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각에서는 유시민장관을 노무현대통령의‘영혼의 쌍둥이’라고도 한다. 정치적'영혼의 쌍둥이'. 조조의 참모 양수(楊修)와 같이 노대통령의 의도를 스스로 알아차리는 그를 그렇게 부르는 건 단순한 수사(修辭)를 넘어, 적어도 현상으로서의 그들의 관계를 표현하는 데에는 가장 정확한 표현이다.
서울대학교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를 땄다.
서울대 학원 프락치 사건으로 투옥되었을 때 제출한 항소이유서를 통해 이름을 얻었으며, 이 글은 지금도 명문으로 평가받고 있다. 1988년부터 1991년까지 초선 국회의원이었던 이해찬 의원의 보좌관이었고, 이후 MBC 백분 토론을 진행했다. 시사평론가로 활동하며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1992, 푸른나무), 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이야기 (1994, 푸른나무), 거꾸로 읽는 세계사 (1988, 푸른나무), 유시민의 경제학카페 (2002, 돌베개),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 (2002, 개마고원), 등의 저술활동을 하다가 200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절필 선언을 하고 정치에 뛰어들어 2002년 개혁국민정당 (약칭, 개혁당)의 창당을 주도했다. 2003년 3월, 보궐선거에서 승리하여 16대 국회에 진입하여 의원선서 시 정장이 아닌 평상복인 흰 면바지를 입고 등원하며 논란을 일으켰다. 또한 국기에 대한 경례 는 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 공작이라 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표명한 적도 있다.
인물 유시민, 타인의 입을 빌리다
노회찬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이 최근 한 스포츠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유시민장관에 대한 인물평을‘논평할 필요가 없는 품질’로 평가했다. 그에 대한 평가에는 도무지 듣는 이를 배려하는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다.‘싸가지 없고, 독불장군이고, 독선적이고, 말을 함부로 하고, 동지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하고, 당내나 원내에는 지지세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인터넷에서만 극렬 지지세력들을 갖고 있고, 인간이 가볍고, 정통 세력이 아니고…등등’ 열우당의 우원식 의원은“유 의원의 직선적인 스타일이 노 대통령과 비슷하다지만, 타인을 함부로 규정하고, 한쪽으로 몰아 매도하는 것은 대통령과 달리 심할 때가 많다”라고 말했다. 같은 당의 한 의원은“유시민은 생각이 다르면 오장육부를 후벼 판다”며“노대통령은 표현이 거칠 뿐 가슴에 못을 박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두 사람은 다르다”고 말했다.‘싸가지’로 상징되는 그의 언행은 그의 주장과 가치 등 내용을 퇴색시키는 자기 모순을 빚어 내기도 한다. 오죽하면 김영춘 의원이“어떻게 옳은 소리를 해도 그렇게 싸가지 없이 하는 법을 배웠냐”고 할 정도다. 이러한 비판을 받는 그도‘차가운’자신에 대해서“업보다. 듣기 싫은 소리를 싸가지 없이 많이 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와 정치적 궤적을 같이 하거나 비교적 호의적인 사람들은 그를 일러 ‘개혁의 전도사’라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개혁 또는 진보의 의미는 넓지만 명확한 개념이다. 그 개념을 유시민에게서 찾는다면 확연히 명백해 진다. 지승호는 자신의 저서‘유시민을 만나다’에서 유시민을‘슬픔과 노여움이 많은 소셜 리버럴리스트(Social Liberalist)라고 명명했다. 지승호의 관점에서 유시민은 원칙비판 이상의 선은 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지승호는 유시민을 정치적 효과를 계산하기 전에 자신이 상처를 받더라도 해야 할 말은 하는 정치인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딴지일보의 대표 김어준 역시 지승호와 크게 다르지 않다.“자신을 객관화하여 스스로를 역사 속에서 통시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놀랍도록 자연스러워 그에 따른 전략전술을 자신의 이익보다 먼저 따져 내는 것이 거의 비인간적인 수준에 도달한 당대의 돌쇠다.”이 시대의 논객 전북대의 강준만 교수 역시 유시민에 대해서“선한 의지가 지나쳐 부끄러움을 느낄 능력조차 없는 멸사봉공 정신의 중독자”라고 했다. 그러나 정작 유시민 본인은 이러한 평가에 대해 언급은 커녕 신경조차도 안쓰는 듯하다. 강준만이 이미 지적했듯이, 유시민 비판자들이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유시민은 지금 내키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가 다른 정치인들에게 칼날 같은 쓴 소리를 할 수 있는 배경에는 바로’내키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 연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못난이(?) 삼형제-노무현, 이해찬, 유시민
유장관은 노대통령의 마음을 울린 대선공신이다. 그는 2002년대선과정에서 노무현후보가 지지율 급락으로 노심초사하자‘노무현지키기’의 전면에 뛰어들었다. 노대통령이 당선이 확정되던 날 밤 소속정당인 민주당보다 먼저 찾은 곳이 그가 만든 국민개혁정당이었다. 모두를 놀래켰던 해프닝이었다. 그는 노대통령 집권 후 고비 때마다 노대통령을 지키는 역할을 해왔다. 노대통령의 정치적 의중 파악에 관한한 그를 따를 만한 사람이 없다는 얘기도 있다. 열린우리당의 한의원은“노대통령이 제일 신뢰하는 의원은 바로 유의원이다”라고 했을 정도다. 그를 복지부장관으로 제청했던 이해찬 전총리와의 관계는 좀 더 개인적인 것이다. 1988년 처음으로 의원 뱃지를 단 이해찬은 그를 보좌관으로 임명하여 정치활동을 시작케 했다. 이후 유의원이 1997년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학술문화진흥재단기획실장으로 밀어준 사람도 이 전총리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이번에 장관직을 수행한 후는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전총리가 늘 길을 인도해 준 셈이다. 노대통령의 정치적, 사상적인 열혈 동지인 이 세 사람은 닮은 곳이 많다. 비타협적이고 공격적이며, 정서보다는 논리를 중시한다는 점 등을 거론한다. 세사람을 모두 잘 아는 열우당의 한인사는“세사람은 3형제같다. 노대통령이 맏형이고 이 전총리가 둘째, 유의원이막내”라고 했다. 다른 사람은“세사람을 보면 서로에게 무척 애틋하다”고도 했다. 앞으로도 노대통령, 이 전총리, 유장관 이들 세사람은 누가 뭐라고 비난하던 중요한 고비마다 서로 밀고 끌어주는 관계를 지속할 것이다. 노무현대통령이 열우당 의원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굳이 유시민의원에게 장관자리를 준 것은 노대통령의 정치구상과도 관련이 있다. 현재 열우당의 공식적인 대선주자가 정동영 김근태 두 사람 밖에 없다. 2002년 대선 때 여당의 대선주자는 7명에 달했다. 이들 7명이 치고 받고 경쟁하면서 각종 매체의 주목을 받으며 지지율을 끌어올렸고 이러한 분위기가 대선승리에 큰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정동영, 김근태 두 사람의 지지율을 합쳐도 박근혜 대표나 이명박 시장 한 사람지지율의 절반도 안된다. 이것은 열우당이 안고 있는 근본문제이지만 당이 안고 있는 숙제라기 보다는 노대통령과 이해찬 전총리가 풀어야 할 지상과제이다. 노대통령은 경선흥행이 대선승리의 주요요소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안다. 노대통령이 정동영,·김근태 두사람 외에 다른 누군가를 세워서 흥행몰이를 하려 한다면 유장관만한 사람이 없다. 열우당 전당대회 당시 유의원이 연설하는 모습을 놓고 노대통령과 너무 흡사다는 평이 많았다. 당시 한 의원은 전당대회장에서 열광하는 유의원 지지자들을 보고“노사모의 새로운 변신 유사모를 보는 것 같았다”고 했다. 노대통령과 유장관은 비슷한 점이 너무 많은데 비해 노대통령과 정동영,·김근태는 너무 다르다. 정동영은 지지 지역에서 부터 노대통령과 다르고, 김근태는 노대통령과 뿌리 자체가 다르다. 열우당의원들 사이에서 노대통령이나 유의원지지파는 이질적 존재다. 최근 당헌·당규를 바꾸기 위한 회의에서 유의원지지파 한 명이 20여회 발언권을 얻어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걸 본 사람들은 질색을 했다. 그 집요함과 일관됨을 놓고 말이다. 이는 노대통령, 이 전 총리, 유장관의 공통된 성향이다. 노대통령은 장관직을 대선주자의 필수코스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과거 그 역시 그의 이전 성향과는 달리 목에 힘을 풀고 장관직을 달라고 동교동계에 로비까지 했을 정도다.“행정자치부장관을 바랐는데 해양수산부장관을 하라고 해 실망했지만, 막상해 보니국정이 보였고 큰도움이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동영·김근태를 입각시킨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유장관의 입각은 이번이 아니라면 다음을 위해서라도 일단 이번에 후보군에 들어 가야 한다는 생각인 것이다. 노대통령의 유장관을 향한 이 정도의 배려는 두사람의 관계를 생각해 볼 때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관계에 무심했던 열우당 의원의 집단 반발은 결국 유장관을‘거물’로 만들었다. 노대통령의 노림수가 한치의 오차도 없이 딱 들어 맞은 것이다.
그의 장점
유장관은 대중적이다. 철저하게 대중(유권자)을 의식하고 이들과 소통할 줄 아는 정치인이다. 그는 유권자들이 갖고 있는 정치인에 대한 분노를 잘 알고 있으며, 그들을 대신해 피아의 구분 없이 독설을 퍼붓는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는 피아를 확실히 구분하여 전선을 확실하게 형성해 낸다. 특히 그의 지지자들은 과거 노사모가 모무현이라는 정치인을 확립시켰던 것처럼,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에서 참여정치의 진면목을 보여 줄 수 있을 만큼 구체적 세력으로 커가고 있다. 유장관은 명석하다. 명석한 두뇌를 통해 가장 강력한 무기인‘말’을 갖고 있다. 정치인에게 말은 칼과 같다. 그의 말은 군더더기 하나도 없이 깔끔하다. 언론을 적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말만 한다. 거대언론의 기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홍보비서 역할을 해 왔다. 그는 대통령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충성을 보인 적이 없다. 계파도 없고 좌고우면(左顧右眄)한 적도 없다. 배짱과 영특함이 그에게는 다 있다. 노대통령 입장에서 봐도 정동영과 김근태는 자신의 필요에 따라 정치적 소신을 바꿀 수 있는 인물이겠지만 그는 말을 바꾼 적은 있어도 자신의 이해득실에 따라 정치철학이나 소신을 바꿀 인물은 아니다. 그의 정치행태는 정치노선과 철학이 같은 노대통령과 끝까지 함께 간다라는 의지의 소산이다. 노대통령 주변에는 그보다 코드가 잘 맞거나, 그 이상으로 충성심이 강한 정치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와 같지는 않았다. 욕 얻어먹기가 두렵기 때문이다. 청문회가 끝날 때 도종환 시인의‘가지 않을 수 없었던 길’이라는 詩를 읊은 것에서 그간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전략) 몇몇 길은 거쳐 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후략)’
유시민의 보건복지부
김근태 전 장관이 노대통령에게 사퇴 의사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후임자의 자격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올바른) 철학과 양극화 해소를 사심없이 풀 수 있는 사람"을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만큼, 신념과 소신이 없으면 여러 이익단체들에 의해 휘둘릴 수 있는 자리라는 의미이기도 했지만 유시민이 적임자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말이기도 했다. 집권 2년을 남겨놓은 임기 후반의 시점에 비로소 노무현의‘참여호’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의 입각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다. 같은 참여정치실천연대(참정연) 소속으로 유 의원과 친분이 두터운 김형주 의원은“입각 제의 이야기가 어제오늘 갑자기 나온 게 아니다. 오래된 일이다.”고 말했다. 올해 양극화와 저출산·고령화 문제 등을 해소하는 데 국정운영의 중점을 둘 예정인 노 대통령은 그의 추진력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의 노대통령에 대한 충심과 그에 대한 노대통령의 필요성은 둘의 운명 공동체를 순항시켜온 동력이었기에 그에게 마지막 정리를 맡긴 것이다. 이런 노대통령의 신뢰에 그는 화답한다.
“저는 참여정부가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보건복지부에서 일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새로운 약속을 하고 새로운 목표를 세우기보다는 정부가 이미 한 많은 약속들을 하나하나 실현하고 매듭짓는 데 주력하겠습니다. 저희 복지부가 하는 일이 조국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불가결한 것이며, 복지부가 성공하는 그만큼 대한민국 의 미래가 밝아진다는 신념을 가지고 일하겠습니다.”N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