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파도를 넘어’
가족의 소중함을 더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요즘 한국인들의 아름다운 삶과 직업에서 가치 있는 삶을 살아온 명사들을 찾아 그들의 삶과 직업에서 인생의 가치를 찾아보는 기획 연재시리즈‘한국인의 삶 인생열전’에서 한국도선사의 선구자 김수금 회장의‘내 인생의 파도를 넘어’라는 자서전을 연재한다. 이번 시리즈는 많은 독자에게 삶과 인생에 대해 잔잔한 감동을 줄 것이다.
글쓴이/ 대륙상운 회장 김수금, 대륙상운 창업자 곽명렬
두 번째 예인선
인천항의 입항선이 계속 늘어가고 이에 따라 예선도 더 필요하게 되어 우리는 대륙호에 이어 82년 일본에서 2000hp급 “대성호”를 도입하기로 하였다. 인천항에 입항하는 선박은 계속 늘고 있었지만 예선이 부족한 상황이어서 선박도입이 필요했고 국내에서 새로 건조할 경우 비용과 시간이 문제가 되어 일본에서 중고선을 도입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에는 민간인이 해외에서 직접 외화를 사용할 수 있는 근거가 없었다. 그래서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상호를 “대륙상운”으로 바꾸고 법인을 설립하면서 한편으로는 인수자금 마련을 위해 중소기업은행에 IBRD차관을 사용할 수 있도록 셋째 진동이가 뛰어 다녀 30억의 인수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70~80년대 인천내항을 들어오기 위해서는 외항에서 대기하여야 하는 시간이 길게는 2~3일씩 걸리기도 할 정도로 입항선박이 많아 예선은 거의 쉴 틈이 없을 지경으로 호황기였다. 1982년 9월 사업시작 후 두 번째 배인 대성호를 인수하기 위해 일동이가 직접 요코하마로 갔다. 인수하며 꼼꼼하게 점검을 하였지만 대한해협을 건너기 전에 제트펠라에 이상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인도자 측에 연락을 하여 수리를 요청하였다. 약 한 달간에 걸쳐 수리를 하는 동안 발전기에도 이상이 있어서 함께 수리를 하였다. 중고선이라서 부분적이 결함이 있을 수 있는데 사소한 결함이야 한국에 와서 고쳐도 되겠지만 다행히 중요기관에 대한 결함을 일찍 발견하여 현지에서 수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이 예정된 시간보다는 좀 늦어졌지만 결과적으로는 배의 중요기관에 대해 이상이 없이 인도 받을 수 있어서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수리 후 돌아오는 길이 한 번의 회황 때문인지 염려가 되었다. 이상이 있는 부분을 다 수리는 하였지만 공연한 걱정이 앞서며 배의 안정적 운항이 걱정되었다. 집 안의 할머니가 장독간에 정한수 떠 놓고 가족들의 안녕을 비는 마음이랄까 과학적인근거가 없는 미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각종 위험과 불안감에 대해 의지하려는 할머니처럼 나도 일동이가 돌아오는 길이 편안하고 배가 안전한 항해를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미신이긴 하지만 나름 기원제를 지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의 수리가 다 끝나고 이제 한국으로 돌아오겠다는 일동이 더러 간단하게라도 기원제든 고사든 지내고 오라고 하였다. 일동이는 특별한 종교를 가지고 있거나 특히 미신 같은 것을 믿지는 않았지만 내말에 언제나 토를 달지 않고 순종하는 편이었다. 다음날 일동이는 직접 시모노세키시장에 가서 각종 제사용품을 사고 요리하여 “안전항해를 기원하는 기원제”를 올리고 무사히 한국으로 향했다. 훗날 들은 얘기지만 기원제의 효험이었을까 험한 파도가 일기로 유명한 대한해협을 건너는데 물이 수정처럼 맑고 잔잔하였다고 한다. 1983년 무서운 한파가 들이닥쳤다. 한파가 왔다고 해서 배가 들어오지 않는 것은 아니고 배가 들어오려면 예선은 필수 아닌가? 그러나 인천항의 많은 예선들이 냉각수가 얼거나 파이프가 터져서 일을 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이 벌어졌다. 위기는 기회의 시작이라고 했다. 우리는 대성호의 냉각수를 모두 뽑아 버리고 작업을 하기 직전 드럼통에 물이 받아 그것을 냉각수로 쓰고 작업이 끝나면 곧장 버려서 얼지 않도록 했다. 불편하기는 했지만 배는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큰돈을 들이거나 엄청난 작업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고 날씨가 몹시 춥기는 하였지만 조금만 수고를 하면 배를 움직일 수 있는 데 작업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대양호의 도입
폐선 시킨 대륙호 이후 84년 “대양호”를 도입하였다. 대성호를 도입할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소형선박에 들어가는 예인선에는 항해 장비가 많지 않아 먼 바다에서 항해하기에는 많은 위험이 따른다. 바다에서 위험이라는 것은 사실 선원전체의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데 그 당시 예인선의 장비 중 레이더가 있기는 하여도 약 30마일 반경이기 때문에 대한해협을 건너는 동안 거의 무용지물이 된다. 또, VHF도 통신거리가 짧아서 인근에 배가 있으면 중계를 해줄 수는 있지만 사무실과 직접 통신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동이가 대양호를 인수하여 오던 그날은 날씨마저 좋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는 대한해협을 건너는 약 10여 시간은 연락두절 상태로 통신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좋지 않은 날씨 때문에 행여나 사고가 생길까봐 걱정을 하였는데 밤늦게 다른 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대양호가 무사히 건너와서 지금 남해안을 통해 인천을 향해가고 있으니 걱정말라는 것이었다. 1974년부터 약 23년간 인천항 도선사로 재직하면서 외항선의 선장경험과 선원송출을 위해 유니온선박과 MOC근무 그리고 MOC부산사무소에서의 경험들을 종합하여 틈틈이 집필한 “해외 취업선의 개척기 회고”를 내었다. 자랑스러운 해양인으로서 또 선배로서 먼저 경험하고 도전하였던 일들의 기록이 후배들에게 하나의 지표가 되어 나의 경험이 후배 해양인들의 발전과 우리나라 해운산업의 발전을 도모하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기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해양인들 이라고 해서 오직 배를 타고 일하는 것만은 아니다. 배를 잘 타기 위해서는 국내외의 운항정보와 기술을 상호 공유하여야 예측하기 어려운 바다위에서 안전하고 경제적인 운항을 할 수 있는 것이다. 1976년 영국 미들즈브러에서 개최한 국제도선사협회 총회(IMPA)에는 세계 각국의 조선사가 모였다. 국낸에서는 처음으로 한국도선사협회 대표로 참석하였고 그 자리에서 관련회의 및 개인적인 미팅을 통해 도선사의 역할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고 또 우리의 도선 기술을 전하면서 국제 민간외교와 국제도선사들과의 우호 증진 위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한창산업의 포괄인수
1985년 2월 엔젤호와 척양호 2척의 배를 보유하고 있는 한창산업(주)의 노정식 사장으로부터 “해양사업이 생각 같지 않아 힘이 드니 전문가가 맡아서 해주면 좋겠다”며 인수 의향을 물어왔다. 당시에는 M&A라는 개념이 없었기에 잘못하면 동종업계에서 오해를 받을 수 있기도 한 일이었으나 “이왕이면 인수받아서 망하는 회사보다 잘 살려서 키워주는 게 좋겠다”는 노 사장의 부탁에 인수를 결정하였다. 한창산업을 인수하면서 대륙상운의 대성호와 대양호 그리고 한창산업의 엔젤호와 척양호 등 모두 4척의 배로 인수하여 사업이 확장되었으나 허가제로 되었던 그때 우리는 한정면허로 인천항 내에서만 사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회사를 좀 더 안정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일반면허의 취득이 필요했으나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일반면허를 발급받는 게 여간 까다롭지가 않았다.
동보선박 인수
1995년 10월 예선업협회 전무를 통해 한진해운 사장이었던 허기사장이 운영하는 동보선박을 매각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국내의 H사와 S사 등 여러 예선업체가 인수협상에 달려들었고, 우리도 우리도 동보선박의 인수에 초점을 모았으나 인수경쟁에 뛰어든 경쟁업체들이 인수가격을 조정하기 위해 일반면허일체를 한정면허밖에 없는 업체에 파는 것은 정부의 허가취지를 무색하게 하는 것이라는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압력을 가하고 우리의 인수를 방해하기도 하는 등 관계기관의 간섭으로 인수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었다. 어떻게든 동보선박을 인수하고 싶었는데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허기사장의 단독면담으로 해결을 보는 수밖에는 없을 것 같아 일동이에게 일을 맡겼다. 내가 나설 수도 있었지만 나는 아직 도선사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선을 직접적으로 운영하지 않은 상황에서 잘못하면 단독면담의 기대효과에 반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일동이는 인수협상을 위해 다각적인 경로를 통해 동보선박의 허기사장의 의중을 알아보았더니“인수금액이 많고 적음은 오로지 업체의 사업능력을 평가하여 책정한 것이고 예선업의 허가는 회사에 내어 준 것이지 개인에게 내어준 것이 아니다. 월남의 전장에서도 살아남은 내가 누군가의 압력에 굴복하여 그들이 원하는 대로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에 매각을 할 이유는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허기사장 나름대로 적당한 인수업체를 물색하고 있다고 했다. 얼마 후 예선협회의 전무로부터 허기사장이 그동안 심사숙고하여 우리와 인수협상 할 의사가 있는 것 같은데 한번 만나보라며 연락을 해왔다. 허기사장은 일동이와 만난 자리에서 오랫동안 도선사로 일 해온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인천항에서 예선업을 잘 운영하고 있는 것을 안다며 나와의 만남을 요구하였다. 이미 우리에게 양도할 생각으로 일동이와 만나고 난 뒤라 서로가 인수에 관련해서 할 얘기는 많지 않았다. 다만 인수 금액과 인수 시기 등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자신이 운영하던 회사가 필요에 의해 남의 손에 넘어가더라도 잘 운영하여 성장시키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지 미숙한 운영으로 또 다른 사람에게 팔리거나 없어지는 것은 원치 않는다며 우리의 인수에 힘을 실어 주었다. 구체적인 인수 금액을 조정하였으나 인수에 필요한 돈을 쉽게 마련할 수는 없어서 허기사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몇 번에 나누어서 지급하기로 했다. 다행히 허기사장은 우리의 제안을 듣고 우리를 믿겠다며 양해를 해주었고 드디어 일반 면허가가 있는 동보선박을 다른 인수의향 업체를 제치고 포괄 인수하였다. 회사명은 한창산업의 인수와 마찬가지로 동보선박이란 상호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청민호”, “약진호”, “월미호”, “진호” 등을 더 보유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지금의 대륙상운, 한창산업, 동보선박 등 세 개의 회사로 사업을 하게 되었다.대륙상운의 주인
대륙상운은 아내가 창업자이다. 그러나 대륙상운의 주인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대륙상운에 근무하는 모든 직원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기업이나 다 마찬가지지만 한 사람의 힘으로 기업을 운영할 수는 없다. 모든 직원이 회사의 운영을 위해 사장이니 부장이니 직책을 정한 것이지 사장이라고 해서 일을 안 하면서도 월급을 받는다던가 일반사원이라고 해서 죽어라 일을 하고 터무니없는 월급을 받는다면 그 회사는 멀리 가지 못한다. 직급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인간으로서의 차별을 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각자 맡은바 책임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는 주인정신이 있어야 한다. 우리 회사에 근무하는 직원들 중 대부분은 입사 후 퇴직을 한 사람이 별로 없다. 부득이하게 자신의 사정으로 퇴사한 몇몇은 있지만 한번 입사하면 평생직장이며 자신의 회사라고 생각하고 열심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직원이나 배에서 근무하는 직원이나 다 똑같은 대륙상운의 주인이며 모두 대륙상운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대기업에 비할 수야 없겠지만 육상과 해상에서 근무하는 대륙상운의 100여 직원에 대하여 한창산업인수 후부터 직원자녀의 학비를 100% 지원하였으나 IMF이후 회사의 사정이 어려워짐에 따라 안타깝게도 고등학생까지는 전액을 지원하지만 대학생에 대하여는 50%만 지원하고 있다. 아직도 국제경제의 침체로 인천항의 경제활동도 많이 위축되어 많은 항만관련업체가 힘들어 하고 있지만 다시금 활황기를 맞을 것을 기대하고 또 직원의 복지도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제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큰아들 일동이의 결혼
82년 여름 사업도 순탄하고 대륙상운을 맡아 하고 있는 큰아이도 결혼 적령기에 들어섰다. 적당한 짝을 지어 주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시누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일동이 장가 안 보내냐?” “내가 참한 색시하나 데리고 갈테니 한번 봐라”는 것이었다. 시누이의 소개로 진해에 사는 수연이(지금 큰 며느리)가 올라왔다. 수연이는 알고 올라왔겠지만 일동이한테는 따로 말하지 않았다. 둘이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서로를 알아보게 하기 위해서이었다. 다음날이 마침 일요일이어서 송도구경을 시켜주라는 핑계로 둘을 내보내고 살펴봤다. 다음날 수연이는 다시 진해로 내려가고 일동이의 눈치를 보니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아 답답하였다. 저녁에 퇴근하여 아내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아내는 며느리 감으로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동이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대화를 나누는 일이 없다. 부자가 마주 앉아서 진지하게 인생을 얘기하거나 살아가는 지혜를 나누는 장면을 보기 어렵다. 특별히 관계가 나빠서가 아니라 일상에 대해 자연스럽게 얘기를 나눌 기회며 시간이 별로 없다. 생활이 바빠서 이기도 하지만 딱히 어떤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한 특별히 얘기할 거리를 만들지 못했고 공연히 멋쩍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어쩌다 기회가 되어 마주앉아 얘기를 하다보면 아버지는 아들의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자기의 말만하며 가르치려는 성향이 크다. 결국은 개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가르침이 되고 아들은 그런 시간이 괴롭기 때문에 가능하면 아버지와의 시간을 갖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일동이와 나는 사업상의 일로 그랬는지는 몰라도 비교적 의사소통을 하는 편이었으나 결혼 문제만큼은 일동이의 생각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다가 일 년 여가 다 될 무렵 도무지 그냥 두어서는 가부간의 결정이 날 것 같지 않아 일동이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했다. “너 전에 왔던 진해 아가씨한테 장가가면 어떻겠냐? 진해가서 결정짓고 올라와라”하였더니 일동이는 별말 없이 “네”하고 내려갔다 올라와서는 “저 결혼하겠습니다”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사돈 어른께서는 “수연이의 나이가 아직 어려서……”하고 망설이자 일동이가 “나이는 문제 삼지 마시고 제게 주실 건지 아닌지만 말씀 하십시오”하였더니 사돈어른께서도 그런 일동이가 마음에 들었던지 별 말씀 안 하시고 승낙을 했다는 것이다. 83년 6월 5일 드디어 일동이를 결혼시켰고 지금은 1남 1녀를 둔 대륙상운의 사장으로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 있다.큰딸 윤희의 결혼
둘째 윤희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어미의 팔자를 닮는다는 딸, 아내가 가난한 내게 시집와서 얼마나 눈물을 흘리고 후회를 하였는지 다 아는 딸애가 지어미와 똑같은 어려운 길을 가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 날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에는 수많은 일들이 있고 지나온 일을 돌아보면 즐겁고 행복했던 일도 많지만 가슴 아프고 돌이켜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들 또한 많이 있다. 자신이 미처 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고 조그만 실수가 걷잡을 수 없이 큰 일이 된 것을 가슴 아파하는 것은 신이 아닌 인간인 까닭이려니 하면서 후회와 포기로 잊어지게 된만 자식에게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자기 자신의 일과는 사뭇 다르다. 비록 자신은 덜먹고 못 배웠어도 자식만큼은 잘 먹이고 잘 가르치고 싶고 좋은 사람과 짝을 지어주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1955년 5월 15일 둘째 윤희가 부산에서 태어났다. 여전히 힘든 시집살이지만 윤희는 딸이라선지 일동이 하고는 또 다른 정이 갔다. 아버지로서 예뻐하는 딸이기도 하지만 큰아이가 아들이다 보니 아기자기한 맛이나 애교 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딸에게 가는 사랑이 같은 자식이라도 조금은 다른가 보다. 어려서부터 아내가 많이 가르치기도 하였지만 맏딸 노릇하느라 그런지 무엇이든 의욕적으로 해내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주도권을 잡는 아이였다. 특히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하인의 일을 모르면 안 되고 하인의 일을 알려면 보기만 해서는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아내는 자주 강조하였고, 이 말을 윤희는 제법 잘 따라 주었다. 경남여중과 테레사 여고 졸업 후 의사가 되기를 바란 우리의 마음과는 달리 경희대식품공학과를 졸업하고 경기도 안중중학교에서 수학담당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 윤희에게 사귀는 남자가 있다는 소리가 들렸다. 여성으로서 직업도 있고 나이도 들었으니 좋은 남자가 있으면 결혼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딸아이의 장래가 달린 문제라 이리저리 수소문해 본 아내는 결혼상대로는 영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내는 자기의 시집살이와 고생했던 옛 기억을 되살리곤 허겁지겁 윤희의 학교를 찾아가 결혼상대로는 낮지 않으니 만나지 말라고 했지만 윤희는 이미 마음을 주고 있었고 상대 남자도 윤희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7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