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 사상 첫 여성 총리, 한명숙 국무총리

그야말로 여성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드디어 우리나라도 처음으로 여성 총리를 가지게 되었다. 이제 여성이 진출하지 못할 분야는 어디에도 없다. 부드러운 힘으로 한국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여성들이 이미 사회 곳곳에서 활약상을 보여준다. 과거 과소평가되었던 ‘여성만의 감성’이 진가를 발휘하며 세상을 움직이고 있다.


지난 4월, 58년 우리나라 헌정 사상 첫 여성 국무총리가 탄생했다.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4월 19일 국회 본회의에서 한명숙 국무총리 임명동의안이 찬성 다수로 통과되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장상 총리 지명자가 국회 인준의 벽을 넘지 못하고 낙마한 지 4년 만의 일이다. 이에 한 총리는 대한민국 헌정사상 첫 여성 총리이자, 고건, 이해찬 전 총리에 이은 참여정부 3대 총리로 취임하게 됐다. ‘외유내강’의 모습을 하고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지닌 한명숙 국무총리. 정권에 휘둘리지 않을 청렴한 이미지를 지켜가며 깨끗한 행정 업무를 수행해내기를 국민 모두가 바라고 있다. 사회 안정을 향한 국민의 애타는 기대를 온몸으로 받고 있는 그가 그 목마름을 앞으로 어떻게 충족시켜줄 것인지에 귀추가 주목된다.

화합과 조정, ‘어울림의 항해’

국무총리 내정자로서 총리실 직원들과의 첫 만남에서 한 총리는 “우리는 국민의 평안과 행복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항해하는 배의 항해사들”이라며 ‘어울림의 항해’라는 말을 꺼냈다. 키를 잡는 역할을 하는 총리와 함께 모든 공직자들이 노를 젓고 돛을 올리며, 엔진을 돌려 추진력을 내자는 포부의 표현이었다. 그 후 동의안 통과 직후 청문회 자리에서 그는 또 “대한민국 호에 야당을 비롯한 여당, 그리고 우리 모든 국민이 함께 타고 이견이 있더라도 화합하고 조정해나가는 어울림의 항해를 해야 한다”며 총리로서의 첫 운을 떼었다.
한 총리는 사회 양극화 해법 마련, 한미 FTA 체결의 지속적 추진 여부 등 참여정부 후반기 주요 국정과제 해결을 과제로 떠안으며, 첫 여성 총리의 국정 수행 능력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가깝게는 5·31 지방선거를 앞둔 중립적 내각 운용 등의 난제들이 한 총리 앞에 버티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과 한 총리간의 국정 운영방식 조율 여부에도 관심이 쏠린다. 노 대통령은 이전의 ‘책임총리’의 체제를 그대로 이어간다는 방침이지만, ‘실세총리’였던 이해찬 전 총리의 역할과는 다르게 한 총리가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의 모습을 그려갈지가 주목된다.
취임 후 근 한 달 동안 한 총리는 활발한 대·내외 활동을 벌이며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그의 첫 번째 시험대와도 같았던 평택 사태 때에는 대국민 발표를 하며 대화와 평화의 길을 모색하자고 간절히 호소하기도 하였다.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으로 수감 생활도

초대 여성부 장관과 환경부 장관을 지냈으며, 16, 17대 국회의원을 지낸 한명숙 총리의 특별난 과거는 운동권 출신이며 전과 경력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국회 인사 청문회 때에는 한 총리의 이념 문제까지 거론되었었다. 국보법 폐지 등 북측에 대한 급진적 성향을 보이는 한 총리의 사상 검증이 필요하다는 논란도 일었다.
작가가 되고 싶었던 꿈 많던 문학소녀는 이화여대 불문과에 진학하며 학생단체에 가입하게 된다. 암울했던 시대는 그를 꿈으로부터 깨어 나오게 했고, 서울대와 이화여대 기독교학생연합 단체인 ‘경제 복지회’에서 활동하며 만나게 된 남편 박성준 씨와 함께 그는 인생의 행로를 바꿔갔다. 단체의 회장과 부회장으로 만난 그들은 4년간의 열애 끝에 1968년 결혼했으나, 결혼 6개월 만에 남편은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됐고 당시 스물 네 살이었던 한명숙 총리는 남편 옥바라지를 하게 되었다. 남편이 감옥에 있던 13년간 한 달에 한 번씩 가던 면회와, 한 차례도 빠짐없이 매주 주고받은 편지로 인해 서로에 대한 사랑은 더욱 견고해졌다. 믿음과 철학을 공유하고 있던 남편을 점점 닮아가며 한 총리는 점점 더 강한 투사가 되어갔다.

그 시기 학생들의 시위를 지원한 것이 문제가 되어 이화여대 사감을 그만둔 한 총리는 강원래 목사가 설립한 ‘크리스천 아카데미’의 간사로 일하게 되었다. 한 총리는 노동자, 농민, 여성, 학생, 종교 계층의 문제를 다루던 크리스천 아카데미에서 여성 교육을 담당하는 간사로 있었다. 사회문제를 해소하기위해 중간자적 중재자를 양성하는 데 목표를 둔 ‘크리스천 아카데미’에서 한 총리는 뛰어난 활동을 보이며 여성 지도자로서의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유신 말기였던 그 시절 빈번히 일어나곤 했던 공안 조작으로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에 한명숙 총리가 연류된 것이다.
1979년 당시 공안 당국은 크리스천 아카데미가 열었던 교육 프로그램을 문제 삼으며 간사 6명을 구속했다. ‘50여 점의 불온 책자를 탐독하고 북한의 체제와 노선을 지지했다’는 죄목이었다. 밤새 고문을 받으며 ‘빨갱이’임을 자백하라는 요구를 받았던 대표적인 고문조작 사건이었다. 후에 이 사건은 조작이었다는 판결을 받으며 한 총리의 무죄도 입증되었다. 징역 4년에 자격정지 4년의 형량을 받았던 한 총리는 2년 만인 1981년 특사로 풀려나게 되고, 같은 해 남편도 석방되었다. 13년 만에 다시 만난 부부는 이미 중년이 되어있었다. 1985년, 지금은 군에 복역 중인 아들 한길도 낳는다.
석방 후 한 총리는 이화여대 여성학과 대학원에 진학하여 현장에서 겪어온 문제를 더욱 전문적으로 연구하고자 하였고, 남편도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하며 함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였다.

초대 여성부 장관, 환경부 장관 지내

한명숙 총리는 여성의 권리와 지위 신장을 위해 힘써온 여성운동의 대모이다. 1983년 여성민우회의 전신인 여성평우회 발족 당시부터 참여를 했고, 1987년 전국 21개 민주여성단체가 연합한 ‘한국여성단체연합’의 구성에도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진보적 여성운동의 한가운데에서 민주화 운동에도 조직적으로 참여하며 1990년 여성민우회 회장으로 취임했다. 90년대 중반에는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 대표를 지냈으며 10대 여성 정책 과제를 발표하며 지자체 선거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그는 호주제 폐지, 동성동본 금혼 규정 삭제, 재산 분할 청구권 등 여성계의 오랜 숙원이었던 가족법을 개정하기 위한 투사적 역할을 하였다. 그 당시 열악한 상황 속의 시대를 앞선 노력들로, 하나 둘씩 바뀌어 온 가족법이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여성운동가에서 정치인으로의 변신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연이 계기가 되었다. 1995년 김 전 대통령의 국민회의 입당제의를 고사하였다가, 1999년 새천년민주당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하며 정치계에 발을 들였다. 2000년 비례대표로 16회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현실정치로 뛰어들었다. 그 후 2001년 여성운동가로서의 활동 경험을 인정받아 초대 여성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여성 권익에 관련된 법률 제정에 애썼으며, 2003년엔 환경부 장관도 지냈다. 그런 그가 지난 4월 총리의 자리에 오르며 사상 첫 여성총리라는 영광을 안게 된 것이다.

‘사상 첫 여성 총리’ 수식어 뛰어넘어야

한편 한명숙 총리의 이번 임명이 여성 총리의 탄생이라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던 것도 사실이다. 그간 우리 사회의 성공한 여성들은, 여성이라는 점에만 조명을 받아 그 인물이나 성공 자체는 간과되어왔다.
한 총리는 취임사에서도 밝혔듯이 자신에게서 드러나는 특성이자 장점인 ‘여성적 리더십’이 이제까지 이어져오던 남성 총리들이 부처를 장악하던 방식과는 분명 다른 형태로 펼쳐질 것이라고 호언했다. ‘리더십’과 ‘장악력’ 사이에는 어떠한 필연적 등식도 성립하지 않는다며 ‘장악’이라는 컨셉, 또 ‘부처 이기주의’를 버리자고 제안했다. 또한 인사청문회 등에서 부각되었던 ‘외유’와 ‘부드러움’보다 자신의 ‘내강’과 ‘카리스마’를 이제 곧 국민이 알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제 한명숙은 ‘사상 첫 여성 총리’라는 수식어로 주목받는 것을 뛰어넘어 속히 대한민국의 한 총리로서의 자리매김을 해야 한다. 여성의 권익을 향했던 열정을 모든 국민을 위한 그것으로 전환하여, 이제는 ‘국민의 행복’이라는 권익을 신장시켜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NP

한명숙 국무총리 취임사 中
“민생 현장 찾아가는 민생 총리 되겠다”
...공직자들이 진실로 국민의 평안과 행복을 위해 어떤 자세로 일해야 할까 한번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공직자들이 “어려운 처지의 국민의 체험을 직접 해보는 것이 참 좋겠다” 이런 제안을 드립니다. 말로만 하는 행정, 책상에서만 하는 궁리가 아니고, 각 부처마다 직접 관계되는 영역에서 현장으로 내려가서 국민이 겪는 어려움을 실제로 체험해 보자는 겁니다.
저는 엊그제 인사청문회의 모두발언에서, ‘여성적인 리더십’에 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여성적 리더십은 이해와 소통, 부드러움과 강인함, 배려와 섬김이 조화를 이룬 지도력”이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데 상식적인 얘기지만, ‘이해한다’는 말이 영어로 under-stand입니다. “아래에 선다”는 뜻입니다. 이해한다, 국민을 이해한다, 국민과 소통한다는 것은 아래에 선다는 뜻입니다. 아래로, 낮은 자리로 내려가서 몸을 낮출 때, 비로소 진실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을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귀를 기울이면 비로소 들리는 소리, 이것이 소통의 출발이라고 봅니다.
각 부처마다 직접 관계되는 현장으로 내려가 몸을 낮추고, 국민 아래에 서서, 국민이 겪는 어려움을 몸으로 체험해 보는 것, 참으로 공직자로서 꼭 한번 그런 방향으로 일하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때, 보이고 들리는 진실의 소리를 정책으로 만들고 시스템화하여 시행하고 실천하는 것, 이것이 ‘공직’이고 ‘공무’(public service)가 아닐까 싶습니다. public service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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