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요덕스토리>의 안무가 김영순 씨

알면서도 모르는 척 지나쳐버리고 싶은 순간이 있다. 몰랐다면서 회피해 버리고 싶은 사실들도 있다. 그러나 알고 있다. 모른다 하여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눈을 감아도 세상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부인할 수 없지 않겠는가.


뮤지컬 <요덕스토리>, 차라리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과장된 것이라든가 혹은 리얼리티를 표방한 철저한 허구였더라면 좋았을 텐데, 사실의 철저한 재현이라는 것이 가슴 아프기만 하다. 과장 없이 철저한 고증 작업을 거친 후 무대에 올렸다고 이야기하는 홍보담당자의 말이 오히려 반갑지 않은 것은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이들이 우리의 동포인 그들을 연기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요덕스토리는 용서를 이야기하지만

<요덕스토리>의 정성산 감독, 그 역시 탈북자이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탈북 했다는 이유로 수용소에 끌려가 4년 전 공개처형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럼에도 정 감독은 요덕스토리의 주제를‘용서’라고 말한 바 있다.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용서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었다.“우리 국민들도 정치로 인한 북에 대한 원망이나 냉소적인 태도를 문화를 통해 용서했으면 한다.”고 말이다.
우리가 이 뮤지컬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비단 정감독 뿐만이 아니었다. 배우며 스텝들 모두가 이야기되어야겠지만 탈북자 출신의 안무가 김영순 씨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북한 무용수들의 안무를 지도한 그녀, 한국 최고의 무용가로 칭송받는 최승희의 직계 제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김영순 씨 역시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탈북 한 이였다. 그녀의 입을 통해 그 곳의 일상에 대해서 그리고 한국에서 탈북자로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어떤 느낌인지 물어보기로 했다.


요덕스토리 탈북자 안무가 김영순씨 인터뷰

▲ 요덕스토리 탈북자 안무가 김영순 할머니. 요덕, 그곳을 생각하면 힘든 일이 없었다.
사단법인 북한민주화 운동본부는 탈북자들의 모임이다. 그것도 정치법 수용소 출신의 탈북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그 곳에는 NK조선의 강철환 기자를 비롯하여 많은 탈북자들이 모여 있다. 비록 자주 모이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김영순 씨는 그 곳에서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단다.
요덕 공연을 위한 연습은 작년 12월 15일부터 시작되었다. 오디션을 보는 것부터. 뽑은 배우들이 모두 뮤지컬 배우였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춤을 못 추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디스코나 재즈댄스는 잘 하는데 반면 우리 춤은 잘 몰랐다고 이야기한다.

Q. 우리 춤과 일반적인 춤의 차이점이 무엇일까?
A. 우선 재즈 댄스의 경우 호흡이 상승한다. 반면에 우리 춤의 경우 호흡이 우아하고 아릅답게 흘러간다. 아다지오적인 느낌이다.

Q. 춤은 언제부터 추었나?
A. 17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췄다. 어렸을 때부터 춤에 관심이 있었다. 난 춤에 미쳤었다. 종합 예술학교 무용학교 1기생이었다.

Q. 정확히 언제 탈북 하였는가?
A. 2001년 2월 1일 탈북 하였다. 그리고 한국에는 2003년 11월 25일에 들어왔다. 그 전에 중국에서 2년 6개월을 체류하였다.

Q. 당신이 정치범 수용소에 들어가게 된 과정에 대하여 이야기해 달라.
A. 70년 8월에 조사를 받고 그 해 10월에 요덕수용소에 입소하였다.

Q. 정확한 이유가 무엇이었나
?
A. 이유는 간단하다. 성해림과의 친분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와는 고교시절과 대학시절 동창이자 친구였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가문에 대한 일에 대하여 알면 안 된다. 그런데 내가 성해림과 친구였으니 문제가 된 것이다. 그녀에 대하여 너무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 죄명이었던 것이다.

Q. 당시 기분이 어땠나?
요덕수용소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요덕수용소는 1970년부터 정식으로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요덕군의 5개리인 룡평리, 평전리, 립석리, 대숙리, 구읍리의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수용소를 건설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안에 흐르는 립석천을 경계로 하여 동쪽의 완전통제구역과 서쪽의 혁명화 구역으로 나누어진다고 한다. 완전통제구역의 경우 종신수용소로 다시는 일반사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곳이다. 수용자들은 광산과 벌목장에서 처참한 강제노동에 시달리다가 결국은 수용소 내에서 죽게 되는 것이란다. 강철환 씨와 안혁의 증언에 따르면 1년 정도 수용소생활을 한 정치범들은 영양실조로 인하여 1년에 몸무게가 평균 15kg 이상 줄어든다고 한다. 추울 때에는 동사하는 사람들이 발생하는 것은 물론 하천물을 그대로 식수로 사용하기 때문에 전염병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수없이 많으며 심한 육체노동으로 폐렴이나 결핵, 펠라그라병 등의 질병에 시달리고 있으나 의사는 물론 약도 없기 때문에 격리 수용된 채 방지된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방치된 채 죽어가는 이들이 하나의 수용소에 매년 40~50명에 이른다고 하니 끔찍할 뿐이다. 매일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처음에는 정신적인 충격이었다고 하나 시간이 지나면 그것조차 무감각해진다고 하니 이것이 더욱 끔찍하게 느껴진다.

A. 하늘이‘꽝’하고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철조망 속으로 들어가야 하나 싶었다. 정신적인 충격은 말로 설명할 수도 없다. 그 충격으로 입소한 순간부터 4년 동안 생리를 멈추었었다. 그런 기분으로 8년 6개월을 살았다.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있겠는가. 그야말로 칠흙 같은 밤이 8년 6개월이었다. 북한에서는 재판 없이 죄명 없이 가는 곳이 정치범 수용소였다.

Q. 요덕수용소의 수용인원은 몇이나 되었나?
A. 글쎄... 어린아이부터 3만 여명이라고 하던데, 수는 정확하지 않다.

Q. 탈북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나?
A. 북한 땅에서 요덕수용소로 가기 전까지는 평양에서 호위호식하며 살았다. 그러나 납득이 가지 않는 죄명으로 수용소로 갔을 때 엄청난 배신감이 들었다. 나 하나의 잘못 아닌 잘못으로 온 식구가 정치적인 박해를 받았던 것이다. 그 정신적인 충격이란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나 철저한 감시 속에서 31년을 살다보니 쉽게 탈북을 감행할 수는 없었다. 모든 정치, 경제, 문화적인 혜택을 박탈당하고 삶을 지탱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갈 곳은 남한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나라를 생각해 본적은 없었다. 내 나라, 내 동포 안에서 여생을 마치고 싶을 뿐이었다.

Q. 탈북하면서 가장 두려웠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A. 탈북 도중에 붙잡히면 바로 총살이다. 두려웠다. 그리고 가장 어려웠던 것은 탈북 뒤의 상황을 어떻게 매끄럽게 처리할 것인가였다.

Q. 두고 온 가족이 없나?
A. 식구는 남아있지 않다. 나하고 아들 둘이 함께 넘어왔다.

Q. 처음으로 한국에 도착했을 때의 기분이 생각나는가?
A. 물론이다. 놀라움과 감동이었다.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 건축물들을 보고 발전한 환경에 감탄하고 그 동안 얼마나 노력하여 이룬 것일까라는 생각에 또 한 번 감탄을 했다. 어안이 벙벙하고 감개무량했다. 아마 감상문을 30장은 썼을 것이다.

Q. 혹 탈북을 후회한 적은 없었나?
A.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내 부모의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고향은 경상북도 안동이었다.

Q. 안동에는 가 보았는가?
A. 물론이다. 안동에 가서 안동댐도 가보고 도산서원도 보았다. 참으로 멋진 곳이었다. 고즈넉하고 점잖은 참 멋진 도시였다.

Q. 당신이 알고 있는 요덕수용소(=제15호 관리소)는 어떤 곳이었나? 그리고 북한 내에서는 그 곳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는가?
A. 북한 주민들은 요덕 수용소를 모른다. 그 곳은 국가 체제 유지를 위한 독재기구이다. 그것을 공개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수용소에서는 입소만 있을 뿐 나가는 시기는 언제인지 알지 못한다. 좌절하면 죽는 곳이다. 기한조차 모르고 그 끔찍한 곳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절망이었다. 비로소 그 곳에서 나가라고 했을 때 나의 형량을 알았다.

Q.. 수용소에서의 생활에 대하여 들어보고 싶다.
▲ 뮤지컬 <요덕스토리> 중에서.
차라리 허구였으면 좋았을 것을. 철저한 고증을 거친 후에 무대에 올렸다고 하니 그것이 더욱 가슴 아프다.
A. 수용소에 입소한 사람들은 계층부터 다양하다. 인민군 장령부터 박사급 인물들 그리고 농민에 이르기까지 있었다. 죄명 역시 다양하다. 김일성의 목에 혹이 났다고 해서 끌려온 이도 있었고 김일성 석고상을 깨서 온 사람도 있었다. 김일성의 사진이 실린 신문을 바닥 밑종이로 사용해서 온 사람, 성해림 건으로 온 사람(성해림이 김일성과 같이 산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사람들), 남한 비디오를 보았다는 이유로 그리고 외국의 문물에 물들었다는 이유로 온 사람 등 다양했다. 수용소에 입소하면 가족단위와 독신자로 구분을 한다. 입소하고 나면 주 사상, 월 사상, 분기 사상, 상반기, 하반기, 연말 사상 투쟁회의를 가진다. 그 안에서 잘못을 하게 되면 또 붙들어가게 되는데, 그렇게 끌려간 사람이 다시 돌아오는 것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도망을 치면 공개처형이다. 난 그렇게 공개처형 당하는 사람을 두 명 보았다. 3시 반에 일어나 4시 반에 출근을 하면 하루 종일 노동을 한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일만 하다 보니 아픈 사람이 수두룩했다. 태양빛을 받는 부분의 손등이 터지기도 하고 혀가 쩍쩍 갈라지고 물만 마셔도 설사를 멈추지 않는 등 그렇게 해서 죽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그 안에서는 거의 농사로 자급자족하며 살아간다. 추위와 더위로 고통 받는 것은 말도 못한다.

Q. 당신은 가족들이 모두 수용소에 입소한 것인가?
A. 그렇다. 내가 성해림과 알고 있다는 이유로 나를 비롯하여 모든 가족이 고통 받았다. 수용소 안에는 큰 강이 하나 흐르는데 나의 아홉 살 난 아들이 빠져죽었다.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수용소에서 영양실조로 돌아가셔서 그 곳에 묻었다. 세 식구를 묻고 8년 만에 네 식구가 나왔다.

Q. 북한에서는 인권문제에 대하여 어느 정도 관심가지고 사는가?
A. 북한에서는 인권이나 자유라는 단어조차 모르고 살아간다. 21세기의 태양을 모셨기에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두 개의 태양을 모셨기에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민족이라고 말하는 이들인데, 자유나 인권을 알 리가 없지 않겠는가.

Q.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려운 점이 많았던 것으로 아는데.
A. 정 감독이 초기에 이 공연을 무대에 올릴 수 있을 것인가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결국은 모두의 성원으로 이루어졌다. 나야 나이 먹었으니 왔다 갔다 하는 것 이외에는 별로 어려운 일이 없었다. 요덕을 생각하면 힘든 게 없었다. 한 번도 나태해 본 적이 없었다.

Q. 지금 행복한가?
A. 지금 행복하다. 그런데 외롭기도 하다. 두 번의 심한 고문으로 지금까지 앓고 있는 아들을 보면 마음이 너무나도 아프다. 하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살고 싶어서 들어 선 땅이다.


끝나지 않은 우리들의 이야기

얼마 전‘국경의 남쪽’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개봉했었다. 비록 흥행 면에서는 큰 성과를 올리지 못했지만 제목만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듯 했다. 국경의 남쪽이라. 한민족이라 이야기하며 살아가지만 어쩌면 그들에게도 우리에게도 서로는 국경너머 다른 나라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가까운 우리의 반쪽이라고들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가 묻는다면 말문이 막혀버릴 것이다. 과연 이대로 좋은 것인가?NP

탈북자들, 미국으로 떠나다

탈북자들이 미국으로 탈출하고 있다. 미국에 망명을 신청한 탈북자들의 대부분은 한국에서의 냉대와 감시가 견디기 힘들어서라는 이유를 말하고 있었다. 국정원 직원과 담당형사에게 취조당하는 시간 그들은 죄인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으로 탈출한 탈북자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처음에는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로스앤젤레스로 갔지만 대접은 한국과 다를 것 없다고 전했다. 그래서 오히려 말은 통하지 않지만 한국 사람들 속에서가 아닌 다른 민족 안에서 살아가기를 선택하기도 했다. 그 곳에서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기 때문이란다. 한국에서 정착금 3260만원을 받은 후 1년간 살다가 여권을 발급받아 탈남 한 장씨의 경우 경상북도에서 자리를 잡았으나 주위의 차별대우와 차가운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미국으로 갔다. 아직 망명을 신청하지는 않았지만 불법행위만 저지르지 않으면 쫓겨날 염려가 없기에 자유롭게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에 체류 중인 탈북자 서재석씨가 현지 이민법원으로부터 망명허가를 받았다. 한국에 정착했던 탈북자로서는 처음으로 받은 망명허가이기에 국내 탈북자 사회를 술렁이게 만들었다. 과연 그들을 탈북자에서 탈남자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고민해 볼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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