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제임스 마틴이 선교사로서 동아프리카 난민들과 함께 생활한 이야기를 담았다. 전쟁의 세기가 양산한 무수한 아프리카 난민들, 그들을 돕고자 파견된 선교사. 너무 진지하고 근본적인 주제들이어서 자칫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수회 난민 봉사회의 활동을 중심으로 동아프리카 난민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진솔하고 수채화처럼 생생한지 책장을 넘기다 보면 저자와 난민들과 내가 어느새 하나가 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일화에 등장하는 난민 하나하나가 마치 내 이웃들처럼 느껴지면서, 그들의 걱정거리가 내 걱정이 되고 그들의 웃음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게 된다. 그들이 울면서 지나온 내력을 풀어 놓을 때는 가슴 뭉클한 깊은 공감에 휩싸이게 된다.

지은이/제임스 마틴ㆍ옮긴이/송은경ㆍ펴낸이/정진석ㆍ펴낸곳/가톨릭출판사

친애하는 오라버니
도와주려 하시니 감사합니다. 저는 제가 책임지고 있는 43명의 사람들을 버리느니 차라리 죽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갈 수 있도록 부디 기도해주세요. 늙으신 우리 어머니와 동생에게 ‘작별 인사’를 전해주세요. 제가 하느님께로 가게 되면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부디 잘 지내세요. 저를 생각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우리의 바람대로 우리를 구해주신다면 내일이면 우리가 서로 만나겠지요.                                          - 당신의 여동생, 펠리시테 니이테게카 올림 -

 
펠리시테와 동료 수녀들은 국경을 넘으려는 난민들을 계속 도와줌으로써 수십 명의 인명을 구했다. 4월 21일, ‘성 베드로 센터’에 도착한 군 병력은 남아 있던 투치족은 물론 펠리시테와 수녀들까지 모두 끌어내어, 미리 준비해 둔 집단 무덤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20명 이상의 난민과 수녀 6명을 총살하고 펠리시테를 마지막 차례로 남겨 두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내 자매들을 모두 죽였으니 나는 더 이상 살 이유가 없다.” 그러나 살해된 사제나 수녀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또 다른 소문들이 나돌았고 며칠 후면 그 소문은 사실로 밝혀지곤 했다. 그것은 바로 본인이 직접 살상 행위를 했거나 ‘대학살’에 협조하는 행위를 한 르완다의 사제나 수녀들의 이야기였다. 여러 차례 지적되었듯 르완다는 본래 아프리카에서 가톨릭 신자가 가장 많은 나라이다. 하루는 내가 공항에서 벨기에인 사제를 한 사람 만나게 되었는데, 르완다에서 작은 선교회 본당을 맡아 24년을 일해 온 사제였다. 우리가 나무 벤치에 앉아 있는 동안 개똥지빠귀 알처럼 푸르스름한 헬멧을 착용한 유엔군 병사 수십 명이 어지럽게 주위를 돌고 있었다. 그는 대학살 기간에도 사목하던 마을에서 최대한 버티다가 벨기에군에 의해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는 내게 자신이 맡았던 본당에서 작은 그리스도 공동체의 리더로 일했던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사람은 수석 ‘교리교사’, 다시 말해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 교리를 가르치는 책임을 맡고 있던 평신도였다. 그런데 이 교리교사가 주도하여 자기 마을 사람들을 살해했다. 공동체에서 리더 역할을 맡아 온 덕분에 누가 후투족이고 누가 투치족인지(제대로 구분하기 힘든 경우가 종종 있었다) 훤히 알고 있었던 그는 대학살에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 동족인 후투족을 이끌고, 자신의 동료 본당 신자들을 ‘판가’로 살육해 버린 것이다. “그 전까지 나는 그 사람을 마을에서 가장 훌륭한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했지요.” 나의 사제 친구가 이렇게 말하고 입을 다물더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연푸른 헬멧들을 서글프게 응시했다. 이윽고 그가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내 인생은 시간 낭비였어요.”

카비나 소코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모든 일이 함께 작용하여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 로마서 8,28

 
당시에는 동아프리카 이외의 지역에서 온 난민들을 보기가 힘들었지만 라이베리아 출신의 난민 카비나 소코르가 어느 날 우리 현관에 나타났을 때 나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난민들이 이따금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하는 얘기들에서 이제 미코노 센터의 존재가 나이로비에 널리 알려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입 소문을 타고 쫙 퍼져 있었다. 하루는 내가 루이제 수녀에게 그런 얘기를 꺼냈다. 그녀가 껄껄 웃더니 말했다. “제가 그랬잖아요, 수사님! 나이로비에 10만 명의 난민이 사는데,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이제 그 사람들이 ‘다’안다니까요.” 카비나는 젊은 사람이었다. 우리와 처음 만난 날, 그는 때 묻은 티셔츠와 빛바랜 재색 바지, 얇은 밑창의 샌들 차림이었다. 그가 들려준 사연은 믿기 힘들었다. 케냐 경찰에게 납치되었다 돌아왔다는 우간다 난민 키이자의 경우와 달리 그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확인시켜줄 동료 난민들이 전혀 없었다. 그 대신 카비나가 내게 보여준 것은, 구겨지고 찢어진 잡지 기사였다. 그가 탈출해 온 후에 라이베리아의 한 잡지가 그의 이야기를 다루었다는 것이다. 카비나의 형님은 라이베리아 정부의 관리로 있었다. 그러다 보니 카비나는 특정 정당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라이베리아가 심각한 정치적 적대 상황으로 접어들었을 때 그의 형님이 경쟁 관계에 있던 당의 당원들에게 납치되고 말았다. 그리고 카비나가 지켜보는 앞에서 자기 당의 다른 당원들과 함께 산 채로 매장되었다. “여길 뜨지 않으면 너도 똑같은 꼴을 당하게 될 거야.”그들이 카비나에게 말했다. 난민들이 다 그러하듯 카비나는 가족과 친구들, 직장과 집을 남겨 두고 라이베리아에서 달아나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라이베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코트디부아르로 가서 ‘정식 신분’의 유엔 난민으로 정착했다. 그러나 일부 라이베리아 난민들과 더불어 몇 달을 지냈을 때 라이베리아 군인들이 그를 찾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조국의 정치적 분쟁이 아직 가라앉지 않아 그가 여전히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음이 분명했다. 친구들은 그에게 라이베리아에서 최대한 멀리 달아나라고 충고했다. 그리하여 그는 코트디부아르를 출발하여, 지나가는 트럭이나 로리(화물차)를 수없이 오르내린 끝에, 자이레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킨샤사로 갔다. ‘로리’는 난민들이 아주 자주 이용하는 운송 수단이
 
다. 아프리카 대륙을 횡단하고자 할 때-걸어가는 방법 외에- 저렴하고 믿을 만한 수단이 몇 안 되는데 ‘로리’가 바로 그중 하나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결국 우간다의 캄팔라에 도착했다. 그러나 우간다에는 라이베리아 사람이 전혀 없었으므로 카비나는 점차 외롭고 서글퍼졌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코트디부아르를 제외한 어떤 나라에서도 유엔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처지란 것을 알게 되었다. 유엔은 난민들이 보다 나은 곳을 찾아 이 나라 저 나라로 떠도는 것을 막기 위해, 첫 망명국에 한해 난민의 지위를 보장하는 증서를 발급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코트디부아르를 제외한 모든 나라에서 ‘기피 인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카비나는 ‘로리’들이 캄팔라와 나이로비를 자유롭게 드나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이것은, 에이즈 바이러스를 동아프리카 전역으로 확산되게끔 만든 주범의 하나이기도 했다. 로리 운전자들이 우간다에서 발생한 이 질병을 옮기고 다녔던 것이다. 어쨌거나 라이베리아에서는 목숨이 위태롭고, 코트디부아르에서는 신변이 불안하고, 캄팔라에서는 비참한 대우에 절망하던 카비나는 마침내 나이로비로 향했다. 거기에는 라이베리아 난민들이 많다는 얘기도 들렸고, 게다가 라이베리아와 그의 형님을 죽인 살인자들에게서 충분히 먼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카비나가 나이로비에서 얻은 것은 더 큰 절망뿐이었다. 알고 보니 라이베리아 난민도 거의 없었을 뿐 아니라, 이 나라에 합법적으로 체류할 처지도 못 되었다. 게다가 돈도 완전히 떨어지고 없었다. 결국 그는 구걸을 하거나, 먹을 것을 찾아 쓰레기 더미 속의 깡통을 뒤지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카비나가 이야기를 끝내고는 충혈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곳에서 난민들에게 사업을 시작할 수 있게 해준다면서요?” 그가 물었다. 그가 더러운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구겨진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오렌지색과 녹색이 섞인 ‘키텐게’바지 차림의 카비나가 어느 콘크리트 바닥에서 붉은 벽에 기대 있는 모습이었다. “이 바지를 제가 만들었어요, 브라더.” 그가 말했다. “그리고 전 아무거나 다 만들 수 있습니다. 재봉틀을 하나 얻을 수 있을까요?” 불행하게도, 유엔 증서를 받지 못한 난민을 후원하는 것은 JRS 헌장이 금하는 사항이었다. 사실 이것은 진정한 난민만을 도울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좋은 규칙이었다. 그러나 카비나의 경우에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진정한 난민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규칙에 불과했다. 그러나 놀라운 우연의 일치인지 하느님의 섭리인지는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나로 말하자면 후자 쪽이라고 굳게 믿었다), 우리는 결국 카비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그 즈음 미코노 센터는 난민들의 정보 센터이자 만남의 장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건물 외벽에 쪽지를 붙여 서로 의견을 주고받고 현관에 놓인 긴 의자에 앉아 소식을 주워듣곤 했다. 도둑도 무섭고 집이 좁아 공간이 없기도 했으므로 우리에게 천, 옷, 조각용 목재, 바구니 만드는 짚 등등, 물건을 들고 와 보관을 요청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루는, 카왕와레에 있는 자택에서 옷도 만들고 수선도 하여 벌이가 괜찮았던 르완다 난민 아델라가 싱거 241N 재봉틀과 무거운 탁자 따위를 모두 챙겨 들고 우리 매장에 나타났다. 기계가 고장이 났나 보다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그녀가 나를 보더니 선 채로 양손을 쭉 내밀었다. “브라더, 제 집이 불타 버렸어요! 도둑들이 모조리 가져가 버리고 이 기계만 달랑 남았어요!” 벤치에 앉아 있던 난민들도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이 아델라가 울음을 터뜨렸다. 집에서 여기까지 5킬로미터쯤 되는 진흙탕 길로 그 무거운 기계를 끌고 온 것이었다. “브라더, 새 거처가 생길 때까지 제 기계를 여기에 좀 맡겨 둘 수 있을까요?” 그 정도 부탁이야 못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힘을 합쳐 그 무거운 재봉틀을 안으로 끌고 갔다. 아델라가 내 손을 잡고 열심히 흔들면서, 기계가 안전해져서 한결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나는 그녀가 새 집을 마련할 때까지, 아니, 기계가 계속 걱정이 된다면 더 오래까지라도 보관해주겠노라고 말했다. “이게 필요한 사람들이 있을지도 몰라요.” 아델라가 나가면서 말했다. “그런 사람들한테 빌려주어도 괜찮아요.” 과연 그런 사람이 있었다. 카비나를 직접 후원할 수 없었던 우리는 그에게 아델라의 재봉틀로 모자를 좀 만들어 보겠느냐고 물었다. 우리에게는 우리 매장에서 제일 잘 나가는 품목 중 하나인 선명한 색상의 납결포 천이 수십 필이나 확보되어 있었다. 이매큘레이트 무라카테테와 에디스 카바가느와라는 듣기 좋은 이름을 가진 부지런한 르완다 여인 두 명이 제작한 천이었다. 나는 카비나를 주 전시실로 데리고 들어가 적당한 천을 함께 골랐다. 그리고 작은 욕실에 넣어두었던 아델라의 재봉틀을 끌어냈다. 그곳에는 자그만 흑단 통나무가 잔뜩 쌓여 있고 큼직한 짚가리도 세 무더기나 들어 있어 욕실이라기보다는 창고라고 하는 게 더 어울렸다. 카비나는 우리 뒷마당 아보카도 나무 아래서 작업에 들어갔다. 몇 시간 후 그가 내게 납결포로 만들어진 ‘코피아(모자)’세 개를 들고 왔다. 꽤 잘 만들어진 물건이었으므로 나는 그에게 2백 실링을 지불했다. 그로서는 정말 여러 주 만에 처음 생기는 수입이었다. 그 후 카비나는 매일 우리를 찾아와 천을 고르고 아델라의 기계로 바느질을 했다. 몇 주가 지나자 그는 자그만 집을 세낼 수 있는 돈을 모았다. 몇 달 후에는 자기 돈으로 기계를 구입하여 자잘한 옷가지를 만들어 이웃들에게 내다 파는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27. 나의 형제
만약 당신이 하느님을 항상 똑같은 방식으로만 생각한다면, 그것이 제아무리 진실 되고 아름다운 생각일지라도, 하느님이 당신을 위해 준비해 둔 새로운 방식의 선물을 결코 받을 수 없을 것이다.
  - 예수회 회원 카를로스 발레스(Carlos Valles),    『하느님 그리기 Sketches of God』

2년이 지나자 나는 고국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고 우리 예수회 장상들의 생각도 그러했다. 비록 지금 하는 일이 좋기는 했지만 (그리고 갑작스레 쓰러지셨던 아버지도 이제는 몸이 회복되어 있었다.) 당초 약속된 기간이 만료되었고 하니 이때 떠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늘 2년 동안만 함께

 
일할 것이라고 말해 왔지만 난민들에게도 익숙해질 시간을 좀 주고 싶었다. 그러잖아도 이별과 짧은 우정, 일시적인 것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아닌가. 그리하여 나는 출발하기 몇 달 전에 미코노 센터의 창에 쪽지를 붙여 놓았다. 영어, 스와힐리어, 프랑스어, 암하릭어, 루간다어, 키냐르완다어로 적은 그 글에서 내가 미국에서 사제 서품을 받기 위한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떠나야 한다는 것과 내가 간 후에도 그들과 그들의 사업에 대한 JRS의 후원은 계속될 것이라고 그들을 안심시켰다. 창에 쪽지가 붙여지자 난민들은 행운을 빌어주면서 나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편지를 써 오거나 선물을 들고 오는 사람도 있고, 작별 인사와 함께 축복을 받게 해주려고 아이들과 부모를 데리고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응들이었으므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 JRS 동료들은 작별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했다. 미코노 센터 뒷마당에서 지난 번 크리스마스 파티 비슷하게 해보자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컵이 나오나요, 브라더?” 누군가가 물었다. 떠난다고 생각하니 평소에도 늘 생각했던 과제가 하나 떠올랐다. 나는 미하엘과 내가 해고시킨 마리 부그위자 및 벤자민과 꼭 화해를 하고 싶었다. 에티오피아 난민인 베레헤의 경우는, 그 무렵 이미 노르웨이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있었다. 그동안 시간이 흘렀지만  내가 취한 행동에 대한 후회만 커져 갔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어느 날 마리 부그위자와 마주앉게 되었다. 나는 그녀에게 심적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마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말을 가로막았다. “당신에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브라더.” 그리고는, 이제는 슬퍼하지 않는다, 새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데 대해 감사한다고 말했다. 벤자민은 여전히 가난했고 일자리도 찾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의 만남은 더한층 힘들었다. 나는 그에게, 정말 미안하다, 당신이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당신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게는 냉정한 위로로 들렸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가 내 마음을 이해해주기를, 내가 늘 그에게 올바르다고 생각되는 쪽으로 해 보려고 노력해 왔음을 알아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과연 그것으로 족할까? 쪽지를 붙이고 며칠이 지났을 때, 카비나 소코르가 나를 만나려고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미하엘이 전해주었다. 난민들과 면담하는 장소인 나의 작은 사무실로 그가 들어섰는데 얼굴이 눈물로 젖어 있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아프리카 남자들이 본래 남들 앞에서 눈물을 잘 보이지 않는데다가, 카비나가 힘든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를 ‘강인한’ 사람으로 여겼었다. 나는 사무실 문을 닫았다. 그가 자리에 앉더니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훔쳤다. 나는 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떠나신다면서요.” 그가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내가 떠난 후의 상황을 염려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재빨리 그를 안심시키고, 미하엘 수사가 변함없이 여기에 남아 일할 것이며 미코노 센터도 계속 그를 도와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머리가 더 수그러들었다. “아니에요, 브라더. 당신은 이해 못해요.”그 말에 나는 재차 안심시키려 애썼다. “당신이 비록 힘든 상황을 겪어 왔지만 앞으로는 이곳 사람들이 돌봐줄 겁니다. 게다가 이미 많은 것을 이루었잖아요. 집도 생겼고 당신의 사업도 생겼고. 계속 발전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어요.” “여전히 이해하지 못 하시는군요, 브라더.” 그는 이렇게 말하고 고개를 떨구더니 눈을 감았다. 그의 자켓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잠시 후 카비나가 손을 뻗어 내 팔을 잡았다. 우리는 쿠션이 깔린 나직한 나무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가 얼룩진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나의 형제입니다.” 그가 말했다. 그 순간 나는 비로소 이해했다. 그 얘기가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와 닿았다. 예수께서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라고 말씀하신 것이나,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라는 얘기나, ‘어떤 인간도 혼자일 수 없다’는 따위의 얘기는 그전에도 물론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 순간 이전까지 나는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나는 카비나의 형제다, 따라서 그는 나의 형제다, 내게는 그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를 도와주고 그의 친구로 남아야 한다. 둘이 함께한 시간과 서로에 대한 관심 덕분에 우리는 진정한 형제가 되어 있었다. 이제 내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맞아요. 그리고 당신은 나의 형제이고.”

28. “언제 다시 오나요? 브라더?”
그들을 바라보며 서 있자니 예전에 나를 사로잡았던 이미지가 다시 떠올랐다. 지금 떠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아프리카를 떠나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다-마치 썰물 든 바다처럼 서서히 장중하게 내게서 멀어져 가는 이 산하이다.    
                     - 아이작 디네센((Isak Dinesen),  『아웃 오브 아프리카 Out of Africa』 중에서

 
작별 파티의 날인 4월 15일은 짙푸른 케냐의 하늘에서 찬란한 빛을 발하는 태양과 함께 시작되었다. 미하엘이 미코노 센터에서 일하는 버지니아, 패트리샤와 함께 준비를 해 왔다. 독일에 갔다가 남편 위르겐과 함께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우타가 루이제 수녀와 오이겐 신부를 모시고 일찌감치 도착했다. ‘노동자 성 요셉’ 성당에서 일하는 존 귀니와 직원들, 매들린 수녀와 ‘화이트회’ 수녀들, 우리 공동체의 여러 예수회 형제들, 그리고 나의 미국인 친구들이 모두 모였다. 많은 난민들이 깔개, 바구니, 나무를 깎아 만든 동물들, 셔츠, 천, 납결포 등 그들이 직접 만든 선물을 들고 왔다. 물론 내가 수없이 봐왔던 물품들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모두 특별하게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탁자보와 냅킨을 제작하는 우간다 여인 사라 나카테가 가져온 선물은 미국과 아프리카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했다. “당신에겐 조국이 둘이잖아요, 브라더.” 식탁보의 긴 쪽에는 개코원숭이들이, 짧은 쪽에는 머리에 깃털을 꽂고 말에 걸터앉아 있는 미국 원주민의 모습이 수놓아져 있었다. 아프리카와 미국. 마마 므지는 내게 붉은색과 녹색의 바구니를 선물하면서 엄숙하게 말했다. “아프리카의 어머니가 미국의 어머니께 드리는 거예요.” ‘엔가비레 빵집’에서 구운 케이크와 오렌지 환타, ‘블루 나일’ 식당에서 준비해 온 에티오피아 음식들이 차려졌다. 파티는 동아프리카식으로 진행되었다. 여러 난민들이 나와 공식 연설을 하고, 노래 부르고, 또 연설하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마지막으로 또 연설이 이어졌다. 가우디 루자게, 케드레스 칸자이레, 조세 무카가가, 스페시 칸테그와, 마리 부그위자, 그리고 수십 명의 르완다 여인들이 ‘키텐게’ 예복 치마로 차려입고 풀밭에 서서, 르완다의 특별한 ‘작별가’를 불러주었다. 최근 르완다에서 벌어진 대량 학살을 생각하니 그들의 노래가 더더욱 마음에 사무쳤다. 저 사람들이 나보다 훨씬 더 깊은 관계였던 사람들
 
과 작별 인사를 나눌 기회조차 갖지 못한 게 대체 몇 번이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날이 저물 즈음 나는 영어와 스와힐리어로 잠깐 연설하면서, 모두에게 감사를 표하고 그들을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두고 모두들 ‘바라카(축복)’라고 말했다. 이윽고 사람들이 모두 떠나 버리자 나는 슬픔에 잠겼다. “언제 다시 오시나요, 브라더?” 우간다인, 르완다인, 에티오피아인, 에리트레아[아프리카 동북부에 있는 에티오피아의 자치령-역주]인, 수단인, 모잠비크인, 케냐인, 모든 난민들이 묻고 또 물었다.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조만간 곧 돌아오고 싶다고 대답하면서도 말하기가 정말 힘들었다. 가우디는 내게 꼭 돌아온다고 약속하게 만들었다. 앨리스 나브위레는 나를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겠노라고 했고, 카비나 소코르는 예수회 관구장의 이름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이 다음에 관구장에게 편지를 써서 내가 돌아오는지 확인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포옹하고, 절하고, 악수를 나눈 뒤 마침내 돌아갔다. 환타 병과 종이 냅킨에 싼 케이크 조각을 움켜쥐고, 빗방울을 피해 가며, 나이로비의 빈민 지역에 있는 각자의 집을 향해. 그들이 준 선물을 모아 지프에 싣고 난 후 쪽빛 하늘에 무지개가 펼쳐진 것이 보였다. 나는 그것을 징조로 받아들였다. 무슨 징조인지는 정확히 모른다. 난민들을 보살피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이었을까? 혹은 난민들에 대한, 그리고 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표시였을까? 얘기의 결말이 너무 완벽하고 깔끔해서 케냐에서 보낸 나의 시간이 전혀 사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민들이 내 입장이었다면 틀림없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럼요, 브라더. 제 얘기는 ‘절대로’ 꾸며 낸 게 아닙니다.”

29. 겨자씨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사람을 구박하거나 학대하지 말아라.
너희도 에집트 땅에서 몸붙여 살지 않았느냐?                   - 출애굽기 22,20

내가 미국으로 돌아오고 몇 주 후, 르완다의 끔찍한 대량학살 소식이 언론의 주요 관심사로 대두하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새로운 화면과 새로운 살육 소식이 들어왔고 세계 각국의 도움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더욱 커졌다. 어느 날 텔레비전을 보고 있자니, 자이레 국경 너머에 있는 투치족 난민 캠프가 나왔다. 담요 밑에 웅크리고 있는 가냘픈 르완다 소년의 스쳐 가는 눈길이 내 눈에 잡혔다. 여러 가지 색으로 염색한 천 조각들로 만들어진 그 담요는 나이로비의 어느 시장에서나 볼 수 있는 싸구려 물건이었다. 지난날 나이로비의 내 침대에도 그런 담요가 깔려 있었다. 기묘한 순간이었다. 갑자기 그 소년에게 깊은 애착이 느껴지면서 이렇게 서로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저미는 아픔으로 다가왔다. - 25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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