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동안 가장 화제가 되었던 인물열전

2011년의 인물-2011, 화제의 인물들

2011년이 끝났다. 그 동안 수많은 사건과 인물들이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다. 2011년을 보내며 한 해 동안 가장 기억에 남고, 영향력이 컸던 사람들을 꼽아보았다. 어떤 이들은 긍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고, 어떤 이들은 우리에게 경고를 했다. 2012년이 끝날 때에는 긍정적인 인물들만 정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은, 가져도 괜찮을까?

1. 마크 주커버그(Mark Zuckerberg, 1984.5.14~ )
▲ 마크 주커버그
2011년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한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중에서도 페이스북(Facebook)의 창시자가 바로 마크 주커버그. 1984년 뉴욕 출생으로 초등학교 때부터 프로그램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2002년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 2004년 페이스북을 창업, 같은 해 하버드를 중퇴했다. 2010년 포춘에서 발표하기로는 세계 35위의 부자이며, 같은 해 타임지에서는‘올해의 인물’에 선정되었다. 제2의 빌게이츠라는 별명을 가진 마크 주커버그는 컴퓨터 관련학과가 아닌 인간의 사회적 욕구와 열망에 대해 공부하고 싶어 심리학을 배웠다. 현재 페이스북의 가입자 수는 약 6억 명으로, 인구수로 따지라면 중국, 인도에 이어 세 번째 국가 규모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페이스북의 회원이다. 페이스북은 원래 하버드 대학생들만을 위한 프로그램이었다. 대학 내의 친교를 위한 사이트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사진 등을 올리고, 올린 사진에 있는 사람들을 태그 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점차 근처 다른 학교로도 범위를 넓히기 시작했고 2006년에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거대 사이트로 자라나기 시작한다. 가입자 수는 지금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스마트폰이 대중화됨에 따라 사회적 관계는 점점 웹으로 이동하고, 웹 상의 관계망은 현실의 관계를 강화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 한 대학생의 손에서 우연히 만들어진 이 페이스북은 지금도 계속해서 커져나가는 중이다.

2. 에반 윌리엄스(Evan Williams, 1972.3.31~ )
▲ 에반 윌리엄스
한국에서는 페이스북보다 트위터가 활성화 되어있다. 트위터의 창시자는 에반 윌리엄스다. 빌 게이츠와 마크 주커버그가 그랬듯 에번 윌리엄스 역시 대학생활을 정상적으로 마치지 못했다. 그는 네브라스카 대학을 다니다가 일 년 반 만에 학업을 그만두었다. 고향에 돌아간 그는 컴퓨터 관련 기술서적으로 유명한 오라일리 미디어의 마케터 자리를 제안 받는다. 그러나 글을 쓰는 일에 더욱 흥미가 있던 윌리엄스는 마케터 겸 테크니컬 라이터로 활동을 시작했다. 3년후 윌리엄스는 회사를 세우게 되었고, 블로거 닷컴(Blogger.com)을 만든다. 블로거 닷컴은 1999년 당시 한참 붐을 탄 블로그 시장에 파란을 불러 일으켰다. 구글은 2003년 에반 윌리엄스를 포함한 전 직원을 고용하며 그의 회사를 합병한다. 그러나 윌리암스는 이후 또 다른 사업을 시작한다. 그가 구글을 나와 차린‘오데오’는 지금의 트위터 공동 창업자 비즈 스톤, 잭 도시와 함께 문을 연 회사다. 트위터가 처음 서비스를 개시했을 때 주위의 반응은 냉담했다. 별로 유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에반 윌리엄스는“아이스크림도 유용하진 않죠”라고 대답했다고. 에반 윌리엄스는 항상 한 가지 프로젝트만을 고집하지 않기로 유명하다. 블로거나 트위터 역시 회사를 설립하며 시도했던 프로젝트가 아니라 사이드 프로젝트였다. 또한 지금 그는 트위터 경영진에서 물러나있는데, 그 이유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큰 성공 이후에도 여전히 개발자의 길을 선택하고 있는 그 역시 2011년의 인물!

3. 안철수(安哲秀, 1962.2.26~ )
▲ 안철수

의사이자 프로그래머자, 벤처 사업가이지 대학 교수. 서울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ㆍ박사 학위를 취득, 만 27세에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학과장을 역임했다. 의대 재학 중 대한민국 최초의 백신 프로그램V1, 2, 3를 만들었다. 7년간 의사 생활과 백신 제작을 함께 하다가 1995년 의대를 나와 안철수연구소를 설립했다. 2005년에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스쿨에서 MBA로 들어가 경영학을 배운 후 KAIST 석좌교수로 임용되었으며, 2011년에는 서울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으로 부임했다가 10월 28일 사임했다. 2011년 8월, 안철수의 서울시장 재보선 출마설이 나온 이후로 정치권 영입 제의가 잇따르던 가운데 각종 여론조사에서 차기 대선후보 지지율 1위로 나타나는 등 이른바‘안철수 열풍’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안철수는 대선에 출마할 의지가 없음을 내비쳤다. 안철수는 추진력과 기업가 정신, 도덕성, 차분한 성격, 겸손한 이미지로 기존의 기득권층과 전혀 다른 느낌을 주며 젊은이들의 가장 대표적인 멘토로 손꼽히고 있다. 그는 교수직에 임하면서 박경철과 함께‘청춘 콘서트’라는 강의를 해오고 있는데 1년에 3천 건의 의뢰가 들어올 정도로 인기가 높지만 일정 문제로 1년에 80여 건을 소화한다고. 안철수는 돈을 많이 주는 기업들의 의뢰는 대부분 사양하고, 무료강연을 많이 하는데 강의할 때마다 적게는 1500명에서 많게는 3천 명 정도까지 몰린다.

4. 스티브 잡스(Steve Jobs, 1955.2.24~2011.10.5)

▲ 스티브 잡스

스티브 잡스는 1955년 태어나자마자 그리 부유하지는 않은 집안으로 입양된다. 리드칼리지(Reed College)에 의학 및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입학했으나 등록금을 감당하지 못하고 한 학기밖에 다닐 수 없었다. 친구 집 방바닥에서 잠을 자고 콜라병을 판 돈과 무료 급식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생활 속에서도 그는 청강을 통해 공부를 계속했다. 이 때 그가 들었던 서예 수업은 나중에 매킨토시의 서체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잡스는 몇 년 후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스티브 워즈니악(Steve Wozniak, 1950.8.11~ )과 협력해 잡스 부모의 차고 안에서 애플을 설립하고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인‘애플I’을 내놓았다. 후속작인‘애플Ⅱ’가 뜻밖의 성공을 거두게 되면서 잡스와 애플은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후 몇 차례 부진을 겪었고 잡스가 30살이 되던 해 애플의 이사회는 그를 해고했다. 몇 달간 공황상태에 빠졌던 잡스는 넥스트를 다시 설립하고 픽사를 인수하며 재기의 발판을 다졌다(이후 픽사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으로 꼽히는‘토이 스토리’를 만들어냈고 디즈니에 인수됐다). 1996년, 애플은 넥스트사를 인수했다. 그리고 잡스는 애플의 최고경영자로 복귀했다. 복귀 후 그는 1997년 10억 달러의 적자를 한 해만에 4억 달러의 흑자로 전환하는 신화를 만들어냈다. 아이맥,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등 그가 내놓은 제품은 연달아 성공했고 애플은 세계 최고의 IT기업으로 우뚝 올라서게 된다. 그리고 스티브 잡스는 2011년 10월 사망한다.

5. 김정일(金正日, 1942.2.16~2011.12.17)

▲ 김정일

북한의 정치가. 김일성(金日成)과 김정숙(金貞淑)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19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 정치국 상무위원, 비서국 비서,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공식적인 제2인자가 되었다. 1991년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1993년 국방위원장에 선출되어 군권을 완전 장악하였으며,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한 뒤 권력을 승계하였다. 이후 17년 동안 국방위원회 위원장,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정치국 상무위원, 최고인민회의 제10기 대의원 등의 공식 직함을 가진 북한 최고 실력자로 군림하였다. 2008년 뇌졸증이 발병한 뒤 2009년 고영희와 사이에서 낳은 김정은(金正恩)을 후계자로 내정하였고, 2010년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임되게 함으로써 후계 구도를 확정하였다. 건강이상설이 끊임없이 나도는 가운데 2011년 12월 17일 현지 지도 방문차 탑승한 열차에서 사망하였고, 이틀 뒤인 12월 19일 조선중앙방송에서 과로로 인한 중증급성 심근경색과 심장 쇼크로 사망하였다고 공식 발표되었다. 시신은 아버지 김일성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기념궁전에 함께 안치되었다. 17년 동안 북한의 최고 권력자로 있으면서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첫 정상회담에 이어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두 번째 정상회담을 하여 남북 대립의 긴장 상태를 완화시키기도 하였으나, 2006년과 2009년 두 차례에 걸친 핵실험 강행과 1999년과 2002년의 1ㆍ2차 연평해전, 2010년의 연평도 포격사건 등으로 한반도의 위기 상황을 지속적으로 고조시키기도 하였다. 또 아들을 후계자로 정함으로써 3대 권력 세습 체제를 구축하였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6. 케임브리지 공작부인 캐서린(Catherine, Duchess of Cambridge, 1982.1.9~ )

▲ 케임브리지 공작부인 캐서린

케임브리지 공작부인 캐서린은 영국 왕세손 케임브리지 공작 윌리엄의 부인이다. 본명은 캐서린 엘리자베스 미들턴(Catherine Elizabeth Middleton)이지만 케이트 미들턴(Kate Middleton)으로 알려져 있다. 1982년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버크셔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캐서린은 2001년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교 재학 중 윌리엄 왕자를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다. 둘은 결별과 만남을 반복해오다 2010년 말에 약혼하였고 2011년 4월 29일에 혼인했다. 결혼과 함께 전 이름 캐서린 미들턴에서 정식 이름 케임브리지 공작부인 캐서린으로 바꾸었다. 뛰어난 패션감각에 털털하고 서민적이면서도 시원스러운 미소를 가진 그녀를 보면서 많은 이들이 윌리엄왕자의 어머니 고 다이애나 전 왕세자비를 연상한다. 실제 캐서린은 포스트 다이애나라고 불리기도 하며, 영국 왕실의 인정 뿐 아니라 영국인들의 지지도 얻고 있다. 지금 캐서린은 영국의 여성들의 패션 아이콘이 되었는데 왕세자비답지 않은 검소함으로 더더욱 사랑받는 중이라고.

 


7. 박영석(朴英碩, 1963.11.2~2011.10.?)

▲ 박영석
산악인이자 탐험가. 동국대학교 체육교육학과에 입학, 동국산악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1989년 네팔의 랑탕리룽(7,025m)에 도전해 최연소 원정 대장으로 동계기간 세계최초등반의 기록을 남겼다. 1991년에는 에베레스트 남서벽 루트에 도전했으나 해발 7,000미터 지점에서 100미터나 추락하여 이틀간이나 의식을 잃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1993년 히말라야 에베레스트산을 국내 최초 무산소 등정에 성공함으로써 산악인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그해 1년간 히말라야산맥 8,000m급의 6개 봉우리를 등정하는 세계 최초의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이후에도 8년 2개월에 걸쳐 히말라야 고산 등반에 주력해 2001년 케이투(8611m) 등정에 성공함으로써 8천 미터 급의 거봉 14좌(座) 완등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이는 한국 산악인 최초의 성과였으며, 세계에서는 8번째 기록이었다. 이후에도 험난한 등반과 세계 탐험을 계속해 2004년 남극점 도보탐험에 성공했고 2005년 5월 북극점을 정복했다. 이로써 지구의 3극점(북극점, 남극점, 에베레스트 산)과 히말라야 14좌, 7대륙 최고봉을 모두 등반하는 세계 최초의 산악 그랜드 슬램을 달성해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또, 2006년에는 단일팀 최초 에베레스트의 횡단 등반에 성공했으며, 2009년 에베레스트에서 가장 험난한 코스로 평가되는 남서벽에 대원 5명과 함께 소수의 원정대로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여 코리안 루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2011년 10월 18일 박영석 원정대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8,091m) 남벽에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도전한 등반 도중 6500m 지점에서 통신이 두절되며 실종되었다. 계속되는 수색에도 박영석 원정대의 자취를 찾을 수 없었던 수색대와 유족은 10월 30일 안나푸르나의 베이스캠프에서 위령제를 올렸다.

8. 김연아(金姸兒, 1990.9.5~ )

▲ 김연아

김연아는 7살에 처음 스케이트를 시작, 초등학교 때부터 전국 동계체전 등 각종 국내 피겨 스케이트 대회에서 우승을 하였고, 대한민국 피겨 스케이터로서는 처음으로 12살에 트리플 점프 5종을 모두 완성하였다. 중학교 1학년 때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선발되었으며 2010년 2월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동계올림픽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움과 동시에 자신의 꿈이었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벤쿠버 올림픽 후 김연아는 유니세프의 국제 친선대사로 임명되어 공익홍보영상과 뉴욕 유엔본부의기념행사에 참가하였다. 또한 타임지의‘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100인’과 미국여성스포츠재단의‘올해의 스포츠 우먼’으로 선정되었다. 신채점제 이후 여자싱글선수 최초로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김연아는 100년이 넘은 피겨 역사에서도 전무후무한 선수다. 데뷔 후 참가한 모든 국제대회에서 입상하였고 11번의 세계신기록을 경신, 공인국제대회 200점 최초 돌파 등 전세계가 주목하는 피겨스케이팅의 아이콘이다. 또한 지난 2011년 7월 6일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제123회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프레젠테이션 발표자로 나선 김연아는 유창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IOC 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이에 힘입은 평창은 역대 최다 득표인 63표를 얻어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었다. 김연아는 이로서 자신의 힘이 단지 피겨에만 국한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였으며 이후 몇 차례의 아이스쇼를 통해 꾸준한 연기를 보여주며 현재 가장 영향력 있는 스포츠 스타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9. 박원순(朴元淳, 1956.3.26~)

▲ 박원순 서울 시장

대한민국의 변호사이자 사회 운동가이며 제35대 서울특별시장이다. 2011년 10월 26일 서울특별시장 보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1975년 서울대학교 사회계열에 입학하였으나 1년 만에 유신체제 반대 학생 운동과 관련하여 제적당하고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하여 1985년에 졸업하였다. 1980년,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 사법연수원 제 12기를 수료하고 대구지방검찰청 검사로 재직하면서 1991년, 영국 런던정경대에서 국제법 디플로마를 취득하고 하버드대학교 법대에서 객원 연구원으로 활동하였다. 박원순은 그동안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참여연대 사무처장, 법무법인 산하 고문변호사를 역임하였으며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시민활동가로 활동하면서 2006년, 만해상과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저작권법의 국내 최고 권위자로 알려져 있으며 시민 운동가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변호사이자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를 맡고 있다. 2011년 9월 박원순은 서울특별시장 보궐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혔고 안철수와 후보 단일화를 이뤄 낸 후 민주당, 민주노동당 등과도 단일화에 성공하여 범야권 단일 후보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나경원을 꺾고 당선되었다. 나경원 후보가 186만7,880(46.21%)명의 지지를 받은 반면 박원순 당선자는 215만8,476(53.40%)명의 지지를 받았다.

10.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 1957.3.10~2011.5.2)

▲ 오사마 빈 라덴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국제 테러리스트. 이집트 과격단체들과 동맹을 맺고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자신이 조직한 테러 조직 알카에다를 통해 국제적인 테러를 지원하기 시작하여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와 9ㆍ11 미국대폭발테러 등의 배후자로 지목되었다. 그는 1992년 수단의 수도 하르툼에서 이집트 과격단체들과 동맹을 맺고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자신이 조직한 테러 조직 알카에다(Al-Qaeda)를 통해 국제적인 테러를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1993년 발생한 소말리아인들의 미국 평화유지군 살해사건에 빈 라덴의 부하 일부가 가담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1996년 미국 국무부의‘주요 테러 재정지원자’로 지목되었고, 같은 해 수단에서 축출되자 아프가니스탄으로 건너갔다. 이곳에서 그는‘미국인과 유대인을 적대시하라’는 교시를 내리고 성전(聖戰)을 선언한 뒤, 지하드 등 다양한 회교 테러 조직들과 함께 전 세계 미국 시설들에 대한 공격을 촉구하였다. 1998년 8월 224명이 사망한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의 배후로 지목되었고, 미국 정부는 그에게 500만 달러의 현상금을 내걸었으며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빈 라덴의 기지와 수단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화학무기 공장에 미사일 공격을 명령하기도 하였다. 1999년 이후 아프가니스탄에서 숨어 지내면서 계속 테러 활동을 벌여왔는데,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미국 맨해튼의 쌍둥이 빌딩인 세계무역센터와 미국 국방부(펜타곤) 항공기 납치 자살테러사건 역시 그가 조종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2001년 10월 말 미국은 그가 숨어 있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전면적 공격을 하고 국제 테러 조직들에 대해 무차별 응징을 선언했다. 수년간 은신생활을 해온 빈 라덴은 2011년 5월 파키스탄의 수도인 이슬라마바드 외곽에 있는 한 가옥에서 미군 특수부대의 공격을 받고 사살되었다. <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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