁먹을 박혜경 대표가 아니었다.“화랑입사결정후 신혼 여행지를 파리로 정했어요. 거기서 전람회 도록을 처음으로 챙겨왔죠. 첫출근을 하면서부터‘화랑과 미술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아야만 마케팅을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 때문이었어요.”그렇게 전시를 보는 것을 시작으로 그녀의 열정 가득한 미술계 생활이 활짝 열리게 된다.“당시 대기업출신으로 화랑에 온 경력사원은 처음이었고 당연히 파격적인 입사였어요. 거기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전 제 몫의 역할을 하는 직원이 되고 싶었어요. 퇴근할 때마다 화집을 싸들고 집으로 향했죠. 먼저 작가이름과 작품의 이름을 외우고 딱딱한 평론을 모두 읽어댔어요. 쉬는 날에도 남편과 전시회를 열심히 다녔죠.
# 그렇게 3년 반 동안 그녀가 화랑에서 한 일은 기업에 미술품을 추천하고, 판매하는 일이었다. 기업이 어떤 상황에서 돈을 쓰고 어떤 상황에서 예산을 결심하는지 그 생리를 잘 알고 있었던 그녀였기에 맡은 바 최선의 기획을 할 수 있었다. 또한 기업에게 어필할 수 있고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하는 것이 가능했다. 당시 대주주가 매스미디어 분야 감각을 가진 자가 필요하다고 했던 말은 바로 이런 것 때문이었으리라.

# “미술품경매장면이 나오는 모든 영화를 수집해서 섭렵하기 시작했어요. 미술품 경매시장은 본격화되기 전이었고, 일상용품에 미술을 접목한 아트상품이라는 것도 막 생겨나기 시작한 때였죠. 격변의 시기에 미술계에 발을 들였기 때문에 더 많은 기회를 접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열정으로 똘똘 뭉친 도전정신을 겸손함으로 조심스레 내려놓는 그녀.

# 쉴 틈 없이 달려오던 그녀는 늦깎이로 부장시절에 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했다.“공부를 하며 의아했던 것은 현장과 이론을 연결하는 어떤 과정이 절실히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국내상황은 교육시스템이 부족하다는 점이었어요.”
미술시장은 2006년부터 2007년까지 상당한 호황세를 누렸다. 주식시장의 유동성이 미술시장으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미술품을 실물자산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미술품담보대출의 시대까지 열렸다.“경매사 외에 미술시장의 또 다른 참여자로서 독립적인 일을 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있을까 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어요. 점점 커가는 세계적 미술시장에서 한국미술을 알릴 수 있는 이들이 필요하지 않겠어요?”2009년, 그녀는 미술시장에 온 이후 처음으로 장기휴가를 내어 두 달 동안 미국의 9개 도시를 돌며 미술관과 작가의 스튜디오 등을 돌아다녔다. “‘선진국들은 정말 미술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컨텐츠와 인프라가 구축되어있구나. 한국도 언제가 필요한 시대가 올거다’라는 것을 느꼈어요. 결국‘미술의 현장과 이론, 아티스트와 개인,기업을 연결해주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내 회사를 갖고 싶다’라는 생각을 굳히게 됐죠.”
뛰어난 강사진, 창의적 교육방식, 특화된 커뮤니티-삼박자의 에이트 인스티튜트
“많은 분들이 우려를 했어요. 편안하게 화랑이나 열지 그랬냐고. 그러나 현재 미술시장에는 사회의 다양한 분야와 소통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그 ‘가교’의 역할을 하고 싶어요. 누군가는 시작해야 하는 일이지 않을까? 소신을 가지고 도전한 일이며 아직도 저는 도전이 즐겁습니다.”
에이트 인스티튜트의 교육프로그램을 경험한 이들은 70%이상 재수강을 한다고 한다. 미술시장이 보다 객관화되고 산업화 되려면 거기에 맞는 좋은 인력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미술계의 정점에 서 있으면서도“미술문화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진정한 조력자가 되려면 저를 포함한 미술 종사자들은 항상 공부를 해야 하고 기회를 나눠야 한다고 생각해요.”라며 자만하지 않는 박혜경 대표. 신념을 잃지 않는 열정으로 미술계와 대중간의 가교역할을 톡톡히 해낼 박혜경 대표와 에이트인스티튜트의 앞날에 건승을 빈다. <NP>
박소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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