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와 설화가 공존, 남한산성(南漢山城)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위치한 ‘남한산성’이 지난 6월 제3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국내 11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당시 삼전도에서 당한 치욕의 상징에서 우리 선조의 자주정신과 극난극복의 결정체로서 국민과 정부의 관심이 높아져 보존과 관리의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됐다. 오랜 세월 한반도의 역사와 함께하면서 독특한 문화유적과 자연이 숨 쉬는 세계 속의 우리 문화유산인 남한산성의 문화재와 설화를 알아본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1호, 수어장대(守禦將臺)

▲ 수어장대
수어장대는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은 누각으로 조선 인조 2년(1624)에 남한산성 축성과 함께 축조된 동(내ㆍ외), 서, 남, 북의 5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장대이다. 청량산 정상(해발 482m)에 위치하고 있어 성내와 인근의 양주, 양평, 용인, 고양 및 서울, 인천까지도 조망할 수 있다. 당초엔 단층누각으로 축조하고 서장대라 불리었으며 남한산성의 수어를 맡았던 수어청(전, 좌, 우, 중, 후의 5관이 소속됐음) 중 우영장이 진을 치고 있었던 곳이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엔 인조가 친히 군사들을 지휘, 격려하며 청태종의 13만 대군과 대항해 47일간 항전하던 곳으로 영조 27년(1751)엔 유수 이기진이 왕명으로 단층인 서장대를 2층 누각으로 증축하고 외부 편액은 수어장대, 내부편액은 무망루(無忘樓)라 이름했다. 무망루라 함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인조의 아들인 효종이 볼모로 심양(현 봉천)에 잡혀 갔다가 8년 만에 귀국해 청나라에 대한 복수심으로 북벌을 꾀하다 승하한 원한을 후세에 전하고 그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그 후 영조, 정조가 효종의 능소인 여주 영릉에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곳 장대에 들러 하룻밤을 지내면서 병자호란 때의 치욕을 되새겼다고 전한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호, 숭렬전(崇烈殿)

▲ 숭렬전과 숭렬전 제향
숭렬전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과 산성축성 당시 책임자였던 이서의 영혼을 함께 모시고 음력 9월 5일 제사를 모시는 사당이다. 인조 16년(1638)에 지어졌으며 정조 19년(1795)에 숭렬이라고 쓴 현판이 내려졌다. 가장 위쪽에 온조왕을 모신 본전이 있으며 아래쪽으로 이서 장군을 모신 부전과 제기와 제사용품을 보관하던 전사청 건물이 있다. 협문 아래쪽으론 교육장소인 강당과 정문인 솟을삼문이 있다. 숭렬전은 신분이 다른 왕과 신하를 함께 모신 것이 특이한데, 이는 병자호란 당시 인조의 꿈과 관련이 있다. 아울러 숭렬전 제향을 지낸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인조대왕의 꿈에 온조왕이 나타나 혼자 있기가 쓸쓸하니 명망이 있는 신하를 같이 있게 해달라고 했다. 이에 인조는 남한산성을 쌓은 공로자인 이서를 같이 모시게 했다고 한다. 숭렬전에선 매년 음력 9월 5일에 제향을 올리고, 매월 삭망(朔望, 매월 1일, 15일)에 참봉과 유사가 분향례를 진행하고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 청량당(淸凉堂)

▲ 청량당과 현절사
청량당엔 다음과 같은 설화(사연)가 전해진다. 청량당은 이회와 그의 처첩을 모신 사당으로 이회는 조선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축성 때에 동남쪽의 축성공사를 맡아 했으나 축성 경비를 탕진하고 공사에 힘쓰지 않고 기일 내에 마치지 못했단 억울한 모함을 받고 무참히 사형을 당했다. 그의 처첩도 남편의 성 쌓는 일을 돕기 위해 삼남지방에서 축성자금을 마련해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처형됐단 소식을 듣고 강물에 투신자살했다. 그 후 그가 이룬 공사를 재조사해보니 견고하고 충실하게 축조돼 있어 그의 죄가 무고함이 밝혀져 서장대 옆에 사당을 지어 그의 넋을 달래게 했다. 본당의 전면엔 이회의 초상화가 있고 좌, 우편엔 벽암대사와 이회 처첩의 초상화가 봉안돼 있는데 원래 것은 6ㆍ25사변 때 분실되고 지금 있는 것은 그 후 새로 만든 것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호, 현절사(懸絶祠)
현절사는 병자호란 때 적에게 항복하기를 끝까지 반대했던 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삼학사의 우국충절을 기리는 곳이다. 나라에선 청나라에 강제로 끌려가 곤욕 끝에 참형을 당한 삼학사의 영령을 위로하고자 숙종 14년(1688)에 유수 이세백의 주도로 세워졌으며 숙종 19년(1693)봄에 사액됐다. 그 후 숙종 25년(1699)에 이르러 삼학사와 같이 항복하기를 반대했던 김상헌, 정온을 함께 모시고 있다. 이들의 충렬과 대의는 높게 받들어져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현절사는 그 대상에서 제외됐다. 아울러 현절사 제향을 지낸다. 병자호란 당시 척화의 의리를 내세워 병자호란 후 심양에 끌려가 충절을 지키다가 그곳에서 비운을 맞은 삼학사인 오달제, 윤집, 홍익한과 좌의정 김상헌, 이조참판 정온의 위패가 배향된 현절사에서 매년 9월 10일에 제향을 올린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호, 침괘정(枕戈亭)

▲ 침괘정과 연무관
침괘정은 무기제작소라 알려져 왔으나 온돌과 마루방, 회랑처럼 된 툇마루 등 건물 구조로 봐 집무실로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최초의 건립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주변에 있던 무기창고를 명나라 사신 정룡이 ‘총융무고’라 이름했단 기록으로 봐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영조 27년(1751) 광주유수 이기진이 고쳐 짓고 ‘枕戈亭’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침과 정’을 ‘침괘정’이라 부르는 까닭은 명확하지 않다. 무기제작소와 무기창고는 침괘정 부근에 별도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호, 연무관(演武館)
연무관은 군사들의 훈련을 위해 건립한 곳으로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 때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엔 연무당이라 부르던 것을 숙종 때 김재호로 하여금 다시 짓게 하고 연병관이란 편액을 하사했다. 정조 때엔 수어영이라 개칭했으나 그 뒤에도 통칭 연병관 또는 연무관이라 부르고 있다. 연무관 규모는 약 330㎡로 규모가 크고 육중하며 높은 기단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연무관 남쪽으로 넓은 규모의 연병장이 있어 병사를 조련하거나 왕의 행차 시 사열(부대의 훈련 정도나 장비 유지 상태를 검열하는 일)하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또한 연병장의 일부는 5일마다 장터로도 활용됐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4호, 지수당(地水堂)

▲ 지수당과 장경사
지수당은 조선 현종 13년(1672)에 부윤 이세화가 건립한 정자로 건립 당시엔 정자를 중심으로 앞뒤에 3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2개만 남아 있다. 정자의 동쪽엔 부윤 이세화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고 제 3연못지로 추정되는 지역은 현재 논으로 바뀌어 있다. 정자의 남쪽엔 서에서 동으로 계곡물이 흐르고 있다. 정자 옆의 연못은 ‘ㄷ’자형으로 파서 연못이 정자를 둘러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으나 을축년 대홍수(1925)때 매몰된 것을 근래에 고증을 통해 복원한 것이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5호 ,장경사(長慶寺)
남한산성 동문 안에서 동복쭉 약 500m 거리의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된 장경사는 대웅전과 종무소, 산신각, 종각, 요사채 2동, 탑 등으로 구성돼 전통 사찰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남한산성 내 10개의 사찰 모두가 일제에 의해 파괴됐지만 그 중에서 가장 적게 참화를 당한 장경사 하나만이 당시의 모습을 일부나마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경기도 기념물 제111호, 망월사지(望月寺址)

▲ 망월사와 개원사
남한산성 10개의 사찰 중 가장 오래된 고찰로 고려 망월암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이 사찰은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성을 정할 때 한양에 있었던 장의사를 허물고 그 불상과 금자 화엄경 한 벌, 금정 하나를 이리로 옮겨 창건했다고 한다. 그러나 <남한지>에서 기록하고 있는 옛 모습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아마 이곳도 일제의 무기, 화약 수거령에 예외적인 사찰이 되지 못하고 그때의 환란을 피하지 못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그 자리에 사찰을 신축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경기도 기념물 제119호, 개원사지(開元寺址)
성내의 남쪽에 위치하는 사찰로 개원사 일주문 안의 우측에 있는 사찰의 연혁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개원사는 인조 2년에 임진왜란으로 파손된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전국에서 모인 승도들을 총지휘했던 본영 사찰로 창건되었다” 1907년 일제에 의해 소실되고 새로 지어 현재의 모습으로 유지하고 있다.

이회장군/매바위와 청량당

 

조선시대 남한산성의 성곽은 본격적으로 1624년(인조 2년)에 수축하기 시작해 일반 민중과 승려들의 참여로 2년 후인 1626년 11월 완성됐다. 이 성역을 쌓을 때 한 설화가 전해지는데 이회장군과 송씨의 설화이다. 산성축성의 총책임자는 이서이고, 서북성은 벽암대사가 이끄는 승병들이, 동남쪽은 이회가 나눠 쌓았다. 벽암대사는 공사를 완공했는데 이회는 사재를 팔아서 경비를 충당하며 축성해도 지세가 험해 성 쌓기가 늦어졌고, 경비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공사경비를 주색에 탕진했단 누명을 썼다. 이회는 구차한 변명 없이 “내 죄가 없다면 매 한 마리가 날아올 것이다”란 유언을 남기고 참수당했다. 그런데 실제로 이회 장군의 목을 베자, 이회 장군의 목에서 매 한 마리가 튀어나와 근처 바위에서 슬피 울다가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멀리 날아가 버렸다. 사람들이 그 매가 앉았던 바위를 보니 매 발톱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축성공사 한 성체를 자세히 살펴보니 이화장군이 쌓은 성은 견고하고 과학적인 축성기법으로 만들어졌음을 알게 돼 무고였음이 드러나고 이회부인 송씨는 축성자금을 3남 지방으로 가서 마련하고 돌아와 송파나루에서 그의 죽음을 알게 돼 통곡하며 모금한 쌀을 강물에 뿌리고 죽음을 선택하니 이후로 이곳을 쌀섬여울이라고 불렀다. 이후 사람들은 이회장군의 목에서 나왔던 매가 앉았던 바위를 매바위라 부르고, 이 바위를 신성시하기 시작했다. 원래 이 매바위엔 실제로 매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어떤 일본인 관리가 남한산성을 둘러보다가, 바위 위의 매 발자국을 보고 참 신기란 일이라 여겨서 그 매 발자국이 찍힌 부분을 도려내어 떼어 갔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그 일본 관리가 떼어갔음을 말해주는 사각현의 자취만 남아 있다고 한다. 수많은 남한산성의 신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영험한 신으로 모셔지는 이는 ‘횡수대감’또는 ‘신장군’이라 불리는 이회장군이다. 그가 산성마을의 도당신으로 모셔지게 된 데엔 앞서 ‘매바위에 남긴 억울한 사연’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이렇게 이회장군이 억울하게 죽은 것이 밝혀지자 마을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크게 안타까워하고, 그를 기리는 뜻에서 그가 죽임을 당한 수어장대 곁에 사당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회장군이 억울하게 횡수(橫數: 흉한 운수)로 죽었기 때문에 ‘횡수대감’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으며, 사당 이름도 ‘대감당’이라 부르며 도당신으로 모시게 됐다. 이처럼 마을 사람들에게 깊은 신앙의 대상으로 자리 잡은 이회장군은 정월에 홍수맥이라고 해 일 년 동안 집안에 드는 각종 흉한 운수나 재앙을 막아내고, 집안이 평안하길 바라는 치성의 대상이었다. 칠월칠석날엔 아이들의 수명장수를 기원하는 칠석맞이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벌봉에 깃든 정기를 날려버린 청태종

 
남한산성 동장대지 동북쪽에 커다란 바위가 있다. 바위가 포개어져 가파르게 솟아있고, 그 아래엔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틈이 나있다. 이 바위를 벌봉 또는 벌바위라고 부른다. 옛날부터 벌이 이 바위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해서 벌암, 벌바위, 벌봉이라 불렀다고 한며 암문 밖에서 이 바위를 보면 그 모양 또한 마치 벌과 비슷하다고 한다. 벌봉은 예부터 영험이 있는 바위라고 해서 치성을 드리는 장소였다. 지금도 이 바위는 정기가 서려 있어 그 영험이 대단하단 소문 때문에 치성을 드리러 오는 무속 신앙인들이 많다. 바위 주변엔 제단도 따로 마련돼 있을 정도이다. 이렇게 영함하단 벌봉엔 청태종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청나라 태종(태종의 고모라는 이야기도 있다)은 용골대를 조선에 비밀리에 보내어 남한산성의 지도를 그려오게 했다. 명을 받은 용골대가 남한산성에 도착해 보니, 남한산성은 하잘 것 없는 조그만 산성이었다. 그래서 구태여 세밀하게 조사해 지도를 그릴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 대강 대강 지도를 그리고 청나라로 돌아갔다. 그러나 용골대가 그린 그림을 받아 본 청 태종은 용골대에게 강의 위치, 조선 도성의 위치 등을 자세하게 물어보는 것이었다. 용골대가 대답하길, “강은 산성 서쪽에 있고, 도성은 강 건너편에 있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청 태종은 크게 화를 내면서 꾸짖길, “네 말과 같이 강과 도성이 서편에 있으면, 남한산성의 산세가 응당 남북이 길고 서북이 짧을 것이거늘, 네 어찌 반대로 서를 길게 하고 남북을 짧게 그려왔는가. 빨리 다시 조선으로 가서 이번엔 산성의 작은 나무 하나까지 빼놓지 말고 그려 오랴. 만약 명대로 하지 않으면, 네 목을 베겠다”고 했다. 이에 용골대가 겁을 먹고 다시 조선으로 들어와서 남한산성의 성곽, 바위, 골짜기, 언덕 등을 빠짐없이 살피고 지도에 그렸다. 그리고 다시 청나라로 돌아가 지도를 바쳤다. 청 태종은 용골대가 그려온 지도를 보곤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키면서 말하길, “이 곳은 벌봉이라는 바위가 있는 곳이다. 이 바위는 천상 벽력성의 정기가 깃든 바위이다. 이 벽력성은 남극성이 범하게 되면 망하고 만다. 그런데 나의 주상이 곧 남극성이나, 만일 조선 국왕이 벌봉을 안에다 두고 성을 쌓았더라면 우리 청나라가 쉽게 나한산성을 공격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벌봉이 성 밖에 있다. 장래에 우리가 조선을 공격하면 조선 국왕은 남한산성으로 피할 것이다. 이때 우리 청나라 군사가 산성 밖에 있는 벌봉으로 가서 바위를 먼저 깨트리고, 벽력성의 정기를 멸하면 산성을 쉽게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다”하고는 조선 침략을 결정했다. 마침내 청 태종은 조선을 침략했고, 그의 예상대로 당시 조선의 임금이었던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다. 이에 청 태종은 군사를 이끌고 먼저 벌봉으로 가서 바위를 깨트렸다. 그랬더니 바위 위로 연기가 나면서 벌봉에 깃들었던 벽력성의 정기가 흩어져 마치 벌떼와 같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한 달 후 청 태종은 남한산성을 공략해 마침내 인조의 항복을 받아 냈다. 후일에 나라에서 이 벌봉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는 다신 임금이 무릎 꿇는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벌봉 밖에다 성을 재차 쌓았다고 한다. 지금의 벌봉이 마치 쪼개진 것처럼 틈이 벌어져 있는 것은, 병자호란 때 청 태종이 벌봉에 어린 정기를 날려 버리려고 깨트렸던 자국이라고 한다.

청나라 군사들을 물리친 벌봉의 벌떼
벌봉엔 청 태종이 바위를 깨트림으로써 정기가 날아가서 우리가 당한 삼전도의 치욕 말고 다른 이야기도 전한다. 이와는 반대로 적극적으로 청나라 군사를 물리친 이야기도 전하고 있어 흥미롭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가 남한산성을 공격하려 벌봉 근처에 이르렀다. 그러나 어디선가 난데없는 벌떼가 나타나 청나라 군사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벌떼에게 청나라 군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때 청 태종의 매부도 벌에 쏘여 죽었다고 한다. 만약 벌봉을 남한산성 안쪽에 두고 성을 쌓았더라면 벌떼가 청 태종마저도 쏘아 죽여서 우리가 승리할 수 있었을 것이란 이야기도 함께 전한다.

임금의 곤룡포를 받은 서흔남

 
남한산성 전 관리사무소 앞쪽 화단엔 묘비가 서 있다. 묘비의 위쪽은 깨져 없어졌고, 남은 묘비마저도 마모돼서 확실한 형체를 알 수 없지만, 남아 있는 묘비명엔 서흔남(徐欣男)이란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원래 이 묘비는 동문 밖 검복리 병풍산 묘소에 있었는데, 그 후손이 화장을 하면서 묘역이 없어짐에 따라 이쪽으로 옮겨온 것이라 한다. 서흔남의 묘비를 옮긴 까닭은 병자호란 때 인조 임금을 구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쳐, 임금의 곤룡포를 하사 받기 까지 한 그를 지속적으로 기리고자 함이었다. 서흔남의 활약상을 말하는 이야기는 여러 가지가 전해지는데, 이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황급히 피난을 왔다. 사태가 다급해지자 인조를 모시던 신하들은 하나 둘 흩어져, 인조는 얼마 남지 않은 신하들과 함께 송파강을 겨우 건널 수 있었다. 강은 건넜으나 날은 어두워지고 설상가상으로 눈까지 흩날려 인조 일행은 남한산성까지 올라 갈 일이 아득했다. 인조는 신하의 등에 번갈아 업혔으나 지친 신하들은 얼마 못 가서 주저앉기를 거듭했다. 더구나 남한산성으로 가는 산길은 험했고, 때마침 눈이 깊이 쌓여 걸어서 올라가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 때 한 총각이 굽 높은 나막신을 신고 나무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인조는 그 총각에게 “나를 좀 업어서 성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이에 그 총각은 나막신을 거꾸로 돌려 신더니, 인조를 업어서 성까지 한숨에 모시고 갔다. 남한산성에 무사히 도착한 인조는 산성으로 들어올 때, 불편하게 나막신을 거꾸로 돌려 신은 것이 못내 궁금했다. 그래서 “왜 나막신을 거꾸로 신었느냐”고 물었다. 이에 총각은 “당신은 피난민 같은데, 만약 신을 바로 신고 오르게 되면 눈 위에 발자국이 나서 적군에게 들키게 되는 위험에 처하게 될까봐, 나막신을 거꾸로 신었다”고 말했다. 인조는 그 총각이 너무나 신통하고 고마워서, “너의 소원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했다. 이에 총각은 인조가 입고 있던 곤룡포(袞龍抱)가 너무 좋아보여서, “당신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달라”고 했다. 인조는 흔쾌히 자신이 입고 있던 곤룡포를 그 총각에서 벗어줬다. 이렇게 인조를 업고 무사히 산성 안으로 피신시킨 총각이 바로 서흔남이다. 그는 이후에도 여러 활약을 펼쳤다. 청나라의 군사가 철통같이 포위해 산성 안과 밖의 교통이 끊어지자, 그는 거지 행세를 하거나 적군으로 변장하기도 하고, 심지어 미친 사람처럼 행세를 하면서 적진을 통과해 삼남지방과 강원도 등지로 가서 위급한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다. 이렇게 서흔남은 전국 각지의 근왕병 진영에 왕의 뜻을 전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수삼 차 왕래해 적의 동태를 보고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뿐만 아니라 청과의 전투에도 참여해 청군 3~4명을 죽이는 공을 세웠다고도 한다. 이렇게 여러 방면에 걸쳐 활약을 펼친 서흔남은 죽을 때까지 왕에게서 하사 받은 곤룡포를 지극 정성으로 보존했다고 한다. 그리고 죽을 때, 자신이 평생 동안 분신처럼 아껴왔던 곤룡포를 함께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따라 서흔남의 가족들은 그와 함께 곤룡포를 중부면 검복리 서남쪽 병풍산에 묻었다고 한다. 나라에선 서흔남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하찮은 천민임에도 불구하고 정3품의 가의대부(嘉義大夫)란 파격적인 품계를 내렸다고 한다. 후세에 말을 탄 벼슬아치들이 서흔남의 무덤 앞을 지날 때엔 반드시 말에서 내렸는데, 이는 서흔남과 더불어 왕의 곤룡포가 함께 묻혀있기 때문이라 한다. 한편, 인조를 업어 모신 사람은 서흔남이 아니라 서기남(徐紀男)이란 이야기도 있다. 서기남은 천하영웅이라 그 후 원두표(元斗杓)의 비장(裨將)이 돼 산성 북문 밖 싸움에서 큰 공을 세우고 청나라의 장수 양고리(楊古利)를 붙잡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한미한 집안 출신이기 때문에 크게 등용되지 못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인조를 업어 모신 사람이 최모(崔某)라고도 한다. 최모는 그 공으로 인해 늘문이에 임금이 직접 하사한 땅을 받았다고 한다.

장경사를 짓게 된 사연
남한산성 동문에서 동북쪽으로 약 500m 정도 가면 사찰이 하나 있다. 이 사찰이 바로 장경사이다. 현재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된 이 사찰은 인조 원년(1624년)에 승군을 소집해 남한산성을 쌓을 때 지어진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는 달리, 장경사를 짓게 된 사연이 전해지고 있어 흥미롭다. 도승인 검단 선사는 남한산성의 한 고개 길에 있는 평평한 바위에서 바둑 두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검단 선사와 함께 바둑 두는 상대는 그 근처에 사는 소년이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소년과 이 바위에서 바둑을 두기 시작한 검단 선사는 소년의 맑은 심성에 흠뻑 빠져 있었다. 혈육 이상의 정이 느껴질 정도로 검단 선사는 소년과 친해졌던 것이다. 그날도 어김없이 검단 선사는 바위에 앉아서 바둑을 둘 상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항상 제 시간에 맑은 얼굴로 나타나 바둑을 두어 주던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한찬 흐른 후에야 나타난 소년은 눈물과 시름이 가득한 얼굴로 늦게 온 사연을 말했다. 자신의 어머니는 오래전부터 병으로 누워있었으며 오늘은 병환이 더욱 심해지셨단 것이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어머니의 약을 구하려 다녀야 하기 때문에 이곳에 올 수가 없다고 했다. 동네의원이 일러주길 어머니의 병은 대추하고 곶감을 구하러 다녀야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 여름에 대추와 곶감을 구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소년은 북쪽으로 가면 가을이 일찍 찾아온 곳도 있을 것이라 생각을 하고, 밤낮을 쉬지 않고 북쪽으로 가서 어머니의 병환을 낮게 할 약을 빨리 구해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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