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월남전은 끝났다.
그러나 고엽제 피해 장병들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쟁 속의 영웅들은 전쟁이 종결되면 사람들에게 아픈 기억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전쟁영웅들은 축제가 끝난 뒤의 허탈함을 안듯 그들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 베트남 전쟁은 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31만 명의 한국군이 참전했으며, 5천여 명의 전사자와 1만여 명의 전상자를 남겼다. 기억의 저편에서 평가가 유보된 채 불편한 역사로 뭉개져온 베트남전쟁이 끝난 지 올해로 30돌을 맞았다. 그러나 아직 남아있는 5만여 명에 이르는 고엽제 피해자들에게는 30돌이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들에겐 아직 끝나지 않는 전쟁이기에...
                                                                                                                                                              취재 / 김현주 기자

어버이날은 잘 보내셨냐는 평범한 인사에 월남참전 용사 조병기(60)씨는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지난 3월 피부질환과 왼쪽 팔 마비증상으로 고엽제 후유의증(경도)을 판정받고 서울보훈병원에 입원한 조씨는 병으로 고생하는 고달픔보다 더 큰 아픔을 안고 있었다. 고엽제의 후유증이 2세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제 자식 놈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저야 이미 늙고 병든 몸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아들 딸 모두 나와 같은 피부질환으로 고엽제 후유증 증상이 보이고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사실을 알고 병원에서 자세히 검사라도 하고 싶지만 병원에 가면 그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 두려워서...” 자기 입으로 자신이 물려준 병임을 차마 말하지 못하고 자신이 보훈병원에서 받은 약을 준다는 말을 하였다.
국가보훈처 자료에 따르면 정부가 공식 인정한 고엽제 후유증 환자는 7만7000 여명. 그러나 고엽제 후유증 신고자 중 약 20%만이 후유증 판정을 받았을 뿐이고, 월 23만~46만원의 수당을 받는 사람은 정부가 인정한 환자의 55%에 불과하다. ‘건강권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우석균 정책국장은 “ 참전 용사 2세에게서도 각종 후유증이 나타나고 있지만 2세에 대한 정부차원의 연구는 계획조차 없다”고 말하며, 정부의 무성의를 질타했다.
조씨의 피부질환은 이미 80년도부터 생기기 시작하였으나 고엽제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힘들게 버티다가 불과 몇 년 전 후유의증 판정을 받고 치료를 하기 시작하였다. 좀 더 빨리 알았다면 악화되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다면서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누구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대중탕에 가면 남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의식하게 된다고 이야기할 땐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자손에게까지 상흔을 남긴 유공자가 왜 이런 마음으로 살아올 수밖에 없었는지 안타까울 뿐이었다. 더욱 더 기자의 맘을 서럽게 한 것은 늦게나마 조그만 혜택을 받게 해 주는 나라에 감사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였다. 그리고  자신은 이미 뿌려진 고엽제에 간접적으로 스쳤을 뿐이어서 이정도지만 초기에 고엽제를 직접 맞은 동료들은 더욱 심각한 상황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
조씨는 자신을 야구경기에서 팀을 위해 희생타를 날린 것에 비유하였다. 이어 같은 병실안의 6.25 참전 용사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이 있었기에 자신들도 있을 수 있었고 자신들이 있었기에 지금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와 젊은이가 있는 것이 아니겠냐고 이야기하며, 희생타를 날린 것에 대해 후회는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다만 다른 고엽제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국가유공자로서의 예우를 받길 원한다는 말을 전했다.  조씨의 등급과 그에 따른 보상이나 혜택이 억울하지는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어찌 보면 낮은 등급은 자신이 조금은 더 건강히 살 수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냐며 씁쓸한 웃음을 짓는 조씨에게서 선하고 순박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상처로 남았을 전쟁인 월남전. 이미 우리의 기억에서는 사라진지 오래지만, 이 전쟁이 고엽제로 고통 받는 파월용사들에 의해 다시금 기억에 떠올려 지고 있다. 공산화되어 조국을 잃고 난후 세계각지를 떠돌아다니는 전쟁유랑민을 통하여 우리도 조국을 지키자고 냉전의식을 부추기는데 사용되었던 전쟁. 최소한 자유 수호를 위하여 싸웠다고 생각하던 파월용사들이 이제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신음하고 있다. 월남전 당시 적의 은신처가 되는 정글을 파괴하고자 사용되었던 고엽제에 의한 심한 후유증으로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베트남전쟁 (Vietnam War)

프랑스에 대한 독립전쟁과 남북 베트남 간의 전쟁은 두 시기로 분류한다. 베트남은 1945년 프랑스령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을 선언, 같은 해 9월에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발족시켰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1946년에서 1954년까지 베트남 독립동맹군과 전쟁을 전개하였다(제1차 인도차이나전쟁). 그러나 1954년 5월 프랑스군의 거점인 디엔 비엔 푸의 함락으로 같은 해 7월 휴전을 위한 제네바 협정이 체결되었다. 협정의 내용은 북위 17°선을 잠정적 군사경계선으로 정하고, 2년 후에는 전국적으로 선거를 실시하여 통일국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955년 남베트남에 고딘디엠 정부가 수립되자 이에 반대하는 공산분자들은 테러 공격을 감행하였고, 1960년 12월 남베트남에서 ‘남베트남 해방민족전선’이란 이른바 '베트콩'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또한 호치민(胡志明)이 이끄는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의 원조를 받아 더욱 세력을 확장하였고, 선거를 통해 베트남 전역을 장악할 수 없게 된 공산측은 군사적인 수단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1961년 미국 대통령 J.F.케네디는 처음으로 미국 정규군을 파견, 베트남에서 '특수전쟁'을 전개하였는데, 이는 남베트남의 공산화는 동남아시아의 공산화를 가져온다는 견지에서 취해진 미국의 대 공산주의 봉쇄전략의 일환이었다. 이어 L.B.존슨 정부는 1964년의 통킹만 사건(미국 구축함에 대한 북베트남의 어뢰정 공격)을 계기로 미군을 직접 전투에 참가시켰다. 1965년에는 북폭(北爆)을 개시하였으며, 1968년까지는 미지상군의 투입도 54만 명으로 확대되었고 전비(戰費) 또한 54억 달러에서 288억 달러로 늘어났다.

한편 1968년 5월부터 평화교섭을 위한 '파리회담'이 계속되었으나, 전황은 캄보디아(1970)·라오스(1971)로 확대되어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양상을 띠기에 이르렀다. 한편 한국을 비롯해 타이·오스트레일리아·필리핀·뉴질랜드 등 우방국이 참전하였으나, 군사적 승리를 거두지 못하였다. 결국 1973년 1월 27일 베트남에서의 전쟁종결과 평화회복에 관한 '파리협정'이 미국·남베트남·북베트남·베트남 남부 공화임시혁명정부의 4자간에 체결되었다.
협정은 ① 미군의 철수, ② 전쟁포로의 송환, ③ 현상대로의 정전, ④ 남베트남에서의 사이공 정부와 임시혁명 정부 간에 연합정부 조직을 위한 협의, ⑤ 정치범의 석방 등을 규정하였다. 그러나 북베트남과 이들의 지원을 받는 베트남 남부 임시혁명정부는 1975년 4월 말 사이공을 점령함으로써 베트남을 적화 통일하였다.

베트남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전쟁으로, 인적 희생도 커서 사망자 약 120만 명, 부상자 약 300만∼400만 명에 달하였다. 베트남전쟁은 동남아시아의 정치상황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는데 캄보디아에서는 론놀 정권과 크메르루주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1975년 4월 프놈펜이 크메르 루주군에게 장악됨으로써 공산화되었고, 북베트남의 전쟁물자 공급로였던 라오스도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공산화에 영향을 받아 1975년 5월에 공산정권이 들어섰다. 이러한 인도차이나반도의 적화는 아세안 5개국에 대한 새로운 위협이 되었고, 이에 따라 중립을 표방해 온 아세안은 각국의 경제력 강화를 기반으로 하는 안전보장기구화의 움직임을 보였다.  

적군과 아군의 공통의 적이 되어버린 고엽제(AGENT-ORANGE)

열대와 아열대의 정글에서 하노이를 중심으로 하는 호치민의 공산군과 인민해방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을 대상으로 월남의 고딘 디엠 정권과 티우 정권을 지원함으로써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고, 궁극적으로는 자유세계의 평화를 지킨다는 명분 하에 통킹만 폭격을 시초로 대규모 전쟁을 감행한 미국은 정글생태계에 적합한 전쟁무기를 개발하였다. 이 전쟁 과정에서 정글이란 것이 미군에게는 커다란 장애물로 인식되었다. 즉 미 공군의 비행기는 보이지 않는 적의 지상포화에 의해서 격추되었으며, 정글에 익숙한 "베트콩"들은 풀잎과 나뭇잎을 대미군 항전의 방패막이로 이용하고 있었다. 미국방성은 이러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전쟁터의 ‘달표면화(lunarization)작전’의 전개를 계획하였고, 그 실시를 위한 무기로서 제초제로 쓰이는 화학물질을 개발하였다. 그것들 중의 하나가 바로 황색고엽제이며, 이때 제조되었던 고엽제용의 화학무기들은 모두 4가지였다. 이 화학무기의 제조는 다우케미컬이 독점적으로 담당하였다.

  이 제초제들의 기본성분은 약칭으로 2, 4-D(2, 4-dichloroghenoxyacetic acid)와 2, 4, 5-T(2, 4, 5-trichlorophenoxyacetic acid)이다. 황색고엽제(Agent Orange)는 2, 4-D와 2, 4, 5-T의 합성이고 자색고엽제(Agent Purple)는 황색고엽제와 유사하나 생산가가 비싸고, 백색고엽제는(Agent White)는 2, 4-D와 피클로람(picloram)의 합성이며, 청색고엽제(Agent Blue)는 카코딜산(cacodylic acid)의 합성제품이다. 이 네 가지 제초제 중에서 베트남전에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이 황색고엽제이다.
황색고엽제의 주성분인 2,4,5-T가 고엽제이 제조과정을 거치면서 발생되는 다이옥신(Dioxin)이 이러한 환경파괴현상의 주범이라고 한다. 정글의 숲을 제거하여 적을 쉽사리 발견하고 섬멸하기 위해서 제조된 고엽제는 적군과 아군이 혼재하고 있는 전쟁터에 살포되었던 것이다. 고엽작전이 치러졌던 지역을 보면 전쟁의 참화는 이제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몸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이 고엽제는 신경을 완전히 녹여 버리고 잠복기간도 길다. 적군과 아군의 공통의 적이 바로 고엽제였던 것이다.


‘죽음의 재‘로 불리는 다이옥신(Dioxin)

문제의 다이옥신은 인류가 발명한 최악의 독성물질로 그 독성이 청산가리의 수만 배에 달한다. 암과 각종 질병을 유발하는 환경호르몬인 다이옥신은 주로 쓰레기 소각로나 화학물질, 비료 생산 공장에서 나오며, 화산이 폭발하거나 산불이 났을 때도 나온다. 공해문제에서 오염도를 나타내는 지표로 흔히 ppm(1백만분의 1) 단위가 쓰인다. 하지만 다이옥신의 허용 규제치는 단위부터가 달라 ppb( 10억분의 1)을 쓴다. 그만큼 엄청난 독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2,3,7,8-TCDD는 요구르트 하나 분량인 85g으로도 10만명의 치사량이 된다.
이 물질은 베트남전쟁 때 미군이 적의 은신처가 되는 숲을 없애려고 사용한 고엽제의 주성분으로, 베트남 참전 군인들이 기형아를 낳는 등 건강 이상을 보이자 그 위험성이 크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다이옥신에 중독되면 극심한 피부 질환이 생기며 생식기능과 간이 손상되고, 암에 걸리기도 한다. 흙, 공기, 물 등에 쌓여 있다 먹이사슬을 통해 인체에 축적되며, 쉽게 분해되지 않는다. 환경운동가들은 가장 위험한 독성물질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다.

다이옥신은 극히 미량으로도 간암과 기형을 유발한다. 미국사회에 있어 고엽제가 크게 사회문제화 된 것도 파월참전부모에게서 생겨난 선천적 기형아의 출산 때문이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선천적 기형아의 출산만이 아니다. 피부암, 간암, 내분비계암, 갑상선암, 폐암, 신장암, 방광암, 뇨관암 등 수많은 암을 일으킨다. 또한 감각 중추도 침범하여 말초신경이상, 감각이상을 가져오고, 운동신경의 이상으로 사지 마비를 가져온다. 면역계의 이상은 폐결핵 등 여러 질환을 유발시키고, 콜레스테롤의 상승으로 고혈압이 유발되고, 뇌졸중을 일으키게도 된다.

  다이옥신의 독성 메카니즘은 아직 규명되지 않았으며, 다이옥신이 일으키는 질병도 증상에 따라 치료할 뿐 치료약도 개발되어있지 못하다. 다이옥신은 지금의 의학기술로서는 불치의 병이다. 고엽제후유증환자들은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 뚜렷한 병명도 모른 채 가산을 탕진한 채 사회적 폐인이 되기 일쑤이다. 원진레이온 이황화탄소중독사건으로 온 사회가 떠들썩했지만, 다이옥신도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다. 이황화탄소는 고혈압, 뇌혈관계, 신장을 침범하지만 , 다이옥신은 각종 암을 유발시킴은 물론, 근골격계, 감각신경계, 면역계의 이상 등 신체에 침범하지 않는 데가 없을 정도이고, 다세대에 걸쳐 선천성기형을 유발하기조차 한다. 우리나라 환경피해를 살펴보더라도 다이옥신만큼 심각한 피해를 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월남파병 결정과 의의

한국의 베트남참전 결정은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한국은 베트남과 동맹관계가 아니었기에 베트남은 한국의 참전을 꺼려했다. 또한 미국에 정치적 이득을 주지 않는다는 판단으로 존슨 대통령은 1964년 10월 동맹국(SEATO 가맹국)에게 군사적, 정치적 지원을 요청할 당시, 한국에는 전용부대 파견을 요청하지 않았다. 더 자세한 이유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 한국은 유엔이나 SEATO의 회원국이 아니다. ② 미국은 아직도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다. ③ 한국의 자체의 안보문제를 안고 있다. ④ 베트남은 한국의 전투부대 참전을 꺼려한다.

그런데 동년 12월 존슨 대통령은 친서를 통해 한국군의 베트남 지원을 확대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와 같은 미국의 입장변화는 군사적 이유 때문이었다. 존슨 대통령은 1971년에 출간된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당시 (1965년 여름) 15개 미 전투사단(총병력 7만5천명)이 베트남에 주둔해 있었다. 맥나마라(존슨 정권의 국방장관)는 34개 사단으로의 증원을 건의했다.... 만약 한국이 9개 사단을 파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병력수준을 17만5천내지 20만 명으로 증강시켜야 한다.”
그래서 존슨 대통령은 대통령특별보좌관 해리만을 보내 한국의 전투부대 파견을 요청했던 것이다.

한편, 한국이 월남참전을 결정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요인을 다음과 같이 5가지로 열거해 보면 ① 한국전쟁 당시 받았던 군사원조를 보상해야 한다는 의무감 ②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강화시키려는 의도 ③ 장래의 경제적 이익에 대한 관심 ④ 국제적 권위를 획득하려는 의도 ⑤ 베트남의 안보가 한국의 안보와 연계되어 있다는 인식 등이 있다.

한국군 월남참전 연병력 규모

파병의 결과로 한미안보동맹 체제는 더욱 강화되었고 한국 경제도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안보와 경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확실히 잡은 셈이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최용호 연구원은 “파병으로 국가적 실리를 최대화하고 전쟁특수를 최대한 활용해 경제개발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평가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한국이 1965년부터 1969년 사이에 베트남에서 번 돈의 액수는 약 5억4600만 달러에 이르고(이 숫자는 당시 한국이 해외에서 벌어들인 전체 외화의 16%에 달한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의 액수는 약 10억 달러나 된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의 박정희 정부는 한국군의 월남전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군사원조를 더 많이 얻을 수 있었다. 1956년부터 1965년까지 10년간 미국의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 액수는 연평균 2억90만 달러였고, 1966년부터 1973년까지 8년 동안 즉 한국군의 월남참전기간의 연평균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액수는 3억 9150만 달러로 늘었다는 통계가 당시 한국 정부와 미국정부 사이에 벌어진 거래의 일부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반대로 한국이 잃은 것은 바로 강도 높은 독성을 갖고 있는 황색고엽제에 노출된 한국의 젊은이들이 안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치명적인 질병이 문제라는 사실이다. 전형적인 군산복합의 희생물로서 미국의 참전용사들은 그 대가를 요구하고 나섰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이중적인 올가미의 희생물이 되었다. 즉 전쟁 상황에서 벌어진 군산복합의 희생물일 뿐만 아니라, 강대국에 종속된 약소국으로서의 종속적 희생물이다.
우리는 현대사에서 큰 획을 긋는 월남파병의 의의나 그 결과를 올바르게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국가부흥의 반석을 용병으로 보는 잘못된 시각

일부 비판론자들은 월남파병으로 국가가 경제·군사적으로 많은 발전을 하였음에도 파병이 경제이익과 전투수당을 전제로 이루어졌으므로 파월 한국군을 용병이라고 비판하는데 이는 잘못된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으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았고 전투수당을 받기는 하였으나 처음부터 파병목적이 명확하였다. 초대 주월한국군사령관인 채명신 장군은 “돈이 필요하다고 목숨을 바치러 갈수 있습니까?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보다 국가존립이라는 더 큰 요인이 있었습니다.“라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도 있다. 사실 용병이란 말은 군사적 지식이 없는 이들의 잘못된 표현이다.

한국군은 월남에서 자유수호를 위한 국가의 부름에 임해 공산주의와 당당히 맞서 용감히 싸웠으며 이들의 희생의 결과로 국가가 여러 분야에서 발전하였고, 특히 경제가 획기적으로 발전하여 국력이 세계로 뻗어나가게 되었다. 이들을 용병이라는 단어로 격하시키는 과오를 저질러서는 안 되는 것이다.

20년을 넘긴 침묵

베트남전쟁의 최전선에 파견되어 고엽제에 노출되어 병석에 있으면서도 참전 재향군인들이 불만을 말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군사정권의 금기사항이었던 것이다. “고엽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참전 미국군이나 오스트레일리아군이 미국의 화학기업으로부터 고엽제 피해를 보상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1991년, 오스트레일리아에 이주한 전한국군장교로부터의 정보였습니다.” 라고 대한해외참전전우회의 기관지편집자는 말했다.

고엽제와 다이옥신의 인체에 미치는 영향은 베트남이나 미국에서는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만 정보의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미군방송이나 미국신문 등의 보도에 의해 아는 자도 있었으나 이것이 보도되는 것은 봉쇄되어 온 것이다. 문제가 계속 숨겨져서 원인불명의 이상한 병으로 쓰러지는 참전 군인들은 적절한 치료도 받지 못해 증상은 점점 악화되어갔다.

고엽제문제는 왜 철저하게 숨겨졌는가. 그것은 전두환·노태우로 이어져온 군인대통령이 참전 한국군의 지휘자의 일원이었다는 사실, 그 전력을 바탕으로 전후 더욱 군내에서 뻗어 올라갔다는 경과와 관계가 있다.
당시 대한민국 제5공화국 정부에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철저한 보도통제로 참전용사들은 ‘베트남 풍토병’이라는 어이없는 말로 보도된 채 각종 질병에 시달리다가 40대의 한창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들은 왜 자기가 죽어 가는지 몰랐다.  병원에서 조차 알지 못했다.  살아보려는 본능 때문에 가산을 모두 탕진했다.  난치병이라고 뒤늦게 안 용사들 중 몇 명은 더 이상 가족에게 고통을 줄 수 없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였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그들이 베트남에서 윤리적으로 부끄러운 짓을 하다가 고약한 성병, 국제 매독에 걸려서 죽는다고 그들의 도덕성을 비난하며 매도했다.
세계평화 수호와 국가경제 발전의 초석이 되었던 수천의 명예로운 참전군인들이 영광과 환대 대신 역사의 뒤안길에서 고엽제 질환의 가혹한 시련을 당하다가 불명예스럽게 죽어간 것이다.

인색한 등급판정

지팡이를 짚고 어색한 걸음을 걷는 해병대 출신의 신기수(59)씨는 고엽제후유증 7급의 판정을 받았다. 단지 걷는 것만 불편한 것이 아니라 통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아내는 이제는 익숙해 졌으나 처음에는 밤마다 신씨의 고통에 시달리는 모습과 괴성에 잠을 못 이뤘었다고 하였다. 사회생활을 전혀 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신씨는 자신의 고통과 통증도 힘들지만 가장으로써의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미안함을 호소하였다. 자신을 위해서도 가족을 위해서도 아닌 국가의 명령을 받고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나라를 위해 바쳤을 뿐인 그에게 지금 남아있는 것은 고통과 모멸감과 절망감 뿐 이다. 신씨는 이미 20차례나 입원했었다. 한번 입원을 할 때마다의 2~3개월은 결코 짧은 시간이라 할 수 없다. 중추신경장애, 다발성신경마비 등의 여러 항목으로 고엽제후유증 7급이지만 이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현재 행정소송 중이다. 충북대학병원 등 여러 병원에서 등급판정을 위한 정밀검사를 받았으나 일반병원 측의 4~5급의 판정과는 다르게 유공자들을 위한다는 보훈 병원에서만 유독 등급판정에 인색한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어렵게 마련한 82만원의 돈으로 대학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고 집으로 돌아올 때 너무 배가 고팠지만 밥 한 끼 길거리에서 해결할 돈이 없어서 배고픔을 참고 집에 돌아와 라면을 끓여먹었을 때 그 참담함에 절망의 피눈물이 흐르더군요..” 라고 말하는 그의 마음을 누가 헤아려 줄 수 있을지 형언키 어려운  답답함이 밀려들었다.

국가유공자 7급 중에서 사회생활에 지장이 많은 사람이 많다. 그런데 문제는 1급부터 6급까지는 기본연금이 70만원이 넘고 비슷한데 유독 7급만 20만원대, 그러나 이것도 3년 전에는 10만원 대였다. 이들은 생활보호대상자나 기초수급자보다도 못한 연금을 받는 것이다. 장애로 인해 취업을 못하거나 설령 했다 해도 안정적이지 못한 유공자들에게 6급과 7급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국가유공자가 등급에 민감하고 조정하려 애쓴다는 것은  어찌 보면 참 창피스러운 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런 우스운 꼴을 만든 것은 코미디 프로그램의 연출가 같은 관계당국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신씨는 여러 자료들과 자신의 사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면서 기자를 조그만 원룸으로 안내하였다. 조금의 창피함도 없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는 신씨에게 한명의 기자가 아닌 천명 만명에게 말하는 듯한 절실함이 느껴졌다. 어두컴컴한 조그만 원룸에 들어서는 순간 그의 파병시절의 군복이 벽에 걸려있었다. 자랑스럽고 당당한 과거의 흔적이 지금 그에게는 인생의 십자가로 느껴질 것 같았다. 그의 방 한구석에 가득 쌓여 있는 약 봉투들, 신씨의 큰 키와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지팡이 그리고 부끄럽게 텅 빈 냉장고안을 열면서 고개를 떨구던 그의 아내가 자꾸만 떠오른다.

참전용사들은 국가유공자로서의 예우에 합당치 않다??

문경에서 소박하게 살아가고 있던 김시형(59)은 고엽제 후유의증으로 지금 서울보훈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김씨의 경우는 가벼운 고엽제 후유의증(경도)을 판정받았다. 그는 시골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이런 고엽제 후유(의)증 같은 정보를 몰라서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채 늙어 버린 장병들이 많다는 것이다. 자신조차 겨우 2년 전에 이런 정보를 접하게 되어 이제서야 혜택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7~8년 전부터 왼쪽 다리가 가늘어지고 마비증상이 오는 것을 느껴서 병원에 가보았지만 아무 이상이 없다는 의사의 무책임한 처방밖에 받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매일 아침 뻣뻣하게 굳은 다리를 주무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김씨의 경우처럼 병명이 뚜렷하지 않은 밝혀지지 않은 고엽제 후유증이 많다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고엽제 후유증에 속한 병명이 없는 월남참전용사들은 국가유공자로서의 대우조차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뢰를 밟고 쓰러지는 베트콩. 빗발처럼 쏟아지는 총탄. 끝내 버티다 숨지며 전우가 내뱉는 외마디소리. 옆에 떨어진 어린 딸의 사진…. ‘지옥의 묵시록’이나 ‘플래툰’ 같은 영화 얘기가 아니다. 월남전에 참전했던 강소위(63)의 뇌리에 박혀 있는 장면이다. 백마부대 1기 소속으로 일년 반 동안 월남전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었던 강소위는 현재 불면증과 악몽에 시달리고 있어서 신경과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월남전에 참전했던 장병들은 온전한 영혼을 갖고 돌아오지 못했고 지금도 여전히 월남전의 악몽과 치열한 혈전을 벌이고 있다. 육체적인 질병 외에 정신적 고통이 더 많은 참전용사들을 지금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고엽제 후유증에 속하지 않기에 국가유공자로서의 예우와 혜택에 제외되어 버린 것이다.

------------ 표삽입(고엽제 질병, 지원내용, 지원대상) --------------

참전용사들이 단지 경제적인 혜택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국가에서 물질적 지원은 해주지 않더라도 국가유공자로 인정해줘서 죽더라도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명예로운 선조로 후손들에게 기억되고 싶다는 것이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이제는 진실을 마주하고 책임져야 할 때이다

베트남의 빽빽한 밀림을 말려버리기 위해 고엽제를 뿌렸을 때 그 당시 고엽제가 그렇게 무서운 것이었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고 사용에 대한 별다른 지시나 주의사항이 없었다. 참전 용사들은 미국에 고마워했다. 그래서 전쟁초반에는 비행기 살포가 아닌 소방호스로 고엽제를 뿌리고 아무 거리낌 없이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었고 어떤 이들은 비행기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고엽제를 맞으며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건 썩은 몸뚱아리 뿐 이다. 마치 천형(天刑)처럼 후유증으로 고통 받는 피해자들, 참전의 죄는 말단에 있었던 그들만이 짊어져야 되는 것일까. 미국은 침묵하고 있다. 한국도 침묵하고 있다. 당연한 권리에 대해 겁먹고 있을 뿐이다. 너무나 당혹스러운 진실을 마주하는 우리의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죽임을 당한 사람들, 또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고 힘겨운 생을 살아내야 했던 생존자들의 고통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들은 누구를 위해 자신을 버렸고 무엇을 위해 싸웠던 것인가.

이젠 말할 때다. 아픈 과거에 대해, 우리의 비굴함에 대해 말할 때다. 이제 우리가 잊어버리려 애쓰는 역사의 생채기를 치료할 때다. 정부는 고엽제 피해 군인들과 그 가족들을 위해 국가 차원에서의 원인 규명과 법적인 조치를 마련해 주고 합당한 예우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1969년, 월남전은 끝났다.
그러나 고엽제 피해 장병들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쟁 속의 영웅들은 전쟁이 종결되면 사람들에게 아픈 기억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전쟁영웅들은 축제가 끝난 뒤의 허탈함을 안듯 그들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 베트남 전쟁은 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31만 명의 한국군이 참전했으며, 5천여 명의 전사자와 1만여 명의 전상자를 남겼다. 기억의 저편에서 평가가 유보된 채 불편한 역사로 뭉개져온 베트남전쟁이 끝난 지 올해로 30돌을 맞았다. 그러나 아직 남아있는 5만여 명에 이르는 고엽제 피해자들에게는 30돌이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들에겐 아직 끝나지 않는 전쟁이기에...
취재 / 김현주 기자

어버이날은 잘 보내셨냐는 평범한 인사에 월남참전 용사 조병기(60)씨는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지난 3월 피부질환과 왼쪽 팔 마비증상으로 고엽제 후유의증(경도)을 판정받고 서울보훈병원에 입원한 조씨는 병으로 고생하는 고달픔보다 더 큰 아픔을 안고 있었다. 고엽제의 후유증이 2세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제 자식 놈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저야 이미 늙고 병든 몸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아들 딸 모두 나와 같은 피부질환으로 고엽제 후유증 증상이 보이고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사실을 알고 병원에서 자세히 검사라도 하고 싶지만 병원에 가면 그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 두려워서...” 자기 입으로 자신이 물려준 병임을 차마 말하지 못하고 자신이 보훈병원에서 받은 약을 준다는 말을 하였다.
국가보훈처 자료에 따르면 정부가 공식 인정한 고엽제 후유증 환자는 7만7000 여명. 그러나 고엽제 후유증 신고자 중 약 20%만이 후유증 판정을 받았을 뿐이고, 월 23만~46만원의 수당을 받는 사람은 정부가 인정한 환자의 55%에 불과하다. ‘건강권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우석균 정책국장은 “ 참전 용사 2세에게서도 각종 후유증이 나타나고 있지만 2세에 대한 정부차원의 연구는 계획조차 없다”고 말하며, 정부의 무성의를 질타했다.
조씨의 피부질환은 이미 80년도부터 생기기 시작하였으나 고엽제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힘들게 버티다가 불과 몇 년 전 후유의증 판정을 받고 치료를 하기 시작하였다. 좀 더 빨리 알았다면 악화되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다면서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누구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대중탕에 가면 남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의식하게 된다고 이야기할 땐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자손에게까지 상흔을 남긴 유공자가 왜 이런 마음으로 살아올 수밖에 없었는지 안타까울 뿐이었다. 더욱 더 기자의 맘을 서럽게 한 것은 늦게나마 조그만 혜택을 받게 해 주는 나라에 감사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였다. 그리고  자신은 이미 뿌려진 고엽제에 간접적으로 스쳤을 뿐이어서 이정도지만 초기에 고엽제를 직접 맞은 동료들은 더욱 심각한 상황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
조씨는 자신을 야구경기에서 팀을 위해 희생타를 날린 것에 비유하였다. 이어 같은 병실안의 6.25 참전 용사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이 있었기에 자신들도 있을 수 있었고 자신들이 있었기에 지금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와 젊은이가 있는 것이 아니겠냐고 이야기하며, 희생타를 날린 것에 대해 후회는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다만 다른 고엽제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국가유공자로서의 예우를 받길 원한다는 말을 전했다.  조씨의 등급과 그에 따른 보상이나 혜택이 억울하지는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어찌 보면 낮은 등급은 자신이 조금은 더 건강히 살 수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냐며 씁쓸한 웃음을 짓는 조씨에게서 선하고 순박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상처로 남았을 전쟁인 월남전. 이미 우리의 기억에서는 사라진지 오래지만, 이 전쟁이 고엽제로 고통 받는 파월용사들에 의해 다시금 기억에 떠올려 지고 있다. 공산화되어 조국을 잃고 난후 세계각지를 떠돌아다니는 전쟁유랑민을 통하여 우리도 조국을 지키자고 냉전의식을 부추기는데 사용되었던 전쟁. 최소한 자유 수호를 위하여 싸웠다고 생각하던 파월용사들이 이제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신음하고 있다. 월남전 당시 적의 은신처가 되는 정글을 파괴하고자 사용되었던 고엽제에 의한 심한 후유증으로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베트남전쟁 (Vietnam War)

프랑스에 대한 독립전쟁과 남북 베트남 간의 전쟁은 두 시기로 분류한다. 베트남은 1945년 프랑스령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을 선언, 같은 해 9월에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발족시켰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1946년에서 1954년까지 베트남 독립동맹군과 전쟁을 전개하였다(제1차 인도차이나전쟁). 그러나 1954년 5월 프랑스군의 거점인 디엔 비엔 푸의 함락으로 같은 해 7월 휴전을 위한 제네바 협정이 체결되었다. 협정의 내용은 북위 17°선을 잠정적 군사경계선으로 정하고, 2년 후에는 전국적으로 선거를 실시하여 통일국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955년 남베트남에 고딘디엠 정부가 수립되자 이에 반대하는 공산분자들은 테러 공격을 감행하였고, 1960년 12월 남베트남에서 ‘남베트남 해방민족전선’이란 이른바 '베트콩'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또한 호치민(胡志明)이 이끄는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의 원조를 받아 더욱 세력을 확장하였고, 선거를 통해 베트남 전역을 장악할 수 없게 된 공산측은 군사적인 수단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1961년 미국 대통령 J.F.케네디는 처음으로 미국 정규군을 파견, 베트남에서 '특수전쟁'을 전개하였는데, 이는 남베트남의 공산화는 동남아시아의 공산화를 가져온다는 견지에서 취해진 미국의 대 공산주의 봉쇄전략의 일환이었다. 이어 L.B.존슨 정부는 1964년의 통킹만 사건(미국 구축함에 대한 북베트남의 어뢰정 공격)을 계기로 미군을 직접 전투에 참가시켰다. 1965년에는 북폭(北爆)을 개시하였으며, 1968년까지는 미지상군의 투입도 54만 명으로 확대되었고 전비(戰費) 또한 54억 달러에서 288억 달러로 늘어났다.

한편 1968년 5월부터 평화교섭을 위한 '파리회담'이 계속되었으나, 전황은 캄보디아(1970)·라오스(1971)로 확대되어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양상을 띠기에 이르렀다. 한편 한국을 비롯해 타이·오스트레일리아·필리핀·뉴질랜드 등 우방국이 참전하였으나, 군사적 승리를 거두지 못하였다. 결국 1973년 1월 27일 베트남에서의 전쟁종결과 평화회복에 관한 '파리협정'이 미국·남베트남·북베트남·베트남 남부 공화임시혁명정부의 4자간에 체결되었다.
협정은 ① 미군의 철수, ② 전쟁포로의 송환, ③ 현상대로의 정전, ④ 남베트남에서의 사이공 정부와 임시혁명 정부 간에 연합정부 조직을 위한 협의, ⑤ 정치범의 석방 등을 규정하였다. 그러나 북베트남과 이들의 지원을 받는 베트남 남부 임시혁명정부는 1975년 4월 말 사이공을 점령함으로써 베트남을 적화 통일하였다.

베트남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전쟁으로, 인적 희생도 커서 사망자 약 120만 명, 부상자 약 300만∼400만 명에 달하였다. 베트남전쟁은 동남아시아의 정치상황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는데 캄보디아에서는 론놀 정권과 크메르루주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1975년 4월 프놈펜이 크메르 루주군에게 장악됨으로써 공산화되었고, 북베트남의 전쟁물자 공급로였던 라오스도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공산화에 영향을 받아 1975년 5월에 공산정권이 들어섰다. 이러한 인도차이나반도의 적화는 아세안 5개국에 대한 새로운 위협이 되었고, 이에 따라 중립을 표방해 온 아세안은 각국의 경제력 강화를 기반으로 하는 안전보장기구화의 움직임을 보였다.  

적군과 아군의 공통의 적이 되어버린 고엽제(AGENT-ORANGE)

열대와 아열대의 정글에서 하노이를 중심으로 하는 호치민의 공산군과 인민해방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을 대상으로 월남의 고딘 디엠 정권과 티우 정권을 지원함으로써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고, 궁극적으로는 자유세계의 평화를 지킨다는 명분 하에 통킹만 폭격을 시초로 대규모 전쟁을 감행한 미국은 정글생태계에 적합한 전쟁무기를 개발하였다. 이 전쟁 과정에서 정글이란 것이 미군에게는 커다란 장애물로 인식되었다. 즉 미 공군의 비행기는 보이지 않는 적의 지상포화에 의해서 격추되었으며, 정글에 익숙한 "베트콩"들은 풀잎과 나뭇잎을 대미군 항전의 방패막이로 이용하고 있었다. 미국방성은 이러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전쟁터의 ‘달표면화(lunarization)작전’의 전개를 계획하였고, 그 실시를 위한 무기로서 제초제로 쓰이는 화학물질을 개발하였다. 그것들 중의 하나가 바로 황색고엽제이며, 이때 제조되었던 고엽제용의 화학무기들은 모두 4가지였다. 이 화학무기의 제조는 다우케미컬이 독점적으로 담당하였다.

  이 제초제들의 기본성분은 약칭으로 2, 4-D(2, 4-dichloroghenoxyacetic acid)와 2, 4, 5-T(2, 4, 5-trichlorophenoxyacetic acid)이다. 황색고엽제(Agent Orange)는 2, 4-D와 2, 4, 5-T의 합성이고 자색고엽제(Agent Purple)는 황색고엽제와 유사하나 생산가가 비싸고, 백색고엽제는(Agent White)는 2, 4-D와 피클로람(picloram)의 합성이며, 청색고엽제(Agent Blue)는 카코딜산(cacodylic acid)의 합성제품이다. 이 네 가지 제초제 중에서 베트남전에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이 황색고엽제이다.
황색고엽제의 주성분인 2,4,5-T가 고엽제이 제조과정을 거치면서 발생되는 다이옥신(Dioxin)이 이러한 환경파괴현상의 주범이라고 한다. 정글의 숲을 제거하여 적을 쉽사리 발견하고 섬멸하기 위해서 제조된 고엽제는 적군과 아군이 혼재하고 있는 전쟁터에 살포되었던 것이다. 고엽작전이 치러졌던 지역을 보면 전쟁의 참화는 이제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몸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이 고엽제는 신경을 완전히 녹여 버리고 잠복기간도 길다. 적군과 아군의 공통의 적이 바로 고엽제였던 것이다.


‘죽음의 재‘로 불리는 다이옥신(Dioxin)

문제의 다이옥신은 인류가 발명한 최악의 독성물질로 그 독성이 청산가리의 수만 배에 달한다. 암과 각종 질병을 유발하는 환경호르몬인 다이옥신은 주로 쓰레기 소각로나 화학물질, 비료 생산 공장에서 나오며, 화산이 폭발하거나 산불이 났을 때도 나온다. 공해문제에서 오염도를 나타내는 지표로 흔히 ppm(1백만분의 1) 단위가 쓰인다. 하지만 다이옥신의 허용 규제치는 단위부터가 달라 ppb( 10억분의 1)을 쓴다. 그만큼 엄청난 독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2,3,7,8-TCDD는 요구르트 하나 분량인 85g으로도 10만명의 치사량이 된다.
이 물질은 베트남전쟁 때 미군이 적의 은신처가 되는 숲을 없애려고 사용한 고엽제의 주성분으로, 베트남 참전 군인들이 기형아를 낳는 등 건강 이상을 보이자 그 위험성이 크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다이옥신에 중독되면 극심한 피부 질환이 생기며 생식기능과 간이 손상되고, 암에 걸리기도 한다. 흙, 공기, 물 등에 쌓여 있다 먹이사슬을 통해 인체에 축적되며, 쉽게 분해되지 않는다. 환경운동가들은 가장 위험한 독성물질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다.

다이옥신은 극히 미량으로도 간암과 기형을 유발한다. 미국사회에 있어 고엽제가 크게 사회문제화 된 것도 파월참전부모에게서 생겨난 선천적 기형아의 출산 때문이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선천적 기형아의 출산만이 아니다. 피부암, 간암, 내분비계암, 갑상선암, 폐암, 신장암, 방광암, 뇨관암 등 수많은 암을 일으킨다. 또한 감각 중추도 침범하여 말초신경이상, 감각이상을 가져오고, 운동신경의 이상으로 사지 마비를 가져온다. 면역계의 이상은 폐결핵 등 여러 질환을 유발시키고, 콜레스테롤의 상승으로 고혈압이 유발되고, 뇌졸중을 일으키게도 된다.

  다이옥신의 독성 메카니즘은 아직 규명되지 않았으며, 다이옥신이 일으키는 질병도 증상에 따라 치료할 뿐 치료약도 개발되어있지 못하다. 다이옥신은 지금의 의학기술로서는 불치의 병이다. 고엽제후유증환자들은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 뚜렷한 병명도 모른 채 가산을 탕진한 채 사회적 폐인이 되기 일쑤이다. 원진레이온 이황화탄소중독사건으로 온 사회가 떠들썩했지만, 다이옥신도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다. 이황화탄소는 고혈압, 뇌혈관계, 신장을 침범하지만 , 다이옥신은 각종 암을 유발시킴은 물론, 근골격계, 감각신경계, 면역계의 이상 등 신체에 침범하지 않는 데가 없을 정도이고, 다세대에 걸쳐 선천성기형을 유발하기조차 한다. 우리나라 환경피해를 살펴보더라도 다이옥신만큼 심각한 피해를 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월남파병 결정과 의의

한국의 베트남참전 결정은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한국은 베트남과 동맹관계가 아니었기에 베트남은 한국의 참전을 꺼려했다. 또한 미국에 정치적 이득을 주지 않는다는 판단으로 존슨 대통령은 1964년 10월 동맹국(SEATO 가맹국)에게 군사적, 정치적 지원을 요청할 당시, 한국에는 전용부대 파견을 요청하지 않았다. 더 자세한 이유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 한국은 유엔이나 SEATO의 회원국이 아니다. ② 미국은 아직도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다. ③ 한국의 자체의 안보문제를 안고 있다. ④ 베트남은 한국의 전투부대 참전을 꺼려한다.

그런데 동년 12월 존슨 대통령은 친서를 통해 한국군의 베트남 지원을 확대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와 같은 미국의 입장변화는 군사적 이유 때문이었다. 존슨 대통령은 1971년에 출간된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당시 (1965년 여름) 15개 미 전투사단(총병력 7만5천명)이 베트남에 주둔해 있었다. 맥나마라(존슨 정권의 국방장관)는 34개 사단으로의 증원을 건의했다.... 만약 한국이 9개 사단을 파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병력수준을 17만5천내지 20만 명으로 증강시켜야 한다.”
그래서 존슨 대통령은 대통령특별보좌관 해리만을 보내 한국의 전투부대 파견을 요청했던 것이다.

한편, 한국이 월남참전을 결정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요인을 다음과 같이 5가지로 열거해 보면 ① 한국전쟁 당시 받았던 군사원조를 보상해야 한다는 의무감 ②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강화시키려는 의도 ③ 장래의 경제적 이익에 대한 관심 ④ 국제적 권위를 획득하려는 의도 ⑤ 베트남의 안보가 한국의 안보와 연계되어 있다는 인식 등이 있다.

한국군 월남참전 연병력 규모

파병의 결과로 한미안보동맹 체제는 더욱 강화되었고 한국 경제도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안보와 경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확실히 잡은 셈이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최용호 연구원은 “파병으로 국가적 실리를 최대화하고 전쟁특수를 최대한 활용해 경제개발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평가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한국이 1965년부터 1969년 사이에 베트남에서 번 돈의 액수는 약 5억4600만 달러에 이르고(이 숫자는 당시 한국이 해외에서 벌어들인 전체 외화의 16%에 달한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의 액수는 약 10억 달러나 된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의 박정희 정부는 한국군의 월남전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군사원조를 더 많이 얻을 수 있었다. 1956년부터 1965년까지 10년간 미국의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 액수는 연평균 2억90만 달러였고, 1966년부터 1973년까지 8년 동안 즉 한국군의 월남참전기간의 연평균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액수는 3억 9150만 달러로 늘었다는 통계가 당시 한국 정부와 미국정부 사이에 벌어진 거래의 일부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반대로 한국이 잃은 것은 바로 강도 높은 독성을 갖고 있는 황색고엽제에 노출된 한국의 젊은이들이 안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치명적인 질병이 문제라는 사실이다. 전형적인 군산복합의 희생물로서 미국의 참전용사들은 그 대가를 요구하고 나섰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이중적인 올가미의 희생물이 되었다. 즉 전쟁 상황에서 벌어진 군산복합의 희생물일 뿐만 아니라, 강대국에 종속된 약소국으로서의 종속적 희생물이다.
우리는 현대사에서 큰 획을 긋는 월남파병의 의의나 그 결과를 올바르게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국가부흥의 반석을 용병으로 보는 잘못된 시각

일부 비판론자들은 월남파병으로 국가가 경제·군사적으로 많은 발전을 하였음에도 파병이 경제이익과 전투수당을 전제로 이루어졌으므로 파월 한국군을 용병이라고 비판하는데 이는 잘못된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으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았고 전투수당을 받기는 하였으나 처음부터 파병목적이 명확하였다. 초대 주월한국군사령관인 채명신 장군은 “돈이 필요하다고 목숨을 바치러 갈수 있습니까?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보다 국가존립이라는 더 큰 요인이 있었습니다.“라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도 있다. 사실 용병이란 말은 군사적 지식이 없는 이들의 잘못된 표현이다.

한국군은 월남에서 자유수호를 위한 국가의 부름에 임해 공산주의와 당당히 맞서 용감히 싸웠으며 이들의 희생의 결과로 국가가 여러 분야에서 발전하였고, 특히 경제가 획기적으로 발전하여 국력이 세계로 뻗어나가게 되었다. 이들을 용병이라는 단어로 격하시키는 과오를 저질러서는 안 되는 것이다.

20년을 넘긴 침묵

베트남전쟁의 최전선에 파견되어 고엽제에 노출되어 병석에 있으면서도 참전 재향군인들이 불만을 말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군사정권의 금기사항이었던 것이다. “고엽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참전 미국군이나 오스트레일리아군이 미국의 화학기업으로부터 고엽제 피해를 보상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1991년, 오스트레일리아에 이주한 전한국군장교로부터의 정보였습니다.” 라고 대한해외참전전우회의 기관지편집자는 말했다.

고엽제와 다이옥신의 인체에 미치는 영향은 베트남이나 미국에서는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만 정보의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미군방송이나 미국신문 등의 보도에 의해 아는 자도 있었으나 이것이 보도되는 것은 봉쇄되어 온 것이다. 문제가 계속 숨겨져서 원인불명의 이상한 병으로 쓰러지는 참전 군인들은 적절한 치료도 받지 못해 증상은 점점 악화되어갔다.

고엽제문제는 왜 철저하게 숨겨졌는가. 그것은 전두환·노태우로 이어져온 군인대통령이 참전 한국군의 지휘자의 일원이었다는 사실, 그 전력을 바탕으로 전후 더욱 군내에서 뻗어 올라갔다는 경과와 관계가 있다.
당시 대한민국 제5공화국 정부에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철저한 보도통제로 참전용사들은 ‘베트남 풍토병’이라는 어이없는 말로 보도된 채 각종 질병에 시달리다가 40대의 한창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들은 왜 자기가 죽어 가는지 몰랐다.  병원에서 조차 알지 못했다.  살아보려는 본능 때문에 가산을 모두 탕진했다.  난치병이라고 뒤늦게 안 용사들 중 몇 명은 더 이상 가족에게 고통을 줄 수 없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였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그들이 베트남에서 윤리적으로 부끄러운 짓을 하다가 고약한 성병, 국제 매독에 걸려서 죽는다고 그들의 도덕성을 비난하며 매도했다.
세계평화 수호와 국가경제 발전의 초석이 되었던 수천의 명예로운 참전군인들이 영광과 환대 대신 역사의 뒤안길에서 고엽제 질환의 가혹한 시련을 당하다가 불명예스럽게 죽어간 것이다.

인색한 등급판정

지팡이를 짚고 어색한 걸음을 걷는 해병대 출신의 신기수(59)씨는 고엽제후유증 7급의 판정을 받았다. 단지 걷는 것만 불편한 것이 아니라 통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아내는 이제는 익숙해 졌으나 처음에는 밤마다 신씨의 고통에 시달리는 모습과 괴성에 잠을 못 이뤘었다고 하였다. 사회생활을 전혀 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신씨는 자신의 고통과 통증도 힘들지만 가장으로써의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미안함을 호소하였다. 자신을 위해서도 가족을 위해서도 아닌 국가의 명령을 받고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나라를 위해 바쳤을 뿐인 그에게 지금 남아있는 것은 고통과 모멸감과 절망감 뿐 이다. 신씨는 이미 20차례나 입원했었다. 한번 입원을 할 때마다의 2~3개월은 결코 짧은 시간이라 할 수 없다. 중추신경장애, 다발성신경마비 등의 여러 항목으로 고엽제후유증 7급이지만 이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현재 행정소송 중이다. 충북대학병원 등 여러 병원에서 등급판정을 위한 정밀검사를 받았으나 일반병원 측의 4~5급의 판정과는 다르게 유공자들을 위한다는 보훈 병원에서만 유독 등급판정에 인색한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어렵게 마련한 82만원의 돈으로 대학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고 집으로 돌아올 때 너무 배가 고팠지만 밥 한 끼 길거리에서 해결할 돈이 없어서 배고픔을 참고 집에 돌아와 라면을 끓여먹었을 때 그 참담함에 절망의 피눈물이 흐르더군요..” 라고 말하는 그의 마음을 누가 헤아려 줄 수 있을지 형언키 어려운  답답함이 밀려들었다.

국가유공자 7급 중에서 사회생활에 지장이 많은 사람이 많다. 그런데 문제는 1급부터 6급까지는 기본연금이 70만원이 넘고 비슷한데 유독 7급만 20만원대, 그러나 이것도 3년 전에는 10만원 대였다. 이들은 생활보호대상자나 기초수급자보다도 못한 연금을 받는 것이다. 장애로 인해 취업을 못하거나 설령 했다 해도 안정적이지 못한 유공자들에게 6급과 7급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국가유공자가 등급에 민감하고 조정하려 애쓴다는 것은  어찌 보면 참 창피스러운 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런 우스운 꼴을 만든 것은 코미디 프로그램의 연출가 같은 관계당국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신씨는 여러 자료들과 자신의 사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면서 기자를 조그만 원룸으로 안내하였다. 조금의 창피함도 없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는 신씨에게 한명의 기자가 아닌 천명 만명에게 말하는 듯한 절실함이 느껴졌다. 어두컴컴한 조그만 원룸에 들어서는 순간 그의 파병시절의 군복이 벽에 걸려있었다. 자랑스럽고 당당한 과거의 흔적이 지금 그에게는 인생의 십자가로 느껴질 것 같았다. 그의 방 한구석에 가득 쌓여 있는 약 봉투들, 신씨의 큰 키와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지팡이 그리고 부끄럽게 텅 빈 냉장고안을 열면서 고개를 떨구던 그의 아내가 자꾸만 떠오른다.

참전용사들은 국가유공자로서의 예우에 합당치 않다??

문경에서 소박하게 살아가고 있던 김시형(59)은 고엽제 후유의증으로 지금 서울보훈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김씨의 경우는 가벼운 고엽제 후유의증(경도)을 판정받았다. 그는 시골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이런 고엽제 후유(의)증 같은 정보를 몰라서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채 늙어 버린 장병들이 많다는 것이다. 자신조차 겨우 2년 전에 이런 정보를 접하게 되어 이제서야 혜택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7~8년 전부터 왼쪽 다리가 가늘어지고 마비증상이 오는 것을 느껴서 병원에 가보았지만 아무 이상이 없다는 의사의 무책임한 처방밖에 받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매일 아침 뻣뻣하게 굳은 다리를 주무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김씨의 경우처럼 병명이 뚜렷하지 않은 밝혀지지 않은 고엽제 후유증이 많다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고엽제 후유증에 속한 병명이 없는 월남참전용사들은 국가유공자로서의 대우조차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뢰를 밟고 쓰러지는 베트콩. 빗발처럼 쏟아지는 총탄. 끝내 버티다 숨지며 전우가 내뱉는 외마디소리. 옆에 떨어진 어린 딸의 사진…. ‘지옥의 묵시록’이나 ‘플래툰’ 같은 영화 얘기가 아니다. 월남전에 참전했던 강소위(63)의 뇌리에 박혀 있는 장면이다. 백마부대 1기 소속으로 일년 반 동안 월남전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었던 강소위는 현재 불면증과 악몽에 시달리고 있어서 신경과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월남전에 참전했던 장병들은 온전한 영혼을 갖고 돌아오지 못했고 지금도 여전히 월남전의 악몽과 치열한 혈전을 벌이고 있다. 육체적인 질병 외에 정신적 고통이 더 많은 참전용사들을 지금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고엽제 후유증에 속하지 않기에 국가유공자로서의 예우와 혜택에 제외되어 버린 것이다.

------------ 표삽입(고엽제 질병, 지원내용, 지원대상) --------------

참전용사들이 단지 경제적인 혜택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국가에서 물질적 지원은 해주지 않더라도 국가유공자로 인정해줘서 죽더라도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명예로운 선조로 후손들에게 기억되고 싶다는 것이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이제는 진실을 마주하고 책임져야 할 때이다

베트남의 빽빽한 밀림을 말려버리기 위해 고엽제를 뿌렸을 때 그 당시 고엽제가 그렇게 무서운 것이었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고 사용에 대한 별다른 지시나 주의사항이 없었다. 참전 용사들은 미국에 고마워했다. 그래서 전쟁초반에는 비행기 살포가 아닌 소방호스로 고엽제를 뿌리고 아무 거리낌 없이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었고 어떤 이들은 비행기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고엽제를 맞으며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건 썩은 몸뚱아리 뿐 이다. 마치 천형(天刑)처럼 후유증으로 고통 받는 피해자들, 참전의 죄는 말단에 있었던 그들만이 짊어져야 되는 것일까. 미국은 침묵하고 있다. 한국도 침묵하고 있다. 당연한 권리에 대해 겁먹고 있을 뿐이다. 너무나 당혹스러운 진실을 마주하는 우리의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죽임을 당한 사람들, 또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고 힘겨운 생을 살아내야 했던 생존자들의 고통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들은 누구를 위해 자신을 버렸고 무엇을 위해 싸웠던 것인가.

이젠 말할 때다. 아픈 과거에 대해, 우리의 비굴함에 대해 말할 때다. 이제 우리가 잊어버리려 애쓰는 역사의 생채기를 치료할 때다. 정부는 고엽제 피해 군인들과 그 가족들을 위해 국가 차원에서의 원인 규명과 법적인 조치를 마련해 주고 합당한 예우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1969년, 월남전은 끝났다.
그러나 고엽제 피해 장병들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쟁 속의 영웅들은 전쟁이 종결되면 사람들에게 아픈 기억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전쟁영웅들은 축제가 끝난 뒤의 허탈함을 안듯 그들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 베트남 전쟁은 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31만 명의 한국군이 참전했으며, 5천여 명의 전사자와 1만여 명의 전상자를 남겼다. 기억의 저편에서 평가가 유보된 채 불편한 역사로 뭉개져온 베트남전쟁이 끝난 지 올해로 30돌을 맞았다. 그러나 아직 남아있는 5만여 명에 이르는 고엽제 피해자들에게는 30돌이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들에겐 아직 끝나지 않는 전쟁이기에...
취재 / 김현주 기자

어버이날은 잘 보내셨냐는 평범한 인사에 월남참전 용사 조병기(60)씨는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지난 3월 피부질환과 왼쪽 팔 마비증상으로 고엽제 후유의증(경도)을 판정받고 서울보훈병원에 입원한 조씨는 병으로 고생하는 고달픔보다 더 큰 아픔을 안고 있었다. 고엽제의 후유증이 2세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제 자식 놈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저야 이미 늙고 병든 몸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아들 딸 모두 나와 같은 피부질환으로 고엽제 후유증 증상이 보이고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사실을 알고 병원에서 자세히 검사라도 하고 싶지만 병원에 가면 그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 두려워서...” 자기 입으로 자신이 물려준 병임을 차마 말하지 못하고 자신이 보훈병원에서 받은 약을 준다는 말을 하였다.
국가보훈처 자료에 따르면 정부가 공식 인정한 고엽제 후유증 환자는 7만7000 여명. 그러나 고엽제 후유증 신고자 중 약 20%만이 후유증 판정을 받았을 뿐이고, 월 23만~46만원의 수당을 받는 사람은 정부가 인정한 환자의 55%에 불과하다. ‘건강권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우석균 정책국장은 “ 참전 용사 2세에게서도 각종 후유증이 나타나고 있지만 2세에 대한 정부차원의 연구는 계획조차 없다”고 말하며, 정부의 무성의를 질타했다.
조씨의 피부질환은 이미 80년도부터 생기기 시작하였으나 고엽제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힘들게 버티다가 불과 몇 년 전 후유의증 판정을 받고 치료를 하기 시작하였다. 좀 더 빨리 알았다면 악화되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다면서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누구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대중탕에 가면 남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의식하게 된다고 이야기할 땐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자손에게까지 상흔을 남긴 유공자가 왜 이런 마음으로 살아올 수밖에 없었는지 안타까울 뿐이었다. 더욱 더 기자의 맘을 서럽게 한 것은 늦게나마 조그만 혜택을 받게 해 주는 나라에 감사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였다. 그리고  자신은 이미 뿌려진 고엽제에 간접적으로 스쳤을 뿐이어서 이정도지만 초기에 고엽제를 직접 맞은 동료들은 더욱 심각한 상황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
조씨는 자신을 야구경기에서 팀을 위해 희생타를 날린 것에 비유하였다. 이어 같은 병실안의 6.25 참전 용사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이 있었기에 자신들도 있을 수 있었고 자신들이 있었기에 지금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와 젊은이가 있는 것이 아니겠냐고 이야기하며, 희생타를 날린 것에 대해 후회는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다만 다른 고엽제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국가유공자로서의 예우를 받길 원한다는 말을 전했다.  조씨의 등급과 그에 따른 보상이나 혜택이 억울하지는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어찌 보면 낮은 등급은 자신이 조금은 더 건강히 살 수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냐며 씁쓸한 웃음을 짓는 조씨에게서 선하고 순박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상처로 남았을 전쟁인 월남전. 이미 우리의 기억에서는 사라진지 오래지만, 이 전쟁이 고엽제로 고통 받는 파월용사들에 의해 다시금 기억에 떠올려 지고 있다. 공산화되어 조국을 잃고 난후 세계각지를 떠돌아다니는 전쟁유랑민을 통하여 우리도 조국을 지키자고 냉전의식을 부추기는데 사용되었던 전쟁. 최소한 자유 수호를 위하여 싸웠다고 생각하던 파월용사들이 이제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신음하고 있다. 월남전 당시 적의 은신처가 되는 정글을 파괴하고자 사용되었던 고엽제에 의한 심한 후유증으로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베트남전쟁 (Vietnam War)

프랑스에 대한 독립전쟁과 남북 베트남 간의 전쟁은 두 시기로 분류한다. 베트남은 1945년 프랑스령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을 선언, 같은 해 9월에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발족시켰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1946년에서 1954년까지 베트남 독립동맹군과 전쟁을 전개하였다(제1차 인도차이나전쟁). 그러나 1954년 5월 프랑스군의 거점인 디엔 비엔 푸의 함락으로 같은 해 7월 휴전을 위한 제네바 협정이 체결되었다. 협정의 내용은 북위 17°선을 잠정적 군사경계선으로 정하고, 2년 후에는 전국적으로 선거를 실시하여 통일국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955년 남베트남에 고딘디엠 정부가 수립되자 이에 반대하는 공산분자들은 테러 공격을 감행하였고, 1960년 12월 남베트남에서 ‘남베트남 해방민족전선’이란 이른바 '베트콩'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또한 호치민(胡志明)이 이끄는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의 원조를 받아 더욱 세력을 확장하였고, 선거를 통해 베트남 전역을 장악할 수 없게 된 공산측은 군사적인 수단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1961년 미국 대통령 J.F.케네디는 처음으로 미국 정규군을 파견, 베트남에서 '특수전쟁'을 전개하였는데, 이는 남베트남의 공산화는 동남아시아의 공산화를 가져온다는 견지에서 취해진 미국의 대 공산주의 봉쇄전략의 일환이었다. 이어 L.B.존슨 정부는 1964년의 통킹만 사건(미국 구축함에 대한 북베트남의 어뢰정 공격)을 계기로 미군을 직접 전투에 참가시켰다. 1965년에는 북폭(北爆)을 개시하였으며, 1968년까지는 미지상군의 투입도 54만 명으로 확대되었고 전비(戰費) 또한 54억 달러에서 288억 달러로 늘어났다.

한편 1968년 5월부터 평화교섭을 위한 '파리회담'이 계속되었으나, 전황은 캄보디아(1970)·라오스(1971)로 확대되어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양상을 띠기에 이르렀다. 한편 한국을 비롯해 타이·오스트레일리아·필리핀·뉴질랜드 등 우방국이 참전하였으나, 군사적 승리를 거두지 못하였다. 결국 1973년 1월 27일 베트남에서의 전쟁종결과 평화회복에 관한 '파리협정'이 미국·남베트남·북베트남·베트남 남부 공화임시혁명정부의 4자간에 체결되었다.
협정은 ① 미군의 철수, ② 전쟁포로의 송환, ③ 현상대로의 정전, ④ 남베트남에서의 사이공 정부와 임시혁명 정부 간에 연합정부 조직을 위한 협의, ⑤ 정치범의 석방 등을 규정하였다. 그러나 북베트남과 이들의 지원을 받는 베트남 남부 임시혁명정부는 1975년 4월 말 사이공을 점령함으로써 베트남을 적화 통일하였다.

베트남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전쟁으로, 인적 희생도 커서 사망자 약 120만 명, 부상자 약 300만∼400만 명에 달하였다. 베트남전쟁은 동남아시아의 정치상황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는데 캄보디아에서는 론놀 정권과 크메르루주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1975년 4월 프놈펜이 크메르 루주군에게 장악됨으로써 공산화되었고, 북베트남의 전쟁물자 공급로였던 라오스도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공산화에 영향을 받아 1975년 5월에 공산정권이 들어섰다. 이러한 인도차이나반도의 적화는 아세안 5개국에 대한 새로운 위협이 되었고, 이에 따라 중립을 표방해 온 아세안은 각국의 경제력 강화를 기반으로 하는 안전보장기구화의 움직임을 보였다.  

적군과 아군의 공통의 적이 되어버린 고엽제(AGENT-ORANGE)

열대와 아열대의 정글에서 하노이를 중심으로 하는 호치민의 공산군과 인민해방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을 대상으로 월남의 고딘 디엠 정권과 티우 정권을 지원함으로써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고, 궁극적으로는 자유세계의 평화를 지킨다는 명분 하에 통킹만 폭격을 시초로 대규모 전쟁을 감행한 미국은 정글생태계에 적합한 전쟁무기를 개발하였다. 이 전쟁 과정에서 정글이란 것이 미군에게는 커다란 장애물로 인식되었다. 즉 미 공군의 비행기는 보이지 않는 적의 지상포화에 의해서 격추되었으며, 정글에 익숙한 "베트콩"들은 풀잎과 나뭇잎을 대미군 항전의 방패막이로 이용하고 있었다. 미국방성은 이러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전쟁터의 ‘달표면화(lunarization)작전’의 전개를 계획하였고, 그 실시를 위한 무기로서 제초제로 쓰이는 화학물질을 개발하였다. 그것들 중의 하나가 바로 황색고엽제이며, 이때 제조되었던 고엽제용의 화학무기들은 모두 4가지였다. 이 화학무기의 제조는 다우케미컬이 독점적으로 담당하였다.

  이 제초제들의 기본성분은 약칭으로 2, 4-D(2, 4-dichloroghenoxyacetic acid)와 2, 4, 5-T(2, 4, 5-trichlorophenoxyacetic acid)이다. 황색고엽제(Agent Orange)는 2, 4-D와 2, 4, 5-T의 합성이고 자색고엽제(Agent Purple)는 황색고엽제와 유사하나 생산가가 비싸고, 백색고엽제는(Agent White)는 2, 4-D와 피클로람(picloram)의 합성이며, 청색고엽제(Agent Blue)는 카코딜산(cacodylic acid)의 합성제품이다. 이 네 가지 제초제 중에서 베트남전에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이 황색고엽제이다.
황색고엽제의 주성분인 2,4,5-T가 고엽제이 제조과정을 거치면서 발생되는 다이옥신(Dioxin)이 이러한 환경파괴현상의 주범이라고 한다. 정글의 숲을 제거하여 적을 쉽사리 발견하고 섬멸하기 위해서 제조된 고엽제는 적군과 아군이 혼재하고 있는 전쟁터에 살포되었던 것이다. 고엽작전이 치러졌던 지역을 보면 전쟁의 참화는 이제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몸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이 고엽제는 신경을 완전히 녹여 버리고 잠복기간도 길다. 적군과 아군의 공통의 적이 바로 고엽제였던 것이다.


‘죽음의 재‘로 불리는 다이옥신(Dioxin)

문제의 다이옥신은 인류가 발명한 최악의 독성물질로 그 독성이 청산가리의 수만 배에 달한다. 암과 각종 질병을 유발하는 환경호르몬인 다이옥신은 주로 쓰레기 소각로나 화학물질, 비료 생산 공장에서 나오며, 화산이 폭발하거나 산불이 났을 때도 나온다. 공해문제에서 오염도를 나타내는 지표로 흔히 ppm(1백만분의 1) 단위가 쓰인다. 하지만 다이옥신의 허용 규제치는 단위부터가 달라 ppb( 10억분의 1)을 쓴다. 그만큼 엄청난 독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2,3,7,8-TCDD는 요구르트 하나 분량인 85g으로도 10만명의 치사량이 된다.
이 물질은 베트남전쟁 때 미군이 적의 은신처가 되는 숲을 없애려고 사용한 고엽제의 주성분으로, 베트남 참전 군인들이 기형아를 낳는 등 건강 이상을 보이자 그 위험성이 크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다이옥신에 중독되면 극심한 피부 질환이 생기며 생식기능과 간이 손상되고, 암에 걸리기도 한다. 흙, 공기, 물 등에 쌓여 있다 먹이사슬을 통해 인체에 축적되며, 쉽게 분해되지 않는다. 환경운동가들은 가장 위험한 독성물질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다.

다이옥신은 극히 미량으로도 간암과 기형을 유발한다. 미국사회에 있어 고엽제가 크게 사회문제화 된 것도 파월참전부모에게서 생겨난 선천적 기형아의 출산 때문이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선천적 기형아의 출산만이 아니다. 피부암, 간암, 내분비계암, 갑상선암, 폐암, 신장암, 방광암, 뇨관암 등 수많은 암을 일으킨다. 또한 감각 중추도 침범하여 말초신경이상, 감각이상을 가져오고, 운동신경의 이상으로 사지 마비를 가져온다. 면역계의 이상은 폐결핵 등 여러 질환을 유발시키고, 콜레스테롤의 상승으로 고혈압이 유발되고, 뇌졸중을 일으키게도 된다.

  다이옥신의 독성 메카니즘은 아직 규명되지 않았으며, 다이옥신이 일으키는 질병도 증상에 따라 치료할 뿐 치료약도 개발되어있지 못하다. 다이옥신은 지금의 의학기술로서는 불치의 병이다. 고엽제후유증환자들은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 뚜렷한 병명도 모른 채 가산을 탕진한 채 사회적 폐인이 되기 일쑤이다. 원진레이온 이황화탄소중독사건으로 온 사회가 떠들썩했지만, 다이옥신도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다. 이황화탄소는 고혈압, 뇌혈관계, 신장을 침범하지만 , 다이옥신은 각종 암을 유발시킴은 물론, 근골격계, 감각신경계, 면역계의 이상 등 신체에 침범하지 않는 데가 없을 정도이고, 다세대에 걸쳐 선천성기형을 유발하기조차 한다. 우리나라 환경피해를 살펴보더라도 다이옥신만큼 심각한 피해를 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월남파병 결정과 의의

한국의 베트남참전 결정은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한국은 베트남과 동맹관계가 아니었기에 베트남은 한국의 참전을 꺼려했다. 또한 미국에 정치적 이득을 주지 않는다는 판단으로 존슨 대통령은 1964년 10월 동맹국(SEATO 가맹국)에게 군사적, 정치적 지원을 요청할 당시, 한국에는 전용부대 파견을 요청하지 않았다. 더 자세한 이유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 한국은 유엔이나 SEATO의 회원국이 아니다. ② 미국은 아직도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다. ③ 한국의 자체의 안보문제를 안고 있다. ④ 베트남은 한국의 전투부대 참전을 꺼려한다.

그런데 동년 12월 존슨 대통령은 친서를 통해 한국군의 베트남 지원을 확대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와 같은 미국의 입장변화는 군사적 이유 때문이었다. 존슨 대통령은 1971년에 출간된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당시 (1965년 여름) 15개 미 전투사단(총병력 7만5천명)이 베트남에 주둔해 있었다. 맥나마라(존슨 정권의 국방장관)는 34개 사단으로의 증원을 건의했다.... 만약 한국이 9개 사단을 파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병력수준을 17만5천내지 20만 명으로 증강시켜야 한다.”
그래서 존슨 대통령은 대통령특별보좌관 해리만을 보내 한국의 전투부대 파견을 요청했던 것이다.

한편, 한국이 월남참전을 결정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요인을 다음과 같이 5가지로 열거해 보면 ① 한국전쟁 당시 받았던 군사원조를 보상해야 한다는 의무감 ②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강화시키려는 의도 ③ 장래의 경제적 이익에 대한 관심 ④ 국제적 권위를 획득하려는 의도 ⑤ 베트남의 안보가 한국의 안보와 연계되어 있다는 인식 등이 있다.

한국군 월남참전 연병력 규모

파병의 결과로 한미안보동맹 체제는 더욱 강화되었고 한국 경제도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안보와 경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확실히 잡은 셈이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최용호 연구원은 “파병으로 국가적 실리를 최대화하고 전쟁특수를 최대한 활용해 경제개발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평가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한국이 1965년부터 1969년 사이에 베트남에서 번 돈의 액수는 약 5억4600만 달러에 이르고(이 숫자는 당시 한국이 해외에서 벌어들인 전체 외화의 16%에 달한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의 액수는 약 10억 달러나 된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의 박정희 정부는 한국군의 월남전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군사원조를 더 많이 얻을 수 있었다. 1956년부터 1965년까지 10년간 미국의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 액수는 연평균 2억90만 달러였고, 1966년부터 1973년까지 8년 동안 즉 한국군의 월남참전기간의 연평균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액수는 3억 9150만 달러로 늘었다는 통계가 당시 한국 정부와 미국정부 사이에 벌어진 거래의 일부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반대로 한국이 잃은 것은 바로 강도 높은 독성을 갖고 있는 황색고엽제에 노출된 한국의 젊은이들이 안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치명적인 질병이 문제라는 사실이다. 전형적인 군산복합의 희생물로서 미국의 참전용사들은 그 대가를 요구하고 나섰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이중적인 올가미의 희생물이 되었다. 즉 전쟁 상황에서 벌어진 군산복합의 희생물일 뿐만 아니라, 강대국에 종속된 약소국으로서의 종속적 희생물이다.
우리는 현대사에서 큰 획을 긋는 월남파병의 의의나 그 결과를 올바르게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국가부흥의 반석을 용병으로 보는 잘못된 시각

일부 비판론자들은 월남파병으로 국가가 경제·군사적으로 많은 발전을 하였음에도 파병이 경제이익과 전투수당을 전제로 이루어졌으므로 파월 한국군을 용병이라고 비판하는데 이는 잘못된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으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았고 전투수당을 받기는 하였으나 처음부터 파병목적이 명확하였다. 초대 주월한국군사령관인 채명신 장군은 “돈이 필요하다고 목숨을 바치러 갈수 있습니까?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보다 국가존립이라는 더 큰 요인이 있었습니다.“라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도 있다. 사실 용병이란 말은 군사적 지식이 없는 이들의 잘못된 표현이다.

한국군은 월남에서 자유수호를 위한 국가의 부름에 임해 공산주의와 당당히 맞서 용감히 싸웠으며 이들의 희생의 결과로 국가가 여러 분야에서 발전하였고, 특히 경제가 획기적으로 발전하여 국력이 세계로 뻗어나가게 되었다. 이들을 용병이라는 단어로 격하시키는 과오를 저질러서는 안 되는 것이다.

20년을 넘긴 침묵

베트남전쟁의 최전선에 파견되어 고엽제에 노출되어 병석에 있으면서도 참전 재향군인들이 불만을 말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군사정권의 금기사항이었던 것이다. “고엽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참전 미국군이나 오스트레일리아군이 미국의 화학기업으로부터 고엽제 피해를 보상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1991년, 오스트레일리아에 이주한 전한국군장교로부터의 정보였습니다.” 라고 대한해외참전전우회의 기관지편집자는 말했다.

고엽제와 다이옥신의 인체에 미치는 영향은 베트남이나 미국에서는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만 정보의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미군방송이나 미국신문 등의 보도에 의해 아는 자도 있었으나 이것이 보도되는 것은 봉쇄되어 온 것이다. 문제가 계속 숨겨져서 원인불명의 이상한 병으로 쓰러지는 참전 군인들은 적절한 치료도 받지 못해 증상은 점점 악화되어갔다.

고엽제문제는 왜 철저하게 숨겨졌는가. 그것은 전두환·노태우로 이어져온 군인대통령이 참전 한국군의 지휘자의 일원이었다는 사실, 그 전력을 바탕으로 전후 더욱 군내에서 뻗어 올라갔다는 경과와 관계가 있다.
당시 대한민국 제5공화국 정부에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철저한 보도통제로 참전용사들은 ‘베트남 풍토병’이라는 어이없는 말로 보도된 채 각종 질병에 시달리다가 40대의 한창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들은 왜 자기가 죽어 가는지 몰랐다.  병원에서 조차 알지 못했다.  살아보려는 본능 때문에 가산을 모두 탕진했다.  난치병이라고 뒤늦게 안 용사들 중 몇 명은 더 이상 가족에게 고통을 줄 수 없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였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그들이 베트남에서 윤리적으로 부끄러운 짓을 하다가 고약한 성병, 국제 매독에 걸려서 죽는다고 그들의 도덕성을 비난하며 매도했다.
세계평화 수호와 국가경제 발전의 초석이 되었던 수천의 명예로운 참전군인들이 영광과 환대 대신 역사의 뒤안길에서 고엽제 질환의 가혹한 시련을 당하다가 불명예스럽게 죽어간 것이다.

인색한 등급판정

지팡이를 짚고 어색한 걸음을 걷는 해병대 출신의 신기수(59)씨는 고엽제후유증 7급의 판정을 받았다. 단지 걷는 것만 불편한 것이 아니라 통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아내는 이제는 익숙해 졌으나 처음에는 밤마다 신씨의 고통에 시달리는 모습과 괴성에 잠을 못 이뤘었다고 하였다. 사회생활을 전혀 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신씨는 자신의 고통과 통증도 힘들지만 가장으로써의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미안함을 호소하였다. 자신을 위해서도 가족을 위해서도 아닌 국가의 명령을 받고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나라를 위해 바쳤을 뿐인 그에게 지금 남아있는 것은 고통과 모멸감과 절망감 뿐 이다. 신씨는 이미 20차례나 입원했었다. 한번 입원을 할 때마다의 2~3개월은 결코 짧은 시간이라 할 수 없다. 중추신경장애, 다발성신경마비 등의 여러 항목으로 고엽제후유증 7급이지만 이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현재 행정소송 중이다. 충북대학병원 등 여러 병원에서 등급판정을 위한 정밀검사를 받았으나 일반병원 측의 4~5급의 판정과는 다르게 유공자들을 위한다는 보훈 병원에서만 유독 등급판정에 인색한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어렵게 마련한 82만원의 돈으로 대학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고 집으로 돌아올 때 너무 배가 고팠지만 밥 한 끼 길거리에서 해결할 돈이 없어서 배고픔을 참고 집에 돌아와 라면을 끓여먹었을 때 그 참담함에 절망의 피눈물이 흐르더군요..” 라고 말하는 그의 마음을 누가 헤아려 줄 수 있을지 형언키 어려운  답답함이 밀려들었다.

국가유공자 7급 중에서 사회생활에 지장이 많은 사람이 많다. 그런데 문제는 1급부터 6급까지는 기본연금이 70만원이 넘고 비슷한데 유독 7급만 20만원대, 그러나 이것도 3년 전에는 10만원 대였다. 이들은 생활보호대상자나 기초수급자보다도 못한 연금을 받는 것이다. 장애로 인해 취업을 못하거나 설령 했다 해도 안정적이지 못한 유공자들에게 6급과 7급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국가유공자가 등급에 민감하고 조정하려 애쓴다는 것은  어찌 보면 참 창피스러운 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런 우스운 꼴을 만든 것은 코미디 프로그램의 연출가 같은 관계당국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신씨는 여러 자료들과 자신의 사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면서 기자를 조그만 원룸으로 안내하였다. 조금의 창피함도 없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는 신씨에게 한명의 기자가 아닌 천명 만명에게 말하는 듯한 절실함이 느껴졌다. 어두컴컴한 조그만 원룸에 들어서는 순간 그의 파병시절의 군복이 벽에 걸려있었다. 자랑스럽고 당당한 과거의 흔적이 지금 그에게는 인생의 십자가로 느껴질 것 같았다. 그의 방 한구석에 가득 쌓여 있는 약 봉투들, 신씨의 큰 키와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지팡이 그리고 부끄럽게 텅 빈 냉장고안을 열면서 고개를 떨구던 그의 아내가 자꾸만 떠오른다.

참전용사들은 국가유공자로서의 예우에 합당치 않다??

문경에서 소박하게 살아가고 있던 김시형(59)은 고엽제 후유의증으로 지금 서울보훈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김씨의 경우는 가벼운 고엽제 후유의증(경도)을 판정받았다. 그는 시골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이런 고엽제 후유(의)증 같은 정보를 몰라서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채 늙어 버린 장병들이 많다는 것이다. 자신조차 겨우 2년 전에 이런 정보를 접하게 되어 이제서야 혜택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7~8년 전부터 왼쪽 다리가 가늘어지고 마비증상이 오는 것을 느껴서 병원에 가보았지만 아무 이상이 없다는 의사의 무책임한 처방밖에 받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매일 아침 뻣뻣하게 굳은 다리를 주무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김씨의 경우처럼 병명이 뚜렷하지 않은 밝혀지지 않은 고엽제 후유증이 많다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고엽제 후유증에 속한 병명이 없는 월남참전용사들은 국가유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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