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교토‘단바망간기념관’-
일제 식민지 지배와 전쟁 피해를 기억하고자 지어진‘단바망간기념관’

“단바망간기념관은 내 무덤이다. 조선인의 역사를 남기는 곳이다”-故 이정호 씨
300미터에 약 40분이 소요되는 갱도 안의 견학 코스를 따라가면 당시 망간을 채취하는 조선인들의 모습이 마네킹으로 재현되어 있다. 조선인들뿐만 아니라 인도의 카스트제도를 방불케 하는 이른바‘피차별부락민’으로 차별받았던 일본인들도 이 광산에 피땀과 눈물을 적셨다. 다이너마이트 발파부터 채굴과 운반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사람의 힘에 의존했던 노동 조건에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다. 발파작업 등 위험도가 높은 작업은 거의가 조선인들에게 맡겨졌고 갱도 바깥에는 조선인 노동자와 가족들이 생활하던 집단 합숙소인‘함바’가 당시의 풍경을 전해주고 있다.‘함바’안에는 곱게 저고리를 입은 여성 마네킹이 허기를 채우려 몰려든 광부들을 부엌 한 켠에 서서 바라보고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중노동에 변변한 장례도 없이 묻혀간 조선인들, 진폐증으로 평생을 불우하게 죽어간 우리 조선인들, 해방된 뒤에도 미처 현해탄을 건너지 못한 조선인들, 일본 사회의 차별과 배제에 맞서 꿋꿋이 살아온 조선인들. 이 광산에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우리 역사가 바로 어제 일처럼 곳곳에서 배어난다. 20년 이상 변변한 재정 보조 없이 한 재일조선인 가족이 운영해오던 이 기념관은 여러 차례 폐관의 위기를 거치면서도“조선인들의 한의 역사를 남겨야 한다”,“단바망간기념관은 내 무덤이다”라는 초대관장 故 이정호씨의 유언과 그 가족들 특히, 아버지의 뜻에 따라 기념관 일을 도맡게 된 차남 이용식 관장의 굳은 결심으로 어렵사리 지켜져 왔다.
“차별의 역사와 싸우다 돌아가신 아버지께 이 책을 바친다”-이용식 관장
기념관을 잠시 폐간하며 출간된 이용식 관장의 저서‘재일조선인 아리랑’(원제:단바망간기념관 7300일, 20만 방문자와 함께)에 이 관장은 다음과 같은 술회로 글을 마치고 있다.
“단바망간기념관의 창시자인 제 아버지 이정호 씨는 어린 나이에 일본과 한국으로 어머니와 생이별을 하고 평생 단 한 번도 그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열여섯 살부터 광산에서 일하기 시작해, 해방 후 25년이 지나서는 진폐증에 시달렸고, 강제 부역의 역사를 남기고자 마지막 남은 모든 힘을 다해 이 기념관을 건설했습니다. 일본인으로 귀화하고 일본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고 공존하는 것, 자신이 변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을 변화시키는 것에 도전하며, 재일조선인이 있는 그대로 민족의 자긍심을 갖고 차별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사회, 그 자손들도 다름을 인정받으며 살 수 있는 사회를 이루는 것이 아버지의 염원이었을 것입니다.(중략)아버지께서‘가령 공격을 받아 죽더라도 뒤로 쓰러지지 말고 앞을 향해 쓰러지며 죽자’라는 말씀을 입버릇처럼 하셨습니다. 일본 전후의 역사, 차별의 역사와 싸우다 돌아가신 아버지께 이 책을 바칩니다”
한 조선인 광부 일가가 광산을 전전하며 개척해온 삶은 가난과 차별에 맞서며, 동시에 조선인으로서의 뿌리와 긍지를 지키려 했던 당연하고도 숭고한 몸부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교토 단바 지방의 망간 광산에서 이 가족이 체험해 오고, 목격하였던 일본에 의한 차별과 가해의 역사는 우리 모두의 역사이다. 포대기에 감겨 현해탄을 건너간 재일동포 1세 故 이정호 씨가 학교에서 광산에서 생활 곳곳에서 피식민지 백성으로서 받은 차별과 수난은 삼남 이용식 씨가 어른이 되어서도 비껴갈 수 없었던 것 같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받았던 학교에서의 차별, 입주 차별, 취직 차별, 외국인등록증을 휴대하지 않았다는 명목으로 받은 장시간의 취조, 기념관 쇠사슬을 절단하고 무단 침입한 경찰의 행태 등등. 이러한 부당한 경험들은 비단 이 가족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광산을 둘러싼 조선인들의 비참한 삶과 허망한 죽음을 목격해온 부자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 체험자들을 찾아내고 증언을 기록하였으며 이를 통해‘돈벌이 하러 온 것이다’,‘강제연행이 아니었다’는 일본인들의 주장을 반박하였던 것이다. 이용식 관장은 저서를 통해 겉으로는‘모집’이라는 명목 아래 노무 동원이 이루어졌다고 할지라도, 경찰이 배후에서 관리하고 있었고 조선인에 대해서는 일본인에 대한 동원과는 질적으로 상이한 강제력이 작용했다고 주장한다. 강제 동원된 것도 모자라 전쟁 후에는 이산가족, 생사 불명, 유골 방치 등의 비참한 결과들이 광범위하게 발생했던 사실들을 상기하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진폐증과 싸우며 조선인들의 역사를 망간 광산에 아로새기리라 결심”-故 이정호 씨
2009년 5월 누적된 적자로 아쉬운 폐관
조선인들의 역사를 지키고 이슬처럼 사라진 한스러운 영혼을 위로해야 한다는 한 재일조선인 가족의 소박하고도 굳은 의지가 없었다면, 일본 땅에서‘단바망간기념관’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2009년 5월 말, 누적되는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폐관하고 말았다. 근방에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기념관 앞을 통과하는 국도의 교통량이 현저히 감소하였고 헌신적으로 일하던 故 이정호 씨의 부인이 고령으로 쇠약해지면서 새로운 인건비가 발생하는 문제 등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일본 사회의 전반적인 우경화와 일본인들의 일제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이 희박해지면서 방문자의 발길이 뜸해진 것이 주된 원인이었다.
단바망간기념관 재건을 향해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단바망간기념관’의 존재가 보도되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폐관 소식이 전해지면서였다. 재일조선인 2세인 이용식 현 관장은 일본 사회 뿐 아니라 이번에는 한국 사회를 향해서도 기념관 재건을 향한 강한 희망과 도움을 호소했다. 일본 내에서도 재일동포들을 중심으로 기념관을 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지난 2010년 6월에는 교토에서는‘단바망간기념관 재건위원회’가 발족되었다.
<단바망간기념관 재건 한국추진위원회 실행위원장 황의중 선생 인터뷰>
Q.‘단바망간기념관’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Q.‘단바망간기념관 재건 한국추진위원회’의 활동에 대해 알려 달라.
A. 알다시피 2009년 5월,‘단바망간기념관’은 폐관이 되었다. 재건을 위한 운동이 일었고‘단바망간기념관 재건 추진위원회’가 발족되었으며 재개관을 위한 성금을 모으기 위해 천명의 회원을 모으기로 계획했다. 그 결과1,435명의 회원이 모였고, 지난 6월 26일 일요일, 드디어‘단바망간기념관’은 재개관 했다.
Q. 천 명 모금운동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모금운동을 펼쳤나.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일본에서는 2010년 초에, 한국에서는 지난해 11월에 재건축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기본적인 비용만이라도 보태고 싶은 마음에 천명 회원 만들기 운동을 시작했다. 학생들과 대학로에서‘100명 후원 가입대회’도 열고, 서울시에 사정사정하여 지하철에 포스터도 붙이고, 국회 앞에서 회원가입 운동도 했다. 그러나 약속한 천명의 회원을 모으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개관은 코앞으로 다가오고 아무리 노력해도 회원은 늘지 않고...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그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우리 학생들이 제 힘으로 기적을 일으켰다.‘단바망간기념관’의 재건축에 열정을 쏟던 한 학생이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올렸고 그 글이 삽시간에 퍼지고 퍼지면서 누구나 알만한 사이트의 베스트 게시물로 올랐다. 하루사이에 백 여 명의 회원이 늘어났고 조회 수가 14만이 넘어섰다. 천 명의 회원을 만드는 한편의 드라마를 본 듯 했다. 안타까운 것은 그 글을 읽은 수많은 사람 중에 우리 어른들이 아닌 젊은 학생들이 앞장서서 모금운동을 펼쳤다는 것이다. 어른들에게는 힘든 경제상황 속에 또 하나의 힘든 일이 생겼을 뿐이었지만 순수한 젊은 학생들은 역사 속에 감춰진 소중하고 중요한 문제임을 깨닫고 진심으로 응원을 보내주었다. 또한 학교 구내식당에서 일하는 조선족 분들이 초기회원으로 다들 가입해 주었다. 어려운 사람이 어려운 사람을 도운 것이다. 아울러 한나라당의 김정권 의원이 100여명의 회원을 모아주었고 재건위원회의 공동대표로 있는 남경필 유통위원장, 강창일 의원, 자유선진당 정책위원장인 박선영 의원도 많은 힘을 보태주었다.
Q.‘윤도현 밴드’와의 인연이 궁금하다.
A. 영국에 있던‘윤도현 밴드’의 팬 중 하나가‘단바망간기념관’의 현실을‘윤도현 밴드’측에 알렸고, 만남이 이루어졌다. ‘윤도현 밴드’는 재개관에 관한 시설비용으로 지난 해 11월에 자선공연을 열었고 그 수익금을 모두 기탁해 주었다. 너무 고마운 일이다.
Q.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일본에서 모금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솔직히 부끄러운 자신들의 역사에 호응을 할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단바망간기념관’은 우리나라가, 우리국민이, 우리 손으로 지켜 내야 할 역사의 증거이다. 현재 모금한 돈은‘단바망간기념관’이 일 년을 운용할 수 있을 정도의 액수일 뿐이다. 현재 재개관 이후 가입회원은 37명 뿐이다. 한 달에 오천 원이라는 돈을 투자해서(학생은 3천원)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로잡을 수 있다면 뿌듯하고 보람 된 일이지 않겠는가. 후원회원 모집은 계속하고 있다.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린다.
‘강제징용이라는 가해의 역사를 먼저 일본인들이 알아야 된다’고 끊임없이 외쳐왔던‘단바망간기념관’.나라나 단체가 나서 할 일을, 한 개인과 가족이 모든 것을 바쳐 지켜왔는데, 같은 민족으로 아무 것도 모른 채, 작은 도움도 주지 못했다는 부끄러움. 이 부끄러움이 우리 모두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역사 자체가 점차 희석되어가는 세태에서 이것마저 파묻혀 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 정부가 나서서 만들 리도 없고, 한국 정부나 단체가 만들고 싶어도 만들 수 없는 이 기념관을 이대로 사라지게 놔 둘 수는 없는 일이다. 몰랐다면 모르나 알면서도 우리사회가 이 작은 기념관 하나를 지켜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일본을 향해 역사 문제를 운운할 체면을 잃게 된다. 반드시 지켜내야만 한다.‘단바망간기념관’은 강제징용이란 역사를 무기로 일본을 성토하는 곳이 아니라, 재일조선인과 일본 사회, 우리와 일본의 진정한 화해를 위해서는 먼저 일본인들이 강제징용이란 가해의 역사를 알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소박하고도 정당한 주장을 묵묵히 내고 있는 곳이며 사람과 진실에 대한 사랑, 역사와 정의에 대한 믿음이란 큰 물 안에서 강제징용의 아픈 역사를 만나고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곳이다. 故 이정호 씨와 現 이용식 관장의 뜻과 정신을 존경하며‘단바망간기념관’의 소박하고 정직하고 든든한 정신을 지지한다. 그리고 이‘단바망간기념관’의 정신이 점차 널리 퍼져,‘단바망간기념관’이 세계의 명소 중 하나로 자리하게 되는 꿈을 꿔 본다. <NP>
최종 목표는 일본 정부(지자체)가 한일 간의 역사문제에 대한 진정한 자세변화를 바탕으로 기념관의 공공성을 인정하고, 정식 예산반영을 통해 운영비를 지원하게 유도하는 것이다. 이 날이 올 때까지 우리 국민들의 진실한 뜻을 모아 일본정부에 전달하고자 한다. 모든 국민의 관심과 협조를 부탁한다. (www.tanbamangan.net 제2차 연도 후원회원 모집 중)
박소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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