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델센터 회장, 패션프로듀서 도신우 회장-

세계 최초로 열린 이집트 피라미드 앞 특설무대에서의 앙드레김 패션쇼, 건설 이래 최초로 열린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앙드레김 패션쇼, 앙코르와트사원을 배경으로 세계최초로 개최된 앙코르-경주 세계문화엑스포의 앙드레김 패션쇼 등 세계적으로 거론되는 문화유적지에서의 패션쇼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열리는 패션관련 복합문화행사를 비롯해 중국에서 개최된 한국문화관광축제 및 글로벌 뮤직 쇼케이스 등 국제적인 복합문화행사와 접목된 패션쇼를 기획하여 30년 동안 1,000회 이상의 총연출 및 총감독을 맡아 온 이가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독보적인 패션문화이벤트 플래너이자 세계적인 패션 역사를 엮어가는 프로듀서인 모델센터의 도신우 회장을 만나 보았다.

Q. 故 앙드레김 선생과의 특별한 인연으로 유명한 것으로 알고 있다

▲ 故 앙드레 김 선생과 함께
A. 1969년 처음으로 모델 활동을 시작했을 당시 앙드레김 선생님은 디자이너로서 입지를 다지며 국내에서 탄탄대로를 달리고 계셨습니다. 디자이너와 모델로 처음 만났으나 그때까지 결코 각별한 사이는 아니었죠. 당시 무명이던 저와는 달리 유명한 디자이너였던 앙드레김 선생님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분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1982년에 사단법인 한국인모델협회 4대 회장을 역임하게 되었고 인사를 드리고자 찾아가 뵙게 되었습니다. 흔쾌히 만남을 수락한 앙드레김 선생님을 찾아갔을 때, 선생님은 패션쇼 기획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계셨어요.“자선행사인만큼 꼼꼼하고 제대로 된 패션쇼를 올리고 싶은데 호흡이 맞는 사람이 없다”며“패션쇼의 전체적인 연출을 도와줄 수 있겠느냐”라고 제의를 하셨습니다. 그때도 지금도 제가 제일 잘 하는 일이자 잘 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당연히 돕겠다고 말씀드렸고 그때부터 앙드레김 선생님의 거의 모든 패션쇼에 프로듀서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30여 년을 비즈니스 파트너로 호흡을 맞추게 된 것입니다.

Q. 故 앙드레 김 선생의 타계에 충격이 컸을텐데?
A. 정말로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입니다. 10년 이상은 아니 그 이상 더 일하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현역에서 뛰시며 자랑스러운 한국을 더 알리실 수 있었는데...너무 일찍 돌아가셨어요. 대한민국이 탄생시킨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기까지 역경도 많았고 고생도 많이 하신 분입니다. 그 기간에 비하면 자신의 브랜드를 런칭하여 세계에 알리고 대중의 사랑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깝습니다.‘김복남’이라는 친근한 본명이 알려지면서 진솔하다는 평가와 함께 국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음과 동시에 세계 어느 디자이너도 그렇게 많은 아이템에 관한 라이센스를 가지고 있지 않을만큼 다방면에 열정과 재능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창의적이고 한국적인 디자인으로 전 세계적으로 패션한류를 펼친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패션정신과 열정, 그리고 30년을 함께 한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존경하는 그분이 좋은 곳에서 편히 쉬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Q. ‘청년 도신우’는 어떤 사람이었나

▲ 모델센터 도신우 회장
A.‘모델’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을 때부터 저는‘모델’이었습니다. 제가 모델 활동을 처음 시작하던 시절에는 남자모델에 대한 인식은 상당히 편협했습니다. 여자모델 조차도 색안경을 끼고 보던 시절이니 남자모델에 대한 시선은 더 좋지 못했죠.‘이상한 놈이다, 미친거 아니냐’는 말을 여러번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저는 옷이 너무 좋고, 옷 입는 것을 너무 좋아하는‘옷에 미친놈’이었습니다. 당시 전국 명문고등학교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던, 한 해 서울대학교에만 3백여명을 진학시키기로 유명했던 경복고등학교가 저의 모교입니다. 그런 보수적이면서도 명문인 학교에서 나름 공부를 곧잘 하던 학생이 명문대 진학은 뒷전이고 모델을 한다고 나섰습니다. 고등학교 친구들은‘경복고등학교의 수치다’,‘체면을 무너뜨렸다’며 요즘 말이 많던‘해병대 기수열외’처럼 저를‘왕따’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아랑곳 않고 모델활동을 시작하였고 고등학교 친구들은 한동안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만나고 싶어도 다들 제 연락을 피하고‘바쁘다’고 핑계를 대며 만나주지 않아 얼굴도 볼 수가 없었죠. 그러나 저는 한순간도 외롭지 않았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제가 미쳐있는,‘모델’이라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하늘이 내려주신 직업, 天職이라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왔습니다. 요즘은 그때 연락이 끊겼던 친구들과 가깝게 지내고 있습니다.‘인생을 살아보니 네가 제일 부럽더라’,‘근사하고 화려한 패션쇼, 좋은 옷들, 멋진 사람들과 함께 하는 네가 제일 좋아 뵌다’고 말을 합니다. 살면서 지금까지 제가 선택한 모델이라는 직업을 단 한번도 후회해 본적이 없습니다.

Q. 모델이 왜 그렇게 하고 싶었나

▲ 모델센터 모델들과 함께
A. 모델을 시작한 것은 제 취미 때문이었습니다. 옷을 갈아입는 것이 제 취미였죠. 가방에 책은 없었어도 옷은 몇 개씩 들어 있었을 정도니까요. 한 여름에 땀이 나면 그것을 참지 못하고 싸들고 온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상황에 맞추어 그때 그때 옷을 갈아입는 일이 너무도 즐거웠습니다. 요즘이야 차가 있어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겠지만 당시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매일 옷을 싸들고 등교를 했습니다. 당시는 맞춤복 시대였기에 옷을 사기 위해서는 양복점에서 사이즈를 재어 자신의 몸에 꼭 맞는 옷을 맞춰야만 했습니다. 아니면 동대문 시장에 가서 원단을 끊어다 두 세 번의 가봉을 거쳐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지금처럼 프리 사이즈나 기성 사이즈가 나와서 아무나 가서 입어보고 맞으면 사서 입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죠. 말 그대로‘나만의 옷’을 만들어 입고 자신의 몸에 꼭 맞게 옷을 재단하던 시대였기에 다른 사람이 입던 옷을 사지도, 팔지도 않았습니다. 명동을 기준으로 양복 한 벌에 17,000원에서 20,000원씩 했었습니다. 당시 대기업을 다니던 회사원의 계약초봉이 1만 5천원이던 시대였으니 어마어마하게 비싼 것이었죠. 어린 저는 그만큼 큰돈을 주고 옷을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남자모델들의 최초 클럽인‘왕실모델클럽’을 만들어 모델일을 하게 되면서 무려 열 벌이 넘는 양복이 생겼습니다. 쇼가 끝나면 제가 입었던 옷을 모두 저에게 주었기 때문이죠. 디자이너들도 모델의 몸에 꼭 맞게 옷을 제작했고, 저만이 입을 수 있는 옷이었기에 팔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좋은직업입니까? 제가 좋아하는 옷을 입고 무대를 멋지게 걸어 나가면 이 옷이 나의 것이 되는 것이죠. 너무 좋았습니다. 너무 행복했습니다. 셔츠, 넥타이, 구두, 심지어는 양말도 주었습니다. 게다가 개런티도 따로 나왔습니다.‘이 일보다 좋은 직업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생각했었죠.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의 천대와 곱지 않은 시선에 부딪혀 전문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취미활동으로만 모델일을 했었습니다.

Q. 본격적으로 전문 패션프로듀서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있다면?
1973년 런던에서 열린 IWS패션쇼가 저의 인생을 바꿔 놓았습니다. IWS는 국제양모사무국(國際羊毛事務局, International Wool Secretariat)의 약칭으로 영국 런던에 본부를 두고 전 세계 24개국에 지부가 있으며 울 제품의 품질 관리에서부터 패션까지 다각적인 활동을 하는 조직을 말합니다. 그 해 IWS패션쇼에는 전세계에서 내로라하는 모델들이 모두 참여를 했습니다. 저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남성모델 중 하나로 참석을 하게 되었죠. 제가 스물아홉이 되던 해였습니다. 그때는 해외에 나가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었습니다. 여권을 만들기도 상당히 어려웠지만 김포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하루를 잔 후 미국 령 알래스카에서 또 하루를 자고 런던으로 가야하는 등 교통도 상당히 불편했을 때입니다. 그렇게 도착한 영국은 다른 세상이었습니다.‘모델’이라는 직업에 대한 대우자체가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엄청난 개런티는 물론이고 공항차량, 숙식, 비행기까지 모두 지원받았습니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패션쇼에서는 모델들이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고 자신에게 배정된 옷을 입고 자신이 생각한 적정한 시간에 걸어나가 쇼를 한 후 돌아와 또 혼자 옷을 갈아입는 시스템이었습니다. 다음 모델이 준비가 덜 되었을 때는 런웨이를 한번 더 도는 일도 다반사였죠. 영국은 달랐습니다. 모든 직업군들이 모여있었습니다. 스타일리스트, 헤어담당, 조명담당, 사운드 담당, 모델 매니저 등등 각각의 분야별로 나뉘어져 각 분야를 담당하는 전문가들이 프로패셔널 한 모습으로 자신의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상당한 컬쳐쇼크를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일본인 모델은 50이 넘은 중년이었습니다. 우리나라보다 모델이라는 것을, 패션이라는 것을 빨리 시작한 것이죠. 일본인 모델은 우리나라 모델업계의 당시 실정을 듣더니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제게 위로를 해 주었죠.‘당신네 나라도 패션과 모델세계는 굉장히 발전할 것이다. 두고봐라’,‘선택받은 사람이며 선택받은 직업이다’라고 용기를 북돋워 주었습니다. 어안이 벙벙한 채로 패션쇼를 끝낸 후 영국 현지 모델의 집에 초청받아 가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동양에서 온 촌놈이 신기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구경도 못해봤던 벤츠를 끌고 와 풀장이 딸린 궁전 같은 저택으로 데려갔고 이 모든 것이 모델 일을 하며 이룰 수 있었던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 굉장히 착잡했습니다. 한국은 언제쯤 모델업계가 발전할 수 있을런지... 그러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신의 계시가 아닐까?’라는. 타고난 신체조건과 외모로 모델을 하게하고 발전된 외국의 모델세계를 접하게 한 이 모든 것이 신의계시인가보다. 전문적인 직업으로 이 세계를 연구하고 발전시켜 나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Q. 당시 한국에서 생소한 직업인 패션 프로듀서의 길에 어려움이 많았으리라 생각된다.
가장 시급한 것은 문화의 교류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모든 문화의 콘텐츠는 일본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당시 명동에는 외국서적을 파는 조그마한 서점이 있었습니다. 매일 그곳에 출근하며 무수한 패션잡지를 읽으며 공부를 시작 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모델들과 패션 프로덕션 관계자들을 알아보기 시작했죠. 당시 일본의 경우 모든 분야가 세분화되어 조직적이고 전문적으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에서는 역부족한 일이었기에 세분화 된 분야들을 종합적으로 이끌어 낼 방안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결심이 서자마자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일본의 모델들을 사귀고, 프로듀서들을 사귀며 발을 넓혀갔습니다. 그들을 친구로 만들었죠. 그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의 패션쇼를 감상하고 전문적인 영역을 하나씩 배워 나갔습니다. 무대를 만드는 장면을 보며 어떻게 만드는지, 어떤 사람이 만드는지, 보고, 듣고, 카메라에도 담으며 잠도 자지 않고 음향세팅, 조명세팅, 모델들의 워킹 등등을 머릿속에 그리고 카메라 속에 담아냈습니다. 스타일리스트의 일은 어떤 것인지, 헤어와 메이크업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까지. 어깨너머로 도둑공부를 하며 하나씩 배워나갔습니다. 국내로 돌아와 그렇게 하나하나 배워 온 것을 토대로 관련 업자를 불러 다시 교육시켰습니다. 처음해 보는 것이라며 거부하던 업자들을 설득해 새로운 것들을 하나하나 주입시키고 새롭게 만들어나갔습니다. 조립부터 설치, 철거까지. 모델들의 트레이닝과 워킹 그리고 패션쇼까지. 그렇게 배우고 경험한 것들을 바탕으로 1984년에 모델센터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Q. 한국의 패션을 세계에 알리는 패션 대사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앞으로의 행보는?

A. 과찬이십니다. 패션쇼를 통해 우리의 문화를 해외에 전파하는 역할은 앙드레김 선생님이 많이 하셨습니다. 해외패션업계에 관한 경험을 말할 때, 앙드레김 선생님과 함께 했던 여러 형태의 패션쇼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1996년에 이집트 스핑크스, 피라미드 앞에서 했던 패션쇼와 2002년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사원 앞에서 했던 패션쇼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그분은 한국적인 미를 최대한 표현해낼 수 있는 장치와 무대와 조명 등에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패션쇼가 최고로 진행될 수 있도록 뒤에서 힘을 보탠 것 밖에 한 일이 없습니다. 이제 선생님의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나라의 미를 세계에 전파하는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번 달 중국 광서 텔레비전에서 개최하는 10개국 아시아 모델 콘테스트에 참석하기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델센터와 중국의 벤틀리, 일본의 오스카가 공동
으로 주관하는 행사입니다. 지난해에도 우리 한복의 아름다움을 선보이고 왔으며 올해도 그럴 계획입니다. 또 제가 심사위원장으로 선발되었습니다. 중국이 주관이니 심사위원장을 중국인으로 할 수도 있었고 일본은 패션시장이 워낙 크기 때문에 일본인을 심사위원으로 선발했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냉정하게 보더라도 한국이 모델산업이나 패션산업에 앞서있다고 판단했기에 한국인인 저에게 심사위원장 자리를 추천했을 것이라고 자부합니다. 중국 외에 홍콩, 몽골, 말레이시아 등지에도 우리 옷과 우리나라를 알리고 있습니다. 문화관광부 소속 문화원을 통해서 우리나라의 모델, 우리나라의 패션 등을 선보이며 패션의 한류를 선동해 왔고 지금도 전파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난 달에는‘2011 Korea Preview in MILANO’의 패션쇼 사전 준비를 위해 밀라노를 방문해 프로덕션 미팅, 모델 오디션을 포함한 현지 패션 관계자 미팅 등 여러 일정을 소화하고 돌왔습니다. 우리 패션의 우수성과 한국모델들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알리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고 있습니다.

Q. 현재 모델업계의 독보적인 인물로서 이 분야에 발을 들이려는 젊은이들에게 한마디

A. 패션디자이너와 모델은‘실과 바늘’같은 사이입니다. 없어서는 안 되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죠. 사실 모델은 패션의 트렌드에 따라 가게 됩니다. 모델도 유행의 변화가 있습니다. 10년 단위 주기로 트렌드가 변하죠. 우선 여자모델의 기본적인 체형 변화를 보면, 70년대만 해도 170cm정도의 모델들이 주로 활동을 했습니다. 80년대 와서 172,3cm, 90년대 들어서는 175cm로 커지다 현재는 180cm 정도가 되어야 스타급 모델로 갈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을 갖추었다고 합니다. 9.5등신 또는 10등신이 되어야 하는 현실이죠. 군살이 없고 슬림한 몸매, 그리고 곧은 뼈대와 자세가 필요하다. 하체가 상체보다 길어야 하며 서구적인 신체적 특징에 동양적인 얼굴을 가진 이가 모델로서 유리합니다. 자기 자신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물론 후천적인 노력이나 성형 등으로 어느 정도 교정은 가능하겠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자신이 과연 모델로서 적합한 사람인지를 냉정하게 심사숙고 해보아야 합니다. 결론을 내렸다면 믿을 수 있는 회사에서 상담을 하고 검증받은 사람들과 함께 모델에 관한 트레이닝을 시작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모델이라는 직업은 분명히 안정되어 있고 정착되어 있습니다. 대학에도 모델학과가 많이 생겨났으며 동덕여대의 경우 모델학과의 석사도 배출한 상태입니다. 그만큼 모델이 학문적으로도 정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델은 한류의 주역으로 우리나라의 브랜드 이미지를 업그레이드 하는데 분명히 일조할 수 있는 직업입니다. 본인에게 어울리는 옷을 입고 관객이나 바이어, 저널리스트들 앞에서 디자이너의 옷을 소개하는 메신저적인 역할을 하는 중요한 직업입니다. 그렇지만 모델이 되기 위해서는 절제된 생활과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며 신체적인 단련뿐만 아니라 건강한 아름다움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또한 내면의 아름다움은 외적으로 비추어져 나오기 때문에 교양을 쌓는 일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세계적인 모델로 뻗어나가기 위해서는 언어의 장벽을 허물어야 하기에 국제 공통어인 영어 정도는 기본적으로 해야 대성할 수 있습니다.

Q. 독자들에게 한 마디
A.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인류의 변함없는 주제였으며 앞으로도 식지 않을 공동의 관심이라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모델센터를 이끌어 오면서 가장 중점을 두었던 부분은 美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어떻게 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올바르게 전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국경이란 희미해져 다양한 민족과 국가가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 나와 다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자유롭게 나눌 수 있는 진정한 communication이야말로 패션이라는 폭 넓은 세계에서 요구되는 열쇠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변함없는 노력과 새로움에 대한 끊임없는 용기와 도전으로 임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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