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 시작된 우크라이나 사태가 수개월째 이어져 오는 가운데 ‘우크라이나 리스크’가 한국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으로 ‘新냉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미ㆍ러가 격하게 대립하면서 직ㆍ간접적 이해당사국인 우리 정부도 적절한 행동방향과 좌표 설정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정부는 지난 3월 19일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을 인정할 수 없다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미국과 공동보조를 취했지만 우크라이나 사태 악화에 따라 국제적인 대러시아 제재에 나서게 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크림자치공화국은 우크라니아를 버리고 러시아를 선택했다.
흑해를 끼고 있는 크림반도는 북쪽 대륙세력이 지중해를 통해 바다로 진출하는 요지다. 흑해에서 이스탄불이 접한 보스포러스 해협을 빠져나가면 마르마라해가 나오고 그곳을 지나면 서쪽으로 에게해, 지중해로 이어진다. 크림반도는 대륙에서 유럽 문명이 태어난 곳이자 유럽 각국의 해양 교류의 중심인 이 바다로 가는 출발점 같은 곳이다. 크림반도를 차지하기 위한 강대국들의 충돌이 적지 않았던 것은 이 지역이 가진 지정학적 이점 때문이다. 근현대사 속에서 크림반도에 대한 욕망을 끊임없이 드러냈던 대표적인 국가가 러시아다. 수세기 동안 동아시아에서 서유럽으로 이어지는 대제국을 건설하려던 러시아로서는 유럽 진출의 발판이라는 크림반도의 전략적 이점을 포기할 수 없었다. 게다가 크림반도를 안고 있는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근원인 슬라브 국가가 태동한 곳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사태를 호기로 삼아 크림반도를 장악한 데에는 이런 정치ㆍ군사적인 배경이 깔려 있다.
피로 물든 마이단 광장
지난 2월 20일 목요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 마이단 광장의 아침은 총성과 함께 시작됐다. 경찰 특공대가 시위대에게 총을 발사한 것이다. 무방비 상태의 시위대는 오토바이 헬멧, 공사장 안전모 등을 눌러쓰고 나무판자나 철판으로 몸을 가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저격수들은 사위대의 가슴과 머리를 정조준한 뒤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이날 시위를 벌이던 세바스찬 씨(27세)는 “저격수들은 마치 컴퓨터 게임을 하듯 한 사람씩 공격했다”고 말했다. 마이단 광장 인근의 미디오 호텔 로비는 비상 응급실로 변했다. 이곳에서 시위대를 치료한 의사 줄리아 씨(32세)는“대부분이 총상을 입었다. 시위대의 몸에서 총알을 빼내는 조치를 거듭했다”고 밝혔다. 로비 한 구석에서는 정교회 사제들이 죽어가는 시위대에게 병자 성사를 하고 있었다. 이름을 밝히길 거부한 한 사제는 “서너 명의 사제가 죽어가는 신도들을 위로하고 아식에 들게 하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고 말했다. 총격이 가신 오후에는 시위대의 시신들이 거리에 흩어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 유족은 물론 오가는 사람들도 애통해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날 총격으로 무려 100여 명이 사망하고 500여 명이 부상당했다. 미국 CNN은 “시위대 측 의료진이 100명 이상 살해당했다고 밝히는 등 지난 3개월 동안 우크라이나 소요 사태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라고 보도했다. 이상은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벌어진 살육전의 간단한 정황이다. 이번 살육전에 이르기까지 3개월 동안 진행된 우크라이나
사태는 결국 ‘유럽연합(EU)으로 갈 것인가, 러시아 세력권 안에 남을 것인가’를 둘러싼 문제였다. 우크라이나는 지난 몇 년 동안 EU와 ‘협력 협정’에 대한 협상을 벌여왔다. ‘EU와의 자유무역지대 구성’등이 주요 의제였다. 이 협정 체결은 우크라이나가 그만큼 EU 세력권에 가까워진다는 다는 것을 의미했다. 러시아는 당연히 반발했다. 결국 지난해 11월 말 우크라이나 정부가 EU와의 협상을 잠정 중단한다고 선언하자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시작됐다. 야당과 상당수 시민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세력권에서 벗어나 서구화ㆍ유럽화되기를 오랫동안 갈망해왔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방송국 UBR의 한 기자는 반정부 시위에 대해 ‘희망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단지 ‘유럽인’이 되고 싶다는 로망이 틀어지는 바람에 시위한 것은 아니다. EU와의 협정에 따라 만성적인 부정부패와 실업, 빈곤 등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가 나올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지만 그 희망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라고 피력했다.
시위 확산 그 결과는…
▲ 빅토르야누코비치 우크라이나 대통령
시민들은 빅토르 야누코비치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압박하며 시위를 이어갔다. 우크라이나 정부와 여당이 집회ㆍ시위 규제법까지 통과시키며 대응하려 했으나, 헛수고였다. 결국 정부가 시위대와 협상에 나서면서 정국은 안정 국면에 들어가는 듯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2월 20일의 살육전이 벌어진 것이다. 이는 ‘대통령 권한 축소’등 시위대와의 협상안에 부담을 느낀 야누코비치가 돌변해 ‘저격수 투입’이라는 무리수를 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살육전은 우크라이나 정국의 판도를 뒤집어버렸다. 사건이 일어난 지 하루 만인 2월 21일 야누코비치는 수도 키예프를 버리고 도망갔다. 결국 우크라이나 최고 의회인 ‘라다’의 의장이 알렉산드르 투르치노프로 교체됐다. 그는 ‘오렌지 혁명’의 주역인 율리야 티모셴코(오렌지 혁명을 주도한 야권 지도자로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총리를 지냈으나 2010년 야누코비치 집권 이후 수감)와 함께 조국당을 창당한 인물이다. 투르치노프는 티모셴코 총리 집권 2기인 2007~2010년에는 부총리를 지내기도 했다. 신임 라다 의장이 된 투르치노프는 먼저 ‘라다’가 유일한 합법 권력기구임을 선언했다. 또한‘라다’에서 표결로 야누코비치에 대한 탄핵ㆍ해임안을 통과시킨 후 5월 25일 조기대선실시를 선언했다. 야누코비치가 감옥에 가둔 티모셴코를 석방했으며 ‘2004년 헌법’을 복원하기로 결의했다. 2004년 헌법의 골자는, 대통령 권한을 총리와 의회에 대폭 나누는 이원집정부제다. 이는 우크라이나가 야누코비치 독재로부터 오렌지 혁명(2004년) 당시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오렌지 혁명은 2004년 11~12월,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집단행동으로 독재정권의 장기집권 음모를 저지한 사건이다. 이번에 쫓겨난 야누코비치 당시 총리는 2004년 대선에서도 부정한 방법으로 야당 후보 빅토르 유셴코를 눌렀다. 그러나 부정선거 의혹이 불거지면서 우크라이나 시민들은 대대적인 항의시위를 벌였다. 이에 따라 2005년 1월 대선을 다시 치러 야당 후보인 유셴코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결국 이번 일로 야누코비치는 2004년에 이어 두 차례나 시민혁명으로 권좌에서 쫓겨나는 기록을 세웠다. 한때 행방이 오리무중이었던 야누코비치는 2월 28일 러시아 남부도시 로스토프나도누의 전시장 ‘베르톨 엑스포’에 모습을 드러냈다. 기자회견에는 기자 200여 명이 몰려들었다. 그는 “도네츠크와 크림을 거쳐 러시아로 왔다”고 말했다. 자신은 도피한 것이 아니라 동부 지역에 과격 세력이 집결한다고 해 현지에서 지지 세력을 모아 대응 조치를 취하려 했을 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법에 따른 대통령’은 자신뿐이고 안전이 보장되면 귀국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우크라이나 최고 의회 라다는 야누코비치에 대해 국제 수배령을 발동했으며, 그를 포함한 전임 정권의 실세들은 시위대 대량살상 혐의 등으로 형사 기소했다. 사실상 근위대로서 시위대 진압을 주도한 경찰 특수부대 베르쿠트는 이미 해체됐다. 이렇게 야누코비치의 세상은 시민들의 힘으로 막을 내렸다.
경제 위기 상황 국민의 피로 권력을 획득한 야권이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은 경제 상황이다. 키예프 시내에서 인쇄업을 하
는 로보비치 씨(47세)는 “10년 전만 해도 먹고 사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키예프 시민들은 그야말로 하루 벌어 하루 먹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당초 반(反)야누코비치 시위의 원인 역시 EU와의 관계 개선으로라도 빈곤 문제를 풀고 싶어 했던 시민들의 욕망이었다. 차기 총리 후보 중 하나인 야권 인사 야체뉵은 우크라이나 경제가 이미 파산 상태나 다름없다는 것을 솔직하게 토로한 바 있다. “국고가 비었다. 정부 부채가 750억 달러(약 80조625억원)에 달한다. 그래서 이미 한 달 이상 연금을 지급하지 못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우크라이나가 외국에 진 빚도 무려 1,300억 달러 규모다. 하지만 외환보유는 약탈당한 상태다”라며 “(야누코비치 실각 이후 구성된) 과도 내각의 운명은 정치적 ‘가미카제’(자살특공대)나 마찬가지다”라고 고백했다. 우크라이나는 당시 미국과 유럽에 구제금융 350억 달러를 요청한 상태였다. 그러나 국고가 바닥난 상황에서 구제금융이 경제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우크라이나 새 정권의 앞날 역시 매우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결국, 러시아에 귀속 크림자치공화국은 결국 우크라이나를 버리고 러시아를 선택했다. 크림반도 주민투표에서 97%가 러시아 연방의 일원이 되길 원했다. 말 그대로 압도적 지지이다. 투표율도 높았다. 유권자의 83%가 투표에 참여해 지난 2012년 총선 때의 2배 가까운 투표율을 기록했다. 높은 투표율과 기록적인 지지율, 현장에서 만난 주민들의 마음을 읽어봤다. 가장 큰 요인은 역시 민족적 배경이며, 크림 주민 가운데 러시아계가 60%이다. 그들에게 러시아는 집이고 고향이고 모국이었다. 출구조사가 발표된 이후 세르게이 악쇼노프 크림 자치정부 총리의 일성은 “우리는 집으로 간다”였다. 수도 심페로폴 레닌광장에서 펼쳐진 축하 무대에서 만난 러시아계 주민들도 한결같이 답했다. 마리나 씨는 “우리는 집으로 돌아간다. 당신이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행복하다”고 기뻐했다. 사실 크림반도는 1992년 독립을 추진했다. 크림 의회는 소련 붕괴 이후인 1992년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한다는 내용의 개헌안을 채택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중앙정부가 반대하자 자치 공화국으로 머물기로 타협했지만 23년이 흐른 것이다. 알렉산드르 씨는 “23년 동안 이 일을 기다려왔다. 이제 집에 돌아간다. 이제 자유롭게 러시아어를 말할 수 있게 됐다”고 좋아했다. 러시아계가 전부 투표장에 나왔다고 가정하면, 나머지 23%는 다른 민족이 투표한 것이다. 주민의 13%를 차지하는 타타르계는 투표 불참을 선언했다. 두 번째 민족인 우크라이나계가 움직였다는 말이다. 우크라이나계는 인구의 24%를 차지한다. 당초 우크라이나계는 러시아 귀속에 반대한다고 알려졌다. 투표 전날에도 세브첸코 공원 앞에서 주민투표 반대 시위를 벌였다. 그 곳에서 만난 우크라이나계 주민은 “러시아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강요하면 우리는 유럽에 군사적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며 강력히 반발했다. 그 이유는 “키예프에서 시위를 벌여 더 큰 자유를 얻었는데 동정심 없는 푸틴 치하의 러시아로 갈 수 없다”고 반대했다. 러시아 귀속에 반대하던 이들을 투표소로 이끈 요인은 바로 경제적 기대감 때문이다. 크림 정부는 시내 여기저기에 러시아와 크림반도의 생활수준을 비교하는 포스터를 붙여놓았다. 직장인 한 달 평균 임금, 연금에서 러시아가 크림보다 2~3배 높았다. 휘발유 값도 러시아가 크림보다 절반 가까이 저렴했다. 크림이 러시아로 합류하면 소득은 높아지고 생활비는 적게 들 것이라는 홍보 전략이다. 악쇼노프 총리는 투표 참여를 독려하면서 크림이 러시아로 들어가면 생활수준이 높아진다고 약속했다. 발레리 씨는 “우크라이나가 해 준 게 뭐가 있느냐”며 “부자 나라 러시아가 이제 도움을 줄 것이다”고 말했고, 타치야마 씨도 “크림은 흑해의 진주인데 아무도 보살피지 않았다”면서 “러시아가 크림을 두 번째 소치로 만들어 주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마지막 요인은 평화이다. 크림 주민들 가운데는 우크라이나도 러시아도 아닌 제3지대에 남기를 바라는 세력이 있다. 독립은 하되 평등한 국제관계를 갖고 싶다는 바람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크림이 홀로 서기에는 정치 경제적으로 힘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최선이 아닌 차선을 선택해야 한다면 바람에 흔들리는 우크라이나보다는 힘 있는 러시아가 낫다는 판단이다. 크림이 강대국 간 싸움터가 됐는데 군사강국인 러시아에 붙으면 방패막이는 돼주지 않겠냐는 것이다. 적어도 전쟁은 피할 수 있다는 논리다. 인나 씨는 “우크라이나에서는 나쁜 일만 생겼는데, 러시아 덕분에 평화가 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다양한 이유로 크림 주민들은 러시아로 옮겨 갔다. 주민들은 러시아든 크림이든 정치인들이 한 약속이 지켜지길 바라고 있다. 러시아가 가져다 줄 크고 작은 선물도 기대하고 있다. 정작 보따리를 풀어야 할 러시아가 그럴 의도와 여력이 있는지는 확인해 보지 않은 채 말이다.
합병 후에도 끊이지 않는 문제들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절차가 마무리되자 다른 러시아 접경지역 주변 도시들이 들썩였다. 자치권 확대에서 분리 독립, 러시아 귀속까지 요구하는 시위가 곳곳에서 이어지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추가 도발에 대비했다. 우크라이나 동부 중심도시 도네츠크에서 이틀째 친러시아 주민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주민
들은 시 청사 건물로 행진하며 우크라이나에서 독립해 러시아로 귀속하기 위한 주민투표를 실시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도네츠크 주민은 “러시아와 크림, 벨로루시가 우리 형제국이다. 푸틴 대통령이 우리를 도와주길 호소한다”고 말했다. 하리코프와 루간스크 등 다른 동남부 도시에서도 연방제 확대와 러시아 귀속 등을 요구하는 집회가 잇따랐다. 반면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에서는 우크라이나의 통합을 지지하고 러시아를 규탄하는 집회가 열렸다. 과도정부 인사들은 국제사회가 우크라이나 정부를 지지하고 있으며, 결국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승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크라이나 안보위 서기인 안드리 파루비는 “서방세계가 푸틴 대통령에게 중단하라고 요구했고 우리는 ‘독립광장’에서처럼 승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도네츠크 등 동부 지역 상황에 대한 우려가 커지자 유엔도 특사를 현지에 파견해 상황 파악에 나섰다. 우크라이나 정부도 긴급회의를 소집해 대책을 점검했다. 우크라이나는 특히 소요 사태가 확산될 경우 러시아가 군사개입을 확대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군사 대비태세를 강화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총리 아르세니 야체뉵은 “군 병력 모집을 즉시 마무리해 우리 병사들이 완전한 복무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며 “핵안보정상회의 참석도 포기하고 우크라이나 경제와 안보 문제 해결에 주력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의 토니 블링큰 백악관 국가안보 담당 부보좌관은 러시아군 수천 명이 우크라이나 동부 국경에 집결해 우크라이나를 위협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러시아의 마음을 돌려 침략하지 않도록 할 가능성이 매우 적다”고 우려했다고 AP통신이 3월 23일 보도했다.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외무장관도 이날 언론 인터뷰에서 “러시아가 냉전 종식 25년 만에 유럽에서 인정된 국경선을 불법으로 바꾸려고 한다”며 “이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만큼 위험천만한 행위”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필립 브리드러브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령관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동부 국경의 러시아군은 이미 전투태세가 확고한 상태다. 브리드로브는 “우크라이나와의 접경 지역에 배치된 러시아군은 대단히 규모가 크고 잘 준비돼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러시아의 트란스니스트리아(1990년 몰도바에서 분리ㆍ독립을 선언한 친러 성향의 자치공화국) 병합 가능성을 경고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에서도 우려가 크다. 안드리 파루비 국가안보ㆍ국방위원회 위원장은 “푸틴의 목표는 크림반도가 아니라 우크라이나 전체”라며 “이 때문에 지난주보다 사태가 한층 더 위험해졌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미국 의회 야권에서는 버락 오바마 정부가 러시아군의 위협에 맞서 우크라이나에 소형 무기와 의료품 등을 지원해야 한다는 촉구가 나왔다. 공화당 지도부의 마이크 로저스 하원 정보위원장은 3월 23일 NBC 방송의 ‘밋더프레스’프로그램에 출연해 “우크라이나가 자국을 지키도록 소형 무기, 의료품, 무선장비, 방어태세 무기체제(defensive-posture weapon systems) 등을 지원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우크라이나 동부는 전통적인 친(親)러시아 지역으로 이곳은 현재 크림반도 때처럼 러시아로의 편입이나 자치권 확대를 주장하는 주민 집회가 잇따르고 있다. 러시아로의 병합이 확정된 크림반도의 세르게이 악쇼노프 자치공화국 총리는 “(친러 지역인) 우크라이나 남동부의 미래는 러시아와의 굳건한 결속에 달렸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한편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위원장 후보인 장클로드 융커 전 룩셈부르크 총리는 “EU가 러시아의 또 다른 침공 표적으로 꼽히는 몰도바와의 협력협정 절차를 대거 앞당겨 대(對)러시아 방호벽을 쳐줘야 한다”고 촉구했다. 몰도바는 애초 EU와의 협정을 2015년 체결한 예정이었으나 러시아의 군사 위협이 강해진 만큼 협정 체결을 수주일 내로 시급히 성사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미국과 EU는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합병한 러시아의 군사 팽창주의를 꺾고자 주요 인사에 대해 자산동결과 여행금지 등 제재를 내놨으나,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이 보복 제재에 나서면서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크림자치공화국이 러시아에 합병된 이후에도 풀어야 할 과제들이 많은 가운데 우리나라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도 귀추가 모인다. <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