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삶을 투영한다.
“전통춤의 독창성과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고 싶다”
중요무형문화재 제97호‘이매방 살풀이’이수자로 국립무용단과 국악원, 그리고 한국의 집에서 안무자, 예술감독의 자리를 거치면서 춤이란 춤을 모두 섭렵한 그녀. 홍금산 무형문화재를 반포의 홍금산 무용원에서 만났다. 억! 소리 나는 춤에 관한 그녀의 수많은 이력을 차치하고, 그녀는 그저 아름다움 그 자체로 여겨졌다. 새까만 옷을 입고 곱게 기자를 맞이하는 그녀의 모습에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그녀는 예술인으로서, 그리고 여인으로서 너무도 아름다웠다.
# 어딜 가나 주목받는 예쁜 아이

@ 곁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바라본 그녀는 아름답다는 말로는 설명이 어려운 모습이었다. 하얗고 조그마한 얼굴에 큰 눈동자, 새빨간 입술까지 어디를 봐서도 그녀의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신비함까지 더해 묘한 느낌을 풍겼다. 조근조근 인터뷰에 응하던 그녀는 가녀리고, 새침할 것만 같았던 첫인상과는 다르게 선한 웃음이 얼굴 가득 번졌다.
# 타고난 재능, 부모님의 영향이 컸다.
나의 재능은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았는데, 아버님께서 그림을 잘 그리셨고 글도 잘 쓰셨다. 어머니는 무척 미인이셨는데, 목소리가 너무 예쁘셔서 방송에도 출연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렇게 부모님께서 모두 예술적으로 재능이 있으셨던 것 같다. 감사하게도 나는 부모님의 그러한 재능을 모두 물려받았다.
# 중학생 때, 이미 두각을 드러내...
정식으로 무용을 배우게 된 것은 부모님의 추천이 큰 역할을 했다. 당시 김백초라는 유명한 무용가에 무용을 가르치고 싶어 하셨다. 그 분의 학원이 종로 낙원상가에 있다고 해, 수소문해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대신 정무현이라는 스페인 남방춤을 하는 분이 운영하는 학원에서 스페인 춤과 한국무용을 조금 배웠다. 그러다가 중학교 2학년 때 이모님께서 신무용의 대가이신 조태근 선생님의 부인이신 김문숙 선생님을 소개해주셨다. 김문숙 선생님의 무용학원에서 무용을 전문적으로 배웠다. 그렇게 춤의 길로 들어섰고,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국립극장에서 했던 국빈을 위한 무대에서 공연을 했었다. 내가 처음 김문숙 선생님 학원에 들어가서 1달 남짓 있을 때에 김문숙 선생님께서 학원에 오셔서 나를 보시더니,“얘 누구니 예쁘다”고 하시더니, 그러고 얼마 안 지나서 바로 코리아하우스 무대에 서게 하셨다.
# 선택받은 재능, 나는 늘 하느님께 감사하며 산다.

# 슬럼프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정신없이 춤만 췄다.
항상 주인공 역할이었기 때문에 분량이 많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춤을 췄다.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춤을 췄다. 나는 사람들과 어울려 놀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한두번은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도 했었지만, 나에게는 익숙한 일이 아니었다. 그 시간을 연습하는 시간으로 써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79년부터는 학원 수업을 해야 했고, 80년부터는 한국의 집 안무자로 활동했으니, 정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몸과 마음을 온전히 춤에 바쳤다. 꿈에서도 안무를 짰으니 말 다했지 않나? (웃음) 정말로 나는 춤 이외에 다른 나의 삶을 살아보지 못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주말에는 각 분야의 대가들을 찾아가거나 모셔서 춤을 배우곤 했다. 또 시간 조정이 어려워질 때면 새벽에라도 선생님을 모시고 춤을 배우고 익혔다.
# 속옷까지 흠뻑 젖도록 연습에 또 연습을 해왔다.

# 온전히 작품 속의 인물로 살았다.
국립무용단에서 춘향전에 춘향이 역을 했었다. 그때 감격스러운 장면이 많이 있었고, 실제로 내가 연기력도 좋았던 것 같다. 이도령과의 이별 장면에서는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춤을 췄다. 온전히 몰입해서 그 작품의 그 인물이 되었던 것 같다. 어떤 작품에 어떤 인물이었든 나는 작품 속에 그 사람으로 살았다. 이럴 수 있었던 것은 춤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잠을 자면서도 춤을 췄으니, 내가 얼마나 춤을 사랑하는지 생각할 수 있지 않겠나. 동생과 한방을 썼었는데, 어느 날 동생이 그랬다.“언니 자면서 춤을 추더라”는 거였다. 내가 바쁠 때에는 잠을 거의 자지 못한 채, 춤을 췄었다. 아마도 당시에도 꾸뻑꾸뻑 졸면서 춤을 췄던 것 같다.
# 땅에 뿌리박은 대지의 흐름이 느껴진다.
정확하게 몇 개국인지는 세어보지 않았지만, 100여개국 정도 공연을 했다. 해외에 나가면 항상 살풀이춤을 주로 췄었고, 춘향전도 공연을 했다. 특별한 한 가지만 언급하자면, 국립국악원 예술단원일 때 파리 가을 축제에 총 예술 감독이었던 마르코비치가 우리 춤에 대해서 언급한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그는 우리의 춤을 두고‘가장 예술적인, 마음의 춤’이라 언급했었다. 그 축제에서 31년 만에 한국을 초청해서 한 달 동안 한국의 소리 악기 연주 춤 모든 우리의 전통 예술을 선보였다. 우리 국립국악원 무용단이 개막과, 폐막식을 맞게 되었다. 우리가 우리의 전통을 가장 잘 지키는 무용단으로서 전 세계에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국립무용단 당시에도 국제 민속 예술제에는 매년 참여했었다. 그 중에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바르셀로나 국제 민속 예술제인데, 당시 31개국이 참가했었다. 그 중에서도 소련과 우리나라가 메인스테이지에서 30분씩 공연을 했다. 그것은 우리의 춤을 인정받았음이 증명된 것이다. 당시 소련의 춤은 기계적인 힘의 춤이라는 평가가 이어졌고, 반면 우리는 마음을 담은 예술 무용으로 인정받았다. 극과 극의 평가가 이어졌던 것 같다.‘서구의 춤이 중력의 한계를 벗어나 비상하려 한다면, 느리고 묵직한 한국의 춤은 땅에 뿌리박은 대지의 호흡이 느껴진다’고 당시 언론에 소개되었다.
# 감정의 춤이라 불리는 살풀이춤

# 젊은 세대들이 전통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역사적으로 침략을 많이 받아서, 우리 전통의 춤과 음악을 즐길 수 없었던 배경이 있었지만 60~70년대 새마을 운동을 거치면서 문화예술의 부흥을 맞았다고 본다. 이제는 우리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음에도 아직도 우리의 춤과 소리를 접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내 생각이지만, 우리의 춤과 노래를 접하고 살아온 분이 10%나 될지 모르겠다. 국립국악원에서도 20~30년 전에는 노령층이 찾아오곤 했는데, 이제는 우리 전통 공연을 보는 연령층이 어려졌다. 아무래도 상당한 저변확대가 이루어지지 않았나 생각한다. 주말에는 젊은 부부가 아이들을 데려와서 공연을 보는 경우도 많고, 남녀노소, 학생들, 아이들까지 다양한 이들이 공연을 보러 온다. 대보름, 명절, 단오날 등 특별한 날에는 기획공연을 하는데 이러한 공연은 거의가 만석이다. 과거에 비해 저변 확대가 이루어진 것이다.
# 1년에 200~300개의 공연, 관심이 필요하다.
지금 내가 국립국악원 퇴직한 지 2년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내가 예술감독으로 재직했을 때에는 매년 200~300개의 공연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1년에 100회 내외라고 알고 있다. 물론 이는 무용단의 공연에 한한 내용이다. 국악원 전 공연은 아직도 200~300회 정도라고 알고 있다. 상당히 많은 공연을 하는 것이다.
# 우리 예술가들의 설자리 마련을 위한 지원 절실

# 죽을 때까지 배우겠다.
지금도 밤낮 없이 하루에 몇 시간이고 연습을 하고 있다. 또 시간이 나면 각계의 선생님들을 모시고 지도를 받고 있다. 아울러 광림무용인선교회를 만들어 찬양과 더불어 다양한 장르의 춤을 지도하고 배우고 있다. 최승희 선생님의 검무나 양산의 사찰학춤 등 이제까지 열심히 추지 않았던 다양한 분야의 춤도 선생님들을 모시고 부단히 배우고 있다. 죽는 날까지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 우리 고유의 춤, 세계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
이렇게 좋은 우리의 춤을 널리 자라나는 새싹들부터 주변의 모든 한국인들에게 널리 소개하고 배우게 해서 우리의 춤을 사랑고 동참하게 했으면 좋겠다. 그러한 취지로 지금 홍금산 무용원을 만들었다. 현재 전통에 대한 배려와 인식이 나빠지고 있는 상황에서 전통춤을 전공하려는 이들이 많이 사라지고 있다. 또, 많은 전통이 퓨전화 되면서, 전통 고유의 모습이 사라지고 있다. 퓨전극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작품은 순간적인 쾌락을 전해준다면 우리의 전통 공연은 오랜 시간 감동을 전해준다. 이렇게 좋은 전통 공연을 지키기 위해서 좀더 많은 지원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춤이 세계로 전해져 세계적으로 정상에 우뚝 설 수 있도록 되었으면 한다.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각계의 지도층분들이 우리 전통에 대한 인식을 하여 좀더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NP>
이민선 기자
dalpangee@inewspeople.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