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성姓이 무엇인가? - 희귀성씨의 이야기 -                                                                         취재 / 임보연 기자

모든 것들은 조금씩 변하고 있다.
아주 미세한 흐름이기에 당장에 알아차릴 수 없을지라도 시간의 단위를 크게 자르고 보면, 분명 변화가 눈에 보인다.
'성씨'역시 마찬가지이다.
오랜 세월에 거쳐 지금의 성씨에 이르렀고, 지금의 성씨에 오기까지 수많은 성씨가 생겨났으며, 사라져가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다양한 이유들로 새로운 성씨가 생겨나고 있다. 또한 성씨가 가지는 의미 역시 많은 변화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러한 변화의 한 예로, 전근대 사회에서는 성과 씨가 신분과 특권을 표시했거나 존칭 또는 비칭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가령 이씨?김씨라 할 때는 양반 신분을 뜻하나 이성?김성 또는 이가?김가라 할 때는 상민 이하의 신분을 지칭하였다. 때문에 유성자有性者가 역적이나 모역과 같은 죄를 범하면 신분이 곧 천인으로 전락되기 때문에 성을 쓸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계층이나 직종 등에 관계없이 누구나 성과 본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에게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일들이 한 때는 그렇지 않았을 때도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태어나면서 가장 먼저 얻게 되는 것이 성씨가 아닌가?
성씨라는 것에는 그 안에 혈연관계를 나타내는 성姓과 지연을 나타내는 씨氏의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특이사항은 우리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는 성은 모두 한자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본래 한국에도 고유의 성姓은 있었으나, 중국 한자성의 전래로 우리 고유의 성은 현재 전하지 않기에 본래의 모습은 알기 어렵다.
그러나 오랜 시간 지나면서 우리만의 고유한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성과 본관이 가문을 나타내는 것이나 이름이 가문의 대수代數를 나타내는 항렬과 개인을 구별하는 자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성씨는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혈연적인 집단의식과 뿌리 깊은 성씨의식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동성동본사이의 혼인을 금기시한다든지, 또는 각 문중에서 다투어 족보를 편찬한다든지, 또 이름을 지을 때 항렬을 따진다 하는 일이 그 단적인 표현이다.  
과장된 표현일지는 모르겠으나, 성씨와 이름에는 역사가 들어있고, 오늘날의 문화가 녹아있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이러한 성씨와 이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이름을 추구하고자 하는 ‘네이밍’운동이 퍼져나가고 있는데, 잠깐 살펴보자.
이름이라는 것에 그 사람의 색이 묻어나는 것인지 아니면 이름의 분위기에 그 사람이 끌려가는 것인지의 문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질문처럼 아리송하다.
새로운 문화코드로 자리 잡고 있는 ‘네이밍’ 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크게 반향을 일으키는 것을 보면 자신의 정체성을 이름을 통하여 표출하고 싶은 욕구가 강해지고 또한 스스로 독립적인 인격체로 평가받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성씨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대략 두 가지의 의견으로 나뉜다.
그 하나는 성씨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다. 페미니스트 가수 ‘지현’은 이름만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그녀는 “가족의 성에 의해 함부로 저를 규정당하고 싶지 않았어요. 왜 성에 대해 가지는 고정관념 같은 거 있잖아요. 가족이기주의라는 것도 생기고 말예요.”라고 말한다. 즉, 성은 배제하고 이름만으로 활동하는 ‘지현’의 경우 성에 부여된 사회적 가치를 거부하고, 자신의 이름만으로 살아가는 사람일 것이다.
다른 시각으로는 자신의 성과 이름을 모두 자신의 정체성 안에서 새로이 만들어내는 경우이다. 사이다... 들어보았는가? 음료수를 떠올리는 이들이 꽤 많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사이다’는 이름이다. ‘사이다’는 <보그걸>등의 잡지에서 프리랜서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는데, ‘김윤희’라는 본명 대신 그가 찍은 사진은 ‘사이다’라는 이름으로 잡지 등 여러 곳에 실린다. 이름에 관하여 근느 이렇게 말한다. “친구사이, 연인사이, 무슨무슨 사이라고 할 때 쓰는 ‘사이다’가 제 이름이에요. 단순히 정지된 명사가 아니라 동작이나 연속성을 가지 말이죠. 그동안 너무 여성스러운 이름을 이름표에 달고 다녔는데 이름을 새로 지으면서 새로운 나를 만들고 싶었어요. 성격이나 외모도 마음에 들게 바꾸는데요 뭘...”
성과 이름이라는 타고나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 자신이 만들어낸 이름 안에서 자유로운 몸짓을 하고 싶어 하는 이들의 욕구가 ‘네이밍’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가 생각한다.

2000년 통계청의 인구주택 총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성씨는 286개(귀화인 제외), 본관은 4,179개이다.
이중 김(金)·이(李)·박(朴)·최(崔)·정(鄭)·강(姜)·조(趙)·윤(尹)·장(張)·임(林)씨의 10대 성씨가 전체 인구의 64.1%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김씨는 전체 인구의 21.6%에 달해 한국인 5명 가운데 1명이 김씨 성을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김씨가 한 몫 끼지 않은 우물은 없다’라는 속담이 증명되는 셈이다.
이에 비해 인구가 수천 명에 불과한 희귀 성씨도 상당수다. 인구 1,000명 미만인 성씨는 112개로 전체 성씨의 39.2%를 차지했다. 인구 100명 미만의 ‘초희귀성’도 42개인 것으로 조사됐다.
강전(岡田)·개(介)·군(君)·누(樓)·망절(網切)·비(丕)·삼(森)·십(십)·어금(魚金)·저(邸)·즙(즙)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소규모의 희귀 성씨와 관련된 흥미로운 분석 결과가 있는데, 성씨 집단의 규모가 작을수록 인구증가율은 큰 것으로 조사됐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한 물리학자가 통계물리학의 기법을 활용해 288개 한국인 성씨의 분포 특성을 분석한 결과 나타났다. 김범준 아주대 교수(물리학)와 대학원생 박성민(27)씨는 27일 “한국인의 288개 성씨 인구에 관한 1985년과 2000년의 통계청 자료를 통계물리학 기법으로 분석해보니, 새로 생성된 희귀 성씨 집단에서 인구증가가 뚜렷하게 큰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이런 인구 증가는 1천명보다 작은 성씨 집단에서 높게 나타나 일부 성씨의 인구는 15년 동안 수십~수백 배 가량 커졌다. 그러나 성씨가 1만 명 이상인 집단에선 평균 인구증가율(15년간 0.1377배)과 거의 같은 증가세를 보였다. 이에 따라 사람들이 자기 성씨 집단이 크고 작음을 느끼는 경계점은 대체로 ‘1천~1만 명 규모’인 것으로 보인다고 김 교수는 덧붙였다.
김 교수는 “근대 이전엔 수리시설과 대규모 농토나 군대를 지닌 큰 가문이 인구 증가에 유리했겠지만 현대에선 작은 성씨라 해서 특히 불리한 이유가 없는데도 성씨 집단이 작을수록
인구 증가가 매우 높은 것은 흥미로운 양상”이라고 말했다. 여기엔 자기 성씨 집단을 일정 규모 이상으로 늘리려는 사회적 욕구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희귀성씨 가운데서도 가장 소수라 할 수 있는 즙씨는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시조 즙간부씨(63)가 모친의 고향인 함경도 성진을 본관으로 호적에 등록한 것이다.
희귀 성씨의 유래를 보면 중국에서 귀화한 예가 많다. 안음(安陰)을 본관으로 하는 서문(西門)씨의시조 서문기는 원의 관리로 고려 공민왕의 비가 된 원의 노국대장공주를 따라 고려에 들어와서 귀화했다. 순천(順天) 도(陶)씨의 시조 도구원 또한 충선왕비였던 원의 계국대장공주를 따라왔다가 귀화했다.
밀양(密陽) 당(唐)씨의 시조 당성은 원 말기에 병란을 피해 고려에 귀화한 뒤 태조 이성계의
창업을 도운 공으로 밀양을 본관으로 하사받았다. 94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집계된 진양(晋陽) 화(化)씨는 시조 화명신이 명나라가 망한 것을 개탄해 경주에 정착하면서 비롯했다.
본래 화(花)씨였으나 조선 성종이 화(化)씨 성을 하사했다고 한다.
옛 왕족의 성씨도 있다. 개성(開城) 내(乃)씨는 조선 개국 초 고려 왕족인 왕씨가 화를 면하기 위해 내씨로 성을 바꾸고 왕씨의 본관인 개성을 본관으로 했다고 전한다. 일설에는 임진강 나루터에서 검문을 하던 군졸이 성씨가 뭐냐고 묻자 “네?”라고 반문한 것이 내씨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밀양(密陽) 대(大)씨의 시조 대중상은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의 아버지다. 발해가 망하자 후손인 대탁이 자손들을 거느리고 고려에 망명, 지금의 경남 밀양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백제 유민들과 관련한 희귀 성씨도 있다. 목천(木川) 돈(頓)씨는 본래 백제 유민으로 고려에 누차 반기를 들어 태조 왕건의 미움을 사 돼지를 뜻하는 ‘돈(豚)’씨 성이 됐다가 뒤에 복성됐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던 당시 목천 지방의 백제 유민들이 자주 소란을 피워 그 지방 주민들에게 돈(豚)·상(像·코끼리)·우(牛·소)·장(獐·노루) 등 짐승 이름을 성으로 삼게 했다. 이들 성은 후에 돈(頓)·상(尙)·우(于)·장(張)씨로 한자를 바꿨다고 한다.

또한 최근 한국 국적으로 귀화하는 외국인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현재 442개의 귀화 성씨가 존재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외국인이 한국에 들어와 귀화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 초엽이며, 그때는 주로 수, 당의 중국인이었고, 고려시대에는 송나라의 사람을 비롯하여 여진, 거란, 안남, 몽골, 위구르 아랍 사람들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명나라와 일본인 등 많은 외국인이 들어와 귀화하였다고 한다. 당시 이들이 귀화를 하게 된 주된 이유는 정치적 망명이나 포교, 투항, 피란, 범법도피, 정략결혼, 그리고 왕실의 시종관계 등이었다. 이때 귀화인들은 대개 조정으로부터 융숭한 대우를 받았으며, 왕으로부터 성명을 하사받은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는 중국계 성씨, 일본계 성씨, 필리핀계 성씨 등의 성씨가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명인의 경우를 보면, 로버트 할리는 우리나라로 귀화하면서 영도 하씨가 되었고, 국적을 한국으로 바꾼 이참 씨(예전 이한우)는 독일 이씨가 되었다. 이렇게 귀화인들은 새로운 성과 본을 만드는 시조가 된다.  

이처럼 우리나라에는 다양한 성씨와 그들이 가지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우스갯소리로 희귀 성씨 중 하나인 ‘빙’씨성을 가진 사람에게 ‘빙’씨 자랑을 부탁하자 자신의 성씨를 가진 사람 중에 범죄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고 얘기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소수의 성씨를 가졌기에 늘 단합이 잘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간혹 희귀성씨들은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못하여 성씨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 여러 번씩 이야기해야 하는 때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의 성씨에 오히려 자부심이 느껴지고, 특이함이 더욱 좋다고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었다.  
앞으로 희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을 통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그들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우리에게 성姓이 무엇인가?
                             - 희귀성씨의 이야기 -

모든 것들은 조금씩 변하고 있다.
아주 미세한 흐름이기에 당장에 알아차릴 수 없을지라도 시간의 단위를 크게 자르고 보면, 분명 변화가 눈에 보인다.
'성씨'역시 마찬가지이다.
오랜 세월에 거쳐 지금의 성씨에 이르렀고, 지금의 성씨에 오기까지 수많은 성씨가 생겨났으며, 사라져가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다양한 이유들로 새로운 성씨가 생겨나고 있다. 또한 성씨가 가지는 의미 역시 많은 변화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러한 변화의 한 예로, 전근대 사회에서는 성과 씨가 신분과 특권을 표시했거나 존칭 또는 비칭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가령 이씨?김씨라 할 때는 양반 신분을 뜻하나 이성?김성 또는 이가?김가라 할 때는 상민 이하의 신분을 지칭하였다. 때문에 유성자有性者가 역적이나 모역과 같은 죄를 범하면 신분이 곧 천인으로 전락되기 때문에 성을 쓸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계층이나 직종 등에 관계없이 누구나 성과 본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에게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일들이 한 때는 그렇지 않았을 때도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태어나면서 가장 먼저 얻게 되는 것이 성씨가 아닌가?
성씨라는 것에는 그 안에 혈연관계를 나타내는 성姓과 지연을 나타내는 씨氏의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특이사항은 우리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는 성은 모두 한자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본래 한국에도 고유의 성姓은 있었으나, 중국 한자성의 전래로 우리 고유의 성은 현재 전하지 않기에 본래의 모습은 알기 어렵다.
그러나 오랜 시간 지나면서 우리만의 고유한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성과 본관이 가문을 나타내는 것이나 이름이 가문의 대수代數를 나타내는 항렬과 개인을 구별하는 자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성씨는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혈연적인 집단의식과 뿌리 깊은 성씨의식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동성동본사이의 혼인을 금기시한다든지, 또는 각 문중에서 다투어 족보를 편찬한다든지, 또 이름을 지을 때 항렬을 따진다 하는 일이 그 단적인 표현이다.  
과장된 표현일지는 모르겠으나, 성씨와 이름에는 역사가 들어있고, 오늘날의 문화가 녹아있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이러한 성씨와 이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이름을 추구하고자 하는 ‘네이밍’운동이 퍼져나가고 있는데, 잠깐 살펴보자.
이름이라는 것에 그 사람의 색이 묻어나는 것인지 아니면 이름의 분위기에 그 사람이 끌려가는 것인지의 문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질문처럼 아리송하다.
새로운 문화코드로 자리 잡고 있는 ‘네이밍’ 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크게 반향을 일으키는 것을 보면 자신의 정체성을 이름을 통하여 표출하고 싶은 욕구가 강해지고 또한 스스로 독립적인 인격체로 평가받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성씨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대략 두 가지의 의견으로 나뉜다.
그 하나는 성씨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다. 페미니스트 가수 ‘지현’은 이름만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그녀는 “가족의 성에 의해 함부로 저를 규정당하고 싶지 않았어요. 왜 성에 대해 가지는 고정관념 같은 거 있잖아요. 가족이기주의라는 것도 생기고 말예요.”라고 말한다. 즉, 성은 배제하고 이름만으로 활동하는 ‘지현’의 경우 성에 부여된 사회적 가치를 거부하고, 자신의 이름만으로 살아가는 사람일 것이다.
다른 시각으로는 자신의 성과 이름을 모두 자신의 정체성 안에서 새로이 만들어내는 경우이다. 사이다... 들어보았는가? 음료수를 떠올리는 이들이 꽤 많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사이다’는 이름이다. ‘사이다’는 <보그걸>등의 잡지에서 프리랜서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는데, ‘김윤희’라는 본명 대신 그가 찍은 사진은 ‘사이다’라는 이름으로 잡지 등 여러 곳에 실린다. 이름에 관하여 근느 이렇게 말한다. “친구사이, 연인사이, 무슨무슨 사이라고 할 때 쓰는 ‘사이다’가 제 이름이에요. 단순히 정지된 명사가 아니라 동작이나 연속성을 가지 말이죠. 그동안 너무 여성스러운 이름을 이름표에 달고 다녔는데 이름을 새로 지으면서 새로운 나를 만들고 싶었어요. 성격이나 외모도 마음에 들게 바꾸는데요 뭘...”
성과 이름이라는 타고나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 자신이 만들어낸 이름 안에서 자유로운 몸짓을 하고 싶어 하는 이들의 욕구가 ‘네이밍’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가 생각한다.

2000년 통계청의 인구주택 총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성씨는 286개(귀화인 제외), 본관은 4,179개이다.
이중 김(金)·이(李)·박(朴)·최(崔)·정(鄭)·강(姜)·조(趙)·윤(尹)·장(張)·임(林)씨의 10대 성씨가 전체 인구의 64.1%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김씨는 전체 인구의 21.6%에 달해 한국인 5명 가운데 1명이 김씨 성을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김씨가 한 몫 끼지 않은 우물은 없다’라는 속담이 증명되는 셈이다.
이에 비해 인구가 수천 명에 불과한 희귀 성씨도 상당수다. 인구 1,000명 미만인 성씨는 112개로 전체 성씨의 39.2%를 차지했다. 인구 100명 미만의 ‘초희귀성’도 42개인 것으로 조사됐다.
강전(岡田)·개(介)·군(君)·누(樓)·망절(網切)·비(丕)·삼(森)·십(십)·어금(魚金)·저(邸)·즙(즙)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소규모의 희귀 성씨와 관련된 흥미로운 분석 결과가 있는데, 성씨 집단의 규모가 작을수록 인구증가율은 큰 것으로 조사됐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한 물리학자가 통계물리학의 기법을 활용해 288개 한국인 성씨의 분포 특성을 분석한 결과 나타났다. 김범준 아주대 교수(물리학)와 대학원생 박성민(27)씨는 27일 “한국인의 288개 성씨 인구에 관한 1985년과 2000년의 통계청 자료를 통계물리학 기법으로 분석해보니, 새로 생성된 희귀 성씨 집단에서 인구증가가 뚜렷하게 큰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이런 인구 증가는 1천명보다 작은 성씨 집단에서 높게 나타나 일부 성씨의 인구는 15년 동안 수십~수백 배 가량 커졌다. 그러나 성씨가 1만 명 이상인 집단에선 평균 인구증가율(15년간 0.1377배)과 거의 같은 증가세를 보였다. 이에 따라 사람들이 자기 성씨 집단이 크고 작음을 느끼는 경계점은 대체로 ‘1천~1만 명 규모’인 것으로 보인다고 김 교수는 덧붙였다.
김 교수는 “근대 이전엔 수리시설과 대규모 농토나 군대를 지닌 큰 가문이 인구 증가에 유리했겠지만 현대에선 작은 성씨라 해서 특히 불리한 이유가 없는데도 성씨 집단이 작을수록
인구 증가가 매우 높은 것은 흥미로운 양상”이라고 말했다. 여기엔 자기 성씨 집단을 일정 규모 이상으로 늘리려는 사회적 욕구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희귀성씨 가운데서도 가장 소수라 할 수 있는 즙씨는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시조 즙간부씨(63)가 모친의 고향인 함경도 성진을 본관으로 호적에 등록한 것이다.
희귀 성씨의 유래를 보면 중국에서 귀화한 예가 많다. 안음(安陰)을 본관으로 하는 서문(西門)씨의시조 서문기는 원의 관리로 고려 공민왕의 비가 된 원의 노국대장공주를 따라 고려에 들어와서 귀화했다. 순천(順天) 도(陶)씨의 시조 도구원 또한 충선왕비였던 원의 계국대장공주를 따라왔다가 귀화했다.
밀양(密陽) 당(唐)씨의 시조 당성은 원 말기에 병란을 피해 고려에 귀화한 뒤 태조 이성계의
창업을 도운 공으로 밀양을 본관으로 하사받았다. 94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집계된 진양(晋陽) 화(化)씨는 시조 화명신이 명나라가 망한 것을 개탄해 경주에 정착하면서 비롯했다.
본래 화(花)씨였으나 조선 성종이 화(化)씨 성을 하사했다고 한다.
옛 왕족의 성씨도 있다. 개성(開城) 내(乃)씨는 조선 개국 초 고려 왕족인 왕씨가 화를 면하기 위해 내씨로 성을 바꾸고 왕씨의 본관인 개성을 본관으로 했다고 전한다. 일설에는 임진강 나루터에서 검문을 하던 군졸이 성씨가 뭐냐고 묻자 “네?”라고 반문한 것이 내씨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밀양(密陽) 대(大)씨의 시조 대중상은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의 아버지다. 발해가 망하자 후손인 대탁이 자손들을 거느리고 고려에 망명, 지금의 경남 밀양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백제 유민들과 관련한 희귀 성씨도 있다. 목천(木川) 돈(頓)씨는 본래 백제 유민으로 고려에 누차 반기를 들어 태조 왕건의 미움을 사 돼지를 뜻하는 ‘돈(豚)’씨 성이 됐다가 뒤에 복성됐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던 당시 목천 지방의 백제 유민들이 자주 소란을 피워 그 지방 주민들에게 돈(豚)·상(像·코끼리)·우(牛·소)·장(獐·노루) 등 짐승 이름을 성으로 삼게 했다. 이들 성은 후에 돈(頓)·상(尙)·우(于)·장(張)씨로 한자를 바꿨다고 한다.

또한 최근 한국 국적으로 귀화하는 외국인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현재 442개의 귀화 성씨가 존재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외국인이 한국에 들어와 귀화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 초엽이며, 그때는 주로 수, 당의 중국인이었고, 고려시대에는 송나라의 사람을 비롯하여 여진, 거란, 안남, 몽골, 위구르 아랍 사람들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명나라와 일본인 등 많은 외국인이 들어와 귀화하였다고 한다. 당시 이들이 귀화를 하게 된 주된 이유는 정치적 망명이나 포교, 투항, 피란, 범법도피, 정략결혼, 그리고 왕실의 시종관계 등이었다. 이때 귀화인들은 대개 조정으로부터 융숭한 대우를 받았으며, 왕으로부터 성명을 하사받은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는 중국계 성씨, 일본계 성씨, 필리핀계 성씨 등의 성씨가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명인의 경우를 보면, 로버트 할리는 우리나라로 귀화하면서 영도 하씨가 되었고, 국적을 한국으로 바꾼 이참 씨(예전 이한우)는 독일 이씨가 되었다. 이렇게 귀화인들은 새로운 성과 본을 만드는 시조가 된다.  

이처럼 우리나라에는 다양한 성씨와 그들이 가지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우스갯소리로 희귀 성씨 중 하나인 ‘빙’씨성을 가진 사람에게 ‘빙’씨 자랑을 부탁하자 자신의 성씨를 가진 사람 중에 범죄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고 얘기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소수의 성씨를 가졌기에 늘 단합이 잘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간혹 희귀성씨들은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못하여 성씨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 여러 번씩 이야기해야 하는 때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의 성씨에 오히려 자부심이 느껴지고, 특이함이 더욱 좋다고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었다.  
앞으로 희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을 통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그들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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