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델라의 타계는‘한 시대의 종말’, 추모의 물결이 지구촌을 출렁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지낸 넬슨 만델라가 우리 시간으로 지난 5일 오전 4시께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세계 언론이 대서특필하였고 추모의 물결이 지구촌을 출렁이게 했다. 만델라의 타계는 한 정치인의 사망을 넘어 ‘한 시대의 종말’ 을 상징한다. 만델라가 일생을 바쳐 싸웠던 대상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정권만이 아니라 인종차별, 식민주의의 잔재, 냉전 체제와 반공 논리, 권력을 가진 자들의 폭압 등 20세기의 모든 모순들이었다.

 ‘역사의 거인’ 의 장례식 

 

벽을 넘어 인류화합의 상징이 된 ‘역사의 거인’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 15일 영면했다. 이로써 지난 5일 요하네스버그 자택에서 95세를 일기로 타계한 만델라의 공식 추모식, 사흘간의 시신 공개와 조문에 이어 이날 장례식까지 열흘간의 국가 애도 기간이 모두 막을 내렸다. 만델라 전 대통령은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먼 여정’ 에서 푸른 언덕이 굽이치고 어릴 적 가장 행복한 시절의 한때를 보낸 곳이라고 묘사한 쿠누에서 남아공 국민과 전 세계에 작별 인사를 고했다. 장례식은 만델라 가족 농원의 개활지에 세워진 대형 천막에서 진행됐다. 이날 장례식에는 영국의 찰스 왕세자, 은코사자나 들라미니주마 아프리카연합(AU) 집행위원장, 조이스 반다 말라위 여성대통령, 로버트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 자카야 키퀘테 탄자니아 대통령 등 아프리카 정상 10여 명과 미국의 인권운동가 제시 잭슨 목사,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 등 유명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장례식에 초대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을 빚은 데즈먼드 투투 전 대주교는 혼선 끝에 결국 참석했다. 만델라와 함께 반(反)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 투쟁 동지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투투 전 대주교는 14일 “정부 초청명단에 없어 장례식에 가지 않겠다”고 했으나 정부 측이 “공식초청 명단에 있다”고 해명하자 이날 장례식에 참석했다. 매장 의식에서는 만델라의 출신 부족인 호사족의 전통에 따라 고인의 영혼을 인도할 황소 50마리를 도축했으며, 남아공 군용 헬기가 국기를 달고 편대 비행을 하며 만델라에 마지막 예의를 표했다. 그러나 부족 전통에 따라 진행된 매장 의식에는 만델라의 부인인 그라사 마셸 여사와 전 부인 위니 마디키젤라만델라 여사 등 친지 450명만 참석한 가운데 비공개로 진행됐다. 만델라의 출신 부족인 코사족은 ‘당신은 약속을 지켰다’라는 찬송가로 그의 용기와 자유, 화해의 삶을 찬양했다. 만델라와 함께 감옥에서 26년간 복역했던 민주화 투쟁 동지 아흐메드 카스라다는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을 걷고 남아공의 존엄을 되찾은 만델라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헌사를 바쳤다. 주마 남아공 대통령은 “남아공의 민주화를 완성한 고인의 마지막을 함께 할 수 있게 된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며 “절망에 빠져있던 우리에게 희망을 선사했던 만델라의 유산을 계승할 것”이라고 밝혔다. 만델라의 손녀 낸디 만델라도 연단에 올라 “할아버지는 직접 모범을 보이는 진정한 지도자였다”며 “할아버지를 통해서 성취란 우리 자신에게 존재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강조했다. 이 밖에도 아프리카연합(AU) 순회의장 에티오피아 하일레마리암 데살렌 총리ㆍ남아프리카개발공동체(SADC) 순회의장 말라위 조이스 반다?대통령ㆍ탄자니아 자카야 키크웨테 대통령 등이 고인을 위한 헌사를 했다.
 

70개국 이상의 정상들이 참석해 화제가 된 추도식 

▲ 오바마 미 대통령과 라울 카스트로 쿠바 대통령

장례식에 앞서, 타계한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추모식에 70개국 이상의 정상들이 참석해 화제가 됐다. 지난 10일 요하네스버그 소웨토 FNB 경기장에서 열린 공식 추모식에는 역대 최다인 전 세계 약 100개국 수반과 정상급 인사들이 수만 명의 남아공 국민과 함께 참여했다. 이는 지난 2005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장례식 당시에 참석한 70여 개국 정상을 훨씬 웃도는 역대 최대 규모이다. 영결식 식순에 따르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 라울 카스트로 쿠바 대통령, 리위안차오 중국 국가부주석 등이 참석했다. 또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은코사자나 들라미니-주마 아프리카연합 집행위원장도 방문해 만델라 전 대통령을 추도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정홍원 국무총리가 조문사절단을 이끌고 남아공을 방문했다. 위대한 족적을 남긴 만델라 대통령을 추모하기 위해 모인 이 자리에서 무엇보다도 화제가 된 것은 오바마 대통령과 라울 카스트로 쿠바 대통령의 악수 장면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연설을 위해 무대에 오르기 전 카스트로 대통령과 마주쳤고, 그의 손을 잡아 흔들며 서로가 미소를 주고받은 것. 이에 국내 언론뿐만 아니라 외신들은 자유를 위한 투쟁으로 평생을 바친 만델라가 세상을 떠나면서도 ‘용서와 화해의 장’ 을 마련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미국과 쿠바 양국은 50년간 이념 갈등과 미사일 문제, 경제 봉쇄, 국교 단절 등으로 적대적 관계를 지속해오며 끊임없는 분쟁의 조짐을 보여 왔기에 현재 이번 두 정상의 악수를 두고 양국 간 화해의 시발점이 되는 것 아니냐는 추측들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어 지난 11일부터 사흘 동안 만델라가 남아공의 초대 흑인 대통령으로 취임해 5년 동안 집무한 정부청사 유니언빌딩에서 그의 시신이 일반에 공개돼 약 10만 명의 남아공 국민이 조문했다. 만델라 추모 행사를 통해 남아공 국민은 흑인과 백인이 모두 함께 그의 화해와 용서의 정신을 기리며 단합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10일 요하네스버그 FNB 경기장에서 주마 대통령이 입장하고 연설하는 과정에서 일부 국민이 야유를 보내는 장면이 목격됐다. 또 만델라 시신이 일반에 공개된 마지막 날인 13일 너무 많은 인파가 유니언빌딩 외곽 집결지에 모이는 바람에 경찰이 인원을 통제하고 집결지를 폐쇄하자 시민들이 이에 반발하기도 했다. 또 한때 일부 시민들이 경찰 저지선을 뚫고 유니언빌딩 구내에 진입하기도 했다. 한편, 미국 CNN방송은 만델라의 추모식에 참석하지 않은 세계적 지도자 5명의 불참이유와 근황 등을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CNN은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과 피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은 건강상의 이유로 참석하지 못했으며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이 세계 지도자들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의전 관행상의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달라이 라마의 경우에는 최근 2차례나 남아공행 비자가 발급되지 않아 참석하지 못했다.

만델라의 삶 ‘투쟁의 역사’ 

▲ 젊은 시절의 넬슨 만델라

남아공의 첫 흑인 대통령인 만델라는 용서와 화합의 정신을 실현한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국제사회에서 존경을 받아왔다. 만델라는 지난 6월 지병인 폐 감염증이 재발해 수도 프리토리아의 병원에 입원했다가 약 3개월 만에 요하네스버그 자택으로 돌아와 치료를 받아 왔다. 만델라는 고령으로 몸 상태가 쇠약해지면서 2011년 이후 수차례 입ㆍ퇴원을 반복했다. 지난해 12월과 올해 3월에도 폐렴으로 입원치료를 받다가 퇴원했고 최근 증상이 재발해 재입원해 집중 치료를 받았다. 그가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10년 남아공 월드컵대회가 마지막이었다. 1918년 남아공 동남부 음베조에서 마을 족장의 아들로 태어난 만델라의 삶은 투쟁의 역사였다. 우연히 한 친구가 백인에게 모욕당하는 걸 보고 인종차별의 부당함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할 당시만 해도 간디의 비폭력주의를 주장하는 인권운동가였다. 하지만, 1960년 샤프빌 흑인학살사건을 통해 비폭력주의로는 자유를 쟁취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결국 42세의 나이로 혁명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군사훈련을 통해 혁명가로서 활동을 시작한 만델라는 5년이 지나기도 전인 1964년에 체포돼 종신형을 선고 받으면서 로벤 섬에 수감되어 27년 동안 옥살이를 하게 된다. 옥중에서 받은 각종 인권상을 계기로 그의 명성은 알려졌고, 어느새 세계인권운동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국내의 저항과 국제사회의 압력에 더는 아파르트헤이트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남아공 백인정권은 1990년 만델라를 출소시키고 ANC도 합법조직으로 인정했다. 석방된 후에도 그의 시련은 계속되었다. 흑인 극단주의자들에게는 온건하다는 비난을 들었고, 종족 간의 복잡한 갈등에도 진저리를 쳐야했다. 그 상황에서도 백인 정부와 협상의 끈을 놓지 않아야했다. 만델라는 인종 차별 철폐를 위해 노력한 공로로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마지막 백인 대통령인 F. W. 데 클레르크 대통령과 지난 1993년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이듬해인 1994년 남아공 최초의 민주선거를 통해 첫 흑인 대통령이 됐다. 정치적인 라이벌이었던 이었던  F. W. 데  클레르크 전 대통령과 줄루족 지도자 망고수투 부텔레지를 각각 부통령과 내무장관으로 입각시켰다. 이 때문에 일부 국민들 사이에 격한 항의와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으나 화합과 사회통합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함께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995년 출범한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 정권 치하에서 자행된 수많은 범죄를 가해자가 고백하는 경우에는 사면해 주는 파격적인 결단을 내리고 시행하게 되는데, 대부분의 범죄자가 백인이라 흑인들의 강력한 항의가 뒤따르게 되었다. 하지만 만델라는 불굴의 의지로 결국 흑백의 화합을 이루어내게 된다. 이런 노력을 통해 이른바 ‘무지개 국가’ 를 건설한 지도자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퇴임 이후에도 남아공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의 존경을 받아왔다.

세계 각국 정상과 유명인 추모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그(넬슨 만델라)는 위대한 지도자이자 진정한 용기의 소유자”라며 “앞으로도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만델라 전 대통령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표명하면서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도 없었을 것”이라고 추모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6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마디바(넬슨 만델라의 존칭)를 잊지 않겠다”는 글을 남기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위대한 빛이 떠났다”며 “만델라는 우리 시대 위대한 거목으로 전 세계가 그를 추모한다. 그를 만난 것은 내 인생에 있어 행운이다”고 애도했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만델라는 아파르트헤이트(흑인차별정책) 철폐 투쟁 운동으로 남아공 역사는 물론 세계사 발전에도 크게 기여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올랑드 대통령은 “만델라로 아프리카 국가들의 단결력과 자부심은 높아졌다”며 “그가 남긴 유산은 영원할 것”이라고 추모했다. 토니 애벗 호주 총리는 만델라 전 대통령을 도덕적인 지도자라며“그는 인종 차별 반대를 외치며 이를 정면으로 맞섰다. 이후 승리자가 됐지만 자신을 억압한 사람을 용서하고 화해의 손길을 먼저 내밀었다”고 말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만델라의 열정은 이후 새로운 희망의 씨앗이 됐다”며 “지금 남아공은 전 세계 민주주의를 선도한다”고 평가했다. 반기문 유엔(UN) 사무총장도 만델라 전 대통령을 추모했다. 반기문 총장은 만델라 전 대통령을 “국제 무대에서 보기 드물 정도로 위대한 인물”이라고 평가하며 “인간 존엄성 향상을 위해 끝없이 노력했다. 고매한 품격을 갖춘 인격자인 동시에 강력한 의지의 소유자”라고 고인을 회상했다. 빌 게이츠 MS 의장은 “넬슨 만델라로 인한 영감을 많이 받았다. 그가 떠나다니…가슴 아프다”며 안타까워했다. 마이크 타이슨도 넬슨 만델라의 타계 소식에 애도의 뜻을 전했다. 마이크 타이슨은 “만델라 타계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의 가족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밝혔다. 미국 유명 방송인인 래리 킹 역시 트위터 계정을 통해 “넬슨 만델라는 20세기의 위대한 인물”이라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한편 축구선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6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고인과 함께 찍은 사진을 게재하며 “마디바(만델라의 애칭)가 남긴 유산과 모범적인 삶에 감사하며. 당신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할 겁니다”라는 추도의 글을 남겼다.
 

만델라의 어록
만델라의 어릴 적 이름인 롤리랄라는 장난꾸러기라는 뜻이라고 한다. 시골의 한 장난꾸러기가 세계 사람들이 존경하는 인물이 된 것으로 보아 한 인간의 배경이나 학식, 피부색을 따지는 것은 무익한 것임을 만델라는 긴 생애를 통해 몸소 보여주었다. 만델라는 이제 쉼에 들어갔지만 그의 유산은 우리들을 통해 지속될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서 이미 그 이상의 것들을 얻었다. 만델라가 설립한 ‘넬슨 만델라기념센터’ 의 셀로 하탕 이사장 등이 펴낸 만델라 어록집에 따르면 그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사람 중의 하나이다. 마지막으로 만델라의 주요 발언을 정리한다. ▲ "ANC(아프리카민족회의)의 투쟁은 아프리카인들의 투쟁이다. 이 투쟁은 아프리카인이 직접 겪은 고통과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생존권을 위한 투쟁이다……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이 아프리카인들의 투쟁에 나 자신을 바쳐왔다. 나는 백인이 지배하는 사회에 맞서 싸웠고 또한 흑인이 지배하는 사회에도 반대해 싸웠다. 나는 모든 사람이 함께 조화를 이루고 동등한 기회를 누리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에 대한 이상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 사회야말로 내가 살아가는 목적이고 이루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그런 이상을 위해 나는 죽을 준비가 돼 있다”(1964년 4월20일. 내란 혐의 리보니아 재판 최후 진술에서) ▲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한 우리 모두는…새로 태어난 자유에 영광과 희망을 돌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범법자 신세였던 우리는 오늘 우리의 땅에 세계 각국을 초청하는 귀중한 특권을 누리고 있다. 정의와 평화, 인간의 고귀함을 위한 공동의 승리를 쟁취한 우리 국민과 함께 자리하기 위해 찾아온 국제사회의 귀빈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우리는 결국 정치적 해방을 이뤄냈다. 우리는 아직도 빈곤과 박탈, 성차별 등 여러 차별에 묶여 있는 우리 국민을 해방시킬 것임을 맹세한다. 이 아름다운 나라에 사람에 의해 사람이 억압받는 일이 결코, 결코, 결코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 자유가 흘러넘치도록 하자. 아프리카에 신의 축복이 있기를”(1994년 5월 10일 남아공 초대 흑인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한 연설에서.) ▲ “친구들, 동지 그리고 남아공 국민 여러분, 평화와 민주주의 그리고 모두를 위한 자유의 이름으로 인사를 드린다. 나는 여기 여러분 앞에 선지자가 아니라 여러분의 천한 종으로 서 있다. 당신들의 지칠 줄 모르고 영웅적인 희생 덕분에 내가 오늘 여기 서 있게 됐다. 그러므로 난 남은 내 인생을 여러분의 손에 맡긴다”(1990년2월11일 27년 동안의 옥살이 끝에 석방돼 케이프타운 시청 발코니에서 한 연설) ▲ “난 말을 결코 가볍게 하지 않는다. 27년간의 옥살이가 내게 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독의 침묵을 통해 말이 얼마나 귀중한 것이고 말이 얼마나 사람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지 알게 됐다는 것이다”(2000년 7월 14일, 만델라 어록집) ▲ “비판적이고 독립적이며 탐사적인 보도는 민주주의의 활력소다. 언론은 정부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언론은 정부 관리에 맞설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능력을 갖춰야 한다. 언론은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충분히 독립적이어야 한다. 언론은 헌법의 보호를 누려야 한다. 그래야 언론이 시민으로서 우리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다”(1994년 2월 14일, 만델라 어록집) ▲ “지도자로서, 난 과거 음케케즈웨니궁에서 당시 섭정왕이 보여준 원칙을 항상 따라왔다. 난 회의에서 의견을 피력하기 전에 참석자들이 각자 무슨 견해를 가졌는지 들으려 항상 노력해왔다”(1994년. 자서전‘자유를 향한 긴 여정’) ▲ “진정한 지도자는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특히 민감하고 복잡한 문제를 대할 때는 더욱 그렇다. 긴장된 상황이 되면 일반적으로 극단주의자들이 세를 불리고 감정이 이성적인 생각을 밀어내는 경향이 있다”(2000년 1월 16일. 만델라 어록집) ▲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한 사람이 태어나서 자신이 속한 국민과 국가를 위해 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을 다 마쳤다면 그는 평안하게 안식을 취할 수 있다. 난 그런 노력을 했다고 믿고 있고 그래서 영원히 잠잘 수 있을 것이다”(1996년. 만델라 어록집)

저작권자 © 시사뉴스피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