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에서 코소보 사태까지, 피로 얼룩진 유고내전

‘유럽의 火藥庫’ 발칸반도

구공산권 몰락 이후 유럽에는 항구적인 평화가 도래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인종, 영토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발칸반도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구 유고연방이 해체되면서 인위적으로 획정된 국경에서는 다민족, 다종교대립으로 갈등이 표출되기 시작했고 이는 결국 피의 내전으로 이어졌다. 발칸반도를 가리켜 세계는 유럽의 화약고(火藥庫)라 일컫는다.

발칸반도의 역사

다민족과 다종교가 뒤얽혀있는 발칸반도, 1800년대 이래 그 정세는 아주 복잡했다. 통일국가가 성립 된 것도 제1,2차 세계대전 후 단 두 차례뿐이다. 발칸반도에는 6~7세기에 걸쳐 슬라브족이 정착하였다. 당시 카톨릭의 신성로마제국과 그리스정교의 비잔틴 제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때부터 14세기까지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세르비아 등 작은 공화국들이 형성되었다가 외세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시 찢어지고 합쳐지기를 반복하였다. 이 가운데 그리스정교를 믿는 세르비아인들은 카톨릭 세력인 북쪽의 오스트리아 제국과, 회교를 믿는 남쪽의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가운데 끼어있어 끊임없는 투쟁을 계속해야 했다. 1839년 세르비아 평원을 장악한 오스만투르크는 이 지역을 통치하게 되는데 이 기간 중 피지배 민족들을 회교도로 개종시켰다. 이 가운데 개종을 거부한 세르비아인들은 농촌에서 가난한 삶을 살아야했고 회교도로 개종한 사람들은 도시에서 봉건영주 또는 상인이 되어 부유한 삶을 살았다. 한편 오스트리아는 17세기말 오스만투르크를 보스니아 지역까지 밀어내고 현재의 크로아티아의 크라이나 지역으로 세르비아인들을 이주시켜 종교의 자유와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은혜를 베풀었다. 그 후 1878년 오스만투르크가 러시아에게 패하면서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다시 독립하게 되지만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는 여전히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게 된다.


유고슬라비아 탄생과정

유고슬라비아는 동유럽의 발칸반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도상으로는 이탈리아동쪽 아드리아해안을 끼고 있는 국가였다. 발칸반도가 처음으로 통일이 된 것은 제1차대전이 끝난 직후였다. 당시 카톨릭 중심의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회교도중심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그리스정교중심의 세르비아인등이 모여 처음으로 다민족 다종교의 단일국가를 형성하고 국가명을 유고슬라비아로 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후 유고는 혼란을 거듭하다가 2차대전이 터졌고 전쟁이 끝난 뒤‘요시프 티토’가 공산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유고슬라비아를 재통일하게 된다. 티토는 유고슬라비아의 각 공화국들이 자체적으로 살아가기 어렵도록 경제구조를 만들고 그 특유의 카리스마적 통솔력으로 장기집권에 성공하게 된다. 티토는 1974년 6개의 공화국에 군사, 외교 등 핵심 부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권한을 공화국들에게 이양하였다. 그럼에도 유고슬라비아는 별다른 분열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1980년 티토가 사망하자 절대 권력자를 잃은 유고슬라비아는 다시 표류하기 시작했다. 각 공화국간의 빈부격차 등으로 지역이기주의가 팽배해져갔고 이에 대해 중앙정부가 제제를 가하자 각공화국들은 다시 민족주의를 내세워 반기를 드는 등 유고연방은 해체의 조짐을 보임과 동시에 내전이라는 혼란의 양상으로 치닫게 되었다.


유고 내전의 발생원인


1980년대 당시 유고슬라비아연방은 6개의 공화국과 2개의 자치주로 이루어져 있었다. 총인구는 2,702만명(1987년),1인당국민소득은 2,240달러였는데 문제는 각공화국간의 빈부격차가 상당히 심했다는 것이다. 가장 부유했던 곳은 공업지대인 슬로베니아와 아드리아해를 관광거점으로 하는 크로아티아였다. 하지만 그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이 피땀 흘려 번 돈의 대부분을 연방정부에서 흡수하여 다른 공화국의 빈민들을 구제하는데 사용하는데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1989년의 공산당의 붕괴와 동유럽의 개혁열풍은 90년대 들어 유고연방의 각공화국들에게도 예외 없이 불어 닥쳤다. 그로인해 공화국들은 독립을 갈구했고 1991년 6월 26일 슬로베니아가 독립을 선언하고 뒤이어 크로아티아도 유고연방을 탈퇴하며 독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각 공화국간에는 공화국내의 다민족, 다종교주의 등이 서로 얽혀 사태는 내분의 양상을 띠며 악화되어갔고 결국 패권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6공화국, 2개자치주)
- 6공화국: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 2자치주: 코소보, 보이보디나(두 곳 모두 세르비아내에 있음)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 해체로 생긴 나라들
- 크로아티아: 1991년 6월 독립을 선포하며 연방에서 탈퇴
- 슬로베니아: 1991년 6월 독립을 선포하며 연방에서 탈퇴
- 마케도니아: 1991년 9월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 1992년 3월에 분리 독립.
- 신 유고연방(세르비아-몬테네그로): 각 공화국들의 독립으로 연방이 붕괴될 처지에 놓이자 두 공화국이 1992년 4월 신유고 연방을 결성.
- 몬테네그로: 2006년5월21일 신유고연방에서 분리독립결정
을 쥐고 있던 세르비아와 독립을 선언한 각공화국들 사이에 유혈충돌이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독립으로 인해 유고연방이 해체될 조짐을 보이자 1991년 6월27일 유고슬라비아연방군은 이를 막기 위해 슬로베니아를 침공함으로써 분쟁은 시작되었다. 이후 싸움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코소보 등지로 옮겨가면서 벌어졌다. 그 사이 주요 민족의 분포에 따라 6개 공화국, 2개 자치주로 이루어졌던 유고슬라비아연방국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신유고 연방, 마케도니아 로 분리 독립되어, 민족간 대립을 격화시키며 현재에 이르렀다. 결국 유고내전은 유고슬라비아연방의 해체, 재편 과정에서 일어난 영토를 둘러싼 세르비아계와 타민족 간에 벌어진 내분이 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세르비아’와‘크로아티아’원한의 역사.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총 인구가운데 가장 큰 세력을 차지하는 세르비아인은 전체인구의 약 36.1%이며 그다음으로는 크로아티아인으로 19.7%이다. 종교로는 세르비아인이 그리스정교, 크로아티아인들이 카톨릭이며 사용언어와 문자도 서로 달랐다. 이들은 제1차대전이래 피비린내 나는 민족분쟁을 벌여왔다. 알렉산더왕이 1934년 마르세유에서 크로아티아 급진파에 의해 암살당하자 크로아티아 우파들은 파시스트와 연계하여 제2차세계대전에서 독일나치의 지원을 받아 세르비아인과 집시, 유태인등을 무려 75만명이나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분노한 세르비아측도 맞서 보복조치로 크로아티아인 30만명을 살해하게 되는데 이런 피의 역사는 양 민족들에게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심어 준 결과를 낳게 된다. 또한 1990년대 각공화국의 지도자들은 그때 당시 자신들의 부모형제가 다른 민족들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것을 직접 눈으로 목격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민족분쟁이 보스니아 내전으로까지 벌어지게 된 것이다. 내전이후 벌어진 월드컵예선에서도 두 나라간의 경기는 스포츠이상, 피의혈전으로 간주했을 만큼 그들의 골은 깊다.


보스니아내전


유고연방국가들이 하나둘 독립하자 1992년 3월3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역시 국민투표를 통해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독립의 선포는 곧 분쟁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독립을 주도한 세력은 회교도중심인 보스니아 이슬람 정부와 이들 세력에 협조하는 보스니아 내(?크로아티아인들이었다. 그러나 보스니아내 약 30%를 차지하는 세르비아인들은 보스니아독립의 가부를 묻는 선거에 불참하면서 보스니아 독립에 협조하지 않았다. 그 중심엔 세르비아인들의 희망이었던 밀로세비치 세르비아대통령이 있었고 사실상 그의 지배하에 있던 유고연방이 해체 되는 것에 대해 적잖은 불만이 쌓여 있었다. 1992년 4월 6일 EU가 보스니아의 독립을 승인하자 보스니아는 본격적인 내전상태에 돌입하였다. 밀로세비치의 군대로 대변되는 유고연방군의 지원을 받는 세르비아계는 내전 초기 보스니아 영토의 약 70%를 일거에 장악하는 기세를 올렸다. 보스니아 사태가 위험 수위를 넘자 UN은 동년 5월 신유고연방에 대한 전면적인 금수조치, 항공봉쇄, 자산동결을 주 내용으로 하는 제재 조치를 취하였다. 신유고연방군은 곧 휴전에 합의하였지만 보스니아내 세르비아계는 휴전에 동의하지 않은 채 전쟁을 계속해 갔다. 유럽에서 냉전 시에도 없었던 민족간의 유혈사태가 내전으로 발전했음에도 UN은 군사행동의 가능성을 시사만할 뿐 직접적인 군사행동은 취하지 못했다. 그러나 보스니아 내전 중 세르비아계에의한 소위 '인종청소'라 불리는 만행이 저질러지자 여태껏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던 UN도 1992년 8월 군사개입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3만 여명의 평화유지군이 보스니아에 파견되었으나 평화유지군의 역할은 미미하기만 하였고 내전은 휴전과 재확전이 반복되는 피의악순환을 되풀이했다. 이러한 상황아래 러시아는 1995년 3월 보스니아사태 해결을 위한 새로운 제안을 하였다. 세르비아계를 암묵적으로 지원하고 있던 러시아는 세르비아공화국이 보스니아 회교정부와 크로아티아정부를 승인하는 대가로 세르비아에 대한 UN의 제재를 해제하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미국의 주도하에 보스니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등 내전 당사국들과 미국, EU, 러시아 등 중재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1995년 11월 1일 미국의 데이턴에서 평화협상이 개최되었다. 난항을 거듭하던 평화협정은 그해 12월‘데이턴 평화협정’체결로 보스니아에는 평화가 정착되는 시금석이 마련됐다. 이로써 25만 명 이상이 죽고 300만 이상의 난민을 발생시킨 보스니아 내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보스니아는 민족ㆍ종교적 이질감이 강하고 중앙정부의 권위가 약하여 통일된 주권국가로서의 한계 있고, 보스니아내 세르비아계를 얼마나 잘 통제하느냐에 따라 평화가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가 결정될 것이다.


‘코소보’ 독립분쟁

코소보는 중세 세르비아 왕국이 처음 세워진 곳이었다. 그런데 터키제국이 세르비아왕국을 점령하면서 코소보에 알바니아인을 집단 이주 정착시키면서 민족ㆍ종교적으로 알바니아인과 세르비아인간의 갈등은 싹트기 시작했다. 1945년 티토대통령은 구유고슬라비아 성립 후 코소보에 자치주의 지위를 부여하였으나, 1989년‘밀로셰비치’가 세르비아를 집권하면서‘대세르비아 건설’이라는 민족주의적 기치아래 세르비아내(?에 있던 코소보의 자치권을 박탈하였다. 이에 코소보 알바니아인(전체 200만중90%)은 이에 대항하여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요구하였고,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은 1992년 유고연방 국가들의 독립과 맞물려 마침내 코소보공화국을 선포하였다. 이로 인해 알바니아계와 세르비아계간의 빈번한 무력충돌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의 발칸반도의 정세는 보스니아 사태의 중요성이 워낙 컸으므로 상대적으로 코소보 문제는 쟁점화 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95년 12월 데이튼 평화협정에 의해 보스니아 사태가 진정의 기미를 보이자 코소보 알바니아계는 코소보해방군(KLA)을 결성하여 본격적인 무장 투쟁 양상을 보였고, 이에 대해 세르비아도 코소보 해방군을 무력으로 강경 진압하면서 사태는 발발하였다. 1998년들어서도 세르비아의 무력에 항의하는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의 대규모 시위가 계속되고 이에 대해 세르비아가 강경 진압으로 대응하는 등 두 민족간의 분쟁이 확산되자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은 신유고연방에 유사시 군사개입 및 경제제재 가능성을 강력히 경고하면서 평화적 해결을 위한 당사자 간 대화를 촉구하였다. 특히 미국은 신유고연방과의 관계개선 방침을 철회하고 EU 의장국인 영국은 밀로셰비치 대통령을 만나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신유고연방의 밀로세비치대통령이 코소보문제를 순수한 국내문제로 간주하여 국제사회의 개입 및 코소보의 분리 독립을 거부하자, 이에 대해 코소보 알바니아인은 국제사회의 적극적 개입을 유도하였다.

NATO는 세르비아에 대해 즉각적으로 코소보에 대한 만행을 중지하라고 촉구하였으며, 만약 사태가 평화적으로 종결되지 않는다면 군사개입을 감행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NATO의 이러한 입장에 대해 러시아와 중국은 코소보 사태에 대한 해결을 UN이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나토의 군사개입은 국제사회의 새로운 긴장을 고조시킬 뿐이라는 입장을 취하였다. 국제사회는 코소보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코소보내에 나토 평화유지군의 주둔을 골자로 하는‘랑부예 평화협정’을 세르비아가 수용하기를 요구하였으나, 밀로세비치는 외국군대를 자국내에 주둔시킬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며 평화협정 체결을 거부하였다. 결국 나토는 UN의 의결을 배제한 채 1999년 3월 24일 세르비아에 대한 공습을 감행하세 되었다. 나토의 공습이 감행되자 밀로세비치는 세르비아인들의 민족주의를 부추키며 결사항전의 의지를 천명하였고, 러시아는 나토의 유고공습이 제국주의적 만행이라고 비난하며 유고와의 연대를 표명하였다. 그 표시로 러시아는 흑해함대 소속 군함 7척을 아드리아해에 파견하는 등 군사적 시위를 벌였다. 러시아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힌 나토는 러시아의 역할과 지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로인해 러시아를 코소보분쟁 해결과정의 주요 주체로 부상케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공습 초기 단기간의 공습으로 군사적 목표 달성을 자신했던 미국은 러시아의 강경한 태도와 제2의 베트남전을 우려하는 국내 여론에 밀려 지상군 파견을 하지 못한채 공습만을 계속하였다. 공습이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나토와 러시아는 코소보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협상을 계속하였으며 5월20일 G7과 러시아가 코소보 평화안의 초안에 합의하자 유고정부는 마침내 코소보평화안을 수용할 것을 발표하면서 코소보 분쟁은 진정기미를 보이며 6월9일 나토와 유고가 유고군의 코소보 철군에 관한 군사실무협정에 합의함으로써 78일간 지속되던 코소보전쟁은 종결되었다. 그후 코소보에서는 평화유지군의 진주로 안정을 회복하는 듯 보였으나 알바니아계 와 세르비아계 사이에 크고 작은 유혈 충돌은 끊이지가 않았다. 코소보사태 는 발칸지역의 다른 분쟁과 마찬가지로 민족, 국경, 종교문제가 복잡하게 얽힌 분쟁이기 때문에 특성상 코소보의 자치권 획득과 분리 독립에 대해 양측의 의견 대립이 있을 경우 코소보 사태는 언제든 새로운 국면을 맞을 수 있다. <알바니아계 2,000명 이상 사망, 세르비아인 500명 사망 추정,120만 이상 난민 발생>


분쟁으로 사라진 유고슬라비아

세르비아에는 코소보와 보이보디나란 두 자치주가 있다. 코소보 주민은 대부분이 알바니아 민족으로 공산국가시절에는 티토(크로아티아 출신) 대통령의 집권아래 나라는 안정되게 유지됐었다. 그런데 티토가 사망하면서 각 민족들간의 갈등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독일 통일과 소련 붕괴 이후 그 갈등은 더 커져 민족별로 독립하자는 분위기가 고조됐던 것이다. 특히 여러 민족이 섞여 있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는 서로 죽고 죽이는 유혈충돌이 만연했다. 그렇게 되면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가 독립을 하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신 유고연방을 결성하며 유고슬라비아에 그대로 남았다. 그 후 2003년 유고슬라비아는 국가명을‘세르비아몬테네그로’로 바꾸었고 2006년 5월21일 '몬테네그로'역시 국민투표에서 신 유고연방으로부터 분리독립을 결정함에따라 유고슬라비아란 이름은 이제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NP

2000년, 코소보사태 종결 후 임기가 '2001년 여름까지 임에도 불구하고 밀로세비치는 자신의 흔들리는 권력을 다시금 공고히 하기 위해 조기 대선을 계획하였고, 2000년 9월24일 대통령선거를 실시하였다. 어떠한 경우에도 선거에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대선을 준비했으나 이미 민심은 밀로세비치를 떠나 있었고 야당 연합 후보로 나선 코슈투니차에게 유고 국민들의 관심은 모아지고 있었다. 선거가 끝나고 개표가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고연방 정부는 개표 결과를 발표하지 않아 국민들의 의혹은 더욱 증폭되었다. 이로 인해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은 커져 갖고 유고연방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선거 무효를 발표하자 국민들의 분노는 일순간에 폭발하며 밀로세비치 퇴진을 외치는 반정부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노동자들은 총파업을 감행했고 국제사회의 여론도 밀로세비치의 퇴진을 기정사실화했다. 또한 밀로세비치의 마지막 지지국이었던 러시아마저 그에게 등을 돌림으로서, 그간 ‘발칸의 히틀러’로 불리우며 서방의 고민 거리였던 밀로셰비치는 마침내 10월6일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국제전범으로 낙인찍힌 ‘밀로셰비치’ 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그는 2006년 3월11일 네덜란드 헤이그 감옥에서 쓸쓸히 숨진 채 발견됐다. 그의 사인을 둘러싸고 그의 가족들과 변호인등은 독살설을 제기해 왔으나 네덜란드 검찰은“밀로셰비치는 심장병으로 자연사했으며 부검결과에서도 독살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발칸의 도살자 밀로세비치, 그의 시신은 사망 1주일 만에 베오그라드에서 장례식을 마치고 고향 집 뒤뜰에 쓸쓸히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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