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마틴이 선교사로서 동아프리카 난민들과 함께 생활한 이야기를 담았다. 전쟁의 세기가 양산한 무수한 아프리카 난민들, 그들을 돕고자 파견된 선교사. 너무 진지하고 근본적인 주제들이어서 자칫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수회 난민 봉사회의 활동을 중심으로 동아프리카 난민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진솔하고 수채화처럼 생생한지 책장을 넘기다 보면 저자와 난민들과 내가 어느새 하나가 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일화에 등장하는 난민 하나하나가 마치 내 이웃들처럼 느껴지면서, 그들의 걱정거리가 내 걱정이 되고 그들의 웃음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게 된다. 그들이 울면서 지나온 내력을 풀어 놓을 때는 가슴 뭉클한 깊은 공감에 휩싸이게 된다.
지은이/제임스 마틴ㆍ옮긴이/송은경ㆍ펴낸이/정진석ㆍ펴낸곳/가톨릭출판사
우리가 칸게미로 이사와 미코노 센터를 개장하고 며칠 지난 후 벤자민이 다시 나타나 돈을 달라고 졸랐다. 우리가 난민들이 만든 공예품을 사들인다는 얘기를 들은 그는 손수 물건을 만들어 가지고 왔다. 그러나 난생처음 만들어 본 물건들이란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바나나 잎 메모지만 해도 그랬다. 난민들 중에는 갈색으로 잘 말린 바나나 잎에 아프리카 여인들이나 예수의 성(聖)가족, 각종 야생 동물들을 세밀하게 그려 넣어 멋진 메모지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루는 벤자민이 얇게 말린 바나나 잎을 종이에 서투르게 붙여 메모지라고 세 장 들고 왔는데 하얀 밀가루 풀 덩어리가 더덕더덕 묻어 있었다. 나는 몇 실링을 주고 그의 물건을 사주기는 했으나, 그가 더 주문하겠느냐고 물었을 때는 ‘노’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벤자민은 매일같이 미코노 센터에 나타나 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 주머니의 돈을 약간씩 건네주곤 했다. 여기 말고는 달리 갈 곳이 없는 처지란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벤자민을 아예 고용해 버리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 그러는 것이 돈이 덜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에게 무슨 일을 맡길 것인가? 우리는 이미 필요한 사람들을 다 고용한 상태였다. 칸게미 출신의 근면하고 용모 단정한 젊은 여성 버지니아가 매장 청소를 맡고 있었고, 고학력의 르완다 난민 마리 부그위자는 판매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타가 독일로 떠나기 전에 관리인으로 고용한 베레헤라는 에티오피아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베레헤는 너무 연로한 탓에 큰 일을 하기 힘들었다. 실제로도 그는 현관에서 담배를 피우며 다른 난민들과 잡담이나 하면서 하루를 다 보내곤 했다. 벤자민을 관리인 조수 비슷한 걸로 고용하여 그의 일을 돕게 하면 어떨까? 화초에 물도 주고, 집 주위의 커다란 정원을 돌보고, 베레헤가 감당할 수 없는 힘든 일을 대신해주면서 말이다. 내가 이 자리를 제의하자 벤자민은 너무 좋아 울음을 터뜨렸다. “예, 그럼요. 하고말고요, 브라더.”그러나 벤자민의 난관은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가 출근한 첫날, 나는 그에게 작은 꽃밭에 가서 잡초를 뽑으라고 했다. 그리고 ‘고무장화’를 신어야 될 거라고 덧붙였던 것 같다. 그것은 케냐인들이 ‘샴바(밭)’에서 일할 때나 우기(雨期)에 주로 신는 목이 긴 고무장화였다. 벤자민이 바닥만 쳐다보았다. “알겠어요, 브라더. 그런데 전 고무장화가 없거든요.” 신이라고는 갈라진 샌들밖에 없다는 얘기였다. 결국 우리가 그에게 장화를 사주었다. 그리고 ‘주아 칼리(뜨거운 햇볕)’에 타지 말라고 모자도 하나 사주었다. 벤자민을 고용했을 무렵 우연히도 또 한 명의 난민이 우리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엘리야라는 늙수그레한 수단인이었는데, 화초와 나무를 팔아 살아가고 있었다. 엘리야는 고물 자전거를 타고 매주 나타나, 자신이 제공할 수 있는 화초의 종류가 죽 적힌 낡은 목록을 들이밀곤 했다. 극락조 250 실링, 제라늄 50실링, 아이리스 100실링, 부겐빌레아 100실링. 벤자민도 그랬지만, 나는 그가 너무 딱해 보였다. 그래서 우리에겐 화초가 더 필요하지도 않았지만 매주 그에게서 뭔가를 사주었다. 며칠 후면 그는 다시 자전거를 타고 낡은 신문지로 싼 작은 화초나 나무를 더 보태어 찾아오곤 했다. “흥!” 그가 화초를 들고 들어오는 것을 처음 본 앨리스 나브위레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저 사람 아마, 남의 정원에서 물건을 훔쳐 냈을 거예요.” 어쨌거나 엘리야의 화초들이 벤자민에게 할 일을 제공한 셈이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벤자민과 엘리야 그리고 하늘이 내려준 비 덕분에 미코노 센터 주위의 정원에는 각종 꽃들이 넘쳐 나게 되었다. 정원사를 부업으로 삼고 있다는 어느 영국인 여성이 우리의 아이리스를 보고는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최고의 작품이라고 감탄했을 정도였다. 벤자민은 마리, 버지니아, 베레헤와 더불어 미코노 센터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네 사람에게 식사를 제공해 봐야 하루 몇 실링의 저렴한 비용이면 충분했고, 버지니아가 영리하고 수완이 비상한 요리사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각기 다른 배경들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네 사람 사이에 끈끈한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벤자민은 어쩌다 한 번씩 화초나 나무를 심곤 했을 뿐, 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청소를 시키거나 뭘 좀 고쳐 달라고 부탁하면 으레 피곤하다거나 몸이 아프다고 호소했다. 병원에 간다며 진료증을 요구하고는 한 번에 며칠씩 결근하고 술 냄새를 풍기며 돌아오기도 했다. 르완다 출신의 다른 난민들이 그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술꾼이에요.” 그들이 볼 때 더 큰 문제는 그가 ‘게으름뱅이’라는 점이었다.벤자민을 고용하고 몇 달이 지났을 때, 우리 전시실의 잠겨진 서랍에 넣어두었던 자그만 금고가 사라진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의 계산으로는 대략 5천 실링(약100달러)이 들어 있었다. 금고는 폐점 후에 사라진 게 분명했으나 그 다음 날 아침에 확인한 바로는 매장 문들이 모두 멀쩡하니 자물쇠로 채워져 있었다.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미하엘과 나뿐이었으므로 외부인의 소행일 리는 없었고 고용인들 가운데 누군가가 금고를 훔쳐 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벤자민, 마리, 버지니아, 베레헤는 당장 서로 등을 돌리고 상대방을 도둑이라고 몰아세웠다.
미하엘과 나는 격분했다. 아니, 배신감마저 느꼈다. 우리는 그 네 사람에게 일자리를 주었을 뿐 아니라 식사를 제공하고 따로 옷까지 마련해주고 돈도 빌려주며 곤경에 처했을 때는 보살펴주기도 했다. 그들을 우리의 친구라 믿었다. 그런데 그중 한 사람이 우리의 돈,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서 난민들의 돈을 훔쳐 간 것이다. 나는 기필코 진상을 캐내기로 마음먹었다. 미하엘과 나는 사라진 금고가 아직도 주변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벤자민, 마리, 버지니아, 베레헤를 데리고 그들의 집으로 달려가 한 집씩 차례로 수색을 했다. 그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었으며, 그 일을 생각하면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그들 중에 한 명이 돈을 훔쳤다는 것은 확실했기 때문에 내 권한 내에서는 잘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 중 한 명에게는 옳은 처사였을지라도 나머지 세 명에게는 그렇지가 못했다. 사실 내가 생각해도 그보다 더 큰 모욕은 없었다. 그들의 작은 오두막을 뒤지는 동안 나 자신도 수치스러웠을 정도니까. 우리는 네 사람의 집에서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을 모두 해고하세요.” 오랫동안 이 나라에서 살아온 한 미국인이 충고해주었다. “공평하게 하자면 그 방법밖에 없어요. 그렇게 해야 도둑질을 불허한다는 메시지도 분명히 전달할 수 있어요. 가만히 두었다가는 난민이나 케냐인들 모두가 당신들을 이용하려 들 겁니다. 모두 해고해 버리세요.” 내가 제대로 알아듣도록 그가 다시 한 번 되풀이했다. “그게 바로 이 나라의 방식입니다.”심지어 난민들조차도 그렇게 충고했을 뿐 아니라 절도 사건을 전해 듣고 대놓고 분노를 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아일랜드 출신의 한 사제도 같은 의견이었다. “전원 해고해 버리세요.”그는 이렇게만 말했다. 괴로운 결정이긴 했지만 그 당시로선 달리 취할 방도가 없어 보였다. 한 사람만 뽑아 해고한다는 것도 독단적인 조치였다. 나 개인적으로는 벤자민을 의심하고 있었다. 미하엘은 베레헤를 의심했다. 결국 우리는 그들 모두를 해고하기로 했다.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그것은 내가 겪어 본 중에, 아니 케냐에 머문 시간을 통틀어 가장 힘들었던 일이었다. 나는 그들을 불러 모아 놓고 우리의 결정을 알려주었다. 버지니아와 마리는 금새 눈물을 터뜨렸고 소맷자락으로 연신 눈을 훔쳐 댔다. 벤자민과 베레헤는 묵묵히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 모임을 끝낸 후 나는 욕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울었다. 몇 주가 지나도 내 마음은 여전히 편치 못했고,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점점 커져 갔다. 그들 전원을 처벌함으로써 다른 난민들과 칸게미에 사는 주민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했다는 점에서는 이상적인 방법이었을지 몰라도 그것은 분명 부당한 처사였다. 게다가 어떤 사람을 해고한다는 것은 그를 궁핍한 생활로 몰아넣는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일자리를 얻기란 거의, 아니 절대적으로 불가능했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미 매장을 맡을 사람을 새로 고용한 상황이었다. 패트리샤 느제리라는 케냐 여성이었는데 대단히 양심적인 일꾼으로 확인된 사람이었다. 미하엘과 나는 그들을 전원 해고한 것이 중대한 실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벤자민과 베레헤가 형편없는 일꾼들이란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우리는 그들 네 사람을 차례로 만나 사건의 진상을 재검토해 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그들을 떠나보내는 것이 정당한지 부당한지는 그 다음에 결정하기로 했다.우리는 그들을 개별적으로 만났다. 이것 역시도 괴롭기 짝이 없는 과정이었지만 아마 미하엘과 나보다도 그들이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버지니아는 초지일관 그래왔듯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다시 받아 달라고 눈물로 간청했다. 마리는 보다 절제된 태도를 보였으며 자신이 감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절도가 벌어졌다는 점을 인정했다. 어쨌거나 금고는 매장 판매원인 그녀 자신의 책임이었으니까. 베레헤는 아무 변명도 하지 않고 우리와 대화하는 내내 침묵을 지켰다. 결국 우리는 버지니아를 의심할 증거는 전혀 없다고 판단하여 그녀를 다시 고용했다. 그러나 벤자민과 베레헤는 워낙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으므로 해고 처분을 그대로 적용시켰다. 금고를 지킬 책임이 있었다고 인정했던 마리도 복직되지 못했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최선을 다해 상황을 처리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일자리를 잃어버린 벤자민과 베레헤와 마리가 궁핍해질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내 죄책감도 달래고 그들의 형편도 고려하는 차원에서, 마리에게 자영업 프로젝트를 하나 맡겼다. 그녀를 맨 처음 우리 사무실로 오게 만들었던 미용실 사업이었다. 마리는 이러한 조치에 흡족해 하면서 우리에게 아무 원한도 없다고 말했다. “금고는 제 책임이었어요, 브라더.” 그녀가 서글픈 투로 말했다. 베레헤에 대해선, 그가 이미 노르웨이로 이민 가려고 절차를 밟고 있던 중이었으므로 유엔 사무소와 협조하여 수속을 앞당겨주었다. 벤자민으로 말하자면, 해고되고 몇 주 후부터 다시 우리를 찾아오고 있었다. 매일같이 와서 울면서 호소했다. “제발 다시 일하게 해주세요.” 그러나 그를 다시 고용해준들, 변함없이 게으른 일꾼으로 남을 것이란 사실을 그 즈음에는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비록 확실한 증거는 없었지만 나는 여전히 그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매주 그에게‘약간의 돈’을 쥐여주면서 그의 문제점들에 대해 충고해주곤 했다. 결국 벤자민은 그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아프고, 가난하고, 직장도 없는, 그리고 지독하게 외로운 생활로 돌아와 있었다.케냐에서 부딪힌 문제들은 정확한 해답이 없는 듯한 경우가 많았다. 혹은, ‘옳은’ 해답 같아 보이는 것에 도달하더라도 여전히 마음이 편치 못했다.
내가 이 사건에서 취한 일 단계 조치를 두고 그렇게 부끄러움을 느꼈던 한 가지 이유는 그것이 내가 늘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그 수많은 관계들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권한(가장 명백한 예를 들자면, 누군가를 고용하고 해고할 수 있는 힘)과 벤자민의 처지는 너무나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에게는 그러한 힘이 거의 전무했으니까. 벤자민이 그 돈을 훔친 범인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나는 그가 의심받을 때 그의 편에서 해석해주지 않았다(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해주지 않았고 결국 그들에게 피해를 끼치고 말았다). 그리고 벤자민을 해고하고 그의 집을 샅샅이 뒤진 것과 같은 나의 권한을 행사하는 방식에도 분명히 잘못이 있었다. 이 점을 나는 그 당시에도 감지하고 있었으나 분노가 앞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로도 줄곧 내가 과연 벤자민을 올바로 대하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케냐인들과 난민들, 외국인 거주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나를 나무랐다. 내가 벤자민에게 계속‘동냥’을 줌으로써 그를 더욱 의존적으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대안에 따를 경우, 다시 말해서 그에게 돈을 주지 않을 경우, 그를 더욱 비참한 상황으로 몰아넣을 것이 뻔했다. 일자리는 전혀 없었다. 그에게는 기술도 없었다. 게다가 케냐는 ‘극빈 계층 구제책’이니, 사회보장제도니, 국민 의료 보장제도[모두 미국에서 실시하고 있는 제도임--역주]니 하는 것이 전무한 나라였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력으로 살아야 했다. 또 하나 내가 느낀 감정은, 내가 나서서 일종의 용서를, 보상을 해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확실한 해답은 없고 상충되는 충고들만 난무하는 상황에서 나는 나 자신의 직관과 가장 신앙인다운 대응이라고 판단되는 것들에 매달렸다. 그리하여 인과응보식 ‘정의’개념으로 원한과 보복의 사이클-내가 볼 때, 르완다나 소말리아 사태, 케냐의 민족 간 영토 분쟁들에서 끊임 없이 반복되는-을 영속시키는 것보다는 용서와 화해의 개념이 더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가 내 의문에 대한 대답의 일종으로 생각하고 더욱더 기도에 매달리게 된 것도 바로 이 같은 괴로운 사건들, 손쉬운 해답이 없어 보이는 사건들 때문이었다. 물론 나는 예수회 수사로서 다년간 규칙적으로 기도해 왔다. 하루 한 시간(미사 외에)으로 못 박아 놓기는 했지만 수련 과정에 있는 수사에게는 다소 버거운 목표였다. 그러나 매일의 기도 시간을 완벽하게 지키지는 못했어도 밤마다 ‘성찰’ 기도를 바쳤다. 성 이냐시오 로욜라가 시작한 이 짧은 기도 형식은 하루를 돌아보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은 다섯 개 단계로 나뉘어진다. 첫째, 하느님께 나와 함께해주시기를 청한다. 둘째, 그날 하루 있었던 좋은 일들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 친구와의 대화, 사업을 잘하고 있는 난민, 맛있게 먹은 망고, 지나가다 맡은 치자 향기, 하늘 높이 떠 있는 태양 등 그 어떤 내용이든 상관없다. 셋째, 하루를 되돌아본다. 그날 하루 있었던 일들 가운데 어떤 일에서 하느님께서 작용하심을 느꼈는지, 어떤 일에서 느끼지 못했는지를 생각해 본다. (나는 이 단계를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으로 생각했다.) 넷째, 좋은 일 궂은일을 떠나 내가‘죄지은’것이 있는지, 혹은 하느님의 은총을 의식적으로 외면한 적이 있는지, 깨우쳐 주십사 청한다. 마지막으로 다음 날에도 도와주십사 하느님의 은총을 청한다. 내게 있어 ‘성찰’은 하느님의 현존-곰곰히 되돌아보지 않으면 놓쳐 버리기 쉬운-을 자각하게 해주는 놀라우리만치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이번 해고 사건 때도 그랬다. 사람들을 해고시킨 후 내 영혼이 여전히 불안하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더 중요한 것이지만 내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마침내 깨닫게 된 것은 바로 기도를 통해서였다. 케냐에서 살아가는 동안 내 기도도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감지하기 힘들지만 분명한 변화였다. 처음에는 나의 외로움과 친구들 및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 다음에는, 병에 걸려 드러누우면서, 내가 이곳을 떠나야 하는지 남아야 하는지를 판단하고자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이른바 ‘향심 기도’에 완전히 빠지게 되었다. 선불교와 기타 동양의 전통에 영향을 받은 이 기도법은 간단한 호흡법을 통해 정신을 ‘집중시켜’ 하느님께 온전히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나의 기도는 대부분 일과 관련된 내용으로 채워졌다. 점점 더 많은 난민들의 얼굴이 내 기도의 초점이 되면서, 그들과 더불어 일하고 그들의 필요에 답해주는 최선의 방법을 하느님께 구하고자 애썼다. 그러나 이것이 곧, 내가 옳은 일을 행하리라는 보증서는 결코 아니었다. - 21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