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온 내 고향 삼천포

‘내 인생의 파도를 넘어’

가족의 소중함을 더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요즘 한국인들의 아름다운 삶과 직업에서 가치 있는 삶을 살아온 명사들을 찾아 그들의 삶과 직업에서 인생의 가치를 찾아보는 기획 연재시리즈‘한국인의 삶 인생열전’에서 한국도선사의 선구자 김수금 회장의‘내 인생의 파도를 넘어’라는 자서전을 연재한다. 이번 시리즈는 많은 독자에게 삶과 인생에 대해 잔잔한 감동을 줄 것이다.

글쓴이/ 대륙상운 회장 김수금, 대륙상운 창업자 곽명렬

 
사랑도 좋지만 부모의 마음에 최소한 부자는 아니더라도 생활이 불편하지는 않을 정도의 재산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윤희가 사귀는 남자에 대해 아내가 알아본 바로는 도무지 살기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전에 삼천포에서의 시집살이 당시 자신이 겪은 것이 떠오른다며 윤희가 사귀고 있다는 그 남자의 집안애기를 하는데 차마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가세는 아마도 내가 청소년 시절 겪은 그 이상이었던가 보다. 아내의 설득을 따르지 않는 윤희에게 아내는 최종적인 안을 내놨다.“아버지와 부모형제를 선택 하겠니? 아니면 그 사람을 선택 하겠니?”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아내의 물음에 윤희는 차마 그 사람을 선택하겠노라는 대답을 하지는 못했고 그길로 아내는 윤희의 머리를 깎아 수덕사로 데리고 갔다. 멀쩡한 딸자식을 중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 사람과 멀리 떼어 놓아야 할 것 같아 취한 조치였다. 수덕사 인근의 조그만 암자에 있는 월성스님에게 딸아이를 맡겨놓고 돌아서는 아내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 했지만 과거 자신의 어렵다 못해 혹독한 시집살이를 생각하면 그렇게 해서라도 윤희의 행복을 만들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월성스님은 모 군수의 딸로 고등교육을 받은 스님이었다. 군수의 딸로 스님이 된 사연은 모르겠으나 우리가 대fir적인 사연을 이야기하고 윤희를 맡기겠다고 하자 월성스님은 흔쾌히 승낙을 하고 맡아주었다. 나는 토요일마다 윤희를 찾아가서 달래주곤 하였는데 언젠가부터 윤희의 마음에서 그 사람이 지워지는 것 같아서 안도하고 찾아가는 기간이 조금씩 길어진 무렵 월성스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곧장 스님을 만났고 스님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윤희와 그 사람이 연락을 한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윤희를 위해한 조치였는데 윤희는 어미의 강요를 못 이겨 그냥 따랐을 뿐 마음속에서는 오히려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만 더 키워준 것이 되었던 것이었다. 윤희도 가슴에 상처를 남기고 아내는 아내대로 실망과 분노를 함께 느끼며 윤희에게 분풀이라도 하듯이“너하고 똑같은 딸을 낳아서 한번 키워봐라 그럼 내 심정을 알 것이다”라며 막말을 하기도 하였으나, 자식에게 이기는 부모 없다고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는 딸을 더 이상 어떻게 할 수도 없어 결혼을 시키기로 하고 그 사람(지금 윤희의 남편이 되나 박 서방)을 만나봤다. 사람 됨됨이도 괜찮고 성격도 온순한 것이 집안이 가난한 것 말고는 딱히 흠잡을 데는 없는 사람이었기에 둘의 결혼을 추진하였다. 박 서방의 집은 평택의 안중읍이었는데 포장도 않되 덜커덕거리며 흙먼지 날리는 진흙길로 한참을 가야 했다. 함께 차를 타고 가는 아내는 그 길을 오가며 가슴을 치며 울었고 나도 가슴 아팠지만 저희 둘이 그렇게 좋다는데 더 이상 말릴 수 없어 1980년 3월 30일 이른 봄 결국 둘의 결혼식을 올렸다. 짧은 머리를 감추고 신부 화장을 마친 딸에게 아내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을 했다.“나는 아직도 네 심정을 도무지 모르겠지만 네가 원하는 결혼을 했으니 잘 살아라”딸이 좋아하는 사람이 마음에 안 든다고 딸에게 큰 상처를 주었지만 딸이 그토록 좋아한다는데 더 이상 딸을 위한다는 것이 오히려 딸의 가슴에 상처만 준다면 어느 부모가 계속 말릴 수가 있겠는가? 부모된 심정에 이왕이면 본인은 물론 부모의 마음에도 드는 그런 사윗감을 선택하면 좋겠지만 비록 부모의 눈에는 차지 않더라도 본인이 그토록 사랑하고 둘이 힘을 합쳐 앞으로 무슨 어려움이 닥쳐온다 해도 이겨 나가겠다는데 도리가 없는 거 아닌가? 결혼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아내는“이제 제가 원하는 대로 결혼을 했으니 서운한 마음 다 잊고 잘 살아주면 좋겠다. 저도 딸을 낳고 시집을 보내게 되면 다 이해 하겠지”라며 못내 서운한 감정을 내비추었고 집에 돌아와서는 윤희가 쓰던 방 앞에 늘 꽃을 꽂아 놓고 윤희를 생각하며 윤희를 위해 기도하곤 하였다. 윤희는 결혼 후 많은 어려움이 있었겠지만 한 번도 힘들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고 박 서방 하고 열심히 살면서 두 딸을 낳아 키웠다. 그러나 아내는 늘 노심초사하며 도와주려 애를 썼고 내게 특별히 말은 하지 않았지만 결혼 후 윤희가 서울 역삼동에 처음 자동차 공장을 차릴 때 아내는 반대하던 결혼이었지만 결혼을 한 이상 둘이 잘 살아주기만을 바라며 제법 많은 돈을 대어주었고 윤희와 박 서방은 제 어미의 마음을 알았던지 열심히 사업을 키워 지금은 아산에서 자동차 정비공장을 하면서 큰딸은 벌써 결혼을 시키고 그렇게 원하던 박 서방과 함께 잘 살아주고 있다.

둘째아들 진동이의 결혼

 
1957년 국내외적으로 큰 사건들이 터지고 있었다. 8월 26일 소련에서는 대륙간 탄도탄을 발사하여 성공했다는 기사로 냉정기의 국제정세가 어지러웠고 국내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 행세를 하며 지방 관리들을 우습게 만들던 가짜 이강석이 검거되는 등 여전히 어수선한 가운데에서 여수에서 9월 10월 둘째아들인 진동이가 태어났다. 갓 태어난 진동이는 약간 검은 얼굴에 어린 아기지만 다부진 모습을 하고 있어 아내에게 말을 하진 않았지만 녀석이 믿음직해 보였다. 부산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고 인천으로 이사하여 대건고등학교를 다녔는데 특별한 말썽은 없었으나 친구들과의 사이에서 좀 튀는 것 같았다. 인천대학교를 졸업한 후 대륙상운에서 제 형과 함께 일을 배웠고 2006년 1월 평택에 대륙상운을 설립하여 초창기 평택항의 어려운 시기에 사업상 많은 어려움을 지혜롭게 극복하고 지금은 비교적 안정된 경영을 하고 있다. 지난 겨울 인천사무실에 들렀을 때 내가 글을 쓰는 것을 보고는 별 말없이 돌아가더니 며칠 후 편지 한 장을 놓고 갔다. 내게 글에 대해 묻거나 제가 편지를 보내겠다는 말도 없었는데 뜻밖이었다. 나도 자상하다고는 할 수 없는 성격이지만 진동이의 평소 언행으로 볼 때 정말 감격스러울 정도였기에 여기에 그 편지의 내용을 정리하여 함께 올려놓는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4남재 중 셋째인 진동이입니다.
평생을 바다와 함께 하신 아버님께서는 어머님과 떨어져 살아야 했던 시간들이 가슴에 한으로 남아 저희들만큼은 가족과 떨어져 살지 않게 하기 위해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사업을 구상하시다가 36년 전 어머님과 함께 목선 1척을 인수하여 예인사업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회사의 회장으로서 또한 아버지로서도 존경하지만 사회의 선배이자 해양업계 원로이며 우리나라 해양발전에 초석이 되신 아버님을 존경합니다. 지금 현재 제가 이 자리에 서 있는 것도 아버님의 자식에 대한 집념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어머님에 대한 아버님의 사랑은 자식으로서 배워야할 부부애(夫婦愛)의 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님의 그런 모습에서 저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조강지처(糟糠之妻)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근본이라는 것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시는 아버님에 대한 존경심은 자식으로서는 물론 회사구성원의 하나로서도 늘 깊이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아버님에 대한 존경심은 깊어가면서도 공연히 멋쩍어서 한 번도 입 밖에 내어본 적은 없지만 진심으로 아버님을 사랑합니다. 또한 사회의 선배로서 사업장의 리더로서 아버님을 따르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예선사업의 구성 관리를 비롯하여 선반건조와 관리 등에 대하여 너무나 세밀하고 정확히 알려주시기 때문에 저는 해양대학교 교수님 출신이신 아버님의 제자가 된 기분이 들 때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거친 바다와 싸우시던 아버님께서 섬세할 정도로 가르쳐주신 덕에 별로 꼼꼼하지 못한 제 성격이 이제는 무슨 일을 하던지 두 번 세 번 확인하는 조금은 꼼꼼한 성격이 된 것 같습니다. 남들은 은퇴하였어도 벌써 은퇴하였을 연세인데도 아직도 저희 곁에서 건강하신 모습으로 챙겨주시니 혹간 우리를 못 믿으시는 것인가 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할 때도 있지만 각종 업무에서 아버님의 명쾌한 결단과 업무처리 방식을 보면서 아직도 더 배워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님 지금 쓰고 계신 회고록에 어떤 내용이 담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회고록을 계기로 아버님과 어머님 두 분이 앞으로도 계속 건강하신 모습으로 저희 곁에서 가르쳐 주시고 저희들을 지켜봐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여 주십시오. 형님가족과 저희가족의 부모님으로서 사랑하는 선배로서 아버님과 어머님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몇 자 적어 올립니다. - 아들 김진동 올림

몇 마디 쓰지는 않았지만 아들의 감정이 묻어나는 편지였다. 나도 평생을 “사랑한다”는 말을 못해 주었지만 아들도 나를 사랑한다는 말에 감격스러웠고 애비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것이 고마웠다. 평소 성격이 좀 급하고 하고 싶은 말을 입에 담아두지 못하는 성격 때문인지 결혼식도 하지 않고 며느리(한혜숙)와 살림을 차려서 나를 당황하게 하였지만 젊은이의 철없는 불장난은 아니었기에 1981년 2월 7일 막내 경희와 함께 합동 결혼식을 치렀다.

막내딸 경희의 결혼식

 
1959년 8월 3일 음력으로 6월 29일에 해양대학교 관사에서 막내 경희를 낳았다. 찢어지게 가난하고 모진 시집살이를 견뎌낸 아내가 경희를 낳고나서 한 말은“애는 한여름 풍성한 과일이 많을 때 태어났으니 먹을 복이 많을 것이다”였다. 친정에서 부유하게 자라며 모자람 없는 시절을 보내던 아내가 결혼 후 원치 않게 닥친 힘든 시집살이에서 가슴에 사무친 것은 의시기주에 대한 걱정이었던 것이다. 아내는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잘 표현한다. 남편인 내가 많은 시간을 해외에 나가있고 간혹 집에 들어와도 아내와 아이들이 잘 있는 것에 흐뭇해하기만 할 뿐 특별한 사랑표현을 하지 못하는 나의 몫까지 다하려 그랬던 것 같다. 네 아이를 낳고 살림도 어느 정도 펴나갈 무렵인 부산 광복동 시절에는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아이들의 기분전환을 위해 광복동 영양센터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통닭 등을 사주면서 함께 해 주었고, 내가 들어오면 인근 범어사에 데리고 가서 늘 함께 있지 못하는 아버지와의 친근감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하곤 하였다. 경희가 먹을 복을 타고 태어났을 것이라는 아내의 말과는 달리 몸이 많이 약한 편이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든다는데 자신의 몸이 편치 못한 까닭인지 경희는 부산동여고 2학년 무렵 학교에 가는 것을 힘들어하여 아내와 의논 끝에 1년만 휴학을 시켜보기로 했다. 고2때 1년 휴학으로 인생이 크게 달라질 것도 없고 행여나 좀 달라진다 하여도 우선 경희가 힘들어 하는데 억지로 보내는 것은 오히려 경희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얼마 후 인천으로 이사를 하게 되어 부산동여고에서 인천신명여고로 전학을 하였고 학교가 바뀌어서인지는 몰라도 경희도 잘 적응하여 주었고 대학에 가서는 중어중문학을 전공하였다. 학교를 졸업한 경희는 그때 아들처럼 여기던 제 큰오빠 친구인 준근(지금 둘째사위)이와 짝을 맺어주고 싶었다. 큰딸 윤희의 결혼에 많이 힘들어 했던 아내는 경희의 결혼만큼은 자신의 뜻에 따라 해주길 바라서였는지 상당히 서둘렀고 마침 딸아이와 준근이도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어 둘의 혼사는 무리 없이 잘 진행되었고 1981년 2월 7일 그동안 결혼식을 미처 하지 못하고 있던 둘째아들 진동이와 함께 합동 결혼식으로 치렀다.

학위수여

 
1996년 5월 31일은 제1회 바다의 날이다. 서기 8백28년 음력 4월 하순 해상왕 장보고가 청해진을 개설한 때를 기념해서 제정된 이날은 독도 영위권 분쟁 등 급변하는 국제 해양환경 속에서 바다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시 해상교역량 세계 6위로 1백18척4백8만6천 톤에 이르는 선박건조로 세계의 배 21.5%를 우리가 만들며 해양강국으로의 꿈을 한창 키워 나가던 때였다.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부산항 신선대부두에서 성대하게 거행된 이 자리에서 나는 교통부장관 표창수상을 하였다. 감회가 깊었다. 내가 표창을 받아서가 아니라 이제야 비로소 우리나라가 해양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해양인들에 대하여 바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국제적인 경기쇠퇴에 따른 물량감소는 전반적인 국내외 경제 불안정을 가져 왔지만 중국과의 무역은 여전히 늘어나고 있었다. 폭설에 이은 한파로 몹시도 추운 2010년 1월 12일 롯데호텔 3층 크리스탈 볼륨에서 해양대학교의 총동창회 정기총회 겸 신년하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나는 제10대 자랑스러우누 해대인으로 선정되었고, 2005년 9월 나의 모교인 해양대학교로부터 명예경영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동안 미약한대로 추진하여 온 장학사업과 해운산업발전에 대한 공로라고 하지만 내게 남다른 경영능력이 있거나 학교에 대단한 공헌을 하여서라기 보다는 우리나라 해양인들에 대한 인식전환과 해운업계 원로로서 또 전임교수로서 계속해서 학교의 발전을 위하여 애써달라는 부탁이며 해운산업의 발전을 위해 좀 더 노력하여 달라는 당부로 알고 있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나에게 이런 표창이나 학위를 주는 것보다는 파도와 싸우며 오대양을 넘나들고 대한민국의 국위선양과 민간외교에 앞장서는 수많은 선원들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고 항만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는 각 분야의 항만종사자들에 대한 안전을 위해 다른 무엇인가를 해줄 수는 없을까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았다.

주피터호의 진수식
1994년 1월 12일 국내예선으로는 거의 초창기 건조로 기억되는 주피터(2900HP)의 진수식을 하였다. 주피터는 우레ㆍ폭풍 등 기상의 지배자로 여겨 왔고 인간의 운명조차도 좌우하는 신이라고 생각하는 하늘의 신으로서 그는 여러 가지의 칭호를 가지며 지선지고(至善至高)의 주피터, 승리의 주피터 등으로 불려진다. 바다는 기상상태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비와 바람은 아무리 훌륭한 시설을 갖춘 배일지라도 항해에 지장을 주게 마련이다. 그래서 배의 이름을 기상을 주관한다는 주피터로 하고 삼광조선에서 내외 귀빈을 모시고 진수식을 하였다.

예인사업과 안전
2013년 12월 현재 평택에 11척 인천에 9척의 배를 가지고 작업을 하고 있다. 2004년대 처음 투입한 평택 사업장은 현대제철의 철강원료 및 제품의 수출입과 기아, 현대 자동차의 수출입차량을 운반하는 선박이 늘어가면서 이제는 인천보다도 더 많은 예선을 필요로 할 만큼 입항선박이 많아졌다. 인천의 보조항 정도였던 평택항이 많은 물량을 확보하고 발전하여 나가는 것은 대단히 반가운 일이지만 130년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인천항의 물동량 감소는 국제경기의 쇠태로 인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지만 국내의 다른 항과 비교해 국가의 지원이 너무 작은 탓도 있어 보인다. 또한 날로 발전하는 중국의 해양강국화와 현대식시설을 갖추고 방대한 배후 부지를 확보하고 있는 중국항만과의 경쟁에 뒤처지기 때문으로 보인다. 인천항이 동북아 거점 항만으로 다시 일어서고 인천공항과 더불어 세계물류의 거점항만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나를 비롯한 항만관계자들은 보다 혁신적인 항만운영계획을 세우고 정부에서도 더 많은 지원이 있어야 할 것 같다. 평택의 대륙상운은 둘째인 진동이가 맡아하고 있다. 학교시절 특별히 공부를 잘한 것은 아니지만 경영능력이 제법 탁월하여 믿고 맡겨 놓고 있다. 예선업을 하면서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작업을 많이 했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인천대학교 공사 중 거제도와 중국에서부터 상판을 운반한 것이다. 대현선박의 예인이나 조그만 바지선의 예인이나 모두 중요한 것이지만 인천대교의 경우에는 나를 포함하여 해상근무자와 사무실 직원에 이르기까지 특별한 자부심과 철저하고 안전한 작업을 위해 평소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임했었다. 모든 현장 작업이 다 안전을 담보하여야 하지만 해상작업은 특히 더 주의하여야 한다. 아무리 작업 일정이 바빠도 날씨가 나쁘면 절대로 무리하게 작업을 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전문기술과 철저한 안전관리가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인데 전문성이 결여된 안이한 태도나 타성에 젖은 작업은 대단히 위험하다. 수시로 안전점검과 교육이 필요하며 작업자들은 스스로도 자칫 해이해지지 않도록 긴장을 하여야 한다. 겉보기에는 밧줄에 배나 바지선을 끌고 가지만 하면 되는 것 같지만 그 배나 바지선을 안전하게 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상상태를 파악하여 작업을 언제 할 것인지 계획을 잘 세워야 한다. 또한 엔진의 출력을 점검하고 와이어의 상태와 크레인의 점검은 필수적이며 운항 중 예인선과 피 예인선을 계속 관찰하며 조그만 이상이라도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아울러 주변 견시를 절대 게을리 하여서는 안 된다. 작업반경 내에 타 선박의 접근은 물론 이물질이나 어선들이 쳐놓은 그물망에도 주의를 하여야 한다. 내 나름 무슨 일에 있어서든 철저한 준비와 점검을 통해 위험을 배제하며 살았기 때문에 35년간 예인업을 하는 동안 몇 번의 작은 사고는 있었지만 큰 과오는 없었는데 해양대학교 시절 교수로서 항해학을 가르치면서 안전을 특히 강조하였고 오랜 선장경험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허베이스트리트호와 해상 크레인의 충돌 사건이다. 누군가의 잠깐 실수로 빚어진 일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혔고 귀중한 자연환경을 파괴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겠지만 와이어를 철저히 점검하고 예인 중 끊임없이 관찰하고 견시만 확실하게 하며 운항을 하였더라면 일어나지 않았거나 사고를 최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천항을 바라보며
우리나라는 광복 후 지금까지 자유경제체제를 지향해왔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전쟁으로 인한 생산설비와 지하자원의 부족으로 1인당 국민소득이 겨우 60달러 정도에 머물렀지만 지금은 2000년대 초 1만불을 넘어 2만불의 국민소득으로 세계적인 경제국가로 발돋움하고 있으며 수년 내에 3만불에 도달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국민소득의 향상이 국민 개개인에데 모두 경제적 이익을 주거나 삶의 질을 향상시켜 준 것은 아니다. 아직도 실질적인 빈곤층이 있고 비정상적인 경제성장으로 인한 상대적 빈곤층은 늘어가고 있다. 그로 인한 계층 간의 갈등은 심화되고 소외된 국민들의 의욕상실은 경제발전 에너지를 상실하게 만들고 있다.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젊은이들에게 물어보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돈이라고 대답한다. 사회가 변하여 이제는 가족 간의 화목이나 친구의 우정보다는 거래관계자와의 관계를 더 중요시하고 자신의 노력에 의한 나름대로의 성공 목표달성보다는 우연한 기회포착이나 복권주의 같은 예기치 않은 순간의 망상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다. 인천항의 미래를 생각하면 심각함을 감추기 어렵다. 인천항의 미래를 위해 지금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를 돌아보면 실적위주의 행정으로 관련부처들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있다. 국가경제의 원동력으로 100여년을 넘게 기여하고 있는 인천항을 재개발이란 명목으로 위락시설을 만들 계획인가 본데 그래가지고 과연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인천항은 살아남고 국가경쟁력은 커질지 의문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지금 잠시 경제적 침체기에 있고 다른 항에 비래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갑문이용에 불편이 있다고 해서 신항으로 모든 것을 내보내고 내항을 점차적으로 위락시설화하거나 주거지로 만든다면 단기간에는 경제적 효과가 나타나는 것 같겠지만 그것은 현직관리의 치적 쌓기에 도움을 줄지언정 인천지역경제나 국가기반산업의 활성화에는 막대한 피해를 주게 될 것이다. 인천신항이 계획도 세워지기 전에 중국에서는 동북아는 물론 아시아 태평양을 포함하는 허브항으로의 발돋움을 하기 위해 천진항이나 양산항의 낮은 수심을 보완하도록 외항에 인공섬을 만들어 2000년대 이후 까지 바라보는 거대항만을 조성하여 이미 운영을 하고 있는데 이에 맞설 항만개발을 하기는커녕 있는 항만도 없애고 관광자원화하려 하는 것은 결코 미래를 내다보는 정책이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지난 관선시장과 민선시장 관계없이 인천항에 대한 투자의 중요성에 대하여 수차례에 걸쳐 충언하였고 미래를 대비하지 않고는 비전이 없다고 하였다. 치적도 좋지만 실제적인 가치가 있는 치적을 만들라고 말하여 주고 싶다. 순간의 판단 실수인지 알면서도 모르는 체 치적을 만들기 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떠들썩하게 홍보하고 대단한 기적이 일어날 것처럼 파헤친 경인아라뱃길의 경우 겨울에 얼고 여름에는 부패하여 문제가 되는 것을 보고 있으면서 내항의 재개발 운운하는 것은 많은 항만인들을 당혹하게 하고 있다. 국민의 혈세로 멀쩡한 항만을 유원지로 만들고 지역 경제를 마비시킬 것인데 상황을 모르는 일부 동조자들은 항만산업을 사양 산업이니 공해 유발 산업이나 하고 있는데 그것은 물질문명의 각종 혜택은 받으면서 살아도 그것을 생성하는 과정은 거부하는 것과 같으며 밥은 먹으면서도 쓰레기처리는 더럽다거나 자동차는 타고 다니면서 공해를 배출하는 나쁜 운송수단으로 정의하는 것과 다름없다. 경제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생산설비가 중요하듯 물류도 중요하다. 대단위 물류의 중심지 그곳이 바로 경제의 중심지가 되는 것이다.

가스해운
1998년 LNG인수기지가 평택에 만들어진 후 인천기지가 들어서면서 LNG운반선의 예선만을 전담하는 한국가스해운설립 당시 기존의 평택 업자들은 당연하다는 듯 인천까지 장악하려 하였다. 당시 인천 업체는 참여를 요구 지역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당시 가스공사 사장을 면담하였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해 지역 국회의원을 통해 참여의 길을 만들어 줄 것을 부탁하였고 당시 지역 국회의원이던 S의원이 가스공사 사장과 협의하려 하였지만‘국회의원은 국정에만 신경 쓰고 우리의 일에는 참견말라’는 쓴소리만 듣고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지역의 경제인으로서 그대로 물러나 타지역의 업자가 들어와 내 눈앞의 바다에서 작업을 하데 놔둘 수는 없었다. 지속적인 관계자와의 면담과 다양한 경로의 압력으로 결국 25%의 지분참여만 가능해졌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결국 대통령에게 까지 보고되고 국영기업체나 대기업의 횡포로 중소기업영역을 빼앗는 것은 안 되며 국가경제의 원활하고 단단한 성장을 위해서는 중소기업의 설자리 만들어줘야 한다는 나의 주장이 설득력있게 전달되어 관계장관과의 면담을 통해 전체지분을 인천업체에게 달라고 하였으나 인천업체 75% 평택업체 25%로 해서 가스해운의 지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총 20척의 예인선을 보유하고 예선업계에서 나름 이름 있는 회사가 된 것은 우연한 기회에 전 사업자로부터 인수 제의를 받아 어려운 가운데 인수하거나 양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배포 큰 나의 아내가 빚을 내어 [대륙호]를 인수하였고 또 대륙호가 좌초되었을 때 나의 폐선 의견에 굴하지 않고 수리를 강행하여 작업을 한 것이 가장 큰 공이라고 생각된다. 지금 비교적 오랜 시간 국제적인 경기의 불황으로 인천항에도 찬바람이 불고 있지만 어려운 가운데도 최선을 다하며 회사의 안정을 꾀하고 있는 아들들을 믿는다. 

맺는 말

 
꽃 같은 세월 다보내고 어느새 80이 넘어 이제는 인생의 종착역을 향해 가고 있고 세월을 잡아둘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은 여러 가지 미련만을 남기는 것 같다. 생은 인연의 연속이다. 그동안 달려온 인생길에 동반자로 만나 아내와 자식들을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가두고 독선적인 삶을 살지는 않았는지 돌이켜본다. 동고동락한다는 부부이지만 62년간의 결혼생활 중 아내와 행복하였던 시간들보다는 남다른 시집살이를 시켜 젊어서의 고운 모습은 다 사라지고 주름 잡힌 얼굴로 잠자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 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철부지 19살 아무것도 모를 때 나에게 시집와서 부산 동대신동에서 살던 시절 구득수원지에서 나무 해다 불 때어서 밥하던 모습과 항아리에 물 길어다 일곱 명의 시집식구를 위해 헌신하던 그 모습, 사남매를 키우면서 마음대로 과자 한 조각 사 먹이지 못하고 목욕탕 한 번 제대로 가지 못하면서 피나는 고생으로 살아온 아내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는 가슴의 상처로 남아 있다. 고마운 사람, 미안한 사람 내 아내의 헌신에 이 책을 빌어 진심으로 감사한다. 내가 세상에 나와 만난 수많은 사람들 중에 아주 특별한 인연이 있었기에 만나게 된 사람들 그래서 내 가족이 되었고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식이 된 것이니 사랑하는 아내에게 씻지 못할 아픔을 준 것에 용서를 빌며 그동안의 수고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1978년 빚을 얻어 한척의 낡은 목선으로 창업한 대륙상운은 이제 맏아들인 김일동 사장이 이끄는 인천의 대륙상운과 둘째 아들인 김진동 사장이 이끄는 평택의 대륙상운으로 성장하여 우리나라 예선업계를 리드하고 있는 것이 보람을 느낀다. 대륙상운은 앞으로 두 아들이 앞장서서 건실하게 성장시켜서 사랑받는 회사, 자랑하고 싶은 회사로 만들고 사회적 기여에도 최선을 다하여 주기 바란다. 나는 별다른 종교가 없지만 어느 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나의 지나온 삶에 대하여 감사하고, 앞으로 남은 시간들에 대하여 감사하며 살아갈 것이다. -  갑오년 4월 김수금 

맺는 말
62년이라는 긴 세월을 남편과 살아오면서 힘들고 어려우누 일도 많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아들 둘, 딸 둘을 아무 탈 없이 키워내고 남편의 해상생활을 뒷바라지하며 혹시라도 아버지와 떨어져 있는 아이들이 잘못되지 않도록 엄마의 사랑보다는 엄격함으로 키운 것이 지금도 마음에 걸리지만 그 아이들이 자라서 이제 나름대로 잘 살아주고 있는 것에 부모로서 보람을 느끼게 된다. 가정에서의 일과는 달리 내 인생 80여 년 동안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1977년 봄 안개로 인한 대륙호의 좌초는 나에게 일생일대의 모험을 하게 하였다. 먼 바다도 아닌 눈앞의 작약도 앞바다에서 전복한 대륙호는 나의 전 재산이기도 하지만 우리 가족의 미래였다. 모래펄에 벌렁 누운 대륙호의 배 밑바닥을 두드리며 통곡하던 그날은 험난했던 시집살이 때보다도 더 암담하였다. 때마침 아파서 쉬고 있던 남편은 2차 오염으로 더 큰일이 생기기 전에 폐선하라고 하였지만 어떻게 마련한 배인데 폐선을 한다는 말인가. 남편에게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테니 걱정말라고 하면서도 내 마음속에는 불안함이 떠나지를 않았다. 그러나 황망한 중에 부산의 전구식 기관장을 불러올리고 수소문하여 배를 고칠 사람을 불러 모아 10여일 만에 대륙호를 살려낸 것은 아마도 지금의 대륙상운그룹 탄생을 위한 시험이었던 것 같다. 이제 20여 척의 예인선과 120여 명의 사원을 거느린 대륙상운은 인천항과 평택항의 예인업계를 리드하면서 대한민국 항만산업의 주역으로 성장하여 나갈 것을 생각하니 지난날의 고생은 사라지고 흐뭇한 마음이다. - 갑오년 4월 곽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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