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온 내 고향 삼천포

‘내 인생의 파도를 넘어’

가족의 소중함을 더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요즘 한국인들의 아름다운 삶과 직업에서 가치 있는 삶을 살아온 명사들을 찾아 그들의 삶과 직업에서 인생의 가치를 찾아보는 기획 연재시리즈‘한국인의 삶 인생열전’에서 한국도선사의 선구자 김수금 회장의‘내 인생의 파도를 넘어’라는 자서전을 연재한다. 이번 시리즈는 많은 독자에게 삶과 인생에 대해 잔잔한 감동을 줄 것이다.

글쓴이/ 대륙상운 회장 김수금, 대륙상운 창업자 곽명렬

 
다행히 대부분 가벼운 부상만 입었고 한 사람만 입원을 하면 될 정도로 상황은 크게 나쁘지 않았지만 배가 출항을 하여야 하는 것이 문제였다. 다친 사람을 혼자 한국으로 송환할 상태가 아니어서 뉴질랜드 세관을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하고 부탁을 하였다. 다행히 친절한 세관직원들이 돌봐 주기로 해서 배는 일정을 지켜 출항할 수 있었다. 선원송출은 계속되어 우리나라의 선원들을 15척의 배에 승선시켰고 타 선사의 요청도 있어서 상당히 많은 인원을 송출할 수 있었는데 아마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수천 명의 선원송출을 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는 나의 노력도 있었지만 승선한 한국인 선원들의 성실하고 능력 있는 근무가 각 선주와 선사의 눈에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호사다마라고 이렇게 선원송출이 무르익어 가는데 국내에선 갑자기 이들을 묶어 두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당시에는 외화 부족으로 일반인의 해외여행이 엄격히 규제되던 때였는데 이를 이용한 일부 국내 선사가 해외에 눈을 돌리고 있는 선원들이 국내선사에 취업을 꺼려하고 임금이 올라가자 선원수첩만으로 해외에 나가는 것은 불법 아니냐며 정식 여권을 발급 받도록 해야 한다는 취지의 의견을 외무부에 냈고 외무부도 이를 수용하려 하는 것이었다. 여권을 받아야만 해외송출을 할 수 있게 된다면 해외송출의 길은 막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외화를 가지고 나가서 쓰고 돌아오는 해외여행이 아니라 외화를 벌어들이고 실업자를 줄이는 해외송출인데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국가경제를 살리는 고급인력을 여권하나로 묶어 두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몇몇 지인들과 함께 선원해외송출의 타당성과 선원송출로 인한 외화 획득 등에 대해 다각적인 방법으로 홍보를 했고 이것이 일간지에 보도되었다. 보도된 일간지를 들고 찾아간 외무부의 직원은 다소 망설였지만 외화벌이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에 부담을 느꼈는지 선원수첩만으로 해외에 나갈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하여 문제가 해결되었다. 다만 이후 3년 이상의 국내 선박 승선 경력자가 아니면 외국 취업을 제한하는 규정이 생기기는 했지만 선원수첩이 여권을 대신하는 규정은 합법적인 것이 된 것이다.

선원봉급의 해외추심

 
당시 해외 선주들이 선원의 봉급이라고 보내는 것은 현금이 아닌 수표였고 이는 외환관리법에 의해 당시 한국은행 외환부에 가서 한화로 바꾸어야 일반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데 수표를 추심하는 것이 몇 일만에 되는 일이 아니었다. 선원가족들은 당장 그 돈으로 생활을 하여야 하는데 거의 한달 정도 걸리는 추심 기간에 그들은 무얼 먹고 살 것인가 막상 해외취업을 도운 이로써 그들의 생활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돈이 와도 써야할 때 쓸 수 없다면 그것도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해외개발공사 담당자를 불러내 이 문제를 협의하였다. 개인적인 봉급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외화를 벌어온 것이고 그것이 국가경제에 도움이 되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한참을 상의하였다. 오랜 시간, 상의 끝에 해외개발공사와 나의 보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한국은행에 요청을 해보자고 하였다. 다음날 해외개발공사 직원과 한국은행에서 만나기로 하고 선원가족들에게도 연락을 해서 한국은행으로 오라고 했다. 선원가족들은 대부분 선원의 아내들이었지만 개중에는 할아버지나 할머니 그리고 애를 업고 간 아주머니 등 40~50명의 선원 가족과 함께 외환부로 갔다. 먹고살기 위해 수만리 타국 땅 험한 바다에서 오직 고국에 있는 가족을 위해 생명을 걸고 일하여 보내온 돈을 규정에만 매여 한 달씩 기다리라고 하면 저들은 어떻게 살라는 것이냐고 외화벌이의 주역들에게 편의를 좀 봐달라는 사정과 함께 한편으로는 수표에 대해서는“해외개발공사와 내가 보증을 할테니 무슨 방법으로든 저들에게 생활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해주셔야 하겠습니다”하며 매달렸다. 처음에는 한, 두 푼도 아니고 가당치 않다던 은행 직원은 잘못하면 사회 문제가 될 것이 염려했는지 한동안 의논을 하더니 우리의 보증으로 약 40만 불 되는 선원 봉급을 한화로 내주었고 그 후로는 특별한 문제없이 은행에서 바로 선원들의 봉급을 내주어 불편 엇이 수령할 수 있었다. 나는 선원송출을 하면서도 간혹 선장으로 근무를 하여야 할 때가 있어서 내가 송출시킨 선원들의 근황을 비교적 상세하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각국의 선사나 선주들과 선원들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많았다. 그때마다 모든 선주들은 한결같이 우리 한국선원들에 대한 칭찬을 들을 수 있었다. 한국선원이 있는 배는 항상 정리정돈을 잘해서 배가 깨끗하기 때문에 항구에 정박하면 외부 일손을 빌려 따로 청소할 필요가 없고 간혹 선박이 고장나도 다른 나라의 선원들처럼 담당업무가 아니라며 모른 체 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고치기 때문에 항해일정에 차질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에 대한 칭찬보다도 더 듣기 좋았고 나는 그것이 바로 한국인이라며 우수하고 근면한 한국인선원들을 언제든지 채용하라는 말을 하였다.

셋방살이의 끝

 
사치나 낭비는 결코 사람의 가치를 높여주는 것이 아니다. 사치하는 지도자가 있다면 그 나라는 국민이 도탄에 빠져 반란이나 혁명으로 쫓겨나게 되고 낭비하는 주부가 있다면 그 가정은 망하게 된다. 조금 있다고 해서 되는대로 낭비하거나 없다고 해서 생기는 대로 써버린다면 미래는 없다. 아내는 부잣집에서 자랐으면서도 함부로 쓰지 않았다. 더구나 처음 시집와서 경제적으로 곤란함을 겪었기 때문에 절약하는 데는 대단한 노하우가 있었다. 비록 먹고 사는 것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라 생활자체가 검소하였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돈을 안 쓰는 것 이상 정확하고 빠른 방법이 없다고 주장하는 아내와 나는 지금도 꼭 써야 할 곳이 아니면 낭비하는 습성은 없지만 그 당시에는 더 더욱 아끼고 웬만한 곳에는 쓰지 않는 그야말로 자린고비가 따로 없었다. 아내는 십 수 년 간 없는 살림을 꾸려온 솜씨로 공중전화 임대업을 하는 등 살림에 보탬이 될 만한 일은 무슨 일이건 마다하지 않았고 쓰기보다는 모으는데 더 악착같았다. 쓰기 전에 몇 번이나 생각해보고 나서야 비로소 지갑을 열었고 쓰더라도 가능한 한 최소한으로 사용하였다. 그렇게 해서 1964년 드디어 남의 집살이를 끝내고 비로소 동광동에 조금만 기와집을 사서 헐고 양옥집으로 지었다. 화초를 좋아하는 아내는 조그만 앞마당에 각종 나무와 꽃을 심었고 연못을 만들었는데 항아리를 묻어 겨울에도 물고기들이 얼어 죽지 않도록 하였고 담장에 심은 넝쿨장미는 골목길까지 화사하게 하였으며 집안의 천리향 향기는 멀리서도 그 향을 맡을 수 있었다. 간혹 잔디밭에서 직접 회를 떠서 나란히 앉은 아이들의 입에 넣어주는 호사도 누렸지만 절약하는 습관은 여전하여 아이들과 함께 수영장에 갈 때에도 집에서 미리 먹을 것들을 준비하고 때로는 밀가루까지 미리 반죽하고 각종 양념을 만들어가 수제비를 끓여주기도 하였다. 온 가족이 인근 범어사로 놀러 갈 때도 아이들이 즐겁도록 보물찾기 할 것을 빼고는 모든 것을 다 집에서 준비하여 갔다.

우리 집의 제사들

 
그 즈음 국내 선박회사라야 고작 대한해운공사와 몇 개 안되는 선사로는 졸업은 했지만 마땅한 취직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해양대를 졸업한 해기사, 기관사, 항해사 등 모두가 승선할 수 있는 기회가 그리 쉽지 않았기에 졸업생 중 동광동 우리 집에 찾아와 때를 기다리는 친구들이 많았다. 부산의 동광동과 중앙동에는 승선 관련된 정보를 얻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고 우리 집이 동광동에 있었기에 졸업생들은 나와 가까운 곳에 있으면 어떻게든 취직을 할 수 있겠다 싶어서였을 것이다. 크지도 않은 집에 덩치 큰 남자들이 예닐곱씩 들어 앉아 언젠가 기회가 오기를 바라며 교수님 집이라고 찾아와 기웃거리는데 때가 되면 밥을 해주고 잠자리도 마련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웬만한 남자들 못지않은 배포를 가진 아내는 교수로서의 엄격한 나 대신 많은 것을 감싸주고 행여 내게 잔소리라도 들을까봐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한 번도 싫은 소리 않고 뒷바라지를 해주고 오히려 그들이 미안해 할까봐 늘 조심스럽게 대했다. 언젠가는 술을 먹고 들어와 자가 이불에 담뱃불이 불어 크게 놀랐던 적도 있었지만 그들에게 체면보다는 빨리 승선할 수 있는 기회가 오는 것만이 유일한 바램이었기에 딱히 나무랄 수도 없었다. 그저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 배를 타게 해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들 중에는 박용섭, 두진욱, 함영민, 임기호, 임경호, 김봉곤 등 지금은 많이 은퇴하기도 했지만 해운계의 주요 인사들이 많았다. 취업의 희망만을 가지고 그렇게 집에 있던 그들이 하나둘 취업이 되어 떠날 때면 아내는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축하해 주었고 또 다른 제자들이 찾아올 것을 오히려 기다리기까지 하였다. 해상근무를 하는 친구들은 자주 올수가 없었지만 해운공사와 국내의 다른 선박관련 회사에서 육상 근무를 하는 친구들은 취업을 하고도 한동안을 집에 놀러 왔고 박용섭 같은 사람은 훗날 해양대학교 총장이 되자 쌀을 한가마니 사가지고 찾아와 넙죽 큰절을 하면서“선생님 저 해양대학교 총장 됐습니다. 이 쌀은 전에 선생님 댁에 있을 때 먹여주신 것 중 이부 갚는 것입니다”하고 인사를 오기도 하였고 그 후로도 간혹 호텔로 불러내어 함께 식사를 하기도 하였는데 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난날을 잊지 않고 찾아준 박 총장이 사다준 쌀은 박 총장의 마음이 함께여서 이었던지 유독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인천항의 도선사가 된다

 
10여 년간 부산 MOC사무소장을 하면서 간혹 필요할 때마다 배를 타기도 하면서 지내는 중 다른 송출 회사가 몇 군데 생겼고 우리나라 선원의 해외송출은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1974년 MOC를 정리하고 인천으로 왔지만 그 후로도 MOC에서는 부사장이 직접 찾아와 계속 근무하여 주길 요청하면서 미국본사에서의 근무조건으로 영주권과 거주할 집까지 제공하겠다고 하였으나 한국을 떠날 수 없다며 아내가 반대하여 결국은 인천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가족과 자주 그리고 오랫동안 떨어져있어야 하는 해상생활에 자주 불만을 토로하는 아내와 아이들의 바람대로 육상 근무를 위해 선장 중의 선장이라는 도선사 시험을 보아 합격했고 인천항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 그때가 내 나이 46살이었고 그 후로 69살까지 23년간 도선사로 근무하였다. 11명의 도선사와 함께 근무하면서 9미터에 이르는 조수간만의 차이와 다른 항구에 비해 수로는 좁은데 조류는 빠른 인천항에서 최대 8만 톤급의 배를 도선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특별한 사고 없이 근무하였다. 아이들은 아버지와 늘 함께 살게 된 것을 좋아하였다. 자식은 아버지의 등을 보며 자란다는 말이 있다. 아버지의 평소 삶의 모습 즉, 평소에 하는 언행을 보고 듣고 해가면서 따라가게 되는 것이다. 배가 들어와 호출이 오면 한밤중에도 작업화에 두터운 털 잠바 그리고 워키토키를 들고 나가는 모습에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아버지로서 아이들에게 본이 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론 동네의 어떤 사람들이 간첩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해 실소를 한 적도 있었다. 도선사의 수입이 적지는 않았지만 퇴직 후의 삶이 걱정되었는지 언젠가부터 아내는 노후준비를 해야 한다며 적당한 사업을 찾고 있었다. 도선사는 직무의 특성상 겸직을 할 수 없었고 아내는 이러한 나의 입장을 잘 알기에 자기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었는데, 인천항에서 예선사업을 하고 있던 이명재씨가 배를 팔아야겠다는 연락을 해 와서 나는 별 생각 없이 아내에게 한번 해 볼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배를 살만한 돈도 없는 아내가 선뜻 하겠다고 달려들었다. 배를 살돈도 없는 데 어떻게 하느냐고 했지만 생전 남의 돈 쓰기를 마다하던 아내가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며 이리저리 수소문을 하고 있는 중 마침 계를 만들고 있던‘경희’엄마가 집에 왔다. 평소 돈거래를 하지는 않았지만 경희 엄마에게 나름 신뢰를 주고 있었기에 처음 드는 계에 2번, 3번 그리고 맨 끝 번호를 받을 수 있었다.

대륙호사의 출항
이렇게 마련한 돈과 모자라는 일부는 나중에 치르기로 하고 1977년 11월 드디어 목선“대륙호”를 포괄 양도받아 아내를 대표로하여“대륙호사”란 간판을 걸고 예선업을 시작하였다. 당시 내가 도선사로 근무하고 있었고 인천항의 예선은 도선사의 지휘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나의 영향력이나 특별한 부탁 같은 것이 없이도 사업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특히 대륙호는 대한석유공사(지금 SK의 전신)에 정기 용선으로 배가 쉬는 날이 없었다. 회사라야 배 한척이니 직원이 따로 없었다. 선장이 운항내역을 집으로 가지고 오면 큰 아이가 퇴근 후에 Bill을 만들고 가사도우미(당시에는 식모라고 불렀다)가 선사에 가져다주는데 간혹 영문타이핑에 오자나 탈자가 생겨도 수정을 하려면 다시 집으로 와서 해야 했고 현장에서 발견하여 수정하라고 하면 심부름 간 가사도우미 아가씨는 “난 몰라요” 한마디하고 도망치듯 집으로 오곤 하였는데 그러다 보니 대금지급이 늦어져서 선사에 연락을 하면 그제서야 Bill이 잘못 타이핑된 것을 받게 되어 수정을 하여야 했던 적도 많았다. 회사에 다니면서 한편으로는 퇴근 후 집에서도 일을 해야 했던 큰 아이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결혼도 안한 이십대의 젊은이가 오, 육십 대의 은행 지점장이나 항만관계자를 만나 업무 협의를 할 때였다. 그때 은행 지점장은 요즘과는 사뭇 다르다. 전용 승용차는 물론이고 비서가 항상 따라붙고 항만의 높은 자리에 있는 분들 또한 지금처럼 쉽게 만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대륙호의 좌초

 
내가 몸이 아파 잠시 쉬면서 집에 있던 1980년 1월 작업을 마치고 귀항하던 대륙호가 작약도 앞 모래톱에 좌초하는 사건이 생겼다. 아내가 연락을 받고 달려가 보니 썰물에 바다 한가운데 모래톱 위에 벌렁 누운 대륙호가 처참했단다. 아내는 작약도 모래톱 위에 얹힌 대륙호의 뱃바닥을 두드리며 한참을 목이 메게 통곡을 하다 마음을 가다듬고“그래 다시 한다. 다시 너를 일으켜 세우고 다시 운항을 한다”하는 다짐을 하며 대륙호를 끌어내어 수리를 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아내는 상식에 얽매인 고정관념으로는 아무런 발전도 기대할 수 없다며 배는 비록 좌초되어 물에 잠겼지만“된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되살릴 것이다. 반드시 되살릴 수 있다”고 하며 한국 아줌마의 근성을 보였다. 나는 누워있는 터에 별반 도움을 줄 수도 없고 해서 폐선시키는 것이 상책이라고 했지만, 아내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해내는 법이라며 낙심을 하면 그 자리에서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고 내게는 걱정 말고 건강이나 빨리 찾으라고 하였다. 테헤란 왕궁을 지을 때 수입한 유리가 다 깨어져 못 쓰게 되어 들어온 것을 보고 다들 낙심하고 있을 때 그 유리를 이용해 멋진 스테인드글라스로 만들어 왕국을 장식해서 세계에서 제일가는 왕궁을 만들 수 있었다며, 옛날에 고된 시집살이를 할 때에 비하면 지금은 자기의 의지대로 할 수 있으니 성공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든 이 시련을 이겨나가야만 한다. 그것이 현실이고 우리가족의 삶인 것이다 아내는 필사적이었다. 아마도 내가 누워 있기에 더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정신을 바탕으로 인생의 힘든 시기를 이겨내는 것이 아내에게는 여성으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애들의 엄마로서 특별한 힘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잔잔한 바람위로 날리던 연줄이 끊어지면 연을 날리던 어린아이는 순간 허탈한 마음에 날아가는 연을 바라보며 울기만 할뿐 연을 잡아볼 엄두를 못 내고 연은 그렇게 날아가 버리고 만다. 하지만 아내는 끊어진 연줄을 끝을 잡아당겨 연을 되찾으려고 발버둥을 친 것이다. 선원들은 대륙호가 좌초되자 개인적인 물건만 챙겨가지고 나왔을 뿐 배를 건질 생각은 하지도 못했던가보다. 자신들이 타던 배 그것이 자신들의 밥줄이라는 생각보다는 우선 살고 보겠다는 것이었을 게다. 괘씸하고 배반당한 느낌이 없지 않았으나 그들은 나름대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고 그래서 배만 버리고 나온 것에 대해 또 부주의로 인한 좌초에 대해 전혀 책임을 묻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한순간 실수를 했다고 해서 그 실수 때문에 그때까지 그들이 회사에 공헌한 것을 몰라라하고 책임을 묻는다면 다음에 어느 누가 회사를 믿고 최선을 다하겠는가. 실수는 순간의 실수고 책임을 묻기보다는 왜 그랬는지 돌아보고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주의를 주었다. 선원들도 이러한 아내의 조치에 몹시 미안해하며 값비싼 교훈을 얻게 되었고 이후 다시는 그런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 -6부에 계속

저작권자 © 시사뉴스피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