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제임스 마틴이 선교사로서 동아프리카 난민들과 함께 생활한 이야기를 담았다. 전쟁의 세기가 양산한 무수한 아프리카 난민들, 그들을 돕고자 파견된 선교사. 너무 진지하고 근본적인 주제들이어서 자칫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수회 난민 봉사회의 활동을 중심으로 동아프리카 난민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진솔하고 수채화처럼 생생한지 책장을 넘기다 보면 저자와 난민들과 내가 어느새 하나가 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일화에 등장하는 난민 하나하나가 마치 내 이웃들처럼 느껴지면서, 그들의 걱정거리가 내 걱정이 되고 그들의 웃음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게 된다. 그들이 울면서 지나온 내력을 풀어 놓을 때는 가슴 뭉클한 깊은 공감에 휩싸이게 된다.
지은이/제임스 마틴ㆍ옮긴이/송은경ㆍ펴낸이/정진석ㆍ펴낸곳/가톨릭출판사
13. 말린디에서
이제 곧 승선한다는 것 외에는 달리 말씀드릴 게 없습니다. 우리가 다음 생에서 다시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마지막으로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은총을 빌었습니다. 로마와 인도 사이의 그 먼 거리와 찾아내야 할 큰 수확을 생각하면.... 우리가 과연 이생에서 서로 다시 만나게 될지 장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541년 3월 18일,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성 이냐시오에게 보낸 서한 중에서
나이로비에 온 지 1년이 지나자 나는 휴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예수회 회원 세 사람과 함께 인도양에 면해 있는 케냐의 항구도시 몸바사로 여행을 떠났다. 이탈리아의 ‘콘솔라타 사제회’가 운영하는 피정의 집에 미리 예약해 놓은 터였다. 그곳은 동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 음식을 제일 잘한다고 평이 나 있었다. 여덟 시간 정도 걸리는 여행이었는데 몸이 좀 불편하기는 했지만 경치는 참 좋았다. 나이로비에서 출발해 그쪽 해안까지 가려면 트사보 지역을 관통하는 몸바사로(路)를 타야 한다. 트사보는 열대초원의 키 큰 풀들로 뒤덮인 건조하고 평탄한 지역으로, 거대한 바오밥 나무들과 키 작은 가시덤불들이 점점이 박혀 있고 그 속에서 얼룩말과 몸집이 큰 영양, 기린, 타조, 톰슨가젤 영양(현지에서는 ‘토미즈’라고 부른다)들이 뛰놀았다. 날씨가 엄청나게 무더웠다. 자동차든 ‘마타투’든 신경 쓰지 않고 차도를 껑충껑충 건너다니는 기린의 수가 꽤 많았기 때문에 사실 도로 자체도 약간 위험스러웠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 케냐인 친구 한 명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만약 ‘마타투’가 불행하게도 기린과 충돌한다면, 기린이 이길 거예요.”금세기 초반의 트사보는 야생동물들 때문에 동아프리카 철도 건설 작업이 자주 중단되는 현장으로 국제적인 악명을 얻었다. 거짓말 같은 사실이었던 이 얘기는 그동안 여러 책들에서 다루어졌는데, 가장 최근에 출간된 찰스 밀러(Charles Miller)의 『미치광이 급행열차The Lunatic Express』도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이 철도 건설담을 다루었다. 동아프리카 철도는 트사보뿐 아니라 리프트 밸리, 나일 강까지 통과하기 때문에 수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바위투성이 산들과 타들어 가는 사막지대를 달리게 되어 있다. 그 당시 내륙으로 수백 킬로미터 들어간 지점에서‘트사보의 식인종들’로 불리는 어마어마하게 큰 사자 두 마리가 출몰하여, 영국인들이 철도 건설을 위해 데리고 들어온 케냐인과 인도인 노동자들을 공포로 몰아넣으면서 대영제국의 행보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 이야기는 1997년에 〈암흑 속의 유령The Ghost and the Darkness〉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 두 마리의 사자가 작업 캠프에 머물던 사람들을 잡아채 가는 사건이 몇 달에 걸쳐 계속되었다. 놈들은 주로 밤에 행동했으나 훤한 대낮에 사람을 채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아무것도 놈들을 막아 내지 못했다. 나무숲에 초소를 세워 망을 보게 하고(파수꾼들도 사자들에게 잡아먹혔다), 키 큰 가시덤불로 ‘보마’(울타리)도 세워 보고(‘사자 보호막’이 되어줄 것으로 예상했으나 이 식인종들이 무슨 수를 썼는지 울타리마저 통과했다), 가장 유명해진 방법이지만, 인공 덫도 설치해 보았으나 허사였다. 마침내, 저격수가 안에(쇠창살이 죽 쳐진 뒤편에) 타고 있다가 사자가 접근해 오면 총을 쏠 수 있는 구조의 궤도차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차를 이용한 첫날 밤, 사자 한 놈이 차 뒤쪽 창으로 기어들어와 저격수를 물고 가 버렸다. 저격수의 소총과 핏자국만 남긴 채 말이다. 몇 달간 공포가 이어진 후, 국왕 특명대의 용맹한 지휘관 J.H. 패터슨(Patterson) 대령이 처절한 추적 끝에 마침내 그 두 마리의 사자를 쓰러뜨렸다. 그는 이 위업을 바탕으로, 『트사보의 식인종들The Man-Eaters of Tsavo』이란 제목- 달리 무슨 제목이 필요했으랴? -의 훌륭한 모험담을 쓰기도 했다. 나의 사자 체험으로 말하자면 수렵 보호구역에서 멀찍이 지프에 올라탄 채 구경해 본 것과 이야기를 통해 접했던 것뿐이었다. 탄자니아 출신의 한 예수회 회원이 잠비아의 예수회 공동체에서 밤중에 자다가 겪었던 일을 얘기해주었다. 온난한 지대에 있는 종교 건물들이 주로 그러하듯, 그 공동체도 주위 마당이 넓은 풀밭과 바로 통하게 되어 있는 구조였다. 어느 날 저녁 숙소로 돌아온 그는 땀띠 방지용 분을 몸에 뿌리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 그는 방바닥에 떨어진 하얀 분가루 위에 선명하게 나 있는 큼직한 사자 발자국 한 쌍을 발견했다. 사자가 방에 들어와 침대 옆에 서 있다가 나간 것이 분명했다. “‘심바(사자)’가 날 먹지 않기로 결정한 거죠.”그가 태연하게 말했다. 나이로비의 우리 공동체에서 경비원 일을 했던 열아홉 살의 마사이족 청년 요셉은 자기네 부족의 풍습을 이야기해주었다. 마사이족 소년들은 사자를 한 마리 죽여야만 비로소‘모란( 전사[戰士])’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요셉 자신도 이미 그 일을 치렀노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나는 그에게 어떻게 했는지 물어보았다. 전통, 사냥 계획, 실행 따위가 얽힌 긴 사냥담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요셉이 대답은 않고 갑자기 몸을 낮추더니, 창을 잡은 시늉을 하며 오른손 주먹을 어깨 너머로 치켜올렸다. “카마 히비(이렇게 했죠)!”이렇게 말하고는 날래게 찌르는 동작과 함께 치아 사이로 휘파람 소리를 냈다. 또 다른 마사이족 친구는 소년 시절에 양치기로 일하다 겪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어느 날 양치기용 지팡이에 나른하게 기대어 있던 그는 “양들이 공중으로 펄쩍펄쩍 뛰는”것을 보았다.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 양 떼 쪽으로 다가가 보니 양들 사이로 아주 큰 개 같은 것이 보였다. 그가 지팡이로 마구 후려치자 마침내 놈은 달아나 버렸다. “하지만 개가 아니었어요.” 내 친구가 말했다. “그건 ‘심바’였어요.” 그리고 덧붙이기를 그때 자신이 좀 더 나이를 먹었더라면 분명 그런 식으로 대응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했다. 보다 최근의 일이지만 나이로비 수렵 보호구역에 인접해 있는 예수회 피정의 집도 ‘심바’때문에 고민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밤 저녁 식사 자리에 나타난 케냐인 요리사가 벌벌 떨면서 소리쳤다, “심바 소리가 들려요.”이튿날 한 사제가 피정의 집 마당에서 사자 발자국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해질녘이나 새벽(심바가 좋아하는 식사 시간이다)에 함부로 밖에 나가지 말 것이며 가급적 집 근처에 머물라는 충고가 수사들에게 주어졌다. 나도 피정을 위해 그곳에 간 적이 있는데, 집 주위에 새 울타리가 세워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충고에 충실히 따랐다. 수사들은 그 울타리가 ‘사자 보호막’이라며 나를 안심시켰는데, 알고 보니 그게 예전에 트사보에서 사용되었던 말이었다.
우리는 오후 세 시에 몸바사의 피정의 집에 도착했다. 머리가 벗겨진 쾌활하고 뚱뚱한 이탈리아인 사제가 우리를 숙소로 안내했다. 그는 나를 데리고 마당을 가로지르더니 해변과 바로 통하는 널찍한 방으로 갔다. 문간 옆에서는 라임 열매 비슷한 녹색의 도마뱀들이 적도의 태양이 하얗게 부서지는 콘크리트 안뜰 위에서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인도양을 향해 서있는 야자수들이 눅눅한 바람결에 천천히 흔들렸다. 수평선에는, 장중하게 소말리아 해안으로 향하고 있는 잿빛의 미국 전함들도 보였다. 방 천장에 매달린 선풍기가 소음도 내지 않고 바람을 일으켰다. “이 빌라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신부님.” 나는 고맙다고 말하고, 그러나 아직은 사제의 몸이 아니라고 밝혔다. “아니라고요?” 그가 콧방귀를 뀌었다. “저, 그럼 이리로 오세요.” 그가 내 가방을 집어 들더니 방에서 나갔다. 나는 어리둥절한 상태로 따라 나갔다. 그가 나를 데려간 곳은 다른 방들 뒤편에 있는 작고 컴컴한 방이었다. 창도 하나밖에 없었고 게다가 주차장과 마주해 있었다. “다른 방들은 ‘사제’전용이오.”내가 그쪽 해안으로 간 이유 중에 하나는 몸바사에서 북쪽으로 몇 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소읍 말린디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말린디는 모험을 즐기는 유럽 여행가들에게 인기 있는 곳으로, 특히 이탈리아인들이 많이 찾는다. 도시가 가까워지면 ‘키에사 카톨리카(Chiesa Cattolica)’라는 표지판과 이탈리아어로 된 부동산 광고들이 나타난다. 사실 말린디에는 해변과 몇 개의 이탈리아 식당 외에는 특별히 볼만한 것이 없다. 그런데 바다로 뻗어 나온 반도에 인도 쪽으로 향한 외로운 돌무더기가 있고 그 위로 금빛 십자가가 하나 솟아 있다. 돌무더기는 좀 더 나중에 만들어졌지만 십자가는 16세기 초에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6세기초에 인도를 세 차례 방문한 포르투갈의 항해가--역주]가 이 해안으로 올라오는 선박들의 항해를 돕고자 세운 것이다. 우리가 이 소읍을 찾아 주변을‘항해할’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 중 하나가 바로 바스코 다 가마의 십자가였다. 지금으로부터 4백 50년 전, 이 십자가를 발견한 또 다른 예수회 형제가 있었으니 바로, ‘인도제국’으로 향하고 있던 저 위대한 선교사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였다. 그는 로마에 있는 예수회 형제들에게 보낸 1542년 9월 20일 날짜의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모잠비크에서 고아까지 항해하는 데 두 달 이상이 걸렸습니다. 도중에 우리는 말린디라는 곳을 거쳤는데 평화로운 무어인들의 도시이지요...이곳에서 사망하는 그리스도교인들은 십자가로 장식된 커다란 무덤에 매장됩니다. 도시 부근에는 저 포르투갈인이 세워 놓은 커다란 돌 십자가가 서 있는데 금박 처리가 되어 있어 아주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보고 얼마나 큰 위안을 받았는지는 우리 주 하느님께서 아십니다. 이처럼 외롭게 그러나 당당하게 서 있는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는 그 크나큰 효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십자가가 보이는 거리에 있는 자그만 성당에 있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케냐에 머문 짧은 기간 동안 미사를 올렸던 곳이 바로 여기다. 성당은 짙푸른 인도양 옆으로 늘어선 코코넛 야자수들을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완벽한 사각형 건물로서, 석회 도료가 발라진 치장 토담과 갈색 풀로 엮은 아주 뾰족한 지붕으로 되어 있다. 지붕 꼭대기에는 나무로 만든 수수한 십자가가 솟아 있다. 성당 주위로 자그만 묘지가 조성되어 있는데 케냐인 가톨릭 신자들과 어느 영국인 준남작의 무덤들 사이 어딘가에, 지난날 말린디로 오던 도중에 숨진 프란치스코의 친구가 잠들어 있다.
갤리온 [옛날 스페인 제국의 대범선--역주] 선상에서 세상을 뜬 한 사람을 말린디에 묻었습니다. 무어인들은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이 죽은 자를 매장하면서 보여준 모습에 교화되었습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지난날 프란치스코도 목격했을 광경이 그대로 펼쳐졌다. 더러운 바닥과 텅 빈 돌 제단. 그러나 우리가 찾아간 날에는, 셀로판으로 싼 자그만 기도 안내장이 노르스름한 테이프로 묶여진 채 제대 위에 놓여 있었다. 또 다른 귀퉁이에는, 누군가가 남겨두고 간 성화가 걸려 있었다.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 안토니오. 다른 귀퉁이에는 시멘트 부대 자루와 일꾼이 팽개치고 간 운동화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이 도시 말린디에서 가장 저명한 사람에 속하는 한 무어인이 내게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기도의 장소로 삼고 있는 교회를 얼마나 자주 찾느냐? 그리고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느냐? 그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신앙을 많이 잃어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 그리스도교인들 사이에서도 그와 같은 현상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어했습니다.
1991년 ‘이냐시오의 해’,성 이냐시오 탄생 5백 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동아프리카 예수회가 이 성당을 새롭게 꾸몄다. 유적지의 역사를 설명해 놓은 녹색의 자그만 목재 안내판도 바깥에 새로 세워졌다.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슬람교도들의 신경을 거스를까 우려하여 안내판을 간소하게 만들었노라고 한 예수회 형제가 설명해주었다. 듣고 보니, 예전에 하비에르가 무어인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취했던 태도와는 좀 다른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했으나 그는 만족해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일에 지극히 충실하신 우리 주 하느님은 이교도를 좋아하지 않으시며 그들의 기도는 더더욱 못마땅해 하신다, 하느님이 그들의 기도를 못마땅히 여기시어 그들의 기도가 멈춰지기를 바라시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슬람이 지배하는 곳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비록 자그만 안내판이지만 참 잘한 일이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쾌활하게 인사하며 맞아준 성당 관리인조차 이슬람 소년인 실상이니까. 우리 셋은 희미한 성당 안에서 미사를 올렸다. 난민들과 일하는 미국인 예수회 신학생, 탄자니아에서 수련자들과 일하고 있는 몰타 섬 출신의 사제, 그리고 나이로비에서 신학교를 맡고 있는 르완다인 사제. 소년 관리인이 상록수 가지로 조심스레 제대를 쓸어 내고는 제단에 바칠 자홍색 부겐빌레아 가지 두 개를 말없이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리넨 보를 더럽히지 않으려고 먼지 덮인 제대에 먼저 신문지를 깔았다. 그러자 제대보 밑으로, 나이로비의 《데일리 네이션》에 박힌 머리기사가 삐죽이 튀어나왔다. ‘일흔 살 노인, 소녀를 강간.’바깥에서는 닭이 구구대고 있었고 바닷바람에 실려 음악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미사를 드리면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생각했다. 말린디에 머물 당시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비행기와 전화와 팩스의 시대를 사는 내가, 오가는 데 몇 달이 걸리는 편지 외에는 유럽에 있는 동료들의 소식을 전혀 알 수 없는 이 먼 곳까지 와 있었던 하비에르의 심정을 제대로 이해나 할 수 있을까? 아니,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같은 성인을 내가 어찌 이해할 수 있으랴? 그는 한 점 꾸밈없이 이렇게 적을 수 있었던 사람이 아니던가.
마호메트 교단의 아주 박식한 무어인이...이 도시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내게, 만약 마호메트가 2년 내로 자신들을 찾아주지 않으면 마호메트나 마호메트교를 더 이상 믿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이처럼 자신 없이 사는 것은 이교도나 큰 죄인들에게 딱 어울리는 것입니다.
오만하다고?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낯선 민족들 속에서 지치지 않고 일했던 사람, 자신이 믿는 ‘좋은 소식’을 그들에게 가져다주기 위해 삶을 바쳤던 사람이 바로 그였다. 소코트라 섬에서 마주친 한 무리의 토착민들이 자신들의 부족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음식을 나누어주자 다음과 같이 감사를 표했던 사람도 그였다.
궁핍한 살림을 쪼개어, 자신들이 가진 것을 내게 주었으니, 참으로 인정 많고 착한 사람들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성당에 서 있자니, 16세기를 살았던 성인의 사고방식이 아주 조금이나 마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가톨릭의 시각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예를 들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다음과 같은 질문 앞에서 고심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카디자 나키요베의 아들에게 과연 세례를 허락해야 하는가?’ 그 시대 선교사들은, 일단 모든 사람을 세례 받게 만들고 그 다음은 하느님이 선별하도록 맡겨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성당에서 깨달았다. 동료들과 떨어져 완전히 낯설고 기이한 문화 속에서 전형적인 중세적 시각으로 살면서도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스스로 ‘이교도들’이라 부른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을 찾고자 씨름했던 사람의 신앙에서 나도 뭔가를 배울 수 있으리라는 것을. -13부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