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반ㆍ부녀ㆍ호남 10%… 진기록 양산하며 대한민국 최초로 여성대통령이 되기까지”
개표 시작 후 2시간 40분,‘당선 유력’
박 당선인은 지난 2007년 대선 이후 5년 내내‘차기 대통령’여론조사에서 1위를 지켜왔다. 안철수 전 서울대 교수‘바람’이 불면서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꾸준히 대세론을 지키며 대선에서 승리했다. 특히 선거 1~3일 전에는 일부 여론조사에서 문 후보에게 역전을 허용했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지만, 40대와 수도권을 집중 공략하면서 마지막 고비를 넘었다. 박 당선인은 열세가 예상됐던 수도권에서 선전하고, 충청 지역에서 문 후보를 크게 따돌렸다. 새누리당으로서는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다는 의미도 있다. 이명박 정부의 인기가 떨어진 상황이었지만, 지난 4월 총선에 이어 대선까지 승리함으로써 행정부와 의회를 모두 쥔‘10년 정권’을 만들어냈다. 민주당은 5년 만에 정권 교체를 시도했지만‘박근혜’의 벽을 넘지 못했다. 민주당과 좌파ㆍ진보 진영에선 전체적으로 새로운 판짜기가 시작될 가능성이 커졌다. 박 당선인은 지난 19일 오후 6시 투표 마감 이후 시작된 개표에서 처음부터 문 후보를 계속 앞섰고, 8시 40분쯤‘당선 유력’전망이 나왔다. 이번 대선 투표율은 75.8%로 97년 대선(80.7%) 이후 치러진 전국 규모 선거 중 가장 높았다.
박근혜, 경기ㆍ인천서 앞서… 충청ㆍ강원선 압도적 우위

외신들, 한국 첫 여성 대통령 탄생 주목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승리로 끝난 한국 대선 결과에 대해 주요 외신 역시 관심을 가지고 보도하고 있다. 지난 20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한국의 첫 여성 대통령으로 선출됐다고 보도하면서 한국 국민들은 급진적인 변화보다 안정적이‘모성애’와 같은 리더십을 선택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박근혜 후보가 선거관리위원회의 개표 결과 51.64%의 득표율로 47.93%를 기록한 인권 변호사 출신인 민주당 문재인 후보를 제치고 당선됐다고 전했다. 또한 신문은 박 후보의 당선은 비록 최근 몇 년 간 여성들이 빠르게 사회에 진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한국 사회에 시금석이 될 전망이라고 평가했다. 유에스에이(USA) 투데이지는 박 후보의 당선이 남성이 지배하는 한국 사화에서 오랫동안 무시되던 여성의 지위를 다시 부각시켰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또한 군사 쿠데타를 이끈 장군의 딸이 여성 대통령이 된 것은 북한과의 관계에서 유화적인 입장을 보인 문재인 후보에 비해 좀 더 단호한 태도를 취한 것, 정부 부패를 근절하고 복지혜택을 높이겠다고 한 것이 작용했다고 평가했다. 블룸버그 통신 역시 한국발 기사를 통해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시해된 지 30년 만에 한국의 첫 여성 대통령으로 선출됐다고 전했다. 통신 역시 한국을 성별 격차가 가장 심한 국가 중 한 곳으로 평가하면서 당선된 박 후보의 앞에는 경제 둔화와 남북간 갈등 등의 문제를 풀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통신은 박 후보의 당선이 역사적으로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한 학계의 반응을 전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 또한 박 후보의 당선에 대해 첫 여성 대통령의 탄생이라고 평가하면서 한국이 보수 정권의 연장에 성공했다고 전했다. 신문은 한국의 중년층과 고령층의 지지가 박 후보의 당선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하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0년대 한국에 경제 붐을 일으켰다고 소개했다. 중국 신화통신은 박 후보의 당선으로 한국의 첫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으며 보수 정당이 앞으로 5년간 정권을 이끌 것이라고 전했다. 신화통신은 또한 박 당선인에 대해 선거의 여왕으로 불리는 정치 베테랑이라고 소개하면서 그가 시해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로 앞서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의 부패 스캔들을 수습한 바 있다고 밝혔다.
박근혜, 그녀는 누구인가

▲ 승부욕 강한 아이
박 당선인은 1952년 2월 2일 경북 대구시 삼덕동(대구 중구 삼덕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박정희는 나이 36세로 육군본부 작전교육차장이었고 주부였던 육 여사는 28세였다. 어린 박근혜는 군인이던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 1958년 서울 장충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조용하고 차분하면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집요한 성격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학년 생활기록부엔‘온순, 침착한 성격, 무엇이든지 성실하게 해내며 실패를 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든 호감을 주는 학생이지만 특정한 친구들과만 노는 경향이 있다’라고 돼 있다. 이런 성격은 학업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동생 근령 씨는 어린 시절 박 당선자에 대해“언니는 매우 모범적이고 착한 학생이었다. 모든 과목에서 좋은 성적을 받으려 했다. 수학이나 국어를 열심히 공부해 좋은 성적을 얻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언니의 경우는 체육 과목까지 열심히 공부해 좋은 성적을 얻으려 했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땐 공기놀이의 동네 챔피언이 되기 위해 동생 근령과 집에서 따로 공기놀이를 연습하기도 했고 고무줄놀이에서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숨을 참으며 깡충깡충 뛰기도 하는 승부욕이 강한 아이였다.
▲ 5ㆍ16으로 바뀐 인생, 청와대로…
1961년 5월 15일 밤 10시, 서재에 있던 박정희 소장은 부인 육 여사를 보고 말했다.“그 가방 속에 권총 있지. 꺼내 줘요. 다녀올게.”그때 박근혜의 나이 열 살이었다. 5ㆍ16은 한 군인의 인생만 바꾼 게 아니었다. 박근혜의 인생이 바뀐 첫 순간이기도 했다. 5ㆍ16군사정변과 1963년 대통령선거를 거쳐 박근혜는 아버지를 따라 청와대로 이사한다. 그는“청와대에 도착한 순간 무엇보다도 엄청나게 넓은 정원에 압도됐다”라고 회고했다. 육 여사는 그가 장충초등학교를 다니기에는 너무 멀어 어머니(박근혜의 외할머니) 집에 맡기기로 했다. 대통령의 딸이라고 자동차로 데려다주고 데려오면 특권 의식이 생길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1964년 성심여중을 다닐 땐 1년 동안 기숙사 생활도 했다. 당시 생활기록부엔 ‘아버지의 기대’라는 항목에 1학년 땐‘피아니스트’, 2ㆍ3학년 땐‘교육자’로 돼 있다. 2학년 생활기록부엔‘너무 어른 같은 것이 결점’, 3학년 땐‘너무 신중해서일까, 과묵한 편’이라고 기재돼 있다. 성심여고를 졸업한 박근혜는 1970년 3월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육 여사는 가정과에 진학하기를 바랐지만 박 대통령이 친분이 있는 김완희 교수의 말을 하면서 전자공학과로 진학하기를 권했기 때문이다.
▲ 고통과 도전, 정치사에 이름을 올리다
1974년 8월 15일.“어머니께 무슨 일이 생겼으니 빨리 하숙집으로 와야 한다.”프랑스 그르노블대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중 친구들과 여행을 하고 있던 그에게 하숙집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급히 귀국길에 오른 그는 프랑스 공항에서‘암살’이라는 글자와 함께 어머니 사진이 크게 실린 신문을 보고 귀국 이유를 알았다. 그는“수만 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고 날카로운 칼이 심장 깊숙이 꽂힌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라고 당시 심정을 표현했다. 스물두 살에 퍼스트레이디가 됐다. 그는 프랑스 유학 시절 언젠가 좋은 사람을 만나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바람을 가졌지만 모두 물거품이 됐다. 그는 곧바로 걸스카우트 명예총재를 맡았고 새마을운동을 구체화한 새마음운동을 주도하며 퍼스트레이디 업무에 몰입했다. 그는“어머니의 행적은 나에게 훌륭한 교과서가 됐다. 탁상행정을 몹시 싫어하셨던 어머니는 고되고 힘들더라도 직접 뛰어다니며 민원을 해결하셨다”라고 자서전에 썼다. 그즈음 그는 아버지와 국내 정치에 관해서도 자주 이야기를 나눴다. 1979년 김영삼 당시 국회의원이 제명된 것을 놓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어떻게 국회의원의 배지를 뗍니까? 아버지가 쌓아 올린 업적을 중앙정보부가 무너뜨리고 있는 것 아닙니까”라고 추궁했다고 한다.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면서 아버지를 따라 세계 각국의 정상과 지도자를 만났다. 이때 쌓은 국정ㆍ외교 경험은 훗날 그가 대통령에 도전할 때 자랑하는 중요한 이력이 됐다. 그러나 이런 도전의 기간은 길지 않았다. 1979년 10월 26일 아버지는“오늘은 삽교천 행사에 간다”라며 아침에 청와대를 나섰다. 그날 저녁 TV를 통해 본 행사 장면에 대해 그는“아버지의 안색이 유난히 하얗게 보여 이 세상 분이 아닌 것같이 느껴졌다. 아버지의 건강에 좀 더 신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라고 회상했다. 다음 날 오전 1시 반 전화벨이 울렸다. 김계원 당시 비서실장은“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그 순간 한 말은“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라는 질문이었다.
▲ 고난과 수행으로 단련한‘잠적기’
그는 9일장을 치르고 난 뒤 청와대를 떠났다. 부모를 대신해 한 집안의 가장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때부터 18년간 고난의 세월이 시작된다. 그는 당시“아버지가 심혈을 쏟아 온 이 나라, 이 사회를 위해 조그만 마음을 바치며 조용히 살겠다”라고 생각했다. 10년 뒤인 1989년 10월 26일.“묘소까지 가는 도중 마음의 울렁임을 참기 힘들었다. 추모사에서‘아버지!’ 하고 부르고 나면 감정이 폭발해 자제키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의 일기장에 담긴 것처럼 15만 명의 참배객이 몰려든 박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 추도행사는 그만큼 특별했다. 전두환 정권은 박 전 대통령의 흔적 지우기에 매진하며 추도식도 허용하지 않았다. 박근혜 남매는 아버지 기일이 되면 숨죽이며 제사를 지냈다. 박 전 대통령의 측근이던 이들은 전두환 정권의 눈에 들기 위해 박정희 정권이 부정부패의 온상이라는 비화들을 쏟아 냈다. 그는 홀로 아버지의 명예 회복에 애썼다. 1988년 박정희ㆍ육영수기념사업회를 발족하고 박정희 일대기를 다룬 책과 영화를 제작했다. 그러나 시련의 연속이었다. 1980년 4월 영남학원 이사장에 올랐으나 교내 운동권의 반대로 7개월 만에 사퇴했다. 동생인 근령 씨와 갈등이 빚어져 육영재단 이사장도 사직했다. 그의 일기장을 보면 당시의 참담한 심정들이 담겨 있다.“너무나 고통이 잇달으니 심장이 감당을 못하는 것 같다.”,“그런 생을 다시 살라고 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할지도 모른다.”그는“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어려웠던 시절, 견디기 힘들어 미치지 않고 살았던 게 기적이었던 시절, 타락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극복해 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고전 등 많은 책을 읽으면서 제 마음을 때리는 좋은 글귀를 적고 다시 읽어 보곤 했다”라고 회고했다. 1997년까지 계속된 이 고통과 시련의 음울한 시간이‘대통령 박근혜’를 만들기 위한 단련의 시간이었다. 박 당선자는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정치에 입문했다. 국가 부도 위기, 대량 실업사태와 생활고에 대한 기사를 접하며 박 당선자는“가슴 밑바닥까지 분노가 일었다.”고 했다. 수많은 국민들이 피땀을 흘린 결과로 세운 나라인데 이렇게 한순간에 무너진다는 데 대한 허탈함과 위기감이었다. 그는 1997년 12월 10일 대선을 8일 앞두고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1996년 총선 직전 자유민주연합(자민련)에서 경북 구미에 출마할 것을 제의했으나 정치에 별 뜻이 없다며 거절했다.
▲“국민과 아픔 함께”국회 본회의장 첫 발언
당선자는 이어 1998년 4월 대구 달성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나섰다.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 정권이 교체된 직후 김 전 대통령의 지지율이 90%가 넘는 상황에서 막강한 조직력을 갖춘 여당 국민회의 엄삼탁 후보와 맞붙어야 했다. 이른바‘달성대첩’이다. 조직과 자금이 없었던 박 당선자는 지역 구석구석을 다니며 유권자들과 만났다. 그는“어느 후보보다 가난한 선거를 치르고 있었지만 내게는 깨끗한 정치를 하겠다는 꿈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예상과는 달리 큰 차이로 이겨 15대 국회에 입성했다.“나라가 어려운 때 정치에 입문하게 되어 더욱 어깨가 무겁다. 앞으로 깨끗하고 바른 정치, 국민과 아픔을 함께하는 정치가 구현되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다.”본회의장 발언대에 처음 선 박 당선자는 이렇게 밝혔다. 2000년 총선을 통해 16대 국회의원이 된 뒤 박 당선자는 전당대회 부총재 경선에 도전장을 냈다. 여성 몫 부총재 자리를 당연직으로 얻을 수 있었지만 거부했다. 경선을 통해 2위로 부총재에 당선된 뒤 박 당선자는 정치개혁, 정당개혁을 주요 과제로 삼았다. 정당의 구조에서 비롯된 잘못된 정치시스템을 바로잡자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당내 분란을 일으키고 종종 왕따가 됐고 비주류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고 한다. 박 당선자는 정치개혁의 핵심으로 상향식 공천을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한나라당을 탈당했다. 이후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해 이끌다가 같은 해 11월 한나라당이 자신의 개혁안을 받아들이자 합당했다. 한국미래연합 창당을 준비하던 2002년 5월 박 당선자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기도 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두 번째 대권 도전에 실패한 뒤 한나라당은 침몰하기 시작했다. 2004년 4ㆍ15 총선을 앞두고 차떼기, 탄핵역풍 등으로 위기에 놓였다. 박 당선자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3월 전당대회에 출마해 당 대표가 됐다. 이 자리에서 박 당선자는“‘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다’고 한 충무공의 비장한 각오를 되새기며 이 자리에 섰다”면 “저는 부모님도 없고 더 이상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사람이다. 당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호소했다.
▲ 대표때 정당 사상 첫‘대국민 약속 실천 백서’ 발간
침몰 위기의 한나라당 선장이 된 박 당선자는 우선 당사에서 나와 여의도 공터에 천막당사를 열었다.“말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으로 개혁의 참모습을 보여 드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명동성당, 조계사, 영락교회 등 종교계를 다니며 사죄의 뜻을 보였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비관적인 예상을 뒤엎고 121석을 얻었다. 이후 서울 강서구 염창동에 둥지를 튼 뒤에도 천안의 연수원을 사회에 환원했고, 비리 등의 혐의로 당원권이 정지된 당원, 중진의원들을 직접 검찰에 고발하는 등 개혁 의지를 강조했다. 박 당선자는 또 원내 정당, 정책 정당, 디지털 정당을 목표로 내세워 실천했다. 당 대표가 의원들과 같은 자리에 앉아 함께 토론을 하도록 의원총회 형식을 바꿨고 정책이나 민원 관련 내용을 꼼꼼히 메모한 뒤 모두 실현에 옮겨 정당 사상 처음으로‘대국민 약속실천백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당 홈페이지를 개편하고 스스로도 미니홈피를 통해 온라인상에서 소통을 활발히 했다.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는 그동안 당 대표가 휘둘렀던 공천권을 시ㆍ도당에 돌려보냈다.“박근혜 실험정치 기로에 섰다”는 평가가 나왔다. 박 당선자가 2년 3개월 동안 대표직에 있으면서 네 번의 보궐선거를 비롯한 모든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고 당 대표 임기를 모두 채운 유일한 대표였다.‘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도 당 대표 때부터 생겼다. 2006년 5ㆍ31 지방선거를 열흘 남짓 앞두고 5월 20일 박 당선자는 서울시장 후보 지원 유세를 위해 신촌사거리를 찾았다가 피습을 당했다. 죽음의 문턱에 갔던 박 당선자는“남은 인생은 하늘이 내게 주신 덤이라고 생각했다”면서“아직 나에게 할 일이 남았기에 거둬 갈 수 있었던 생명을 남겨 둔 것”이라고 말했다. 병상에서 눈을 뜨자마자“대전은요?”라며 당시 지방선거의 판세를 걱정했다는 일화도 유명하고, 한나라당은 지방선거에서 압승을 거뒀다. 박 당선자는 2006년 6월 당 대표에서 물러난 뒤 17대 대선 경선을 준비했다. 그는 이임식에서“국민 여러분께서 보내 주신 사랑을 큰 빚으로 생각하고 평생 갚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선거에서도 모든 유세현장에서 했던 이 말은 박 당선자 스스로도“평생 안고 가야 할 숙제이며 다짐”이라고 했다.
▲ 17대 땐 MB에 당내 경선 져 대권 재도전
2007년 이명박 대통령과의 경선은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 한나라당 내 친이명박계, 친박근혜계의 계파가 나뉘고 갈등이 심화됐다. BBK를 비롯해 이 대통령을 둘러싼 의혹을 친박 진영에서 대거 제기하고 친이계가 이에 맞서면서 본선을 능가하는 경쟁을 펼쳤다. 그러나 박 당선자는 2007년 8월 경선에서 일반 당원, 대의원, 국민선거인단 경선에서는 모두 승리했지만 국민여론조사의 벽에 부딪혀 석패했다. 흰색 상의를 입은 박 당선자가 담담한 목소리로 경선 결과에 승복한다고 밝힌 연설은‘아름다운 승복’으로 여겨져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2008년 4월 총선에서 박 당선자는 4선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그러나 총선 공천을 두고 친이계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친박계 인사들이 공천에 대거 탈락해 무소속으로 출마하거나 친박연대를 창당했다. 이후 복당 문제도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해 박 당선자는“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후 몇몇 정책에 대해 박 당선자가 이 대통령과 반대되는 의견을 내세우며 당내 계파 갈등은 4년 내내 골이 깊었다. 박 당선자는 이 대통령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다며 최대한 드러나지 않은 행보를 하고 입장 밝히기를 꺼렸지만 박 당선자는 내내 가장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였고 야당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지녔다. 박 당선자는 2009년 4월 이상득 전 의원의 정치개입 논란이 일자“이번 사건은 정치의 수치”라고 했고 같은 해 7월 미디어법 논란 당시“(여당) 개정안에 반대표를 던질 것”이라며 수정 조건을 제시하기도 했다. 2009년 이후 이 대통령이 내놓은 세종시 수정안을 두고 두 사람의 갈등은 최고조에 다다랐다. 박 당선자는 세종시 수정안이 평소 정치 신념인 원칙과 신뢰에 어긋난다며 반대했다. 청와대와‘강도’라는 비유까지 써가며 거침없이 설전을 주고받았고 2010년 6월 세종시 수정안이 본회의에 상정됐을 때에는 직접 발언대에 서서 반대토론에 나섰다. 18대 국회에서 유일한 경우였고 결국 세종시 수정안은 무산됐다. 박 당선자는 2010년 싱크탱크인 국가미래연구원을 발족하는 등 비공식적인 활동을 하며 대선을 차근차근 준비했다. 2011년 12월 한나라당이 또다시 큰 위기에 닥쳤다. 10ㆍ26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시 중앙선관위 홈페이지에 대한 디도스 공격이 불거지면서 민심을 잃고 추락했다. 또 한 번 박 당선자에게 구원 요청이 쇄도했다. 박 당선자는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당 쇄신을 진두지휘했다. 정강정책에서 보수를 과감히 삭제하고 경제민주화의 가치를 넣었다.“국민만 바라보고 가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그 결과 100석 안팎에 그칠 것이라던 지난 4ㆍ11 총선에서 152석을 획득하며 제1당을 유지하며 박 당선자의 위력이 또 한번 발휘됐다. 8월 새누리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박 당선자는“이번 대선이 저의 마지막 정치 여정”이라며 국회의원직까지 내던지고 마지막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다. 그리고 12월 19일 박 당선자의 15년 정치 여정은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라는 새 기록을 남기며 새롭게 시작됐다.
드디어 女대통령시대가 열렸다
지난 19일 치러진 18대 대통령선거에서 박근혜 당선인은 갖가지 신기록을 갈아치웠다. 20일 오전 1시 현재 개표가 94.5% 진행된 가운데 박근혜 당선인은 득표율 51.7%를 기록했다. 이 추세가 그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박 당선인은 헌정 사상 첫 여성대통령에 이어 1987년 직선제 이후 첫 과반 득표를 기록하게 된다. 또한 부친인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이어 최초의 부녀 대통령의 기록도 갖게 된다. 박 당선인은 또 보수정당 사상 처음으로 호남에서 득표율 10%를 돌파한 주인공이 됐다. 광주광역시에서는 7.76%를 기록했고 전북에서는 13.22%,전남에서는 10%의 득표율을 기록 중이다. 광주와 전남북을 포함한 호남 평균은 10.32%다. 마의 10%벽을 돌파한 것. 17대 대선에서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후보는 광주에서 8.59%, 전북에서 9.04%, 전남에서 9.22%를 기록해 호남 전체로는 8.95%였다. 16대에서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는 광주 3.57%, 전북 6.19%, 전남 4.62%로 호남 평균은 4.79%에 불과했다. 이회창 후보는 15대 대선에서는 광주 1.71%, 전북 4.54%, 전남 3.19%로 평균 3.14%에 불과했다. 14대때의 경우 당시 김영삼 민주자유당 후보는 광주 2.13%, 전북 5.67%, 전남 4.20% 평균 4%였다. 13대 노태우 당시 민주정의당 후보도 10%벽을 넘지 못했다.
의미와 과제

박소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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