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갈등의 깊은 골, 호ㆍ영남 지역감정 분석

오늘날의 많은 정치학자들은‘갈등은 민주주의의 위대한 엔진’이라는 말에 동의하고 있다. 또한 민주주의는 갈등에 기반을 둔 정치제체이며, 진정한‘정의’는‘갈등’이라고 했다. 실제로 우리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 갈등의 안정적인 표출은 그것이 자기 파괴적으로 표출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민주주의의 기초를 이루는 갈등이라는 것은 매우 다양한 유형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사회에서도 여러 갈등들이 표출돼 왔다. 지난 1987년 발생한 6월 항쟁으로 제도적 민주화가 이뤄진 후 잔재하는‘지역감정’을 기반으로 한‘지역 간의 갈등’이 그것이다. 지역갈등은 특정 정치인 혹은 당에 대한 지지 혹은 거부의 형태로 정치적 대의자를 선출하는 선거에 매우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으며, 1987년과 1988년 양대 선거를 통해 지역감정 문제는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현안 중 하나로 대두 돼왔다. 최근엔 진보정당의 출현 등으로 다소 완화되고 있는 추세이긴 하나 그 영향력은 여전히 지대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지역갈등은 아직도 간과할 수 없는 한국사회 최대 과제 중 하나이다.

박미진 기자 mjp@

민주주의에서의 갈등
정치학자 덩크와트 러스토우(D. A. Rustow)는 민주주의는 갈등에 기반을 둔 정치제체라고 말하고 있으며, 스튜어트 햄프셔(S. Hampshire)도“정의는 갈등이다”라고 말해왔다. 실제로 갈등은 시민들의 민주적 역량을 축적시키며, 나아가 더 정의로운 사회가 될 수 있도록 한다. 만약 다원적인 현대 사회에서 갈등이 표출되지 않는 사회가 있다면, 그것은 그 사회가 잘 통합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떠한 힘에 의해서 갈등이 억압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갈등은 민주주의체제 하에서 정당의 바람직한 역할 또한 사회적 균열(cleavage)의 제도적 표출로 이해돼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민주주의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 민주주의는 사회가 서로 갈등하는 이해와 의견 차이로 이루어져 있는 조건에서, 이들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는 데에 그 존재 이유가 있는 정치체제이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갈등‘지역감정’
한국사회에서 갈등은 주로 호남과 영남간의 지역감정에서 두드러진다. 우리나라와 같은 제도권 정치에 있어서 이러한 지역간의 갈등은 당의 유일한 분획선으로 작용해 왔다. 그러나 이 같은 지역감정은 선거과정에서의 그 영향력이 워낙 지대해, 지나친 분열을 획책하기 때문인지‘망국병’이라는 별칭까지 붙기도 했다. 지난 1987년과 1988년엔 양대 선거(1987년 6월 민주 항쟁의 영향으로 대통령직선제로 헌법 개정. 김대중, 김영삼 후보 연합-노태우와 경쟁 구도 형성했으나, 김대중 후보가 김영삼과의 연합 체제를 깨고 경쟁자의 길을 택한 이후 영호남이 분열이 시작됨)를 통해 지역감정 문제가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현안 문제 중의 하나로 대두된 이후 그 심각성에 대한 우려와 함께 이의 해소를 위한 방안들에 대한 논의가 다각도에서 모색되어 왔을 정도였다. 현재는 이념적 협애성의 완화로 인한 진보정당의 출현 등으로 다소 완화되고 있는 추세이긴 하나 그 영향력이 여전히 지대하다는 측면에서 지역감정은 아직도 간과할 수 없는 한국사회 최대의 과제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역감정(지역간의 갈등)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원인은 크게 ▲역사상 기원(‘지역 국가나 지역갈등이 현재의 지역갈등에 원인을 제공했는가’또는‘왕조나 지배계층에 의해 특정 지역에 대한 차별이 행해졌는가’) ▲지역민간의 선천적‘성격차이’ ▲지역적 불균형발전 ▲중앙사회(엘리트)의 차별적 충원으로 보고 있다.

역사적 관점1. ‘지역국가에서 기원’
먼저 역사적 관점에선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간의 대립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부족국가가 부족연맹의 단계를 거쳐 왕권적인 고대 국가로 형성되는 시점부터 삼국 간에는 잦은 대외 정복 전쟁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세 나라 국민들 사이에는 적대심이 형성됐고, 실제로 광개토왕 비문을 비롯한 많은 사료들은 삼국 사이에 존재했던 노골적인 적개심을 증명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현대 지역감정의 원인으로 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근대 이전의 사회에는 어느 민족이든 혹은 국가든 항상 지역대립의 현상은 있었으며, 이런 대립과 갈등을 겪지 않고 통일국가를 이룬 예는 거의 없다. 삼국간의 대립은 어디까지나‘국가 간’대립이었다. 영국과 같이 지역 국가의 강한 독립성이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경우라면 몰라도, 삼국은 후에 통일과정을 거치면서 단일민족의 의식이 강하게 자리매김했다. 때문에 삼국시대의 대립현상이 오늘날 하나의 국가체제 안에서의 지역갈등과 감정의 기원이라고 보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일각에서는 오늘날의 지역갈등이 신라지역을 대표하는 영남과 백제지역을 대표하는 호남 간 지역갈등이 가장 첨예하다는 사실을 근거로 삼국시대의 백제와 신라의 대립이 오늘날의 호남과 영남의 대립으로 재현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남북분단의 원인을 고구려와 신라 또는 백제 간의 대립에서 찾고자 하는 것만큼이나 단순한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 관점2. ‘특정계층의 지역 차별’
일각에선 역사상 지배계층의 특정 지역에 대한 차별이 오늘 날 지역감정을 조장한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피정복민인 백제와 고구려 유민을 포섭하는 과정에서 백제 유면에 대해 차별적인 대우를 한 바 있다. 즉 통일 이전까지는 대등한 관계에서의 갈등구조가 통일 이후에는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관계로 바뀌면서 특정지역(민)에 대한 차별로 변모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조까지의 지역간의 갈등은 주로 중앙관계에의 진출을 최고 가치로 여겼던 사대부 계층에 있어서 중앙과 지방간의 갈등이었지, 호남과 영남, 관북과 관서 등 지역간의 갈등관계는 아니었다. 조선조 후기에 발생했던 동학혁명도 경상도 경주출신의 최제우에 의해 창시되어, 당시 농민에 대한 수탈이 가장 심했던 전라도 지역이 중심이 되어서 일어난 것이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중앙정부 또는 지배계층에 대한 피지배계층의 항거이지 지역중심의 반란으로 볼 수는 없다. 또한 고려 이후 각 지역에서 발생한 민란에 있어서 호남지역의 민란 발생빈도는 타 지역에 비해 오히려 적은 편에 속하며, 그 성격도 왕권이나 체제에 대한 도전이라기보다는 지방 관원들의 백성에 대한 학정에 기인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적어도 조선조 말까지는 지역에 따른 차별대우는 존재했지만 그것이 지역과 지역 또는 지역민간에 갈등과 대립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관습적 관념‘선천적 성격차이’
다음은 전국의 18세 이상의 남녀 463명을 대상으로 관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각 지역민에 대해 고정화된 기존관념을 조사한 한 것으로, 20개의 양극‘형용사 척도’를 통해 각 지역민에 대한 고정관념을 밝혀낸 결과 ▲서울 사람은 사교적이고 영리하나, 이기적이고 인색하다 ▲충청도 사람은 다정하고 겸손하나, 보수적이고 결단성이 없다 ▲강원도 사람은 검소하다, ▲전라도 사람은 생활력이 강하고 영리하며 사교적이나, 이기적이고 신뢰성이 없다 ▲경상도 사람은 생활력이 강하고 결단성이 있으나 시끄럽다 ▲제주도 사람은 생활력이 강하다 등의 인식이 강했다. 이러한 고정관념의‘형성 계기’는 ▲직접 경험에 의한 것이 41.5% ▲부모로부터 전해들은 것이 17% ▲친구나 이웃으로부터가 16.5% ▲매스컴을 통해서가 15.5%인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각 지역민에 대한‘사회적 거리감 측정’에 있어서는 전라도 사람에 대한 차별대우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결혼상대자로는 56% ▲친구로는 61% ▲동업자로는 63% ▲동거자로는 59%가 전라도 사람을 상대로 삼지 않겠다고 말했으며 ▲36%는 정착지로 전라도를 선택하지 않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다음으로 한국 대학생의 지역적 편견을 연구(전국 4개 지역권(서울, 충청, 전라, 경상)의 대학생들에게 25개의 특성 기술 개념을 통해 평가)한 결과 ▲서울 사람은 대체로 사교적이고, 타산적이며, 이기적이다 ▲충청도 사람은 대체로 예의가 있고, 소박하고, 성실하다 ▲전라도 사람은 대체로 생활력이 강하고, 타산적이고, 야심적이다 ▲경상도 사람은 대체로 시끄럽고, 의지있고, 결단력이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전라도 사람들은 스스로를“영리하다, 의리있다, 소박하다”라고 자체평가하고 있으나, 타 지역 사람들은“생활력이 강하다, 타산적이다, 야심적이다”라고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전라도 사람에 대한 지역민간의 생각이 집단 간 갈등과 반목의 주요 요인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의 연구들에서 주목할 것은 호남인의 성격 특성으로‘간사하다’든가‘신뢰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특성이 반복되어 지적되고 있다는 사실과, 호남 외 지역 사람들은 지역감정의 원인을‘호남 사람들의 성격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호남사람들의 성격이나 행동양식에서 타 지역민과 구분되는 특징이 정말 존재하는가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 전남, 광주, 대구, 경북 4개 지역의 중, 고, 대학생 총 1,010명을 대상으로‘캘리포니아 성격 검사’를 사용하여 조사한 연구에 의하면, 호남 학생들이 영남 학생들보다 지배성, 안녕감, 독자적 성취, 그리고 융통성 척도에서 유의미하게 높은 점수를 나타내고 있을 뿐, 성격검사를 통해 나타난 것으로는 호남인의 성격은 영남인의 성격과 크게 다르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지역감정이 호남인의 성격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근거가 없다고 밝히고 있다.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다른 연구에서는 영남인의 성격 특성으로 나타나지 않던‘약삭빠르다’, ‘간사하다’, ‘이기적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형용사가 호남인이 지적한 영남인의 특성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영남인이 호남인을 보던 태도가 호남인에게 영향을 주어 역으로 나타난 결과라고 해석하고 있다.

지역적 불균형 발전이 한몫?
1960년대 이래 시행되어 온 우리나라의 경제발전 전략은 공업화를 중심으로 한 성장위주의 정책이었다. 이러한 맥락 아래서 경제개발의 기본 전략으로 설정한 불균형 집중투자전략은 지역간의 불균형을 심화시켜 오늘날 지역감정과 갈등의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은 이미 여러 연구사례에서 공통적으로 지적된 사항이다. 이들 연구들은 수도권 및 영남지역이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지역이며, 혜택을 받지 못한 지역은 전라도, 강원도, 충청도 지역이라는 사실에 대해 여러 가지 통계자료를 통해 증명해 보였다.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여 년간 전국의 지역별 제조업 분포율은 서울이 29.9%로 가장 높았고 다음 경남(22.5%), 경북(14.5%), 경기도(10.1%), 전북(6.0%), 충북(2,5%), 강원(1,150%), 제주(0.8) 순이었으며, 20년 뒤인 2000년대 들어서는 서울이 21.1%로 경남(28.5%)에 밀려 다음 두 번째 순위로 내려갔고, 다음 경기(25.0%), 경북(12.6%), 충북(1.9%), 강원(0.9%), 제주(0.2) 순으로 영남지역이 경제적 측면에서 우세한 반면, 호남 및 강원, 충청지역은 열세 지역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지역간의 경제적 격차가 지역갈등이나 감정을 유발시키는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다. 경제적 수준이나 지역개발의 측면에서 가장 앞선 곳은 수도권 지역인데 이에 대해서는 여타지역 주민들이 지역감정을 느끼지 않으며, 또한 호남지역에 못지않게 경제적 측면에서 열세지역인 충청, 강원지역 주민들은 우세지역을 향해 지역감정을 표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것을 증명해 준다. 한편, 응답자들을 출신지 별로 재분류한 후 경제발전의 과정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본 지역과 손해를 본 지역에 대한 생각을 알아본 한국사회학회의 조사에 의하면, 가장 큰 이득을 본 지역은 영남지역(41%)이, 서울과 경기지역(31.2%)이라고 응답하였는데, 이를 다시 응답자의 출신지에 따라 살펴보면, ▲전라도 출신들은 영남지역이 이득을 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비율(65.7%)이 높은 반면 서울과 경기 지역이 이득을 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비율(14.8%)은 낮았다. 한편 ▲경상도 출신들은 자신의 출신지역인 영남이 이득을 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비율(31.1%)이 상대적으로 낮고, 서울과 경기지역이 이득을 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비율(39.9%)은 상대적으로 높았다. 이 같은 결과들은 호남출신들은 영남을 자신의 지역과 비교하여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는 것을 보여준다. 역으로 ▲가장 큰 손해를 본 지역에 대해서도 전체 응답자 중 45.7%가 호남지역을 ▲10.3%가 강원도와 충청도를 지적하고 있는데, 특히 ▲전라도 출신은 자신들의 출신지역이 절대적으로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73.0%) 같은 비수혜지역인 ▲강원도와 충청도가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비율은 매우 낮은 것(3.0%)으로 나타났다. 종합적으로 살펴본 결과 경제적인 격차는 영남과 호남 간 지역감정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며, 단지 지역감정을 부추기며 강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중앙사회(엘리트)의 차별적 충원이 결정적
중앙엘리트의 영호남 출신자와 구성비를 조사한 결과, ▲3급 이상 공무원ㆍ영남(28.0%) 호남(9.1%) ▲청와대 비서관ㆍ영남(47.2%) 호남(2.8%) ▲군장성ㆍ영남(44.0%) 호남(11.5%) ▲50대 재벌 임원ㆍ영남(32.6%) 호남(6.3%) ▲KBS, MBC 임원ㆍ영남(35.5%) 호남(6.5%)와 이와 같이 중앙엘리트들의 출신지역이 호남보다 영남이 큰 폭으로 많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전근대사회에서는‘특정 지역 출신의 등용제한’이라는 문제가 귀족, 사대부 등 일부 계층에만 국한된 문제였을 뿐 일반 백성과는 무관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곧 지역감정을 야기한 직접적인 원인으로는 작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비단 엘리트의 충원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닌, ‘사회생활 전반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차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인식으로 해석 될 소지가 있으며, 이는 지역감정을 심화시키는 큰 요인이다. 또한 온정주의적, 연고주의적 속성이 상대적으로 강한 한국사회의 경우, 엘리트 충원이 자신의 출신지역 사람이 적거나 없을 경우에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하더라도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경제적 격차 등과 같은 현상이 결합할 경우 이는 더 증폭된다. 실제로, 사회조사연구소(부산대)의 조사결과에 의하면 지역감정의 유발 원인으로서 정부의 지역불균등 발전 정책(55.4%)에 이어 정부 고위직 인사 정책의 지역적 차별을 46.2%가 지적하고 있으며, 지역별로는 호남 출신은 인사정책상의 차별에 대해 78%가 지적하고 있는데 반해 영남출신은 12%만이 지적하는 대조적 현상을 보이고 있다. 즉 엘리트 충원에 있어서의 불균형이 원인이 돼 수혜 지역과 비수혜 지역 간에는 경제적 격차가 벌어지고 사회적 차별이 빚어진다고 인식하게 될 때, 스스로 피해지역이라고 생각하는 지역의 주민들은 엘리트 충원에 있어서 불균형의 문제는 소수의 엘리트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고, 바로 자신의 문제라는 인식으로 전환돼 이것이 집단의식화 될 때 지역감정으로 발전된다. 이러한 인사에 있어서의 편중적 구조가 장기간 계속되고 있을 뿐 아니라 좀처럼 시정될 전망이 없다고 인식될 때, 소외지역의 주민들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자기 지역 출신의 집권이라는 목표로 집약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잠재하여 있던 지역감정은 선거과정을 통해 가장 노골적이며 첨예하게 표출되는 것이다. 하지만 호남이 지지하는 정치엘리트의 경우에도 호남의 이해를 대변하지 못했다. 실제로 호남 출신의 김대중과 정당이 갖는 보수적, 엘리트적 요소는 자주 호남문제가 갖는 개혁적, 민중적 성격과 충돌했었다. 김대중 정당 내의 운동적 요소들조차 전국적 보편주의를 가짐으로서 호남이라는 지역성이 갖는 향리적 특수주의와도 충돌했었다. 그렇다면 지역감정의 동원은 어떠한 사회 균열에도 기반을 두지 않은 정치엘리트의 의도적 동원이라는 결과를 얻을 수밖에 없다.

중앙엘리트들은 왜 지역감정을 동원했는가?
그렇다면 중앙엘리트(정치인)들은 왜 이러한 지역감정을 동원했을까? 그 근본적인 원인은 한국 정치체계의 출발 당시에 있다. 한국의 정치는 냉전반공체제의 산물로서 극히 협애한 이념적 스펙트럼 내에서 형성되었다. 이미 분단국가의 건설자들은 스스로 정치적 경쟁의 틀을 협애한 이념적 공간 내에 가두었고, 갈등과 균열을 표현할 수 있는 정치언어와 담론의 범위를 최소한으로 축소했다. 좌우의 극한적 이데올로기 갈등이 가라앉았을 때, 당시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던‘인민’이라든가, ‘계급’, ‘노동자’와 같은 단어는 공산주의자들의 언어인 것처럼 인식되었고, 이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 정당이 사회 갈등을 표출하고 대변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짐으로써 여ㆍ야당을 포함한 한국정치의 대표체계 전체는 사회의 이익과 요구를 광범위하게 대변하지 못한 채, 사회의 가장 기득적인 보수층만을 대변하게 됐다. 그러나 곧 이러한 사태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한 사건이 1970년대 유신체제에서 발생했다. 1980년 광주항쟁으로 폭발한 지역문제였다. 선거에서 지역간 경쟁의 구도는, 먼저 1987년 민주화와 더불어 선거공간이 개방되었을 때 야당과 민주화운동이 단일전선으로 통합되는 것을 제어하고 분열시키기 위한 권위주의 세력의 사회적 동원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 후 민주적 개방과 함께 지배적 정당체제로서 지역정당체제가 형성됐다. 이것은 냉전반공체제가 주형한 대표체제의 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사회의 다른 계층적 갈등과 이익, 열정이 표출되고 동원될 수 있는 정치적 경쟁이 어려운 상태에서, 지역의 지지시장은 정치 엘리트와 정당이 선거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었던 가장 손쉬운 정치적 자원이기 때문이다. 즉 한국의 지역감정은 민주적 개방과 더불어 대중 동원이 필요했을 때 기존 정치엘리트의 틀 속에서 지역을 분획함으로써 국지화된 갈등 축을 따라 대중을 동원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지역감정은 냉전반공주의를 기반으로 한 사회구조와의 단절이 아닌, 그것의 지속을 보장하는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돼 왔다는 결론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난 반세기동안 우리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에 대해 합리적 대안으로 조직화 되고 또, 상호 갈등하고 경쟁하면서 사회적 기초가 튼튼해지는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날치기 법안 통과, 상대후보 원색비판, 파벌싸움 등 난국에 처한 오늘의 한국사회를 위해 지금 우리사회는 지역감정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갈등을 되찾을 때 이다. <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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