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혼돈의 분쟁(分爭)

아직도 세계 곳곳에는 정권획득과 영역다툼을 위해 분쟁과 내분이 계속되는 국가들이 있다. 원인 소멸로 분쟁이 종식된 곳이 있는가 하면, 분쟁은 잠잠해 졌지만 여전히 불씨가 남아 언제 또다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 같은 지역과 지금도 대립양상을 띠며 피를 흘리고 있는 내전 국가들이 있다.



역사적 배경
기회와 모험의 땅 아프리카! 하지만 그 동쪽 끝자락에는 신마저 버린 땅이 있다. 에티오피아와 케냐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 ‘소말리아(Somalia)’가 바로 그곳이다. 여타 아프리카 국가들이 복잡한 문화적, 종교적 배경과 다양한 인종적 구성을 바탕으로 하는 것과 달리 소말리아는10세기 이후 천여년 동안 비교적 동일한 인종적 뿌리와 역사적 전통을 가진 국가였다. 소말리아인들의 시기적, 종족적인 기원과 관련하여 학자들간 다양한 이견이 엇갈리지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소말리아인들의 종족적 뿌리는 10세기경을 전후로 하여 아랍 세력이 현재의 소말리아 영토로 넘어오면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유목생활을 통해 형성된 동류의식과 이슬람이라는 종교적인 동질성을 통해 19세기 후반까지 소말리아인들은 내부적으로는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서구 열강들, 특히 이탈리아와 영국이 소말리아를 식민지배하면서 내부적인 균열의 시대는 싹트기 시작하였다. 19C후반~20C에 걸쳐 이태리와 영국으로 분할되는 식민지 지배기를 통해 소말리아의 북부와 남부가 이태리령과 영국령에 놓이면서부터 두 지역 간 갈등의 골은 서서히 깊어졌고 이로 말미암아 소말리아는 내외부적으로 정치, 경제적 요인과 맞물리면서 결국 피비린내 나는 내전으로까지 이어지는 역사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분쟁의 발발요인
소말리아 내전의 직접적인 요인은 부족간 갈등과 경제적 불안 그리고 지배세력의 비민주적인 정치적 탄압 등을 들을 수 있다. 1960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소말리아는1969년 군 장성 바레(Mohamed Siad Barre)가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사회주의 일당독재 체제를 출범시켰다. 이후 Barre 군사정권은 자기 부족 위주의 정책으로만 일관하며 22년간의 장기집권을 펼쳤다. 그러자 이에 반발한 부족들이 통일소말리아회의(USC)를 결성하고, 1991년 1월 쿠데타를 일으켜 Barre를 축출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소말리아에는 군벌세력파가 생겨나게 되는데 통일소말리아회의(USC)에 참여한 무장군벌인 아이디드파, 모하메드파(이후 Mahdi파로변경), 아토파등이 바로 그 핵심 군벌이었다. 이후 이 군벌 세력들은 정권 쟁탈을 위한 부족 간의 치열한 대립으로 격화되어 결국 내전에 휩싸이게 되었다. 무정부 상태에 놓인 소말리아는 아이디드파의 우세가 지속되는 가운데 내전은 점점 격화되어 갔고 사상자와 난민이 속출하는 가운데 기회의 땅은 피로 얼룩지게 되었다.

유엔 평화유지군 파견
소말리아의 사태가 국제적인 관심을 끈 계기가 된 것은 1991년 계속된 내전과 심한 가뭄으로 인해 국민의 과반수가 넘는 420만명이 기아에 직면하여 죽음의 땅으로 변하면서부터이다. 1992년 4월 UN은 UN소말리아활동(UNSOM)을 결의하고 1차로 평화유지군(PKO) 4500명을 소말리아에 파견하여 대량 아사를 막는데 일단 성공했다. 또한 UN은 1992년 12월도 내전의 조기 종식과 물자수송로의 확보를 위해 미군 중심의 다국적군을 파견하였다. 1993년엔 USC의 모하메드 잠정대통령파와 반대파인 아이디드 장군파를 포함하여 범 군벌세력들이 1월4일 아디스아바바에서 UN의 중개에 의해 소말리아평화회의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최대 군벌세력인 아이디드파는 UN에 의한 국민화해회의의 개최에 반대를 표명했고, 미군에 의한 무장해제 요구도 거부하였다.

▲ 당시 모가디슈의 반군들이 끌고다닌 미군의 사체
미국주도 분쟁종식 실패로 끝나
1993년 5월에는 UNDOES1을 교대하여 1차보다는 인원이 30,800명으로 대폭 증가된 UNSOM2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1993년 6월 5일 PKO에 참여중인 파키스탄병 24명이 아이디드파 민병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UNSOM2의 지휘부는 아이디드의 체포를 명령하였고, 미군은 아이디드파의 주요 거점 및 시설에 대한 폭격을 개시하였다. 아이디드의 체포를 둘러싸고 구속, 재판 등의 곤란한 문제들이 발생하여 결국 1993년까지 사망자 70명을 포함한 279명의 사상자를 내고 무위로 끝났다. UN은 자신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말리아 사태가 해결 조짐을 보이지 않자 결국 UNSOM2의 활동을 실패라고 규정하고 1993년 12월부터 단계적인 철수를 개시하였다. 1995년 3월2일 UN PKO(파키스탄군)과 1500명의 미 해병대가 철수를 완료하자, 기회를 보던 아이디드파는 수도권에 대한 제압을 개시하여 동년 5월에 아이디드가 일방적으로 대통령에 취임하고 신정부 수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사태가 아이디드파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는 듯 보였으나 아이디드가 1996년 7월말 전투 중 부상을 당하여 8월1일 사망하자 아이디드의 아들을 후계자로 내세우고 전투의 지속을 발표하였다.

내분 정전회의 계속 결렬
그 후 반군 간에 정전을 모색하는 회의가 수차례 개최되었으나 매회 각 군벌간의 이해 상충으로 회의는 결렬되고 말았다. 그러나 최대파인 아이디드파와 마디파가 주축이 되어 협의는 계속 진행 중에 있었다. 1996년 10월 15일에는 케냐 대통령의 중개로 무장 3파(마디, 아이디드, 아토)는 즉시 정전에 합의하는 성명을 발표하였으나 같은 해 12월14~15일 수도 남부에서 아이디드파와 민병대가 충돌하여 정전 합의는 붕괴되었다. 그러다가 1997년 1월 모가디시오에서 26당파와 4명의 간사에 의한 협의 결과 국민구국평의회(CSN)의 결성하는데 합의하였으나 또다시 각 군벌간의 이해관계가 상충되어 결렬되었다.

1997년 12월에는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아이디드파와 마디파가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1998년 2월15일에 각 군벌 및 부족 대표 450명이 참여하는 평화회의를 개최하기로 합의를 하였다. 이에 대해 각 군벌의 입장은 달라 일부 파벌은 카이로 합의의 무효를 주장하며 지속적으로 전투를 재개하였다. 1998년 1월 26개 파벌은 이디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에서 아이디드파와 마디파가 합의한 내용을 검토하고 아이디드파에게 2월의 평화회의 전까지 바이도아 지역을 반환하라고 촉구하였다. 그러나 아이디드파는 이를 끝내 거부하고 Rahabwein 저항군과의 전투를 지속하고 있다. 이로써 한때 소말리아 분쟁양상은 거대군벌 대(代) 다수의 소수군벌에 의한 투쟁으로 변화하였다.

끝나지 않은 분쟁의 불씨
소말리아 내전은 2000년대에 들어서도 군벌과 정부 간의 갈등으로 지속되고 있다. 소말리아는 이디오피아가 소말리아의 불안정을 의도적으로 도모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으나 이디오피아는 이를 극구부인하고 있다. 케냐는 소말리아로부터 무기밀수를 봉쇄하기 위해 국경상의 모든 교역을 중단하였으며 미국 테러사건 이후 오사마 빈 라덴이 소말리아로 은신할 수 있다는 소문에 의해 유엔의 감시가 더 심해지기도 했다. 소말리아는 아직까지 무정부 상태로 지난2004년10월10일 대통령을 선출했다. 수도인 모가디슈의 치안이 매우 불안하기 때문에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 외곽에 있는 실내경기장에서 대통령 선거 투표를 했다. 3차 투표까지 실시 한 결과 에티오피아가 지지하는 군벌 압둘라히 유수프아메드가 5년 임기의 소말리아 과도정부 대통령에 선출됐다. 하지만 소말리아 내전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고 현재까지도 북부 소마릴란드를 비롯한 군벌 사이의 대립이 계속되고 있어 소말리아전체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통일정부가 존재하지 않는 혼돈의 무정부상태로 있다. 또한 최근4월4일에는 우리의 선박 동원호(동원산업소속)가 소말리아 인근해역을 항해하다가 소말리아 반군으로 추정되는 세력에 의해 납치된 사건도 발생했었다.

승자 없는 전쟁
소말리아 사태는 정권 장악을 위한 군벌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내전과 가뭄이 동시에 발발하여 생겨난 사태이다. 전쟁에 의한 사상자와 기아에 의한 아사자가 1992년 한해에만도 40만명이 발생하는 등 수십만이 사망하고 수백만의 난민이 발생한 인재이자 천재에 의한 비극적인 분쟁이다. PKO와 미국을 주축으로 한 다국적군을 파견한 유엔의 노력도 내전에 휘말려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소말리아는 국제사회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었다. 이후 3대 군벌들은 전투를 지속하였고 결국 최대군벌인 아이디드의 사망이후 해결 국면에 접어들어 군벌간의 정전은 합의된 상태이나 소수 반군들의 투쟁은 현재도 지속되고 있다. 동 분쟁은 국제사회 및 주변국에 큰 영향을 미친 분쟁으로 대규모의 인도적 지원과 난민 구조 활동이 실시된 바 있다. 대한민국도 인도적 차원에서의 상록수 부대가 평화유지군으로 활동하였었다. 그러나 내전의 전개과정과 미국의 역할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소말리아 사태에 대한 많은 연구결과들은 미군이 투입되기 이전에 이미 소말리아의 기아사태와 혼란은 어느 정도 진정된 것으로 평가한다. 따라서 유엔평화유지군과는 별도의 미군의 추가배치는‘인도적’목적보다는 수에즈운하가 맞닿아있는 아프리카 동북부 지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확대를 목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결국‘제국주의적’이었던 미국의 개입이 소말리아인들의 저항을 야기했다는 평가이다. 한 소말리아 청년은 자신의 조국을 이렇게 표현했다.
“소말리아를 지도에서는 찾을 수 있지만 이 나라는 이미 죽어 없다.” NP

철수로 이어진 ‘아이디드’체포작전
소말리아 내전종식을 위해 골머리를 썩던 미국은 1993년 10월3일, 소말리아 최대군벌의 수장‘아이디드,와 중심각료 체포작전(작전명:아이린)을 감행한다. 우리에게 영화‘블랙호크다운’으로 잘 알려진 이 작전에서 1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라는 미군의‘아이린’작전 예상시간은 완전히 어긋나고 다음날 아침까지 반군과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수도‘모가디슈’에서 계속됐다. 결국 파키스탄군의 도움을 받아 투입됐던 미군 특수부대원들은 빠져나오게 되지만. 이 작전에서 미군은 19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소말리아인 1,000여명이 목숨을 잃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작전 결과를 낳는다. 문제는 이 작전에서 미군헬기 2대가 격추되었는데 그중 헬기조종사1명이 소말리아인들에게 생포되고 다른 한명의 시체는 난자당해 시내곳곳에 끌고 다니는 장면이 미국의 대표적인 방송인CNN을 통해 방영되었던 것이다. 이 끔찍한 장면을 본 미국은 경악했고 클린턴정부는 소말리아 사태를 원점에서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또한 자국민이 천여명이나 죽은‘모가디슈 학살’에 분노한 소말리아인 1만7000명이 미군 기지에 대한 총공격에 자원하게 된다. 소말리아인의 거센 저항의 정보를 입수한 클린턴정부는 사태를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닫고 결국 소말리아에서 철수를 결정한다. 이후 미군은 단계적철차를 밟아 1995년에 완전히 소말리아에서 철수하였다. 결국 미국주도하에 이루어진 소말리아 평화를 위한 재건계획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만 남긴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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