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제임스 마틴이 선교사로서 동아프리카 난민들과 함께 생활한 이야기를 담았다. 전쟁의 세기가 양산한 무수한 아프리카 난민들, 그들을 돕고자 파견된 선교사. 너무 진지하고 근본적인 주제들이어서 자칫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수회 난민 봉사회의 활동을 중심으로 동아프리카 난민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진솔하고 수채화처럼 생생한지 책장을 넘기다 보면 저자와 난민들과 내가 어느새 하나가 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일화에 등장하는 난민 하나하나가 마치 내 이웃들처럼 느껴지면서, 그들의 걱정거리가 내 걱정이 되고 그들의 웃음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게 된다. 그들이 울면서 지나온 내력을 풀어 놓을 때는 가슴 뭉클한 깊은 공감에 휩싸이게 된다.
지은이/제임스 마틴ㆍ옮긴이/송은경ㆍ펴낸이/정진석ㆍ펴낸곳/가톨릭출판사
일이 끝난 후에는 피할 수 없는 승객, 앨리스 나브위레를 집에 데려다준 뒤 로욜라 하우스로 돌아왔다. 그리고 우리의 작은 집에 딸린 성당에서 미사를 드렸다. 미사가 끝나면 몰타, 인도, 탄자니아, 아일랜드, 벨기에, 캐나다, 미국 등 세계 각지 출신의 예수회 회원 열 두어 명과 함께 음료수와 땅콩, 맥주를 즐겼다. 오후 여섯 시 정각에 벨이 울리면 우리는 거실에서 식사 전 감사 기도를 바쳤다. 저녁 식사는 늘 간소했다. 식사에 참석할 사람 수에 딱 맞게끔 음식을 준비했으므로 음식이 남는 일은 드물었다. 어느 날 저녁 가리사 교구장 주교가 예수회 지방 관구장(지역 수도원장)을 찾아와 감사 기도를 끝내고 거실에 남아 있었다. 공동체의 나머지 회원들은 마렝고 소스[버섯, 토마토, 올리브, 포도주 등으로 만든 소스-역주]를 친 닭고기, 콩 꼬투리, 감자가 접시마다 가득 담겨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삼십 분 후에 주교와 관구장이 식당으로 슬슬 들어와 보니,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음식은 콩 꼬투리 세 개와 감자 한 알뿐이었다. 음식을 남겨 두어야 한다는 것을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아,”주교가 인심 좋게 껄껄대며 말했다.“이게 바로 그 유명한 예수회의 손님 접대군요.”저녁 식사가 끝나면 예수회의 전통적 기도 관습이 이어졌다. 성당에 가서 감실 안에 모셔진 성체 앞에서 기도를 드리는 일이었다(보통 성체조배라고 한다). 물론 성체는 미사 때 축성된 빵이었다. 로욜라 하우스에 처음 왔을 때, 다소 시대에 뒤떨어진 이 행사를 보게 된 나는 참가하지 않기로 당장 마음먹었다. 성체 조배하는 것, 다시 말해 하나의‘사물’에 신앙심을 집중한다는 것이 내게는 그리 마음 편하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하느님을 상자에 가두어, 단지 하나의 사물로서만 유효하게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리하여 나는 처음 몇 주 동안에는 회원들이 성체조배하기 위해 거실에서 나가면 혼자 남아서 식탁의 접시를 치우곤 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난 후 공동체 관구장이 나를 사무실로 부르더니 부드럽게 물었다. 저녁 식사 후의 성체조배를 왜 피하느냐? 형제가 참여하지 않는 이유를 두고 집안 사제들이 모두 의아해 한다. 나는 그 이유까지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 화가 나서(내 기도 생활은‘내’문제가 아닌가?), 그런 기도 생활은 내 영성의 일부가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 정도 설명했으면 됐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관구장이 이렇게 말했다. 성체조배가 형제의 영성의 일부가 아니라 해도 한번 해볼 만한 것이라고 본다. 시대에 좀 뒤떨어진 관습이어서 젊은 예수회 회원들에게 큰 호응을 받지 못한다는 건 나도 인정하지만, 형제들과 함께 기도한다는 차원에서 참석한들 별 지장은 없지 않은가? 나는 마지못해 동의했다.
다음 날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나는 다른 형제들과 함께 성당으로 들어갔다. 공동체 사람들이 감실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더니 침묵 속에 기도를 올렸다. 나도 무릎을 꿇기는 했으나‘억지로’ 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속이 상했다. 그런데 얼마 후 실내를 돌아보니 열두 명의 형제가 하나같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그 순간 고요하고 평화로운 감정이 나를 채웠다. 그것은 깊은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였다. 그 후로는 매일 밤 참석했다. 하느님을 상자에 가두는 것은 남들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마침내 깨닫게 된 것이다. 내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생각한 방식들을 통해서도 은총이 다가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저녁 식사 후에는 크리비지[cribbage: 2-4명이 하는 카드놀이의 일종--역주]를 즐기는 사제들도 있고 일간지를 보거나 미국 혹은 유럽의 방문객들이 가져온 잡지를 숙독하는 사제들도 있고, 기도하려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초창기 얘기지만 시내에 비디오 대여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낸 짐 코리건과 나는 공동체 형제들을 위해‘비디오의 밤’을 주최하곤 했다. 해적판 테이프임에 분명했는데 화면 아래쪽에 다음과 같은 문구들이 지나가곤 했다. ‘이 비디오는 복제할 수 없습니다’,혹은‘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의 용도로만 제작되었음. 복제 금지.’대체 어떤 작자들이 아카데미 회원들에게만 발송되는 테이프들을 나이로비의 복제 업자들에 게 팔아넘기는 걸까? 우리는 궁금해졌다. 케냐에는 국영 텔레비전 방송이 두 곳 있었다. 스와힐리어로 된 저예산 드라마와 뉴스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KBC, 그리고 호주에서 제작된 연속극, 케냐인들의 크리켓 시합, 미국에서 제작된 쇼들의 재방송을 주요 프로그램으로 하고 있는 KTN. 재방송되는 미국의 프로들은‘ROC’[볼티모어 시 쓰레기 수거원으로 일하는 흑인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역주],‘가족 문제Family Matters’등, 주로 미국 흑인들을 다룬 내용이었다. 금요일과 토요일 밤에는‘세계의 스포츠Transworld Sports’라는 영국의 스포츠 프로그램을 볼 수 있었다. 영국에서 벌어진 주요 축구 경기들을 금요일마다 하나하나 정리하고, 토요일에는 해외의 축구 경기들을 요약해주는 프로였다. 비록 지루하도록 길기는 했지만 우리 공동체에서는 이런 프로그램들을 반드시 시청하게끔 되어 있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케냐의 광고 방송들이었다. 광고들은 멋진 이름을 가진 비누들(‘브리티시 임페리얼 레더’,‘화’,‘레이디 게이’등)과 현지에서‘다와 야 와두두(벌레약)’로 불리는 살충제들로 공평하게 양분되어 있었다. 나는 미국에 있을 때도 그랬지만 케냐에서도 광고 마케팅에 척척 말려드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곤충들을 익사시킬 정도로 듬뿍듬뿍 뿌려야 하는 분무용 살충제를 살 때도, 내용물의 효과보다는 제품의 이름-‘둠’[파멸, 죽음이란 뜻-역주]-에 끌려 선택했으니까. 나이로비의 저녁 뉴스는 매일 밤 정확하게 똑같은 말로 시작되었다. KTN의 경우에는“오늘, 다니엘 아랍 모이 대통령 각하께서...”였다. 그러고 나면 대통령의 하루가 지루하게 나열되었다. 리프트 밸리의 병아리 부화장 개장식에 참석하셨다, 몸바사의 중등학교를 방문하셨다, 키암부의 주일 예배에 참석하셨다, 엘도레트의 성실한 시민들 앞에서 연설하셨다 등등. KBC에서도 똑같은 말을 듣게 되는데 단지 스와힐리어라는 점만 달랐다.“레오, 므투쿠푸 라이스 다니엘 아랍 모이...”나는 밤이 되면 꿀을 넣고 끓인 우유를 간식으로 즐겨 먹었다. 식당 테이블 중 하나에 놓여 있는 꿀단지에는 단지를 공격하다 죽은 개미들이 까맣게 붙어 있었다.
꿀 표면에 개미가 둥둥 떠다녔는데 건져 내려면 아주 애를 먹었다. 꿀이 들러붙어 몇 차례 일을 그르친 후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냈다. 꿀을 한 술 떠서 끓인 우유가 담긴 컵에 넣어 두면 개미들이 저절로 표면으로 떠오르는데 바로 그때 걷어 내는 방법이었다. 이 경험은 내게, 선교사의 삶에는 세 단계가 있다고 한 옛 말씀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쌀에서 벌레를 가려내고 쌀을 먹는다. 약간 시간이 지나면 쌀과 벌레를 그냥 함께 먹는다. 마지막에는 쌀에서 벌레를 가려내어 벌레를 먹는다. 당시 내게 앞으로 가려고만 하는 열정은 있었는지 몰라도, 경험 많은 한 선교사 친구의 말처럼,“막 도착하려는 단계”였는지도 모르겠다. 오후 열 시가 되면 잠시 묵상기도를 한 후 잠자리에 누워 독서를 했다. 예수회 형제들이‘성찰(examen)’이라 부르는 묵상기도는, 오늘 하루 내가 하느님이 계실만한 곳을 찾으려 얼마나 노력했나를 돌아보는 일종의 반성의 시간이었다. 내가 잠으로 빠져 들려고 할 때면 종종 연세 많은 인도 출신 사제의 기도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그는 테라조[대리석을 골재로 한 콘크리트-역주] 바닥에 샌들을 끌면서 지붕 달린 통로를 오락가락했다. 등 뒤로 묵주를 들고 있어 그가 걸을 때면 나무 구슬들이 나직하게 딸각거렸다.
나는 난민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점점 좋아졌고 특히 칸게미에서 일하는 것이 즐거웠다. 주민 모두가 나 를 알고 있는 듯한 동네에서 일해 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그 점에서 내 피부색이 큰 도움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아무리 줄잡아 말하더라도 미코노 센터로 오면서 마주치는 난민들은 모두 나를 알았다. 그들과 인사하다 보면 그들의 사업, 건강, 가족 문제로 오랫동안 얘기하게 되곤 했다. 그러고 나면 이번에는 내 일과 건강 그리고 멀리 필라델피아에 있는 가족-언급될 때마다 항상 상대의 놀라움을 야기하는 원천이었다-에 관한 얘기로 넘어가기 일쑤였다.“우리 대신 당신 부모님께 꼭 안부 전해주세요, 브라더!”
칸게미 흙길 변의 행상인들과 구운 옥수수와 땅콩을 파는 사람들도 나를 잘 알고 있었다. 나는‘노동자 성 요셉’성당에서 점심을 먹었으므로 그곳 예수회 형제 및 직원들과 친해지게 되었다. 공동체 중에서도 특히 그처럼 가난한 지역의 공동체와 깊이 알고 지낸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곳에 가면 나는 행복했고 예수회 형제의 자격으로 그곳에 있다는 것도 행복했다.
차가 고장이 났거나, 차를 갖지 못한 친구에게 빌려주어 이따금 지프를 사용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지프가 없는 날이면 나는 일을 마치고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갔다. 정류장은 깊은 계곡을 가로질러야 있었다. 어느 날 오후-그날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나는 걸어서 귀가하기 시작했다. 칸게미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 잡은‘노동자 성 요셉’성당에서 시작되는 긴 흙길이었다. 울퉁불퉁한 그 길은 이파리가 늘어진 바나나 나무 군락과 키 큰 녹색의 피쿠스 나무, 오렌지색 옥잠화, 기다란 녹색의 토끼풀과 옥수수가 자라는 밭 사이로 내리막을 이루고 있었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샴바(작은 밭)’에서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과 마주치게 되는데, 내가 지나가면 그들도 고개를 들고 큰 소리로 인사하곤 했다. 청록색, 보라색, 남색의 무지개 빛깔을 한 태양조(太陽鳥)들이 높다란 풀잎 끝에 내려앉아 있었다. 계곡 바닥에는, 우기를 제외하고는 작은 냇물과 별다를 바 없는 나이로비 강이 흘렀다. 강둑에 모여 앉아 가족들의 빨래를 하던 늙은 키쿠유족 여인들이 농담을 하며 깔깔거렸다. 먼지 앉은 덤불 위에 젖은 빨래들을 펼쳐 놓으면 뜨거운 태양이 금세 말려주었다.
강 위에는 나무토막과 나뭇가지들을 삼끈으로 동여매어 만든 허술한 다리가 걸쳐져 있었다. 비가 오면 그 작은 다리는 순식간에 물살에 휩쓸려 갔으므로 칸게미 사람들은 새 다리를 놓는 수밖에 없었다. 그 다리를 처음으로 건너게 된 내가 다리 위에서 머뭇거리자 빨래하던 여인 하나가 깔깔대며 이렇게 충고했다.“웨웨 니 마가리 사나, 브라더! 하쿠나 시다!”(브라더, 당신은 말라깽이라 괜찮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강을 뒤로 하고 언덕을 오르던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다져진 흙길에 서서 뒤돌아보니 멀리 언덕 위로‘노동자 성 요셉’성당이 보였다. 오후 네 시인데도 태양은 대낮이나 다름없었다. 햇살이 계곡 위로 떨어지면서, 불그스름한 갈색의 오솔길과 작은 강, 바나나 나무들, 풀, 사람들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 순간 느닷없이 크나큰 기쁨이 나를 엄습했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도 행복했고 난민들과 더불어 작업하고 있다는 것도 행복했다. 나는 있어야 할 곳에 정확하게 와 있었다. 나 자신이 쓸모 있는 존재, 결실을 거두는 존재라는 느낌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내가 그러한 행복과 만족, 평온을 느낀다는 것이 너무나 놀라웠다.
나는 나중에, 무엇이 나를 그토록 행복하게 만들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 날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골치 아픈 일들로 가득했던 평범한 날이었다. 난민들의 사업 중에 성공적인 사례를 몇 개 꼽아 본 것 외에는 특별히 흥분할 일도 없었다. 주요 난제들 중에 해결된 것도 없었다. 난민들의 삶이 일거에 나아진 것도 없었다. 특별히 좋은 소식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우리 공동체는 지난 2년간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내가 무슨 특별한 여행이나 휴가를 앞두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大)미사가 있는 대축일도 아니었다. 그날 밤에 누구를 만나 저녁을 먹을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예수회 창설자인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는 영성 지도자들을 위한 안내서인 『영신 수련Spiritual Exercises』에서‘위안’에 대해 적어 놓았다. 그는 위안을 영성의 고양, 위로와 기쁨을 주는 감정이라고 설명했다. 1541년 이냐시오의 기록에 의하면, 그러한 위안은“진정한 행복과 영적인 기쁨을 주며, 그래서 모든 슬픔이나 혼란을 추방시킨다...”그가 말하는 위안을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하자면‘선행되는 이유가 없는 위안’,불시에 엄습하거나, 스쳐가거나, 혹은 전혀 예기치 못하게 사람을 채워 버리는 감정이다. 이 감정이야말로 하느님에게서 온 놀랍도록 특별한 선물이라는 것을 이냐시오는 체험을 통해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살아오면서 그러한 유의 경험을 몇 번밖에 못했지만 그날 그 산허리에서 느낀 것만큼 강렬한 감정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다리를 건너 작은 오두막 몇 개와‘샴바’를 지나 마침내 칸게미에서 벗어나 리루타로 접어들었다. 동네 간의 경계라 해 봐야 실상 늘 변하고 사라지고 하는 실정이긴 했지만 말이다. 길은 리루타의 큰 성당을 지나 계속 이어졌다. 이곳이 바로 선교회 본당인‘노동자의 주보 성 요셉’성당의 모(母) 본당 격인‘세례자 요한’성당 이었다.‘노동자 성 요셉’성당에 비해 역사도 더 길고 기반도 훨씬 든든하게 다져진 이 성당은 전통적인 유럽 교회와 좀 더 가까워 보였다.‘성 요셉’성당과 마찬가지로 리루타의 이 본당에도 대형 학교가 딸려 있었다. 좀 더 가까이 가자 제복 차림의 케냐 소년 소녀들이 지나갔다. 여학생들은 연푸른 블라우스와 짙은 남색 치마 차림이고, 남학생들은 흰 셔츠(찢어진 셔츠인 경우가 많았다)와 짙은 남색 바지 차림이었다. 학생들은 손에 손을 잡고 쾌활하게 맨발로 흙 길을 밟고 갔다. 버스 정류장은 성당 바로 너머에 있었다. 정류장에는 낡은 금속으로 만들어진 대기소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예전에 불행하게도 마타투와 한 차례 충돌한 결과, 기괴하게 찌그러져 쓰레기 더미 같은 모습으로 도로변에 주저앉아 있었다. 사람들은 대기소 지붕이었을 법한 곳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는 길가에 서 있는 커다란 자카란다 나무 그늘 속에서 잠자코 기다렸다. 버스들은 드물게 왔을 뿐 아니라, 대부분 귀가하려고 악착같이 매달리는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만원 버스였다. 버스가 출발하려 하자 승객들이 내게 손을 내밀며 어서 붙잡고 타라고 아우성이었지만 나는 사람들을 마구 밀어젖히고 타고 싶지는 않았다. 불편한 여행이 될 것을 우려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냥, 기다리는 게 별로 싫지 않았다.
목걸이
값을 치르기 전에, 무슨 쓸모가 있는지 잘 따져 보라.
-- 『케냐: 외로운 행성 여행에서 살아남은 고양이
Kenya: A Lonely Planet Travel Survival Kit』
동아프리카에 온 봉사자들 가운데는 나이로비를 휴양지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내게는 좀 이해하기 힘든 발상이었다. 물이 바닥나고, 전화가 먹통이 되고, 전기가 끊어지고, 진득진득한 진흙 때문에 지프가 멈춰 서고, 때로는 식중독에도 걸리는 형편이었으니 말이다. 모린수녀도 그렇게 우연히 찾아든 손님이었다. 그녀는 우간다 북부의 소읍 아쥬마니 근처에 있는 난민 캠프에서 JRS와 공동으로 작업하고 있는 호주 출신의 용감한 수녀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놀라운 유머 감각과 장미빛 인생관의 소유자였으나 우간다에서 일하면서 그 두 자질이 자주 시험대에 올라야 했다. 모린은 나이로비를 여행하고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동료 수녀 두 명, 함께 일하던‘콤보니(Comboni)회’신부 세 사람과 함께 우간다 북부의 공동체에 있다가‘수단 인민 해방군’에게 체포되었다. 체포 이유는 그들이 선동 행위를 했다는 것이었는데 사실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리하여 이 6명의 가톨릭 선교사들은‘이슬람주의를 퍼뜨렸다’는 이유로 고발되어 한 달 동안 갇혀 있다가 풀려났다. 모린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나는 보스턴에서 잠시 와 있던 예수회 선배와 모린을 태우고 오지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15부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