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제임스 마틴이 선교사로서 동아프리카 난민들과 함께 생활한 이야기를 담았다. 전쟁의 세기가 양산한 무수한 아프리카 난민들, 그들을 돕고자 파견된 선교사. 너무 진지하고 근본적인 주제들이어서 자칫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수회 난민 봉사회의 활동을 중심으로 동아프리카 난민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진솔하고 수채화처럼 생생한지 책장을 넘기다 보면 저자와 난민들과 내가 어느새 하나가 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일화에 등장하는 난민 하나하나가 마치 내 이웃들처럼 느껴지면서, 그들의 걱정거리가 내 걱정이 되고 그들의 웃음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게 된다. 그들이 울면서 지나온 내력을 풀어 놓을 때는 가슴 뭉클한 깊은 공감에 휩싸이게 된다.

지은이/제임스 마틴ㆍ옮긴이/송은경ㆍ펴낸이/정진석ㆍ펴낸곳/가톨릭출판사

수녀회 소유의 그 건물은 우리가 원하던 것과 딱 들어맞았다. 타일 지붕이 얹힌 목조 단층집으로 널찍한 현관과 통풍 잘 되는 큼직한 방들, 넓은 뒷마당이 갖추어져 있었다. 우리가 이 집에 내는 적당한 임대료는 이곳 교구에서 미혼모를 위한 기금으로 사용할 것이라고 했다. 결국 기증 단체들이 JRS에 제공하는 돈이 이중의 은혜­먼저 난민들을 위해, 그 다음에는 홀어머니들을 위해­를 베풀게 되는 셈이었다. 계약서에 서명을 한 우리는 당장 공사에 들어갔는데 다행히도 난민 사업체들을 통해서 작업의 대부분을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예로, 앞쪽 현관을 난민들의 대기실 및 모임 공간으로 만들 계획이었던 우타와 나는 칸게미에서 가구점을 하는 우간다 난민 요셉 세마쿨라에게 부탁하여 튼튼한 목재 의자들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매장으로 이용될 거실에는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소나무로 만든 대형 진열대와 키 큰 책장 네 개가 놓여졌는데 이것도 모두 요셉이 제작한 것들이었다. 그는 우타와 나의 사무실로 개조될 안쪽 침실에 자그만 소나무 책상도 두 개 넣어주었다. 이사와 관련해 한 가지 걱정거리가 생겼다. 난민들이 찾아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들에게는 전화도 우편함도 없었고 이동도 잦았다(그들의 표현에 따르면‘뜨다’). 통지서 같은 것을 발송해야겠지만 어떤 방법으로? 그냥 루이제 수녀가 그들에게 직접 알려주는 건 어떨까? 난민 사회에는 지극히 효율적인 연락망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깜박 잊었던 것이다. 이사하고 사흘도 채 못 되어 스무 명의 난민들이 나타났다. 우리의 매장을 채울 수공예품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벌써 전해 들었던 것이다. 그 후 몇 주 동안, 사이잘 바구니, 구슬 세공품, 밀짚모자, 천 조각을 이어 붙인 침대보, 수놓인 티셔츠, 나무로 깎아 만든 전등갓, 그림, 동물 인형, 납염직, 사이잘 나무로 짠 핸드백(‘키온도’라 불린다) 따위를 잔뜩 들고 수십 명이 다녀갔다. 우리는 2주 만에 제품을 가득 채웠고 장사를 할 준비가 되었다. 그 후로도 보통 하루에 20~30명의 난민이 다녀갔다.

그런데 매장 이름을 뭐라고 하지? 나는 벌써 마케팅을 고민하고 있었다. 일단 귀에 쏙 들어오고 기억하기 쉬운 이름이 필요했다. 그리고 난민들이 좋아할 수 있는 이름이어야 한다는 것도 중요했다. 처음에는 유명한 예수회 회원을 기리는 이름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1965년부터 1983년까지 예수회의 카리스마적 총장으로 일했고‘예수회 난민 봉사회’를 창설한 페드로 아루페가 우선 머리에 떠올랐다.“아루페 센터가 어때요?” 내가 JRS 동아프리카 책임자인 마이크 에반스에게 제안했다. 마이크가 불만족스러운 소리를 내더니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었다. 별로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 그의 전임자였던 사람이 나이로비의 난민 센터에 아루페 총장의 이름을 따 붙였다. 이‘아루페 센터’는 근면한 난민들을 대상으로 1인당 몇 백 실링씩 동냥을 제공했다. 그러자 곧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결국 이 센터는 문을 닫고 말았다. 그가 우려하는 바는 우리의 새 사무실과 매장이 난민들에게 예전과 같은 동냥 지급소로 인식되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따라서 그는‘아루페 센터’란 이름을 다시 쓰는 것에 반대했다. 예수회 성인의 이름을 붙이면 어떨까? 나는 그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었다(루터교 신자인 우타가 어떻게 생각할지 자신할 수는 없었지만).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는 예수회의 창설자였다. 그러나 예수회 공동체 본부가 이미‘로욜라 하우스’로 불리고 있었고, 두 곳이 같은 이름을 쓰게 되면 예수회 회원들에게 혼란을 초래할 우려가 있어 전통에도 합당하지 않았다. 위대한 예수회 선교사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St. Francis Xavier [1506~1552: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이끌던 예수회 최초의 일곱 회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인도와 말레이제도, 일본의 가톨릭 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역주]의 경우도 그 이름을 딴‘하비에르 하우스’가 캄팔라에 있었고, 영국의 순교자 성 에드먼드 캠피언St. Edmund Campion의 경우도, 나이로비에‘캠피언 하우스’가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적당한 예수회 성인도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요셉이 만들어준 소나무 의자들이 자리를 잡자 매일 아침 아홉 시만 되면 난민들이 현관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우타와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 어느 날 아침 나는 그들에게 조언을 구했다.“이곳의 명칭을 아프리카 성인 이름으로 하는 게 어떨까요?”“그거 좋은 생각인데요.”그들이 말했다. 동아프리카 출신으로 가장 유명한 성인이라면 우간다의 순교자들을 꼽을 수 있었다. 그들은 열두 명가량 되는 어린 소년들로서 19세기 후반에 바간다족의‘카바카’(왕)에 의해 살해되었다. 왕의 시동이었던 이 소년들은 죽음을 당하기 불과 몇 달 전에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다. 이 어린 순교자들의 이름을 따 붙인 본당 공동체도 여러 군데 있었다.“키지토가 어떨까요?”내가 순교자들 가운데 가장 어렸던 소년의 이름을 대며 물었다. 나는 그 이름이 좋았다. 기억하기도 쉬웠고. 침대보 제작 일을 하는 세 명의 우간다 여인들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아주 멋져요, 브라더!”바로 그때 다른 의자에 앉아 있던 수단 출신의 한 여성이 얼굴을 찡그렸다.“브라더, 바키타가 어때요?” 그녀가 물었다.‘카노시안 수녀회’Canossian Sisters 소속이었던 바키타는 최근에 성인위에 오른 수단 출신의 여성이었다. 이번에는 우간다인들이 인상을 썼다. 난민들이 보기에는, 어떤‘아프리카’성인을 택하더라도 특정한 한 나라를 추켜올리는 결과가 나왔다. 분열을 조장할 우려가 있어서 아프리카 성인도 안 되었다. 차라리 간단한 스와힐리어 단어가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희망’,‘믿음’따위에 해당되는 단어 말이다. 나는 스와힐리어 사전을 들고 나왔다.“‘므완가자’는 어떨까?”‘빛’을 뜻하는 단어였다.“그건 나이로비 예수회 피정의 집 이름입니다.”우리 공동체 회원 한 사람이 내게 상기시켰다.“‘희망’을 뜻하는 ‘투마이니’는?”안 된다. 근처에서 작은 공동체를 운영하는 수녀회가 이미 그 이름을 쓰고 있다.“그럼 ‘믿음’이란 뜻의 ‘이마니’는?”이번에는 우타가 불만이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케냐 대통령의 소속 정당인‘케냐 아프리카 민족 단결당’이 공공건물 따위의 이름을 지을 때 항상 이 단어를 사용했다. 스와힐리어는 그만하면 됐다. 우리는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한 난민이 보다 소박한 이름을 하나 제안했다.“‘미코노’ 같은 건 어떨까요?” 그것은‘손’을 뜻하는 단어였다. 좋은 이름인 것 같았다. 짧아서 기억하기도 좋을 뿐더러, 특히 미국인이나 유럽인들의 귀에도 잘 들리는 이름이었다. 다음 날 나는 난민들에게 그 이름을 제시했다.“미코노?” 왜 이곳을‘손’으로 부르려 하느냐? 이 매장에는 여러분의 손으로 만든 작품들이 진열될 것이며 모든 사람이 손에 손잡고 일하게 될 것 아니냐, 내가 설명했다.“아하!”가우디 루자게가 탄성을 질렀다.“그거 정말 좋네요!”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기뻐한 것은 아니었다.“우간다 순교자들이 훨씬 더 좋았을 것을.”어느 우간다인이 아쉬운 투로 말했다. 우리는 함께 일할 사람을 세 명 고용했다. 케냐 출신의 젊은 여성 버지니아 가토니예는 청소부로, 르완다 난민 마리 부그위자는 판매원으로, 나이 지긋한 에티오피아 남성 베레헤는 관리인으로. 우리는 서서히 고객을 끌기 시작했다. 미국 대사관의 친구들은 물론 사제와 종교 단체들도 들르기 시작했다. 몇 주가 지나자 최소한 하루에 서너 명의 고객이 찾아올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외국인 거주자, 외교관, 영국인 장기‘체류자들’, 부유층 케냐인, 선교회 성직자들, 평화 봉사단 단원들, 싼 물건을 찾아다니는 미국 및 유럽의 관광객들까지‘미코노 센터’의 고객이 되었다. 우리가 매장을 공식 개장한 것은 8월 28일이었다. 그날 미사는 나이로비 대주교인 모리스 오툰가 추기경이 집전했고 옥외에서 거행되었다. 그는 키가 크고 위풍당당한 케냐의 고위 성직자였다. 나는 준비과정에서, 전례예식서에‘난민과 유배자들을 위한 미사’양식이 있음을 발견했다. 추기경도 그것이 이 행사에 적절하다고 볼 것 같았다. 가우디를 비롯한‘화려한 양장점’멤버들­그즈음 그들은 종교 의상을 만드는 데 꽤 숙달되어 있었다­이 추기경을 위해 특별히 밝은 녹색의 영대를 만들어 왔다. 제단에 흔히 쓰이는 리넨 보는 난민들이 만든 녹색과 검정 색의 납결포가 대신했고, 성작은 모잠비크 난민들이 나무로 깎아 만든 잔으로, 성반은 르완다 여인들이 엮은 사이잘 바구니로 대신했다.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뒷마당 아보카도 나무의 시원한 그늘 아래 앉아 있었다. 스와힐리어, 키냐르완다어, 불어, 영어로 노래를 불러 대는 수십 명의 난민들에 둘러싸여 있자니, 내가 나이로비를 떠나지 않고 남은 덕분에 지금 얼마나 행복한가 싶었다.
오툰가 추기경은 강론 중에 출애굽기와 마태오복음의 내용을 설명하면서‘이집트로의 피난’으로 알려진 구절을 인용했다. 그리고 살인자 헤로데 왕을 피해 달아난 마리아와 요셉과 예수도 결국 난민이었음을 상기시켰다. 마침내 35분에 걸친 강론이 끝나자 한 난민이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브라더, 추기경님이 이렇게 오래 말씀하시는 걸 보니 우리를 정말로 좋아하는 게 분명해요.”잠시 후 추기경은 우리 현관에 성수를 뿌리고‘미코노 센터’에 축복을 내렸다. 전반적으로 볼 때 칸게미의 집은 완벽한 출발인 것 같았다. 난민들이 모이는 장소, 제품을 팔 수 있는 장소가 생겨난 것이다. 비록 나이로비에서 제일 궁핍한 빈민 지역에 위치해 있기는 했지만 고객들의 차와 난민들의‘마타투’가 손쉽게 연결되는 장소였다. 그리고 주택의 구조를 감안할 때, 고객들이 현관 밖에 앉아 난민들과 만나고 대화할 수도 있었다. 우타와 내게는 전용 사무실이 생겼으므로 이제 난민들의 문제를 도와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데(사실 이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이었다) 보다 많은 시간을 쏟을 수 있게 되었다.

민초들의 이야기
와피가나포 템보 니야시 후우미아. 코끼리들이 싸우면 풀이 고생한다. - 스와힐리 속담
어느 날 아침 우간다 난민 키이자 존 프란치스가 미코노 센터에 나타났다. 때묻은 티셔츠와 개똥지빠귀 알같이 푸르스름한 스웨터를 걸치고 있었는데 한쪽 소매가 길게 찢어져 있었다. 그는 차분한 표정과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고 몸이 아주 여위어 있었다. 키이자의 이야기를 처음에는 믿기 어려웠지만 그 후 다른 우간다 난민들이 그의 얘기를 확인해주었다.“키이자는 정말 힘들게 살아왔어요.”그들 중 한 사람이 내게 이렇게 속삭였다. 키이자는 유리 같은 눈빛으로 찬찬히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는 이디 아민 다다의 독재 정권 시절, 우간다 동부의 한 작은 부락에서 살고 있던 청년이었다. 1979년, 아민이 탄자니아를 등에 업은‘우간다 민족 해방 전선’과 전쟁을 벌이던 시기에 키이자도 우간다 군에 징병되었다. 키이자가 속한 부대는 탄자니아에서‘민족 해방 전선’반도들과 싸우기 위해 파견되었다. 동아프리카인들은 탄자니아를 TZ로 부르는데 발음도 영어 그대로‘티제트’이다. 당시 키이자는 열일곱 살이었고 어린 아내를 집에 남겨 두고 떠나와 있었다. 그는‘티제트’에서 용감하게 싸웠다고 한다. 그러나 곧 민족 해방 전선 측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떼 지어 끌려간 키이자와 그의 소부대는 길고 좁다란 참호 속에 기어 들어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참호에 들어간 그들은 차갑고 붉은 흙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줄줄이 엎드렸다. 다음 순간 민족 해방 전선 지휘관이 우간다인들을 한 사람씩 권총으로 쏘기 시작했고 그들은 구덩이 속에서 몸부림치고 비명을 질러 댔다. 살육이 한창 진행되던 도중 지휘관의 총탄이 떨어졌다.“하느님이 절 살려주신 거지요.”키이자가 말했다. 그 후 키이자는 탄자니아의 수도, 다르에스살람의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간수들이 그를 괴롭히려고 그가 먹을‘포쇼’(카사바 열매를 갈아서 끓인 우간다의 주식이다)에 모래를 섞는 바람에 그는 끔찍한 위장 장애를 일으켰고 엄청난 출혈이 있었다.“적십자 사람들이 찾아와 사진을 여러 장 찍어 갔지요.”그가 말했다. 그러나 그들의 방문으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키이자는‘포쇼’먹는 것을 포기했다. 1980년에 전쟁이 끝나자 키이자와 살아남은 그의 부대원들은 우간다로 송환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민의 전임자였던 밀톤 오보테가 9년간의 추방 생활을 끝내고 돌아와 권력을 잡고 있었다. 그 결과, 키이자처럼 과거 아민의 병사로 복무했던 사람들이 국가의 적으로 몰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국에서 다시 수감되는 신세가 되었다. 예로부터 나일 강의 수원이었던 빅토리아 호수 주변의 작은 마을 진자에서 1년 동안 갇혀 있던 키이자는 가족이 너무나 그리운 나머지 마침내 탈옥을 결심했다. 그리하여 어느 날 밤, 낡은 옷가지를 밧줄처럼 엮어 부서진 창문으로 타고 내려왔다. 어부에게 돈을 주고 호수를 건넌 후 이틀 동안 숲에 숨어 지냈다. 마침내 케냐 국경에서 몇 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고향 마을에 도착한 그는, 우간다군이 먼저 집에 도착하여 벌채용 칼로 그의 아내와 자식들을 살해했음을 알게 되었다. 마을 여인들이 전해준 바에 따르면, 그의 아내는 살해되기 전에 강간까지 당했다. 키이자는 군인들에게 발각될까 두려워 다시 숲으로 숨었다. 그리고 인도양 쪽에서 긴 여정을 시작한 동아프리카 철도가 초원 지대를 가르며 이어지는 말라바에서 케냐의 국경을 넘어, 작은 가톨릭 선교회로 피신했다. 그 후 그는 그곳에서 동남쪽으로 240킬로미터를 걸어 나이로비에 도착했다. 나이로비에 온 키이자는 싸구려 물건들을 파는 자그만 잡화점‘두카’를 시작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우간다 여인과 결혼하여 자녀도 셋 두었고 살림살이도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간다 공권력을 생각하면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는 그가 나이로비 도심을 걷고 있는데 케냐 경찰차가 한 대 접근해 왔다. 경관 세 명이 차에서 내리더니 그의 멱살을 잡고 구타했다. 그리고 그를 경찰차 트렁크에 밀어 넣었다(키이자는 우간다 정부가 케냐 경찰과 공모하여 자신을 납치한 것으로 믿었다). 트렁크 안은 질식할 듯 갑갑했다. 금속이 녹이 슬어 생긴 틈새들로 들어오는 공기가 전부였다. 경찰은 30여 분마다 차를 세우고 트렁크를 열고는 웅크린 키이자를 주먹으로 구타했다. 그리고 그의 옷을 모두 벗겨 길에 내던져 버렸다. 그렇게 몇 시간을 달린 후 도로가 울퉁불퉁해지고 흙냄새가 피어오르자 키이자는 차가 나이로비에서 멀리 벗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살길은 트렁크를 열고 뛰어내리는 방법밖에 없었는데 잠금 장치를 연거푸 발로 차자 마침내 트렁크가 휙 열렸다. 트렁크에서 뛰어내린 키이자는 흙 길에 나뒹굴었다. 살펴보니 나이로비에서 북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진 나쿠루 호숫가의‘국립 사냥 보호구역’에 와 있었다. 경찰이 이곳에서 그를 처단하여 짐승의 먹이로 남겨 두고 갈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때 자동차 정거하는 소리가 나더니 경찰이 키이자를 추격해 왔다. 그는 혼비백산하여 날카로운 가시에 피부가 찢겨 나가는 것도 모르고 숲 속으로 달음질쳤다. 필사적인 상황에서 그는 맨발에 벌거숭이 몸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소리 높여 울부짖었다.“하느님, 도와주세요! 저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요!”
몇 시간 후 추적자들을 따돌린 키이자는 수렵 보호구역에서 나와 한 주유소에 이르렀다. 거기에서 차를 얻어 타고 나이로비로 와 보니 그의 가족은 가게에서 숨어 지내고 있었다. 그 후 그는 나이로비에 와 있는 우간다 난민들의 이야기를 통해, JRS가 자신의 사업에 도움을 줄 수도 있겠다고 판단했다. 내가 만나 본 키이자는 가족을 부양하려는 의지가 결연했다. 우리는 화장지와 말라리아 약, 성냥, 사탕, 비누, 환타 음료 따위를 파는 그의 작은‘두카’를 지원해주었고 그는 아주 잘해 나갔다. -11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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