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온 내 고향 삼천포

‘내 인생의 파도를 넘어’

가족의 소중함을 더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요즘 한국인들의 아름다운 삶과 직업에서 가치 있는 삶을 살아온 명사들을 찾아 그들의 삶과 직업에서 인생의 가치를 찾아보는 기획 연재시리즈 ‘한국인의 삶 인생열전’에서 한국도선사의 선구자 김수금 회장의 ‘내 인생의 파도를 넘어’라는 자서전을 연재한다. 이번 시리즈는 많은 독자에게 삶과 인생에 대해 잔잔한 감동을 줄 것이다.

글쓴이/ 대륙상운 회장 김수금, 대륙상운 창업자 곽명렬

해양대학 교수

 
그러나 아내는 힘든 가운데도 잘 견뎌 주었고 최초의 분가는 둘째 아들인 진동이를 낳고 나서 학교관사로 가기 전 28일간이었다. 따로 살림을 내기는 하였지만 말이 분가지 살림살이 하나 가지고 나오지 못한 채 그야말로 알몸뚱이로 나온 것이다. 설거지통을 엎어놓고 밥상 대신 사용하였으며 다시 그 밥상은 아이들 목욕통으로 사용하면서 우리의 첫 분가는 시작되었다. 학교를 졸업한 후 처음으로 취업한 대한해운공사에서 9년 여간 배를 타고 육상근무도 하던 1961년 아이들과 아내를 위해 배를 내려 해양대학교 교수로 갔다. 해양대학교 교수직을 맡으면서 우리는 해양대학교 관사로 살림을 옮겼다. 교수의 월급 5300원 그것을 처음 받아든 아내는 감격의 눈물과 함께 비로소 시집살이를 면했구나 하는 안도를 하는 것 같았다. 지난 일을 생각하면 크게 마을을 쓰고 싶지는 않았겠지만 아내는 나의 월급에서 얼마를 떼어 시댁에 보내드리고 쥐꼬리만큼 남은 돈
 
으로 생활을 하면서도 시집살이를 하던 때와는 비교가 안 되게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한다. 나라가 가난하고 모두가 살기 어려운 때라 학교인들 재정이 넉넉하지는 못했기에 대학교수라고 하지만 빠듯한 교수 봉급은 늘 가계를 적자로 만들었고 무언가 돌파구를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나의 봉급으로 시댁과 우리 살림을 하기에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고 아이들도 점점 자라면서 들어가는 돈이 많아지자 아내는 생활비를 줄이고 무엇이든 해서 생활비를 보태야겠다며 학교 관사주변의 조그만 공터에 각종 채소를 심기도 하고 남들 보기에 안 좋고 창피하니 그만 두는 게 좋다고 말렸지만 아내는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하지도 않고 거리낌 없이 닭을 키우기도 하면서 어려운 살림을 끌어 나갔다. 관사생활도 아내에서는 일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관사에서 막내 경희를 낳았다.

최초의 실습선 “반도호”
1960년 이승만정권이 무너지고 윤보선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불안전한 시기였다. 말이 해양대학교지 변변한 실습선 하나 없는데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학생들의 장래를 걱정하고 있을 무렵 우여곡절 끝에 우리나라 최초의 무역선 금천호를 해운공사로부터 인수 받을 수 있었다. 원래 화물선으로 건조 된 금천호였지만, 나는 학교의 모든 장비를 빌리고 이곳저곳에 손을 내밀어 대한조선공사에 약 2년간에 걸친 개조 공사를 하여 해양대학교 최초의 실습선을 만들어 냈다. 개조 시 객실의 화재를 겪는 등 어려운 순간도 있었고 많은 것이 부족했지만 해양대학교 최초의 실습선이 만들어졌다. 마치 내 소유의 배가 생긴 것처럼 흥분되고 감격스러웠다. 학생들에게 보다 실제적인 교육을 할 수

  ▲ "울며 헤진 부산항"  영화

있게 된 것은 물론이고 직접 바다에 나가 체험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감격스럽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1960년 12월 14일 졸업생 230명에 대한 해군예비역장교 임관식과 함께 거행된 명명식에서 실습선은 반도호란 이름은 갖게 되었다. 그리고 1962년 12월부터 다음해 2월 17일까지 나는 반도호의 선장으로 약 60여 일간 해양대학 14기생 전원을 데리고 하와이로 처녀항해를 함으로써 선원의 꿈을 이루려는 학생들에게 꿈과 희망을 더하여 주었다. 내 손으로 개조한 배지만 아직은 경험이 적고 최초의 실습선에 타게 된 학생들이 충동적이 될 수도 있어 젊은 학생들을 데리고 가는 길은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지만 오랫동안 함께 해온 학생들을 믿고 하와이로 향하였다. 실습선 반도호가 하와이를 다녀온 후에 학생들이 사오거나 입고 다닌 하와이의 화려한 무늬가 있는 속칭 Aloha shirt로 인해 “노란샤츠의 사나이”란 노래가 전국적으로 유행하기도 하였으며 하와이의 기타음악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반도호는 해양대학교의 실습선이지만 대한민국의 홍보대사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반도호에는 실습을 위해 타고 가는 학생들과 함께 우리나라를 알리기 위한 각종 책과 문화교류를 할 수 있도록 국산영화와 노래 그리고 우리나라 고유의 여러 가지 물건들을 함께 싣고 갔었다. 반도호가 하와이로 실습을 가면서 해양대학교 최초의 실습선으로 간다는 자부심은 물론 이왕 가는 길이면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니 나름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하기로 한 것이다. 특히 지금도 잊지 못할 일중 하나는 하와이로 갈 때 가지고 간 것 중에 영화“성춘향”이 있었는데 영화의 완성도니 예술적 가치니 하는 것은 우리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조국을 떠나 만리타향 낯선 곳 하와이에서 힘겨운 삶을 살고 있던 재외동포들에게는 고국의 냄새를 맡을 수 있고 고국의 영화를 보며 추억에 젖고 감회에 빠진다는 것 자체가 그리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 동포들은 영화의 내용에 도취 되어서 보다는 고국에 대한 향수로 영화 내내 함께 흥분하고 안타까워하며, 또 기뻐하고 환호하면서 마치 암행어사가 출두 할 때는 자신들을 찾아온 고국의 특사들과 함께 있는 것처럼 감격해 하며 눈물바다가 되었던 것이다. 또, 한때는 국가의 원수로서 최고 권력자였던 이승만 박사는 하야 후 하와이로 와서 많은 외로움을 느꼈는지 우리 학생들의 손을 잡고 “이제 나를 데리어왔어?”하며 눈물을 흘려 정치적 관계를 떠나 많은 사람들이 함께 울었다. 그 후에도 반도호는 많은 실습운항을 하다 폐선되었다.

선원들의 해외송출

 
우리나라에서의 해외취업은 1900년을 전후하여 이루어진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으로의 취업이민과 일제에 의한 토지수탈과 농촌의 궁핍으로 인한 대륙으로의 유랑이민이나 일본으로의 취업, 또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징용에 의한 강제송출 이었을 뿐이고 현대적 의미에서의 해외취업은 1963년 12월에 체결된 한ㆍ독 양국 정부간의 “서독파견 한국광부 임시고용계획(각서)”에 의해 247명의 광부가 서독에 취업한 것과 간호사들의 취업이 거의 유일하다. 인구가 늘고 8ㆍ15광복과 6ㆍ25전쟁을 겪으면서 교육에 대한 열망이 높아져 고교졸업자는 수도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아졌고 덩달아 대학을 졸업한 전문인들도 수없이 배출되고 있었다. 그런 터에 국비로 키운 해대인들이 유휴 선원 또는 과잉노동력으로 남아돈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며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해대인들은 전문능력을 발휘 할 수 없어 낙심천만인 것이다. 고급 인력을 다 수용 할 수 있는 국내 선사는 없었다. 자리가 있어도 못가는 것이 아니라 자리가 없어서 문제가 된다면 국내뿐 아니라 외국의 선사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 맞는 노동조건과 근무환경을 제공할 해외업체를 찾아내어 주는 것도 교수로서의 책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당한 해외 선사에의 취업은 국가에서 돈을 들여 애써 키운 인재들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은 물론 외화 벌이에도 한몫을 할 것이라는 생각에 본격적인 외국 선사에의 취업을 추진하기 위해 1965년 학교를 그만두고 제자들의 해외 송출을 위한 준비를 했다. 때마침 정부에서는 1965년 10월에 한국 해외 개발공사를 설립하여 해외 인력송출에 국가적인 지원도 뒷받침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한국 선원들이 우수하다고 하여도 외국 선사의 인력수급실태를 모르고는 안 될 일이었기에 내가 먼저 경험하고 실태 파악을 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았다. 물론 나 혼자의 힘으로 하루아침에 좋은 결과를 만들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노력만큼의 성과는 어떠한 형태로든 나타날 것으로 믿고 우선 우리나라와 지역적으로나 외교상으로 가까운 대만의 유니온 라인에 취업하였다. 유니온 가인에서 2년 여간 성장으로 근무를 하면서 한국인으로의 자부심을 가지고 실력과 성실함을 직접 보여 주었다. 그들의 눈에 나의 모습이 긍정을 넘어 감탄을 하게 만들어야 제자들의 취업이 원하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의무감과 내 모습에서 한국선원들의 모습을 발견하면 더 많은 인원의 취업이 이루어 질 것이라는 생각에 모든 업무에 있어 다른 배의 선장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성실하고 능력 있는 모습으로 비쳐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모든 업무에 최선을 다했고 선원들과의 관계도 선장의 지배적인 모습보다는 서로 융합하고 한배의 조직원으로서 인간관계를 이루는데 무엇보다도 신중하게 처신하였다. 처음으로 탄 배는 유니온 스타였다. 한국인 선원들을 데리고 탄 이배에는 두 명의 선장이 있었다. 한국인 선장을 채용하기는 했지만 완전한 신임을 하지 못하는 불안한 선주는 중국인을 매니저 형식으로 승선시켜 감독 선장과 감독기관장이라는 형식으로 나를 비롯한 한국인 선원들을 관찰하였다. 조금 불편하기는 했지만 선원들과 나는 그들을 신경 쓰지 않고 우리의 일에만 최선을 다하였고 몇 번의 운항에서 우리를 전폭적으로 신임하게 된 유니온 라인에서는 더 이상 감독 하는 일이 없어졌다. 외항선에 휘날리는 태극기에서 남다른 자부심을 느끼고 오대양을 누비며 우리 선원의 위상을 해외에 높여 외국 선주들로 하여금 우리 선원의 기술과 근면성을 인정받게 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나의 근무태도와 적극적인 인간관계 형성으로 유니온 라인의 12척의 배에 우리나라 선원들의 송출을 이루어 낼 수 있었고 이어서 포틀랜드에 본사를 두고 있는 라스코에도 항해사와 기관사를 비롯한 많은 선원들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많은 제자들과 선원들이 있었고 그들을 다 받아주기에는 유니온 라인은 적은 회사였다.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취업의 문을 열어 주려면 더 큰 선사로 가서 세계를 무대로 뛰게 만들어야 했다. 1968년 이스라엘 계 미국인의 회사로 200여척의 배를 소유하고 있는 Maritime overseas corp로 자리를 옮기면서 42명의 한국인 선원들을 데리고 가서 Har Camel이라는 배를 운항 하였다.

두 명의 선장

 
MOC의 배를 탈 때도 처음에는 유니온 선박에서와 마찬가지로 채용한 한국인 선장과 선원을 관찰하는 감독 선장이 탔었다. 1만3000톤급 배를 인수 받아 요코하마에서 출항하여 포틀랜드로 운항 하는데 포틀랜드근교에 이를 무렵 감독선장인 마스터 마노아가 선교에서 불안하게 왔다 갔다 하면서 포틀랜드 등대가 안 보인다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소위 감독선장이라는 사람이 기본적인 운항 스케줄을 이해 못한 것 같았다. 내가 육분의로 계산한 결과에 따르면 앞으로도 한 시간은 더 가야 등대가 보이게 되는데, 나는 미스터 마노아에게 다가가서 “걱정 마시오. 정상적인 운항을 하였고 등대는 한 시간 후면 보일 겁니다.”하였다. 한 시간 후면 보일 것이라는 내 말에도 연신 불안해하며 시계를 보던 마노아가 내 말대로 정확히 한 시간 후에 포틀랜드 등대가 보이자 비로소 안심을 하며 “선장의 말이 맞았소. 수고했습니다.”하는 것이었다. 항해의 안전을 위해서는 많은 교육을 받고 경험을 쌓아야 한다. 또한 선장의 안정적인 심리상태가 필요하다. 실제로 내가 불안한 성격의 소유자는 아니었지만 본사에서는 보다 더 안정적인 항해에 도움이 된다며 Har Camel이라는 배를 타게 되었을 때 아내와 함께 승선할 수 있도록 아내를 초청하였고 아내는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여자선원수첩 1호를 받아 나와 함께 항해를 하였다. 덕분에 아내는 나와 함께 파나마운하를 건너고 희망봉을 지나는 등 본의 아니게 세계 일주를 하게 되었다. 아내는 본사의 배려로 승선한 것이고 선원으로서 일을 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부지런하고 거저 놀고 먹지 못하는 성격의 아내는 배를 타고 유람한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든가보다. 배에는 선원들의 식사를 담당하는 주방 요원이 있었지만 아내는 그들을 도와 선원들의 밥을 해주고 필요하면 빨래도 해주어 가면서 선원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였다. 콩을 운반하는 Har Camel에서 아내는 선원들의 반찬을 만들기 위해 손수 메주를 만들고 기관실에서 띄운 된장과 바닷물을 이용해 간장을 만들어 선원들의 반찬에 양념으로 사용하기도 하였고, 된장국을 끓여주기도 하였으며 기후가 더운 인도에 가서는 비록 한국의 재래종 오이는 아니지만 인도의 오이를 사다가 오이냉국을 만들어 주어 선원들이 그렇게 좋아 할 수가 없었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떠다니는 외항선 위에서 우리 한국의 고유음식인 된장국을 먹을 수 있으니 그럴 법도 했다. 아내와 함께 근무할 수 있던 나도 여러 가지로 좋았지만 처음 몇 달간 남편과 함께 세계여행을 한다며 좋아했던 아내는 점점 아이들을 걱정하기 시작했고 결국은 집에 가야겠다며 인도 비샤카파트남 항에서 귀국하면서 아내와의 여행은 끝났다. 아내가 귀국하던 날 선원들은 한국에 들어갈 때까지만 조금 더 같이 가자며 귀국을 말렸지만 한번 애들을 걱정하기 시작한 아내의 마음은 돌릴 수가 없었고 선원들은 몹시 아쉬워하며 작별을 하였다. 함께 한 선원들의 근무 모습이 성실했고 나의 선장으로서의 근무 태도가 자국인들의 모습과 비교하여 좋은 인산을 주었기 때문에 본사에서는 한국인 선원의 더 많은 취업을 요구하게 되었고, 한국인 선원들의 수가 늘어감에 따라 한국인 선원을 지속적으로 관리하여 줄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다. Maritime overseas corp의 회사 체계상 전문적인 인력 관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MOC 부산 지점장
당시 선원으로 해외 송출시 계약기간은 2년이었다. 그런데 본사에서는 근무한지 1년밖에 안된 내게“김 선장은 계약기간이 아직 남았지만 부산에 가서 우리 회사의 지점을 운용하면서 선원 관리를 해주십시오.”“물

 
론 필요시에는 선장으로서 배를 움직여 주시고요”하고 부산 지점으로 발령을 냈다. 단순히 서류만을 만들고 이론적으로만 아는 사람이 아닌 실전 경험이 많은 선장의 통합 지휘가 필요하다며 나에게 본사에서 근무할 것을 요청한 것이다. 수년간 배를 타고 세계를 누비던 나로서는 배를 운항하는 데는 크고 작은 배 가릴 것 없이 자신이 있었지만 책상에 앉아서 사무를 본다는 것은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어서 그들의 요청을 쉽게 수락할 수가 없었지만 더 많은 우리 선원을 Maritime overseas corp에 데려올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수락을 하고 본사에서 근무를 하였다. MOC 부산사무소에서 소장으로 근무하면서 우리나라 선원들의 해외송출에 더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주로 한배단위로 선장과 함께 40여 명씩을 보내는데 간혹 선장으로 적격자가 없을 때는 선원들만 뽑고 내가 직접 나가 선장으로 근무하기도 하는 두 가지 일을 해야만 했으나 불편보다는 우리나라 선원을 취업시키고 나 또한 간혹 배를 타면서 선장으로서의 자질을 잃지 않을 수 있어 후일 도선사가 되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한번은 우리나라를 출발해 포틀랜드로 가는 배의 선장으로 승선하였는데 본사로부터 포틀랜드에서 곡물을 실을 예정이니 오는 동안 곡물 창고를 만들어 가지고 입항할 수 있도록 하라는 전갈이 왔다. 조선소는 고사하고 운항 중인 배에서 곡물창고를 만들라니 그것도 운항 기간이 길지도 않은 15일 안에 전문기사나 설계자도 없이 오직 설계도 하나만 보고 만들어 내기란 쉽지 않았지만 우리 선원들은 “해낼 수 있다.”는 신념과 한국인의 능력을 보여주자는 오기가 발동했다. 밤낮으로 작업을 하던 중 너무 서두르다 조그만 사고가 생겼다. 화물칸 안에서 작업 지휘중인 내게 작업을 위해 세워둔 H-Beam이 넘어져 화물칸으로 추락했으나 다행이 H-Beam이 직접 몸에 닿지는 않아 불행 중 다행으로 크게 다치지는 않은 것이다. 어린 시절 쌀장사한다고 배를 탔다가 전복된 이후 내 생명을 위협한 두 번째 위험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위험한 순간을 넘기고 작업은 계속되어 포틀랜드에 입항할 때는 설계도대로 곡물창고가 다 완성되었고 항구에서 안정도를 검사한 후 문제없이 통과되어 즉시 화물을 적하할 수 있었다. 배와 함께 하면서 생긴 사고는 그 후에도 있었는데 한번은 뉴질랜드에 입항하여 정기적인 구명정 훈련을 하는데 구명정을 내리는 도중 밧줄이 풀리면서 7,8명이 타고 있는 구명정이 바다로 떨어져 버렸다. - 5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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