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춘서커스 박세환 단장

집중인터뷰-동춘서커스 박세환 단장

동춘 서커스의 박세환 단장은 19살 때부터 50년을 서커스를 위해 살아온 사람이고 앞으로도 서커스를 위해 살아갈 사람이다. 서커스를 위해 밥을 먹고 잠을 자며, 자신을 위해서는 집 한 채도 남겨두지 않고 모든 것을 서커스를 위해 바친 그는, 개인적인 꿈이 뭐냐고 묻자“동춘 서커스를 조금 더 운영하기 쉽게 만들어 후계자에게 넘겨주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50년간 맘 변하지 않고 하나만 바라보고 달려온 직업인에게, 기자는 우연히 대부도를 찾았다가‘동춘 서커스’천막을 발견했다고 고백할 수는 없었지만, 진심으로 그 우연에 감사했다.


Q. 동춘 서커스의 역사와 현재에 대해서 설명 부탁한다
1925년, 일제 강점기에 박동춘님이 일본 서커스 단원으로 활동하다가 30여명의 조선 사람들을 모아 창단 한 것이‘동춘 서커스’입니다.‘동춘 서커스’는 연극, 쇼, 국악, 마술, 서커스 등으로 이루어진 대중예술의 집대성이라 볼 수 있죠. 당시에는 지금처럼 극장도 없었고 TV도 거의 일반인에게는 보급되지 않았을 때이므로 전국에 18개 정도 있는 서커스가 대중문화의 중심이자 뿌리였습니다. 제가 동춘에 입단한 1962년만 해도 이봉조, 배삼룡, 서영춘, 남철, 남성남, 정훈희 선생님들이 동춘을 지키고 계셨으니까요. 서커스가 점차 대중들의 외면을 받으며 쇠퇴하게 된 데에는 물론 본질적인 문제가 있었겠지만(사실 우리나라는 서커스단이 살아남기에는 힘든 여건을 지녔습니다. 국토는 좁고, 봄에는 농번기, 여름에는 폭염에 장마, 가을은 짧고, 바로 한파가 닥치는 겨울이 찾아옵니다. 이동극장이 살아남기에는 굉장히 어려운 환경이죠), 1974년 서커스가 급격히 몰락한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있었습니다. 새마을 운동의 시작과, TV드라마‘여로’였어요.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며 대중들은 낮에는 열심히 일해야 했고, 밤에는 동네에 한 대쯤 있는 TV앞에 모여 여로를 시청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로가 방송된 지 딱 5개월 만에 18개 서커스단이 반으로 줄었고, 80년대가 되면서는 서너 개의 서커스단만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2005년 이후부터는 동춘 서커스가 국내 유일의 서커스단입니다.

Q. 어떻게 서커스를 시작하게 되었나
고등학교를 다니며 음악 동아리에 들어가게 되었고 노래와 악기에 관심을 가지던 차에, 우연히 동네에 온 서커스단을 보고나서는 한 눈에 반해버린거죠. 저는 경상북도 경주 출신입니다. 할아버님은 육당 최남선 선생과 교우지간으로 성균관대, 대구대, 경북대의 이사를 지내셨고, 제2대 국회의원이셨습니다. 저는 그런 가문 종가의 장남이었고요. 원래부터 경주는 유교적이고 보수적인 곳입니다. 서커스라니, 지금도 어떤 집안에서는 연예인들이나 예술가들을‘쟁이’자를 붙이며 깔고 보는데, 당시에는 오죽했겠습니까. 가족들에게는 감히 서커스를 하겠다고 말할 생각도 못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무작정 서울로 상경을 했습니다. 소위 말하는 가출이죠(웃음). 대학에 들어가는 대신 서커스를 선택한 건데, 그 서커스단에 입단하는 일도 보통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동춘 서커스는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극단이었고, 단원도 많았기에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별 재주도 없어 보이는 절 받아주지 않으려고 했어요. 3개월을 졸졸 따라다니며 단원들의 심부름을 도맡아하다가, 남철 선생님이 절 따로 가르치고 심부름꾼으로 쓰겠다고 말씀해주셔서 겨우 입단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입단했다고 바로 무대에 설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요. 온갖 잡일을 하다가, 짬이 나면 동네 전파사 앞으로 뛰어가 라디오를 훔쳐듣고, 그 이야기하는 것을 계속해서 흉내 내고, 돌아와서도 중얼중얼 연습을 계속하고, 노래 연습을 하는 것이 일과였습니다. 열심히 하는 모습이 서커스 단원들의 눈에 띄게 되었고, 무대에 오를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생생해요.‘청춘의 꿈’이란 노래였는데, 제가 사실 노래에는 정말 자신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실제 무대는 생각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박자도 못 맞추고 내내 부들부들 떨다가 내려온 것이 제 인생의 첫무대였어요. 그냥 노래를 부르는 것과 돈을 낸 관객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천지차이였습니다. 이때의 교훈으로 2003년부터 2009년까지 서울예술대학 무용과에서 강의하면서도 항상 학생들에게 강조했습니다.‘아무리 연습을 많이 해도 실제 관객 앞에 한 번 서는 것만 못하다’고요. 그렇게 동춘에 들어간 지 6년쯤 지났을 때, 긴 장마에 서커스단의 사정도 많이 어려웠는데, 저도 몸이 많이 아팠습니다. 결국 집을 찾아갔는데, 집에 아무도 없는 겁니다. 너무 배가 고파 부엌에서 밥만 대충 퍼서 마루에 앉아 먹고 있는데, 외출하셨던 어머님이 들어오시는 겁니다. 어머님은 절 가만 보시더니 말없이 물을 떠다주셨습니다. 그게 6년만의 가족과의 재회였어요. 워낙 몸이 약해진 상태라 한 달간 치료를 받았고, 다시 동춘에 들어갔습니다. 부모님께는 여전히 사실대로 말씀드릴 용기가 없어 그냥 서울의 방직공장에 다니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몇 년 후 집에서도 제가 서커스단에 있다는 것을 알아내 잡혀 들어간 적도 있었는데, 그때도 보름 만에 다시 도망쳤고요. 이후에는 3년쯤 지나 이상하게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저는 원래 신이나 영감을 안 믿는 타입인데도 어떻게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이 들어, 경주행 기차를 탔습니다. 경주역에서 내려 몇 걸음 걸었나, 동네분이 절 보시더니‘할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왔구나’하시는 겁니다. 발인 직전이라 모습은 뵐 수 있었습니다.

Q. 동춘 서커스를 책임지는 단장이 되게 된 과정을 알려달라
1973년 여러 가지 사정상 서커스를 그만두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국제시장에서 장사를 했는데, 사업은 생각보다 훨씬 잘 되어 그때는 돈도 꽤 모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동춘과의 인연을 끊은 것은 아니었고, 선전부장을 자임하고 주변에 동춘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일은 계속 했었어요. 동춘 단장님도 매일같이 찾아오셔서 돌아오라고 말씀하셨고요. 그러다가 1978년 동춘 서커스가 인천 간석동에서 공연을 하다가 태풍을 맞은 겁니다. 거의 모든 것을 다 태풍에 날리고, 어쩔 수 없이 동춘의 단장님도 동춘을 매매하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때도 신문이며 뉴스에도 나왔었고요. 현장을 찾아가 보았더니, 정말 처참했습니다. 기억나는 첫 장면은 제니입니다. 제니는 당시 동춘에서 30년을 넘게 길러온 코끼리였는데, 제가 나타나자 멀리서부터 반갑다고 발을 구르고 코를 휘두르며 울더라고요. 망가진 동춘을 보며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 가장 확실한 건, 동춘을 남의 손에 넘길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동춘은 누가 뭐래도 우리나라 대중예술의 뿌립니다. 쇼, 연극, 음악, 서커스, 코미디. 뭐든 동춘을 통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그런 동춘을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손에 넘길 수도, 그렇다고 사라지게 놔둘 수도 없었습니다. 동춘을 반드시 살려야겠다. 그런 사명감이 들었어요. 당시 제가 돈을 좀 모으긴 했지만 동춘을 넘겨받기에는 절반정도밖에 안 되는 돈이었는데, 나머지는 벌어서 갚기로 하고 계약을 하게 되었지요. 그렇게 단장이 된 겁니다.

Q. 한국에서 서커스를 하며 힘든 부분이 있다면?
우리나라에서의 서커스단은 본질적으로 적자이기 쉽습니다. 관객들이 오려면 봄가을이 좋은데, 그렇다고 여름겨울을 쉴 수는 없거든요. 여름겨울을 쉬면 단원들의 기술이 무뎌지고 몸이 무거워져서 봄가을이 되었을 때 바로 공연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운동선수들이랑 똑같아요. 김연아 선수도 우승을 한 다음날부터 다시 훈련을 하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정말로 여름이나 겨울에는 관객 수가 현저히 적습니다. 그러니 적자지요. 거기에다 서커스는 아무리 늦어도 10살부터는 훈련을 시작해야 합니다. 단역을 만드는 데에도 3년은 걸리고요. 왕도가 없는 기술이에요.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서커스가 잘 알려지지 않아 서커스인을 기르기 위한 교육체계가 없습니다. 2008년에 사실은 문화관광부에서 서커스 아카데미를 만들어주겠노라 약조했었는데, 이후 장관과 실무자가 바뀌며 다시 미뤄진 상태입니다. 모든 예술에는 투자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투자가 이루어지면 공연의 질이 향상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공연의 질이 향상되어야 더 많은 관객이 찾을 것이고, 더욱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공연관광산업화로 가장 많이 활용되는 게 바로 서커스입니다. 서커스의 매출이 전 세계 공연예술의 수익 중 58%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장르 자체가 없는 상태입니다. 왤까요? 연극도, 국악도, 클래식도, 미술도 모두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예술 장르는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고, 교수진이 있고, 정치인들이 있는데 서커스에는 그런 힘이 없습니다. 서커스에 관련한 힘 있는 무리가 없어요. 그런데 그런 이유로 한국의 서커스를 죽이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요? 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동춘을 끝까지 잡고 있을 테지만, 길어야 10년이면 저도 물러나야 할 텐데, 후계자가 없습니다. 물론 진작부터 홍보에 힘을 쏟았어야 한다고 후회하고 있습니다만, 저 혼자 하기엔 벅찹니다.

Q. 동춘의 단장을 하면서 후회한 적이 있다면?
후회는, 정말 많이 했지요(웃음). 쉬운 일은 하나도 없었던 것 같아요. 특히 지금 기억나는 건 2003년의 태풍 매미였습니다. 여수광장에서 공연하고 있었는데, 태풍이 온다는 겁니다. 평소라면 미리 천막을 거둬두었을텐데, 하필 그 날이 추석이었어요. 추석연휴 며칠간의 매출이 평소 몇 배의 매출인지라 천막을 거뒀다가 다시 치는 일주일을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어 결국 공연을 하기로 했습니다. 추석 당일, 아침 11시 공연이었어요. 관객이 천명 가까이 들어와 있었는데, 극장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부랴부랴 관객을 내보내고 딱 20분 후, 그 큰 극장이 모두 날아갔습니다. 날아가는 데 딱 10분이 걸렸고요, 다시 햇빛이 비추는 데 딱 20분이 더 걸렸습니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망가진 천막을 철거하는 비용만 2천만 원이 들었습니다. 음향기기며 모든 장비와, 단원들의 모든 물품도 완전히 날아가 버렸고, 많은 단원들이 동춘을 떠났습니다. 수해대책본부에서도 가설극장의 경우에는 도움을 줄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당장 먹고 살아야 할 일이 막막했으니 공연은 해야 했습니다. 별 수 없이 남은 짐만 추슬러 진주로 이동을 했습니다. 빌어서 땅이며, 음향이며, 조명이며, 포장마차용 천막까지 빌려 공연을 단행했습니다. 그래서 공연을 하는데, 사람들이 끝도 보이지 않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한 달간을 그랬어요. 알고 보니 저희 이야기가 뉴스에 보도가 되었는데, 그걸 본 사람들이 동춘 서커스를 살리고자 와주신거였죠. 입장료가 성금이고 후원금이고 기금이었습니다. 2009년 신종플루가 몇 달이었잖아요. 사람 모인 곳에는 절대로 가지 않아야 하는 질병이었으니까, 어떻게 이겨낼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루에 관객이 10명정도 들어오고 그랬어요. 급여만 5억 가까이 밀렸습니다. 결국 2009년 11월에 해체선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다시 일어설 힘을 주신 것도 바로 관객 분들이었습니다. 동춘 서커스를 살려야 한다고 인터넷에서 십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글을 올리고, 어르신 분들은 청와대에 전화까지 해주셨어요. 그런데 제가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리저리 돈을 빌려서 해체선언 한 달 만에 김포체육관에서 다시 공연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폭설이 내리는 겁니다. 눈이 정말 무릎까지 내리는 거예요. 이제는 정말로 끝났구나 싶은 순간에, 관객들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찾아오신 분들이 전화로 지인을 부르는 모습을 봤어요. 동춘을 살려야 한다고요. 동춘 서커스는 정말로 여러분이 살려주신 겁니다. 그 이후에도 정말 끝이구나 싶은 순간마다 도움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작년 2010년 5월 부채를 갚을 수 있었어요. 이건 정말이지 기적입니다.

Q. 동춘 서커스 단원은 몇 명이나 되며, 어떻게 생활하고 있나
지금 단원은 50여명 정도로 모두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 중 중국인 단원은 18명 정도 되고요. 중국인 단원과도 보통 5년 이상 장기계약을 해서 우리나라의 안무와 언어를 거의 습득한 후에 공연하고 있습니다. 원숭이도 몇 마리 함께 지내고 있어요. 예전에는 코끼리라든가 다른 동물들도 많았는데 지금은 시대가 바뀌면서, 재래식 서커스보다는 테마 서커스(서커스+뮤지컬, 과학, 연기 등)를 요구하더라고요. 그래서 동물이 나오는 분량이 많이 줄었습니다. 하루 일과는 어떤 공연을 하는가에 따라 달라지지만 대부도에서 장기공연을 하는 지금 같은 시기에는 아침 10시경 일어나서 식사를 하고 12시경까지는 몸을 풀고, 2시, 4시, 6시 공연을 하고 이후엔 자유시간입니다. 1회 공연은 보통 100분이며, 서커스는 17가지정도 보여드립니다. 쌍철봉 묘기, 접시춤, 궁중실크무용, 링위의 링, 조형, 단지묘기, 링체조묘기, 외발자전거타기, 발레와 서커스, 변검마술, 수직줄타기, 훌라후프묘기, 외줄타기, 사다리 넘기, 2인 공중회전, 두남자의 힘, 비보이무술체조 등으로 이루어지며 대부도 같은 관광지에서는 쇼를 위주로, 예술회관 투어 등에서는 테마서커스를 합니다.

Q. 현재 동춘 서커스의 공연은 어디에서 볼 수 있나
대부도에 상설공연장을 설치하고 공연 하고 있으며, 롯데월드에서도 토요일부터 월요일까지 공연합니다. 대부도 공연의 경우에는 대부도 관광활성화 정책에 따라 윈윈정책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요, 대부도 내에서 식사나 숙박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서커스 입장료를 2만원에서 8천원으로 할인해드리고 있습니다. 이게 지금 매우 반응이 좋아서 주말에는 하루 평균 1000~1500명의 관객이, 평일에는 500~600명의 관객이 찾아주십니다. 지금 그렇게 공연을 시작한 지 4개월 정도가 지났는데, 일 년간 공연해보고 계속 반응이 좋다면 안산시 측에서 상설극장도 세워주겠다 한 상태입니다. 이 기회를 빌어 안산시 김철민 시장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네요. 그리고 전국 순회공연도 하고 있습니다. 10월 5일 광양예술회관, 6일 동해시, 7일 금천노인종합복지관, 8일 대구북구문화예술회관, 10일 롯데월드, 23일 논산 강경젓갈축제, 11월 3일 논산문화예술회관, 8일 달서구청, 12일 김제문화예술회관, 15일 양촌노인복지관, 22일 군포노인복지관, 30일 한국육영학교 등에서 공연하게 됩니다. 또한 내년 2012년 경남고성에서 열리는 세계엑스포에서도 3월 30일부터 6월 10일까지 공연하기로 확정이 된 상태입니다.

Q. 동춘 서커스의 장기적인 목표가 있다면?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서커스를 만드는 것이 꿈입니다. 그리고 캐나다에 있는‘태양의 서커스’처럼 되고 싶습니다. 이 서커스단의 매출이 연간 1조에서 1조 2천억입니다. 우리는 왜 못하겠습니까? 사실 서커스는 동양인에게 더욱 유리하거든요. 몸도 가벼워 더욱 멀리 높이 날 수 있으며, 우리나라 사람들의 재주는 어디에서도 알아주잖아요. 또한 관광객을 위해 전국 주요도시에 상설극장을 세우고 공연을 하고, 서커스 박물관과 서커스 아카데미를 세우고 싶습니다. 전 19살부터 지금까지 50년을 서커스에 바쳤습니다. 서커스를 위해 밥을 먹고 잠을 잡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집 한 채도 없습니다. 제 모든 것은 모두 서커스를 위한 것입니다.

Q. 마지막으로 동춘 서커스를 찾아주었던 관객과, 찾아줄 관객들에게 한마디 부탁한다
정말로 깊이 감사합니다. 여러분 덕에 우리 동춘 서커스가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86년 동안 이어왔고, 100년을 향해 가는 중입니다. 여러분이 우리를 지금껏 여러 번 살렸고, 용기를 주었고, 입장료를 지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관객여러분 없이는 동춘 서커스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유일한 서커스가 이대로 없어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관심을 가져주십시오. 저희도 여러분께 부끄럽지 않게 더욱 발전하고 성장하겠습니다. <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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