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지도부의 추악한 민낯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

중국 역사상 ‘세기의 재판’ 이라 불릴 만한 보시라이(薄熙來ㆍ64) 전 충칭(重慶)시 당서기이자 중 

▲ 법정에 선 보시라이

앙정치국 위원에 대한 닷새간의 법정공방이 2013년 8월 26일 갖가지 화제를 뿌리면서 일단락됐다. 밝혀진 사실이 ‘소설보다 더 극적’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보 전서기는 이번 재판에서 자신에 대한 뇌물수수ㆍ공금횡령ㆍ직권남용 등 세 가지 혐의에 대해 강하게 부인하면서 그간 드러나지 않은 새로운 사실들을 폭로했다. 재판 장면이 중국 정부의 통제에 따라 부분 삭제되기는 했지만 대부분이 웨이보(微博ㆍ중국판 트위터)를 통해 중국과 전 세계에 공개되면서 재판의 관심과 열기를 달궜다. 

‘충칭의 왕’의 몰락
보시라이 재판은 ‘문혁 4인방’ 의 대표인 장칭의 공개재판이후 가장 관심을 집중시킨 ‘정치적 재판’ 으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4인방은 마오쩌둥의 신임을 얻어 문화혁명을 주도한 장칭, 야오원위안, 왕훙원, 장춘차오를 가리킨다. 이들은 1976년 마오쩌둥 사망 후에 벌어진 치열한 권력 쟁투 끝에 패배해 투옥됐으며, 1980~81년 재판에서 문화혁명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중형을 선고받았다. 덩샤오핑은 이 재판을 시장 개혁ㆍ개방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했다. 이번 보시라이의 재판은 4인방 재판 이후 중국 최대의 정치 재판으로 불리고 있다. 보시라이는 중국공산당 혁명 원로의 귀족 피를 물려받은‘태자당(太子黨)’의 중심인물로 커다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던 ‘충칭의 왕’ 이였지만 이번 재판 과정에서는 환멸의 극치를 여실히 보여줬다. 보시라이는 공판이 시작되자마자 혐의를 부인하기 시작했고 재판이 진행될수록 반격 수위는 높아졌다. 보시라이는 아내 구카이라이(谷開來)가 저지른 영국인 독살 사건을 은폐하려고 왕리쥔(충칭시 공안국장)을 중앙 정부 동의 없이 독단적으로 해임하는 등 직권 남용 혐의를 받고 있다. 이 부분 심리에서 보시라이는 자기에게 도덕적 책임이 있지만 이는 법적 책임을 지는 것과 별개라는 논리를 폈다. 보시라이는 “왕리쥔이 미국 총영사관으로 도주하는 과정에서 나에게 잘못과 과실이 있었고 이 때문에 당과 국가의 명예에 누를 끼쳐 매우 부끄럽다”고 죄를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보시라이는 “공소장에 적시된 나에 대한 문제는 오차가 크다고 생각한다”며 “나는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 상응하는 책임을 지기 바라지만 죄냐 죄가 아니냐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왕리쥔을 공안국장 자리에서 쫓아낸 것도 아내의 살인죄를 덮으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모함을 받고 있다는 구카이라이의 주장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진술했다. 검찰은 이런 보시라이의 주장을 반박하려고 미국 총영사관 망명 기도 등 혐의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왕리쥔을 증인으로 불렀다. 보시라이는 랴오닝성 성장이던 2002년 한 비밀 시설 공사 프로젝트를 통해 조성한 비자금 500만 위안(약 9억 1천만 원)을 부인 구카이라이와 관계가 있는 한 법률회사 계좌로 빼돌린 혐의를 받고 있다. 보시라이는 공금 횡령 여부를 인정하느냐는 재판장의 물음에 “수사를 받으며 500만 위안이 구카이라이 친구 계좌에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며 “나는 시종 공금횡령 혐의를 인정한 적이 없다”고 답했다. 이에 앞서 보시라이는 22∼23일 재판에서 2천179만 위안(약 39억 6천만 원) 규모의 뇌물 수수 혐의도 전면 부인한 바 있다. 중국 관영 매체는 보시라이가 뇌물 혐의를 전면 부인한 것에 대해 “연기력이 경지에 달했다”고 비난했다.

보시라이 사건의 도화선 

▲ 구카이라이

보시라이 사건을 폭발시킨 결정적인 도화선은 2012년 2월 6일 보의 심복이자 충칭(重慶)시 전 공안국장인 왕리쥔(王立軍ㆍ42)이 자신의 신변안전을 위해 여장을 한 채 쓰촨성(四川省) 미국 총영사관에 들어가 망명을 신청하면서 비롯됐다. 만약 왕리쥔의 망명사건이 없었다면 보시라이는 8개월 뒤에 열렸던 2012년 10월 열린 18차당대회에서 7인 정원의 상무위원에 선출될 것이 유력했다. 왕리쥔의 갑작스런 망명신청은 중국을 넘어 세계 언론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체면이 상한 중국 정부는 국가안전부를 파견해 왕리쥔을 검거하기에 이르렀다. 왕리쥔이 근무지인 충칭시를 몰래 빠져나와 직접 차를 몰고 340여㎞ 떨어진 청두시까지 도착해 외국공관중에서도 중국의 라이벌 G2국인 미국의 총영사관으로 뛰어든 것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미국 총영사관은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해 왕의 망명신청을 거부했고 쫓겨난 왕은 곧바로 포위 중이던 중국 국가안전부에 검거됐다. 왕리쥔이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한 것은 공안국장으로서 보시라이의 부인 구카이라이(谷開來ㆍ55)가 2011년 11월 15일 영국인 사업가 닐 헤이우드(당시 41)를 독살한 사실을 알고도 2개월 여 동안 법적조치를 취하지 않고 은폐했으며 이 사건의 처리를 위해 보시라이에게 보고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생겼고 왕이 생명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왕은 2012년 1월 28일 구의 살인사건을 보시라이에게 보고하자마자 몹시 화가 난 보시라이로부터 따귀를 맞았으며 내처 공안국장직에서도 면직됐다. 자신의 심복이던 왕리쥔에 관련해 보시라이는 “그는 품성이 극악하다며 그의 증언은 믿을 수 있다”며 “왕리쥔의 망명 시도가 아내 사건을 은폐하려던 내 탓이 아니고, 그가 구카이라이를 짝사랑했다”는 충격 발언을 내놓았다. 보시라이는 아내에게 공금을 횡령해 보내줬다는 혐의를 벗기 위해 자신의 치부인 외도 사실을 고백했다. 보시라이의 여성 편력은 널리 알려진 것이지만 그가 외도 사실을 스스로 밝히면서 중국 언론을 들썩이게 했다. 보시라이는 이번 재판에서 “부인인 구카이라이와 왕리쥔이‘아교와 옻처럼 끈적끈적한 관계(여교사칠ㆍ如膠似漆)’였다”고 폭로해 파문을 일으켰다. 보가 자신의 치부인 부인의 불륜사실을 터뜨린 것은 검찰의 직권남용 혐의를 반박하기 위한 것이다. 즉 왕리쥔이 자신의 가정과 감정을 침해했기 때문에 따귀를 날렸고 이런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왕이 도주했다는 논리다. 보가 폭로한 구와 왕의 구체적인 관계는 매우 사실적이다. 보시라이는 진술에서 “구는 왕의 말이라면 무조건 받아들일 정도였다”면서 “왕은 구와의 관계 속에서 나의 가정 속으로 파고들었다”고 말했다. 보는“시의 부서기나 조직부장도 집의 문을 두드린 적이 없었는데 왕은 마음 내키는 대로 집을 출입했다”면서 “실제 둘은 아주 특수한 관계였고 나는 귀찮아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털어놨다. 보 전서기의 폭로는 이어졌다. “왕은 구를 몰래 사랑하고 있었으며 감정이 깊어져서 헤어나질 못했다”며 “구에게 편지로 고백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보는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설명했다. 보는 “왕은 나의 성격을 잘 알고 있다”면서 “그는 나의 가정을 침범했고, 내 감정의 뿌리를 침해했다”고 폭로했다. 애초 왕리쥔은 보시라이가 랴오닝성(遼寧省) 다롄(大連) 시장일 때 발탁해 충칭시 서기로 부임하면서 데려가 심복으로 삼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왕리쥔은 쉬밍(徐明ㆍ42) 다롄스더그룹(大連實德集團) 회장의 소개로 2007년 말 랴오닝성 진저우(錦州)시 공안국장으로 있다 구카이라이에게 먼저 소개받았다. 당시 구는 복용하던 약에 누군가 독극물을 넣었다는 의사의 진단결과에 따라 소송을 진행 중이었는데 왕이 구의 운전기사를 범인으로 잡아내자 그때부터 깊은 신뢰를 하게 됐다. 구는 보시라이가 충칭시 서기가 된 이후인 2008년 왕을 충칭으로 뽑아 올렸으며 아들 보과과(薄瓜瓜ㆍ26ㆍ현재 미국 컬럼비아대 로스쿨 재학 중)의 미국유학 당시 안전을 책임지도록 부탁했고 닐 헤이우드가 보과과의 신변을 위협할 때도 긴급보안을 요청했다. 구카이라이와 왕과의 사이는 2011년 6, 7월경부터 틈새가 벌어졌다. 왕이 2011년 5월 충칭시 부시장에 임명된 뒤 시 상임위원이 되지 못한 데 대해 불만을 표시하면서 부터다. 구카이라이가 남편인 보에게 살인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은 의문으로 남아있다. 끝까지 사실을 숨긴 채 왕리쥔과 사건은폐에 성공하기를 기대했을 것이란 추정이 가능하다. 실제 보시라이도 이번 재판에서 자신은 구의 살인사건과 전혀 무관하다고 진술했다. 왕은 구와의 사적인 관계가 깊었고 만약 구의 범행이 탄로나 형사재판을 받을 경우 구의 살인은폐에 대한 비호와 방조혐의로 몰릴 것이 뻔했다. 또한 직속상관인 보시라이는 자신의 따귀를 날리고 2012년 2월 2일 공안국장직도 면직시켰다. 자신이 이제 기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왕은 2012년 2월 6일 오후 2시31분 청두주재 미국총영사관에 들어가 안전위협을 이유로 정치적 망명을 요청했다. 왕리쥔은 2012년 9월 24일 사적 위법행위, 모반도주, 직권남용, 뇌물수수 등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부부의 살인과 뇌물혐의
구카이라이가 닐 헤이우드를 살해한 끔찍하고도 대담한 행동은 공산당의 고위권력자의 절대적인 권력 배경과 무관치 않다. 구의 오랜 사업파트너였던 닐은 당시 구의 아들 보과과의 소개로 진행한 부동산 투자가 실패하자 약속했던 수익의 10%인 1300만 파운드를 지불하라며 “돈을 주지 않으면 파멸시키겠다”고 보과과를 위협했다. 인구 2,945만 명으로 중국 최대인 충칭(重慶)시의 1인자인 남편을 둔 구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처음엔 닐을 마약사범으로 몰아 단속과정에서 사살된 것으로 꾸미려했으나 왕이 실행을 거부하자 독살계획으로 바꿨다. 구는 공안국장인 왕까지 끌어들임으로써 완전범죄를 확신했다. 구카이라이의 살인은 조직적인 계획 하에서 치밀하게 진행됐다. 구는 2011년 11월 13일 집사인 장샤오쥔(32ㆍ張曉軍ㆍ9년형 선고)을 시켜 닐을 베이징에서 충칭으로 비행기로 데려오게 한다. 그날 밤 9시 구는 장과 독약, 마약 및 술, 차 등을 가지고 닐이 투숙하던 호텔로 가 함께 술과 차를 마셨다. 구는 닐이 술에 취해 토한 뒤 독약이 든 물을 마시게 해 독살시켰다. 구는 2012년 8월 20일 살인혐의로 사형유예판결을 받았다. 한편, 보시라이 가(家) 몰락의 배경에는 쉬밍 회장이 도사리고 있었다. 쉬는 보시라이의 ‘금고’ 역할을 했다. 대신 보시라이의 비호 속에 급속도로 사업을 불려나갔다. 쉬는 1992년 다롄스더그룹을 창립한 뒤 2005년에 <포브스>발표 중국부호 8위에 오를 만큼 급성장했다. 보와 쉬는 깊은 공생관계를 이어갔다. 쉬는 프랑스의 지중해 연안도시 니스에 300여만 달러의 별장을 사 구에게 상납했으며 이 부분에 대해 보의 뇌물수수죄가 적용됐다.

열렬히 사랑했던 부부의 파멸 

▲ 보시라이와 배우 장쯔이

보시라이는 다롄스더그룹 쉬밍(徐明) 회장으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았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고 밝혔고, 구카이라이는 쉬 회장이 자신에게 프랑스 별장 등을 사준 사실을 “보시라이도 알고 있을 것”이라고 반박하면서 법정공방을 펼쳤다. 이 호화 별장은 보시라이 뇌물 수수 액의 대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에 보시라이는 “그녀는 미쳤고 항상 거짓말을 한다”며 아내에 대한 인신공격을 주저하지 않았다. 구카이라는 보시라이가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여인이었다. 구카이라이는 자신의 책 ‘미국에서 승소하다’ 에서 보시라이를 1984년 처음 만났다고 길록했다. 하지만 보시라이의 전처 리단위(李丹宇)는 보시라이가 자신에게 이별을 통보한 1981년 6월 이전부터 두 사람 간 불륜이 시작됐다고 4년을 끈 이혼 소송에서 폭로했다. 리단위의 오빠 리샤오쉐(李小雪)와 구카이라이의 언니가 부부 사이여서 보시라이와 구카이라이는 사돈지간이었다. 1978년 함께 베이징대를 다니면서 사귀기 시작했다는 게 리의 주장이다. 두 사람은 1986년 부부가 됐지만 ‘사랑’ 은 오래가지 못했다. 보시라이는 지난 25일 재판 당시 구카이라이가 1999년 11월 보과과를 데리고 돌연 영국 유학을 떠난 것이 자신의 외도 탓이라며 염문설을 시인했다. 보시라이는 1999년 당시 충칭 지역 방송사 아나운서 장웨이제(張偉傑)와 불륜설이 나돌았다. 지난해 9월 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는 보시라이의 당적과 당직을 박탈하면서 ‘여러 명의 여성과 정당하지 못한 관계를 가졌다’고 지적했다. 보시라이는 가족의 스폰서 격인 쉬밍(徐明) 다롄스더유한공사 회장으로부터도 여성 100여명을 ‘성상납’받았는데 그 중에는 배우 장쯔이(章子怡)도 있다고 보쉰(博訊)이 보도한 바 있다. 장쯔이 측은 즉각 보쉰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해 다음 달 16일 미 로스앤젤레스 법정에서 재판이 열린다. 아내 구카이라이도 지조를 지키는 여인은 아니었다. 타이완 타블로이드지 왕보는 이날 구카이라이가 2011년 남편의 부하인 왕리쥔(王立軍) 전 충칭시 공안국장과 영국인 사업가 닐 헤이우드, 집사 장샤오쥔(張曉軍)과도 내연관계를 유지했다고 전했다.

중국 ‘사법 투명성’ 의 진일보과 한계
보시라이가 이번 재판의 최후진술에서 밝힌 “나는 총리도 푸틴도 되려고 하지 않았다”라는 진술이 웨이보 중계에서 삭제됐다. 유일한 그의 정치적 발언이 삭제된 것이다. 실제 보시라이 사건의 핵심은 중국 공산당 내부의 권력투쟁이었다. 보시라이는 2007년 충칭시 당서기를 맡으면서‘충칭모델’로 불리는 좌파식 경제ㆍ사회정책을 추진했다. 농촌 주민들에게 도시 거주권(후커우ㆍ戶口)을 줘 복지를 강화하고 서민과 노동자 등 저소득층을 위한 저렴한 임대주택을 건설해 제공했다. 또 주민들을 모아 혁명가요를 부르게 하고 대대적인 ‘범죄와의 전쟁’ 을 벌이는 정책을 실시했다. 태자당(太子黨ㆍ중국 고위층 자녀)출신인 보의 이러한 ‘튀는 행동’ 이 후진타오 전주석과 원 총리로 대표되는 공청단(공산주의청년단)파의 견제를 받던 가운데 왕리쥔 망명사건이 보의 낙마에 결정적 빌미가 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에 따라 보시라이는 중국 정치권내 권력투쟁의 ‘희생양’ 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중국 지배자들은 보시라이 재판으로, 보시라이 축출의 정당성과 반부패 의지 등을 대중에 보여 주고자 했다. 이번 재판에서 보시라이 일가의 온갖 부패와 비리 혐의가 공개됐다. 보시라이의 아들은 기업주가 제공한 전용기로 아프리카로 놀러 다녔으며, 아내는 거액의 뇌물을 챙기고 프랑스에 호화 별장을 샀다. 관영 <인민일보>는 “이번 재판은 법에 근거해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진행됐다”며 자화자찬했다. 그러나 이번 재판에서 국가주석 시진핑과 지배자들의 의도가 잘 먹혔는지는 의문이다. 공산당의 지도와 감독을 받는 법원이 ‘사법 투명성’ 을 보여 줬다고 믿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많을까. 재판의 주요 내용은 법원이 웨이보(중국판 트위터)로 상세히 중계했지만, 이는 공산당의 검열을 통한 공개였다. 공산당기관지 런민르바오는 재판이 끝난 후 1면 논평에서 “이번 재판은 법에 근거해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진행됐다”며 “법치로 부패를 척결하겠다는 당과 국가의 결심을 보여줬다”고 밝혔다. 실제로 이번 재판은 중국의 5세대 지도부 출범 이후 최고위직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시진핑(習近平) 체제의 반부패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시험대라는 평가가 많았다. 하지만 이번 재판 역시 공개재판 형식이기는 했지만 방청객들이 공개모집 절차 없이 일찌감치 정해져 사실상 비공개 재판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시진핑 체제가 강력한 반부패와 사법개혁 의지를 드러내면서도 여전히 고위층에 대한 재판에서는 폐쇄성을 유지하려 한다는 것이다.

중국 고위권력층의 추악한 ‘민낯’
인기 있는 정책들을 펼치며 중국의 최고 지도부 후보로 거론되던 거물 정치인이 부인의 영국인 사업가 독살 혐의와 측근의 미국 망명 시도 등이 연이어 터지면서 권력에서 축출됐다. 이번 재판이 ‘문혁 4인방’의 대표인 장칭(江淸1914~1991)의 공개재판이후 가장 관심을 집중시키며 닷새 동안 열렸음에도 풀리지 않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이러한 의혹에 대한 갖가지 궁금증을 덮어 둔 채 열린 이번 재판이 거대한‘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는 지적이 당연히 일어나는 이유다. 정치국 상무위원 후보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보의 행적을 문제 삼을수록 중국 공산당과 체제가 입을 타격을 감안해 중국 당국과 보가 적당한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했을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구카이라이가 남편을 공격한 것은 중국 검찰의 작품이라고 보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검찰은 감형이나 보과과를 처벌하지 않는다는 등의 조건을 내걸고 구카이라이를 압박했으며 이런 압박에 따라 구카이라이가 검찰 편에 섰다는 해석이다. 아울러 보시라이가 이미 형이 확정된 구카이라이에게 뇌물수수 등의 책임을 떠넘기고자 ‘거리두기’ 전략을 택한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살인 사건 혐의는 구카이라이와 왕리쥔 등에게만 적용시키고 보시라이는 뇌물수수ㆍ공금횡령ㆍ직권남용 등 개인비리에 국한해 마무리 지은 것으로 평가된다. 이제 보시라이 전서기는 9월중 판결만을 앞두고 있다. 현재로서는 징역 15년 이상의 중형에 처해질 것으로 보인다. 한때 ‘중국의 케네디’ 로 불리기도 했던 보시라이가 초라한 모습으로 법정의 피고인석에 앉아 자신의 무혐의를 강변하기위해 부인을 “미쳤다”고 하면서 낯 뜨거운 외도사실을 폭로하는 등의 추태를 보면서 권력의 무상함이 느껴진다. 보시라이는 최후 진술에서 “나는 자신이 매우 불완전하고 주관주의에 빠져 있으며 성질이 급하고 엄중한 과실과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했다. 이번 사건은 탄탄하게만 보이던 중국 공산당 일당 사회주의 체제의 취약성과 화려한 색깔로 뒤덮여있던 중국 고위권력층의 추악한 ‘민낯’ 이 적나라하게 폭로됐다는 점에서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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