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는 창의력을 강조하는 시대이며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우리나라 헌정 사상 첫 여성 대통령 당선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이미 세계 각국의 여성 지도자들이 국제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네고 있다. 얼마 전 타계한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가 1979년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어 자국을 넘어 천하를 호령했다 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1세기 들어 전 세계적으로 여성 정치인이 국가 최고지도자가 되는 사례가 늘었다. 2012년 현재 대통령이나 총리 등 국가 최고지도자가 여성인 나라는 전 세계 18개국. 독일, 브라질, 아르헨티나, 코스타리카, 스위스, 리투아니아, 슬로바키아, 라이베리아, 방글라데시, 아이슬란드, 트리니다드토바고, 코소보, 태국, 덴마크, 자메이카, 모리셔스, 세르비아, 말라위 등이다.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철의 여인 ’이라 불린 영국의 마거릿 대처 전 총리가 4월 8일(현지 시간) 향년 87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대처 전 총리는 런던 시내 호텔방 침대에 앉아 책을 읽다가 8일 오전 평화롭게 숨을 거뒀다고 영국 데일리메일이 9일 보도했다. 고인의 시신은 사망한 지 13시간 뒤인 9일 오전 12시 20분 경찰 오토바이 4대의 호위 속에 개인 구급차에 실려 인근 병원 안치실로 옮겨졌다. 대처 전 총리는 지난 크리스마스에 간단한 방광 종양 제거 수술을 받은 뒤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자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4개월간 리츠칼튼 호텔 특실에 머물며 마지막을 준비했다. 대처 전 총리의 장례식은 오는 17일 런던 세인트폴 성당에서 국장에 준해 거행된다. 마거릿 대처는 지난 79년부터 90년까지 3차례나 총리를 연임하면서 사회주의 정책과 '영국병'에 찌든 영국을 시장경제 국가로 바꿔놓았다. 이 결과 대처는 초대 수상 로버트 월폴부터 현 수상 데이빗 캐머런에 이르기까지 290여 년 동안에 배출된 57명의 영국 수상 가운데 이름 다음에 ‘ism’ (주의; 철학)이 붙는 유일한 수상이 되었다. 이렇게 그녀의 통치철학은 ‘대처리즘(Thatcherism)’ 으로 불린다. 대처는 풍기는 분위기와는 달리 잡화점집 딸이었다. 독실한 감리교도였던 아버지의 가르침을 실천한 끝에‘선거로 뽑힌 또 다른 여왕’이라는 영예의 타이틀을 얻었다. 대처가 총리직에 올랐던 1970년대 영국은 방만한 복지국가와 강성 노동조합이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었다. 1978년 겨울에 시작된 공공 부문 근로자들의 총파업은 영국 사회에 일대 혼란을 가져왔다. 대처는 정권을 잡자마자 예산을 줄여 작은 정부를 실현했고, 세금으로 보전되던 공기업을 민영화했으며 노동 관련법 제정과 개정으로 노조 파워를 무력화시켰다. 또한 ‘빅뱅’ 이 되리라던 금융개혁에 성공했고 ‘영국병’ 으로 알려진 분배와 복지정책을 친시장적 정책으로 바꿨으며 평등주의에 사로잡힌 교육을 경쟁체제로 살려냈다. 대처는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호흡을 맞춰 소련과 공산주의 붕괴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1982년에는 아르헨티나와의 포클랜드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강력한 리더십을 인정받았다. 대처의 기여로 세계는 1980년대부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전까지 역사상 전례 없는 호황을 누렸다. 이렇듯 마거릿 대처는 구조개혁에 성공하여 신자유주의가 뿌리 내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무분별한 민영화와 노조 와해 등으로 실업자를 양산해 양극화를 심화시켰다는 비판도 낳았다. 결국 1990년 유럽통합에 반대하다가 당 지도부와의 갈등으로 자진 사임한 뒤 이듬해 정계를 은퇴했다. 대처 전 총리를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꼽는 정치인 중에 박근혜 대통령도 포함된다. 박 대통령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에서는 “대처 총리가 영국병을 치유해 새로운 도약을 이룩한 것처럼 대한민국의 중병을 고쳐 놓겠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페론주의’ 에바페론
아르헨티나는 2차 대전 전후한 시기에 세계 5대강국 중 하나였다.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호시절 ‘남미의 파리’ 로 불리기도 했으나 정치적 혼란과 무능·부패한 정부, 만연한 포퓰리즘으로 쇠락 길로 접어들었다. 아르헨티나가 포퓰리즘의 대명사로 자리 잡은 것은 ‘페론주의’ 영향이 크다. ‘페론주의’ 는 아르헨티나의 정치 운동으로 후안 페론 전 대통령과 영부인 에바 페론의 정치 활동이 그 출발점이다. 반론도 많지만‘페론주의’를 현대 포퓰리즘의 원조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애절한 뮤지컬 ‘에비타’ 로 유명한 후안 페론 전 대통령의 두 번째 아내이자 퍼스트레이디였던 에바 페론은 아직까지도 아르헨티나의 빈민층에게 ‘성녀(聖女)’ 로 칭송받고 있다. 에바 두아르테는 아르헨티나의 시골마을 로스 톨도스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생부에게 버림받고 가난한 유년기를 보낸 에바의 꿈은 영화배우였다. 15살이 되던 1935년, 그는 맨몸으로 집을 나와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향했다. 빼어난 미모로 숱한 남자들을 만나며 B급 멜로영화부터 라디오 연속극까지 전전하던 그녀는 1940년대 들어서는 어릴 적 꿈처럼 유명 영화배우가 되어 부와 명성을 모두 얻었다. 1944년 아르헨티나 서부 산후안에서 지진이 발생해 사망자가 6000명 넘게 발생했다. 이 때 에바 두아르테는 이재민 구호기금 모임에 참여해 당시 노동부 장관이었던 후안 페론을 만났다. 1946년 6월, 아르헨티나 대통령 후안 페론의 부인으로서 에바 두에르테 데 페론은 퍼스트레이디 자리에 올랐다. 1946년 노동자의 지지를 받아 집권한 페론은 친노동 정책을 펼쳐 인기를 누렸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산업화 물결 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페론집권기의 정책은 ‘분배’ 라기보다는 민심을 얻기 위해 국민들에게 무조건 ‘퍼주는’ 정책과 다름없었고, 이런 연유로 ‘페론주의’ 는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한 포퓰리즘이라는 오명을 낳았다. 퍼스트레이디 에바 페론은 소프트파워로 남편의 권력을 뒷받침했다. 역사학자 펠리페 피냐는 “에바 페론은 노조와 호의적 관계를 맺고, 가난한 시민들을 지원해 남편의 통치를 도왔다”며 “후안 페론이 정치에 초점을 맞췄다면 에바 페론은 ‘헐벗은 사람’ 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미디어를 지배했다”고 평했다. 그 후 ‘에바 페론 재단’ 을 통해 학교와 병원, 고아원을 짓고 자기 이름을 딴 의료지원 기차로 전국을 누볐다. 남편을 부추겨 나라를 복지 천국으로 만들었다. 때문에 노동자와 빈민들은 그를 ‘성녀’ 로 떠받들었다. 대중은 환호했으나 나라는 골병이 들어갔다. 반대자들은 페론 정책이 사회 분열을 조장한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고 언론을 탄압하는 등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또한 무솔리니를 동경해 그의 파시즘에 심취하기도 했다. 초등학생에게 매주 자기 부부를 찬양하는 작문 숙제를 냈고 자서전을 교재로 채택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사실 친노동자 포퓰리즘 정책을 제외하면 한국의 군사독재 정권과 유사한 점이 많다. 후안 페론은 쿠데타로 중앙정치 무대에 등장한 군인이었으며 산업화를 이끌었다. 그가 설립한 재단도 부자들의 돈을 뺏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생색낸 것이라는 악평을 들었다. 1950년, 페론주의의 모순이 조금씩 드러나는 가운데 에바 페론은 자궁암 진단을 받았다. 1951년 재선에 도전한 후안 페론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에바 페론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지만 논란 끝에 군부의 압박으로 10월 부통령 후보 자리에서 물러났다. 에바 페론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다 후안 페론이 재선에 성공한 뒤 8개월이 지난 1952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후에 쿠데타로 축출된 후안 페론은 에바 페론의 후광에 힘입어 약 20년 동안의 망명 생활을 접고 귀국해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석유 파동으로 발생한 경제 위기와 정치혼란을 극복하지 못한 채 1974년 7월 사망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여러 곳에서 아르헨티나의 사례는 복지라는 이름으로 벌이는 무분별한 정부의 확대가 멀쩡한 나라를 어떻게 파산시키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페론은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군부와 노동자의 대결을 부추김으로써 사회적 위화감까지 조성했다. 그 결과 아르헨티나 경제는 성장기반을 잃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에바 페론의 영향력은 식지 않았고 그의 유산이 사회 곳곳에 남아있다. 민중들은 에바 페론을 성녀로 지정해 달라고 교황청에 요청했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제2의 에바 페론을 자처하고 있다. 에바 페론과 페르난데스 대통령을 비교한 책을 쓴 아라셀리 벨로타는 “둘 사이에는 정치적 지속성이 있다”고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는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에바 페론이 만들어낸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며 “페론주의는 페르난데스 대통령처럼 노동자의 자식도 대학에 진학하고 커리어를 쌓아 대통령이 되는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평했다. 대선을 앞두고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에바 페론 사망 59주기에 맞춰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심 사회개발부 청사에 에바 페론의 얼굴을 새긴 높이 31m, 폭 24m의 초대형 동판을 세우기도 했다. 또한 대통령은 에바 페론의 초상화를 넣은 100페소 지폐를 공개하기도 했는데 100페소는 아르헨티나 최고액권이다.
‘인도의 국모’ 인디라 간디

인도는 남존여비 사상이 그 어느 나라보다 뿌리 깊은데도 강력한 여성 정치 지도자가 많이 배출됐다. 대표적으로 정치 명문인 네루-간디 가문의 여성들을 꼽을 수 있다. 네루-간디 가문은 1947년 인도 독립 이후 37년간 인도 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인도 건국의 아버지’ 로 불리는 자와할랄 네루 초대 총리부터 딸인 인디라 간디, 손자인 라지브 간디까지 3대에 걸쳐 총리를 지냈다. 인디라 간디는 변호사인 할아버지와 정치인인 아버지를 가진 인도의 특권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영국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을 갖고 있던 네루 집안은 암리차르의 평화 시위대가 무참하게 살육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뒤 적극적인 반영 독립 운동에 뛰어들었다. 외동딸로 태어난 인디라에게는 어린 나이에 겪었던 부모의 투옥 등의 주변 환경이 그녀가 자연스럽게 정치에 입문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역사를 전공했으며, 1938년부터 아버지를 따라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인디라는 영국 유학 후 어머니의 일을 돕던 변호사 페로즈 간디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1942년 결혼한 뒤 간디라는 성을 얻었다. 1959년 여당인 인도 국민회의파 당수가 된 이후 1966년 인도 최초 여성 총리가 됐다. 간디는 경제개발계획을 주도하고 여권신장에 기여했다. 녹색혁명으로 농업개혁에도 앞장섰다. 아시안 게임을 열었고 중국과 국경분쟁을 겪으면서 아그니 미사일을 발사했고 핵실험을 했다. 빈민층에 대한 각별한 애정으로 전 국민에게 지지를 받았던 인디라는 세월이 흐를수록 독재자로 군림하며 권력을 세습하다 축출되고 말았다. 1975년부터 1977년 사이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는데 이는 1947년 인도의 독립 이후 유일하게 민주정치가 중단되었던 시대로 간주된다. 또한 그녀는 방글라데시 독립을 지지하면서 파키스탄과 갈등을 빚었다. 1984년 인디라 간디는 총리 관저에서 나오다가 자신의 시크교도 경호원들에게 암살당했다. 소위 ‘푸른별 작전’ 으로 불리던 시크교 분리주의자들에 대한 강경 진압이 화근이 되었다. 이 사건은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시민 폭동을 불렀다. 인도 시민들은 긴 머리에 터번을 두르고 긴 칼을 갖고 있는 시크교도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유럽을 호령하는 앙겔라 메르켈
메르켈 총리는 지난해 경제전문잡지 ‘포브스’ 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00명’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남성을 포함해 꼽은 순위에서도 전체 4위에 올랐다. 1954년생으로 전후 세대인 앙겔라 메르켈은 2차 대전의 결과물로 생겨난 동독에서 성장했다. 메르켈은 라이프치히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했고 총리 관저에 들어서기까지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독일 통일 후 실시된 첫 총선에 출마해 단번에 배지를 달았다. 헬무트 콜 전 총리의 ‘정치적 수양딸’ 인 메르켈은 의원이 되자마자 장관에 발탁되는 등 승승장구였다. 조호정 현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메르켈 집권 당시 독일은 장기간 경기침체 지속, 10%가 넘는 고실업률, 재정 악화, 빠른 고령화 등으로 구조적 문제가 깊어지면서 ‘유럽의 병자’ 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그의 집권 이후 독일은 마법의 나라로 변화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정책의 일관성 유지가 성공 요인이다. 하나의 거대한 목표보다 작은 목표를 많이 세워 꾸준히 추진하는 ‘스몰 스텝(small step)’ 전략이 주효했다”고 분석했다. 이와 함께 국내외 경제위기 극복뿐 아니라 유럽 재정위기 해결 과정에서 재정 협약을 관철시키며 협력을 이끌어내는 리더십을 보여준 것을 또 다른 성공 요인으로 풀이했다. 메르켈은 구제 금융을 받는 나라에 엄격한 긴축 정책을 요구해 나라 밖에서는 비판을 받지만, 독일 내에서는 화해와 조정의 정치인으로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김광웅 서울대 명예교수는 그의 책 ‘미즈 프레지던트’ 에서 “메르켈은 정치 감각과 수완이 뛰어나고 배포도 크다. ‘독일의 마거릿 대처’ 로 불릴 만큼 강한 리더십을 보여준다”며 “오랫동안 외로운 투사 이미지였지만 지금은 지지 세력을 넓히기 위해 관계의 리더십을 지향하고 있다”고 평했다. 오는 9월 총선에서 3선에 도전하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정치 행로에도 서광이 비치고 있다. 메르켈이 이끄는 기독교민주당(CDU), 소수당인 기독교사회당(CSU), 자유민주당(FDP)으로 구성된 연립정부가 총선 5개월여를 앞두고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지지율이 야권을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독일 언론이 10일 보도했다.
‘IMF 첫 여성 총재’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 통화기금라고 불리는 IMF 국제통화기금에서 첫 여성 총재가 탄생하며 세계적으로 여성의 힘이 얼마나 큰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됐다. 첫 세계 경제 대통령이 탄생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국제 금융을 담당하는 국제 통화 기금은 1945년 브레턴우즈 협정에 의해 체결된 것으로 세계 무역의 안정된 확대를 통해 가입국간의 고용증대, 소득증가, 생산자원 개발에 기여를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가입국이 187개국이나 되는 거대한 세계기구이다. 만장일치로 국제통화 기금의 첫 여성 총재로 당선된 크리스틴 라가르드는 본래 프랑스의 여성 재무 장관이었다. IMF 총재 경선에서 라가르드를 적극 지지한 팀 가이트너 미 재무부 장관은 ‘그녀는 번뜩이는 재치를 가지고 있고, 여성으로서 그녀가 가지는 포용력과 중재능력은 권위주위적인 프랑스 행정부의 큰 자산이다’ 며 그녀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라가르드의 화려한 이력은 그녀가 처음 입사한 세계 최고의 국제 로펌 회사 ‘baker&Mckenzie’ 에서 시작된다. 1981년부터 18년 동안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던 그녀는 드디어 1999년, 로펌 회사 최초로 여성 회장 겸 CEO의 자리에 올랐다. 이 기간 동안 회사의 매출을 50%까지 성장시키며 여성 사업가로써의 입지를 굳혔다. 그녀가 프랑스 정계에 진출하게 된 계기는 2005년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그녀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프랑스 최고의 훈장으로, 군공이나 문화적 공적이 있는 사람에게 대통령이 직접 수여하는 상)을 수여하고, 이어 프랑스 통상장관으로 발탁하면서부터이다. 사르코지 대통령이 취임한 시기에는 농수산부장관을 맡았고 약 한 달 뒤 다시 첫 여성 재무장관으로 임명됐다. 이처럼 크리스틴 라가르드의 이력에는 ‘첫’ 이라는 수식어가 많이 따라붙는다. 최근 2012년 미국 타임지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에 실리기도 한 라가르드는 법률가이지만 세계 경제의 리더로서 모든 회원국들을 한 마음 한 뜻으로 이끌어 가는데 최선의 목표를 두겠다는 의지를 밝히며 IMF의 미래를 이끌어나가고 있다.
21세기는 ‘3F 시대’
변호사 출신의 줄리아 길라드 호주 총리는 미혼으로 호주 사상 첫 여성 지도자가 됐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 헬레 토닝 슈미트 덴마크 총리, 셰이크 하시나 방글라데시 총리, 요한나 시귀르다르도티르 아이슬란드 총리, 에블린 비드머 슈룸프 스위스 대통령도 여성으로 한 나라를 이끌고 있다. 여성 국가 최고지도자가 증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남성 못지않은 능력과 저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앙겔라 메르켈이나 크리스틴 라가르드의 예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는 여성 특유의 섬세함으로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수행하고 부정부패에 연루되는 일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미래학자들 모임인 토플러협회는 2010년 ‘40년 뒤 일어날 40가지(40 FOR THE NEXT 40)’ 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전 세계적으로는 앞으로 여성 지도자들의 비율이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여성 지도자가 통치하는 시대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 요지이다. 미국 미래학자 존 네이스비츠는 저서 ‘메가트렌드’ 에서 21세기는 ‘3F 시대’ 로 간다고 논평했다. 3F는 여성성(Female), 감성(Feeling), 상상력(Fiction)을 의미한다. 21세기는 창의력을 강조하는 시대이며 여성의 섬세한 감각이 능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얘기다. 유수와 같은 역사 속에서 늘 사회적으로 억압당했던 여성들이 점점 그 파워를 더해갈 것은 자명해 보인다. <N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