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2011‘올해의 인물’은‘시위대(protesters)’였다. 타임지에서는“시위대가 권력의 지형도를 바꿔놓았다”고 선정이유를 밝혔다. 작년 한해 최대의 화두는 단연 전세계를 휩쓴 시위대다. 아랍의 봄부터 뉴욕의 가을을 지나 러시아의 겨울까지, 그리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시리아의 봉기까지. 이제 시민들은 사회적 억압과 불평등, 극으로 치닫는 양극화, 부의 편중으로 억눌려왔던 분노를 한꺼번에 표출하기 시작했다.
2011년 초‘재스민 혁명’으로 시작해 중동과 북아프리카 일대에 불어닥친 아랍의 민주화 운동은 영원할 것 같았던 독재자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튀니지ㆍ이집트ㆍ리비아정권을 잇달아 무너뜨리고 시리아ㆍ예멘까지 불이 옮겨 붙었다. 그러더니 지난 9월 미국 뉴욕에서는 금융계의 탐욕을 고발하고,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월가를 점령했다. 월가 시위대는“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는 구호로 전 세계를 점령하며 경제 계급의 변화를 부르짖었다. 그리고 겨울, 러시아에서는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시위대가 분연히 일어나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의 퇴진을 요구했다. 중국에서도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지난해 2월 20일 중화인민공화국에서 튀니지 혁명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시위로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체제를 타도하고 민주화를 이루자는 것. 또한 중국을 상징하던 저임금에 시달리던 근로자들은 파업을 선언하고, 개발을 앞세운 정부의 강행토지수용에 맞선 주민들의 반항도 이어졌다. 인터넷을 통해 순식간에 퍼져나간 시위계획은 13개 주요도시에서의 개최였으나, 공안에 의한 경계로 인해 소규모 시위만 가능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시민들이 연행되거나 외출금지명령을 받았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인터넷 이용의 감시가 어렵게 되자 시위를 개시하자는 글을 삭제하는 등의 대책을 세우고 있다.
2011년의 문을 연 아랍의 봄
▲ 2011 아랍의 봄 시위(위키백과 제공)
아랍의 봄은 전례가 없는 시위운동 및 혁명의 물결로, 2010년 12월 이래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반정부 시위를 뜻한다. 시초는 2010년 12월 18일 모하마드 부아지지의 경찰 부패와 이에 대한 대처법을 놓고 불거진 튀니지 시위자들의 집단행동이었다. 튀니지에서의 시위 성공에 힘입어 혁명의 물결은 알제리ㆍ바레인ㆍ이집트ㆍ이란ㆍ요르단ㆍ리비아ㆍ모로코ㆍ튀니지ㆍ예멘 등 중동과 북아프리카 일부 지역 등으로 번져나가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이어 이라크ㆍ쿠웨이트ㆍ모리타니ㆍ오만ㆍ사우디아라비아ㆍ소말리아ㆍ수단ㆍ시리아에서도 소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생하였다. 여러 반정부 시위 중 특히 튀니지와 이집트의 반정부 시위는 정권교체로 이어졌으며 이는 혁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러한 반정부 시위에서는 파업 참여 운동, 데모, 행진과 집회 뿐 아니라 SNS를 이용한 의사소통으로 광범위한 시민들의 인식확대가 가능해졌다.
수단 반정부 시위, 경찰에 꺾이다
2011년 1월 30일, 수단의 수도 하르툼과 알우이드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하르툼의 시내와 대학교들에서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이 있었다. 시위대는 튀니지 등에서부터 큰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SNS를 이용했다. 그들은 사이트를 개설하여 선전수단으로 적극 활용했다. 알와칸 신문의 편집자 후세인 코갈리는 딸이 시위대의 페이스북 계정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체포당했고, 시위대의 지도자인 무바라크 파딜의 두 아들도 시위의 주동자로 체포당했다. 경찰과의 충돌 중 부상당한 학생이 병원치료를 받다가 사망한 사건도 시위대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다. 친정부 성향의 언론은 시위대가 수단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고 경고하였으나 일부 시위자들은 대통령 오마르 알바시르의 사퇴를 요구하기 시작했으며, 국민 투표 결과 99%의 찬성률로 남수단의 독립이 이루어지자 시위의 열풍은 더욱 거세졌다. 학생 시위대는 경찰들에게 돌을 던지며“튀니지, 이집트, 수단은 함께”라고 외쳤다. 경찰은 이들 중 5명을 체포하며 시위를 진압하였다. 알우이드에서는 500명이 넘는 시위대가 광장에서 정부를 규탄하며 “변화를 원한다”고 외쳤으나 경찰이 최루탄을 쏘아 강제해산시켰다. 이후에도 수단 정부는 강력한 경찰의 힘으로 시위대 진압에 나섰다. 3월 21일에 계획되었던 시위는 시작하자마자 경찰에게 진압당해 무산되었다.
이집트 혁명, 정권을 몰아내다
▲ 격분의 금요일,2011년 4월 29일, 바니아스의 반정부 시위(위키백과 제공)
이집트에서는 2011년 1월 25일부터 2월 11일까지 장기 집권 대통령인 호스니 무바라크의 퇴진을 요구하며 반독재 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 첫날부터 정부는 대부분의 방송국을 검열했고, 시위자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퍼뜨리는데 도움을 준 소셜 미디어 웹사이트도 차단하기 시작했다. 1월 27일, 트위터에 이집트 내의 SMS와 블랙베리 메시지 서비스가 차단되었다는 글이 올라왔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SNS도 간헐적으로 차단됐다. 같은 날 밤 이집트 정부는 인터넷 접속을 전면 차단하는 전례 없는 행위를 실행했다. 당시 전세계적으로 이집트 내의 인터넷 주소는 접속이 불가능했다. 이집트인들은 전세계 핵티비스트(해커와 정치행동주의를 뜻하는 액티비즘[Activism]의 합성어로 최근 중국인권담당기관이 웹사이트를 개설하자 이에 침입, 공식자료를 지우고 비난 서명을 띄우는 등의 활동을 하는 정치적인 해커)들의 도움을 받아 토르(Tor, 익명 IP 네트워크) 프록시, 스마트폰 테더링, 지상선을 통한 전화 접속 모뎀 등 다양한 방법으로 차단막을 우회, 아마추어 무선까지 동원하여 국제적 통신을 시도했다. 이 일로 인터넷 활동단체 텔레코믹스는 이집트의 인터넷 접근성 등급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미얀마’와 같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집트 혁명으로 인해 최소 시위자 135명, 경찰 12명, 탈옥한 12명, 감옥 서장 1명이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최소 750명의 경찰과 4,000명의 시위자가 부상을 입었고, 최소 1000명이 구속을 당했다. 결국 무바라크는 1월 29일 내각을 해산하겠다고 발표했고, 2월 11일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은 군부에 권력을 이양하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리비아 혁명, 카다피를 사살하다 북아프리카의 국가 리비아에서 무아마르 카다피의 지지 세력과 카다피에 반대하는 반 카다피 세력 간에 무장충돌이 벌어졌다. 리비아 혁명(Libyan Revolution)이다. 리비아 혁명은 2011년 2월 15일, 리비아를 42년 동안 통치해 온 강압적인 카다피 정권에 대한 일련의 평화적인 반정부 시위로 시작되었다. 반정부 시위의 물결은 리비아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반 카다피 세력은 벵가지에 카다피 세력의 축출과 민주선거를 목표로 하는‘국가과도위원회’를 설립하였다.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는 초기에 카다피와 그의 측근 인사 열 명의 자산을 동결하고 여행을 제한하는 결의를 통과시켰으며, 이후 카다피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 2011년 3월부터 리비아는 본격적인 내전상태로 들어갔으며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다가, 결국 8월 카다피 세력이 수도 트리폴리를 장악하였다. 그러나 10월 카다피의 고향인 시르테를 공격한 반 카다피 군은 10월 20일 카다피를 사살하였다.
시리아의 봉기, 계속되다
▲ 시리아 반정부 시위대
2011년 1월 26일부터 2012년 현재까지 시리아는 내부갈등을 겪고 있다. 반정부 시위는 지난 해 1월 26일 시작되었으며, 3월 15일을 기점으로 크게 확산되었다. 시리아 봉기는 튀니지와 이집트의 혁명 운동처럼 행진과 파업 등을 포함한 다양한 항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시민 저항 운동이며, 지난 10년 간 시리아 내에서 일어난 최대 규모의 시위사태다. 시리아 정부는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천 명 이상의 시민을 살해하였으며, 이에 대해 100명 이상의 병사들이 사망한 데에는 시민들의 책임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정부 시위가 지속되며 시리아 정부는 전차와 저격수를 동원해 유혈진압의 강도를 높이고, 물과 전기의 공급을 중단하거나 식량을 몰수하기도 하였다. 시리아군은 2011년 5월 바니야스ㆍ홈스ㆍ하마ㆍ탈칼라크ㆍ라타키아ㆍ미단ㆍ두마 등 여러 마을에 진입해 시위대를 유혈진압했으며, 이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시리아의 인권은 국제기구와 전세계로부터 크게 비난받고 있다. 인권단체‘휴먼라이츠워치(Human Rights Watch:HRW)’는“바샤르 알아사드가 권력을 쥐고부터 10년간 시리아의 인권 상태를 개선시키는 데 실패했으며 시리아의 인권 상황이 세계 최악의 부류에 속한다”고 밝혔다. 시리아는 자유선거가 없는 독재상태로 통치되고 있으며, 정부에서는 인권운동가와 정부 비판자를 투옥하며, 표현ㆍ결사ㆍ집회의 자유가 엄격히 제한되고 있다. 지난 1월 16일 영국의 BBC방송은 국제인권단체들은 지난 1년 동안 400명이 넘는 어린이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이 중 상당수가‘고의적 살해’라 밝혔다고 보도했다. 유엔인권이사회에서도 2011년 12월 보고서에서 시리아 반정부 시위 10개월간 최소 5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지적했다. 지금도 시리아 국경에는 조국을 탈출하려는 난민 수천 명이 몰려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역시 지난 1월 16일“시리아 사태가 용인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며“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이 사태를 심각하고 엄중하게 다루길 희망한다”고 발언했다.
反 월가 시위, 전 세계를 점령하다
▲ 반월가시위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는 2011년 10월 15일에 시작, 미국 뉴욕 주 뉴욕 월가에서 진행되고 있는 시위로 미국의 가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뉴욕은 세계 최대 강대국 미국의 경제수도이며, 월가는 그러한 뉴욕의 경제중심거리이다. 반 월가 시위는 상위 1%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고 움직이며, 99%의 사람들에게는 자유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사람들의 분노다. 미국과 같은 기형적인 사회체제는 빈곤국가가 아닌 영국, 스페인 등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상위1% 소득계층의 소득이 전체 국민 소득의 23%를 차지하는 기형적 형태를 하고 있다. 반 월가 시위는 시작된 지 한 달가량 만에 전세계로 확산되었으며 미국과 아시아ㆍ중남미ㆍ유럽ㆍ오세아니아ㆍ아프리카 등 80여 개국, 1500여개 도시에서 유사시위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가장 과격한 양상을 보인 곳은 이탈리아 수도 로마. 10만여 명(주최 측 추산 20만 명)이 거리에 나선 로마에서는 일부 시위대가 국방부 청사 별관과 도로변에 세워진 차량에 불을 지르거나 은행 점포의 유리창을 파손했고, 경찰이 최루탄과 물대포를 쏘며 진압에 나섰다. 볼로냐에서도 경찰과 시위대가 몸싸움을 벌였다. 독일에서는 8000여명의 시위대가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유럽중앙은행(ECB) 청사 앞에서 세계 금융시스템의 부당함과 은행 권력의 과도한 집중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수도 베를린에서도 4만여 명이 시위에 나선 가운데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집무실 앞에서는 1만 명이 행진했다. 영국 런던에서는 5000여명의 시위대가“런던증권거래소(LSX)를 점령하라”시위에 참여했고, 페이스북을 통한 온라인 시위에도 1만5000여명이 동참했다. 특히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설립된 고발 전문사이트 위키리크스의 설립자인 줄리언 어산지도 시위에 참가해 시위자들을 독려했다. 어산지는“영국의 은행들은 부패한 돈을 받아낸다. 이것이 내가 런던점령시위를 지지하는 이유 중 하나다”고 밝혔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반 월가 시위의 지도부가 없으며 목표가 불분명하다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반 월가 시위가 금융 자본주의의 탐욕을 규탄하고 99%의 고충과 불평등을 고발하며 전세계의 공감을 얻어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마땅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최근에는 나치당과 공산당에서도 반 월가 시위에 대한 지지를 공식적으로 드러내며 시위의 순수성이 위협받고 있다. 반 월가 시위의 지도부 부제의 약점이 다양한 의견을 수용할 수 있다는 강점으로 승화될 수 있을지는 더욱 지켜봐야 할 것 같다.
러시아, 총리의 퇴진을 요구하다 지난 2011년 12월 24일 모스크바에는 러시아 정부의 부정 선거를 규탄하고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의 퇴진을 요구하는 수만 명의 시위대가 모였다. CNN은 이날의 시위대가 구소련체제가 붕괴한 이후 가장 규모가 컸다고 발표했다. 이 시위는 같은 달 4일 있었던 러시아 총선에 온갖 부정이 개입되었다는 것이 밝혀지며 10일부터 시작되어 점차 확산된 결과로, 이날 시위에는 2만 5천여 명(주최 측 추산 5만여 명)이상이 참여했다. 경찰은 시위에 대비해 2만9000명의 경찰관을 배치했다고 밝혔지만, 주최 측은 그보다 몇 배 더 많았다고 주장했다. 시위대는 부정 선거를 규탄하며“푸틴 없는 러시아”를 외쳤고 수십여 명의 시민들이 구속되었다. 푸틴의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러시아 전역에서 점차 커지고 있으며,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조차 푸틴의 퇴진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고르바초프는 현지의 한 인터뷰에서“푸틴은 지금 물러나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10여 년 전 푸틴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던 스스로의 결정을 수치스럽게 생각한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고르바초프는 이날의 시위에도 연사로 참석했으며, 작가 보리스 아쿠닌, 반체제 변호사 알렉세이 나빌니 등도 이 시위에서 연사로 나섰다.
한미FTA 반대 시위, 물대포와 맞서다
▲ 한미FTA시위대에 물대포 진압
2011년 한나라당이 주도해 비준한 한미 자유 무역 협정의 무효를 주장하며 시위가 시작되었다. 지난 해 11월 22일 한미FTA 비준 동의안이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되었고, 하루 뒤인 23일 오후 서울 명동 성당 등지에서는 한미 FTA 비준안 처리를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현장에는 3천여 명의 시민들이 모였는데 경찰은 도심 한복판에서 물대포를 쏘며 시위대를 강제 진압하였다. 더불어 일부 시위 참가자를 연행하는 등의 일이 벌어져 인권 시민단체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물대포의 경우 사람이 맞았을 때 그 강도가 세, 물대포에 맞아 고막이 찢어지거나 넘어져 뼈가 부러지는 등의 사례가 잇달아 발생함에 따라 경찰의 과잉 진압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가 높았다. 국가인권위원회 역시 경찰 측에 시위대에 대한 과잉진압을 자제할 것을 요청했다. 반면 같은 달 26일에는 광화문에서 열린 촛불시위에서 흥분한 일부 참가자들이 종로경찰서장을 폭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과 주최 측의 주장에 따르자면 일부 시위대가 박건찬 종로경찰서장의 얼굴과 어깨를 때리는 등의 폭력을 행했다. 경찰은 박 서장이 당시 사복경찰 5~6명과 함께 집회 참가자 속을 비집고 들어가고 있었는데, 이때 경찰복장을 입고 있는 박 서장을 발견한 일부 시민이 야유를 퍼부으며 박 서장의 모자를 벗기고 어깨와 머리 부분을 때렸다고 밝혔다. 시위대의 다른 참가자들이 이러한 행위를 말리기도 했으나, 이 과정에서 박 서장의 계급장이 뜯어지고 안경이 망가지며, 왼쪽 어깨에 타박상을 입는 등 전치 3주의 부상을 당했다고 전해졌다. 박 서장은 이 날 정상 출근했으며 현장 비디오 자료 등을 바탕으로 김 모 씨(54세, 무직)가 긴급 체포되었다. 경찰 측은 집회의 불법성과 폭력성이 공공질서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며 용의자를 엄중 처벌하겠다고 밝혔다.
1%에게 버림받은 99%가 꿈틀하다
“우리 99%는 1%의 탐욕에 저항한다”이는 반월가시위대의 구호다. 그리고 이 구호가 이제 서울에서도 들려오고 있다. 시민들은 이제 1%의 특권층이 아닌 99%의 서민을 위해 투표해야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깨닫기 시작했다. 한국대학생연합 등 43개 청년과 대학생 단체에서도 작년 10월 19일 있었던 기자회견에서“지난 10년간 뉴타운 재개발로 1% 부자만 배불렸고 청년들은 고시원, 반지하, 옥탑방으로 내몰렸다”며“1%만을 위한 서울시정의 최대 피해자는 청년층”이라 강조했다. 반 월가 시위에서 처음 거리로 뛰쳐나온 것도 대학 졸업 후 비정규직으로 일하며 불안한 미래에 힘겨웠던 미국의 서민들이었다. 서민들이 양극화와 실업으로 생존권을 위협받는데도 정치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99%의 서민들을 외면해왔다. 그래서‘안철수 바람’이 불었고, 박원순 서울 시장이 당선할 수 있었다. 1%에게 버림받은 99%의 꿈틀거림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 <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