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충주, 2부 중앙탑권(중원 문화권)

분위기를 느끼고 운치를 만끽할 수 있는 계절, 겨울이다. 절로 온몸이 움츠러드는 추위로 옴짝달싹하기 싫을 수도 있으나, 이 계절만큼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 또 있을까. 아름다운 풍경이 만들어내는 자연에 흠뻑 빠져 보고 싶다면, 역사와 비경이 숨 쉬는 충청북도 충주로 떠나보자.

☞ 일상의 쉼표 하나, 여행길에 숨 고르기
- 충주 세계무술 공원

분주한 여행길에 휴식 같은 시간을 보내려면 충주세계무술공원에 가보자. 그곳에는 격투의 기술을 넘어선 수련과 수양으로서 무예가 있고, 오래된 거목과 푸른 잔디밭이 남한강의 잔잔한 물줄기와 어우러진 자연이 있다. 자연을 닮은 돌을 전시한 수석공원에 서면 오랜 세월 돌에 새긴 자연의 손길이 느껴진다.

   ▲ 충주세계무술공원 내 충주세계무술박물관
격투를 넘어선 수양의 길
무술축제가 열린다. 공원은 세계무술박물관, 야외공연장, 연못과 물레방아, 수석공원, 돌미로원 등으로 구성된다. 공원 곳곳에 있는 거대한 고목과 넓고 푸른 잔디밭이 고즈넉한 남한강과 어우러지는 풍경이 충주 사람들은 물론, 여행자의 발걸음도 머물게 한다. 충주에 세계무술박물관이 있는 것은 택견때문이다. 택견의 계보를 잇는 송덕기, 신한승 등이 1970년대 충주에 터를 잡고 택견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1983년 택견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송덕기와 신한승은 초대 예능 보유자가 됐다. 택견은 고구려의 무용총과 각저총 고분벽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경주 용강동 고분에서 출토된 택견상도 택견이 삼국시대부터 전해진 무술이라는 걸 뒷받침해준다.

돌에 새겨진 자연의 손길
돌과 관련된 장소가 두 곳 있다. 한 곳은 ‘돌미로원’이고, 다른 곳은 ‘수석공원’이다. 돌미로원은 남한강 호박돌로 담을 쌓아 미로를 만든 공간이다. 충주의 특산물인 사과와 태극무늬를 모티프로 디자인했다. 돌담은 총연장 2090m, 면적 8400m2 규모다. 어른과 아이들이 술래잡기, 미로 빨리 벗어나기 등을 하면서 놀아도 재미있겠다. 돌담에 설치된 관을 통해 돌담 뒤에 있는 사람과 말을 주고받는 놀이 시설도 있다. 수석공원에서 기이하게 생긴 크고 작은 돌을 감상해보자. 수석공원은 남한강에서 나온 크고 작은 돌 90여 점을 전시한 곳이다. 오랜 세월 물살에 깎인 모양이 예사롭지 않다. 단단한 돌이 파인 홈과 드러난 굴곡이 충주의 산천을 닮았다. 물살에 깎인 곡선은 굽이치는 강물 같고 울퉁불퉁 솟은 부분은 산봉우리를 닮았으니, 산과 강이 돌 하나에 담겼다. 그뿐이랴, 홈이 파인 곳에 고인 빗물은 저수지나 작은 연못이니 자연이 빚은 돌의 형상이 인공이 가미된 예술품과 또 다른 감동으로 다가온다. 어떤 돌은 보는 각도에 따라 여러 가지 형상이다. 낮은 곳에서 바라보면 산줄기들이 파도처럼 넘실대며 밀려오는 모양이다가, 옆에서 보면 비상하는 새의 힘찬 모습이다. 90여 개 수석이 각기 다른 모양이니 느낌도 다를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여린 물살이 어떻게 단단한 돌을 저런 모양으로 빚었을까”,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본다.

   ▲ 충주세계무술공원 내 수석공원

☞ 현의 노래 탄금대
달천과 남한강이 만나는 지점 너른 강이 고즈넉하다. 강에 솟은 절벽 위에서 솔숲을 울리고 강물 위로 내려앉은 1400여 년 전 가야금 곡조는 우륵의 것이었다. 그날도 새가 날고, 오늘처럼 노을이 붉게 물들었으리라. 우륵이 가야금을 탔다고 해서 후세 사람들은 그곳을 탄금대라고 불렀다. 1000여 년 뒤 조선 장군 신립은 탄금대에서 왜적을 향해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8000여 군사의 붉은 피로 물든 강물 위로 노을은 하염없이 드리웠을 것이다. 탄금대에 가면 끝나지 않은 현의 노래가 노을로 피어난다.

   ▲ 탄금대 산책로
임진년 충주의 봄은 처절했다
1592년 봄 단월역에 군사를 주둔시킨 신립 장군은 조령으로 달려가 지형지세를 살폈다. 상주에서 패하고 후퇴하던 이일은 그곳에서 신립을 만난다. 이일이 “훈련도 받지 않은 백성으로 대항할 수 없는 적을 감당하려니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고 말하자, 신립은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에 김여물은 “저들은 수가 많고 우리는 적으니 그 예봉과 맞부딪칠 수는 없습니다. 이곳의 험준한 요새를 지키면서 방어하는 것이 적합합니다”라고 의견을 냈다. 조령에 군사를 배치하고 싸우자는 얘기였다. 신립 장군은 휘하 장수들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기병에게 유리한 벌판으로 나가 싸울 계획이었다. 김여물은 아들 김류에게 “남아가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수치를 씻지 못하고 웅대한 뜻이 재가 될 뿐이니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할 뿐”이라는 편지를 띄운다. 전투에 패할 것을 짐작하고 결사 항전 의지를 다지는 붓끝이었다. 결사 항전의 날은 다가오고 있었다. 4월 27일에 적이 조령을 넘어 단월역에 이르렀다. 목사 이종장과 이일이 적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첩보를 수집하며 전방에서 활약하고 있었는데, 적에게 발각되어 본진인 신립 장군과 연락이 단절됐다. 이튿날 새벽, 적은 충주성과 달천 방면, 강을 건너는 길 등으로 군사를 나눠 전투를 시작한다. 뒤에는 시퍼런 강물이 흐르고, 앞에서는 적이 물밀 듯 밀려온다. 물러설 곳도, 피할 곳도 없는 그곳에서 군사 8000여 명이 죽어갔다. 목숨만큼 절실한 승전의 깃발이 기울었음을 알았지만, 신립은 끝까지 활을 놓지 않았다. 뜨거워진 시위를 당기며 수십 명을 죽이고, 끝내 강물로 뛰어들어 자결했다.
   ▲ 탄금대에서 여행자를 가장 먼저 반기는 잔디밭과 음악당
우륵과 진흥왕, 충주에서 만나다
번뜩이는 창칼, 군사들의 함성과 말발굽 소리, 비명, 피로 물든 강, 꺾인 깃발… 죽음으로 적에게 항전한 1592년 봄. 그보다 1000여 년 전 어느 해 봄날은 온화했다. 신라 진흥왕은 551년 3월, 나라 안을 순시하다가 충주에 이르러 우륵을 불렀다. 이전에 진흥왕은 가야를 합병하고, 우륵을 충주에 살게 했다. 우륵은 제자 니문과 함께 가야금을 연주했다. 우륵의 연주를 듣고 감동한 진흥왕은 이듬해 계고, 법지, 만덕을 우륵에게 보내서 가야금을 배우도록 했다. 우륵은 계고에게 가야금을, 법지에게 노래를, 만덕에게 춤을 가르쳐 11곡을 전해주었다. 세 제자는 그 곡을 익히는 과정에서 5곡으로 만들었다. 우륵은 제자들이 편곡한 것을 처음에는 몹시 불쾌하게 생각했으나 그들이 연주하는 곡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애절하면서도 슬프지 않고 즐거우면서도 방탕하지 않으니 바르다”고 왕 앞에서 연주하라는 말까지 남겼다. 그들은 우륵의 말대로 왕 앞에 나가 연주했다. 왕은 “전날 낭성(진흥왕이 충주를 찾았을 때 머물렀던 곳)에서 들은 음악과 다를 바 없다”며 우륵에게 후한 상을 내리고, 그 음악을 신라의 음악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좋은 일에 마가 낀다는 말처럼 몇몇 신하가 “망한 나라 가야의 음률은 취할 것이 못 된다”고 아뢰자, 왕은 “성인이 음악을 제정하는 것은 인정으로 연유하여 조절하게 한 것이니 나라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은 음악 곡조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우륵의 가야금은 이렇게 진흥왕의 문화 장려 정책에 힘입어 크게 발전했다. 가야금 음조에는 하림조와 눈죽조가 있는데, 모두 180여 곡을 남겼다. 이중 하림조는 진흥왕이 충주에 왔을 때 우륵이 하림궁(임시 행궁)에서 연주한 곡으로 추정된다. 가야의 악기 가야금과 그 곡조가 진흥왕의 의지에 따라 신라의 음악으로 발전한 것이다. 탄금대는 우륵이 가야금을 탄 곳이라고 후대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신라 시대 낭성이 충주의 탄금대라고 밝혔다. 탄금대 주변에는 우륵의 가야금과 관련이 있는 금곡리(지금의 칠금동), 금뇌리(지금의 금능동), 청금리(청금정이 있는 마을) 등이 있다.

☞ 전장의 중원에서 평안의 중원으로
중원의 상징이던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이 위치한 공원이다. 1992년 사적공원으로 변모한 이곳은 남한강을 품고 있어 경관 또한 훌륭하다. 격전의 전장 중원은 아득히 먼 이야기다. 이제는 그 중심에 아늑한 휴식이 자리한다.

   ▲ 중앙탑사적공원(충주박물관)
국토 정중앙의 탑
남한강은 계명산을 지나며 ‘S’자로 굽이친다. 완만한 나선을 그리며 충주 시가지를 품은 뒤에는 다시 반대로 굽이치며 목계나루를 향해 나간다. 〈용비어천가〉에 ‘쇠벼라’라고 기록된 지형이다. 탄금대의 서쪽 옛 가금면 일대다. 당시 백성들은 이 일대를 연천(淵遷)이라 쓰고, 쇠벼라라고 불렀다. 연(淵)과 같은 의미인 소(沼)와 벼랑을 의미하는 벼라를 합한 말이다. 쇠[沼]를 쇠[金]로 오인해 금천이라는 지명이 나왔고, 가금면이 생겨났다. 그 가운데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6호)이 자리한 마을은 탑평리라 불렸다. 탑평리 칠층석탑이 그 물길을 굽어보는 평지에 자리한 까닭이다. 가금면은 2013년 중앙탑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충주 사람들이 탑평리 칠층석탑을 부르는 이름이다. 소를 따라 자리한 아름다운 벼랑보다는 여전한 중원의 자존심이다.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이 언제부터 중앙탑으로 불렸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연유를 추적할 수 없을 만큼 오랜 시간이다. 탑평리 칠층석탑이 세워졌다고 여기는 신라 원성왕(재위 785~798년) 때부터일 수도 있다. 그와 관련해서 재미난 전설이 있다. 원성왕이 국토의 중앙을 알아보기 위해 남과 북의 끝 지점에서 보폭이 똑같고 잘 걷는 사람을 한날한시에 출발시켰더니, 탑평리 칠층석탑에서 만났다. 이에 그 자리에 탑을 세우고 국토의 정중앙임을 표시했다. 중앙탑면에는 안반내[半川]라는 곳이 있는데, 이 또한 남북의 반이 되는 내라는 뜻이다. 탑평리 칠층석탑에는 신라의 김생과 관련한 일화도 전해진다. 그가 반송산에 사찰을 세운 뒤 서적을 보관하려고 탑을 세웠다는 이야기다. 탑평리에 왕이 태어날 기운이 있어 탑을 세워 제거했다. 는 씁쓸한 설도 있다. 삼국의 격전지로 늘 세계의 중심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세계의 변방이어야 했던 슬픔이다. 북서쪽으로 장수왕의 충주 고구려비가, 남쪽으로 진흥황이 신라 귀족을 이주 시켰다는 충주 누암리 고분군이 그 증거처럼 자리한다. 새로 신라에 편입된 백제와 고구려 유민을 제도하기 위함이라고도 하고, 육로와 수로의 교차점으로 안전을 기원하는 의미로도 해석한다. 사찰과 무관하게 탑으로만 존재했다는 주장도 있다. 모든 사연은 중원의 의미와 역할에 일정 부분 기댄다.
   ▲ 열두대에서 바라보는 풍경
예술이 어우러진 중원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이 있는 둔덕에 올라 조금 더 가까이 그 존재를 마주한다. 2단 기단에 7층 탑신을 올렸으며, 14.5m로 아래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높다. 장대석 10여 장으로 구축한 지대석부터 만만치 않은데, 높이에 비해 경쾌하다. 전각부의 작은 구멍은 풍경을 단 자리다. 창건 당시에는 꽤 장엄한 모양새였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남은 통일신라 탑 가운데 가장 높다. 고려 시대에 중수한 흔적도 있다. 1917년 해체ㆍ복원 작업을 했는데 6층 탑신에서 서류(書類)편과 동경(銅鏡) 2점 등이, 기단부에서 청동제 뚜껑 있는 합(靑銅製有蓋盒)이 나왔다. 이 가운데 동경 2점은 고려 때 물건이며, 사리를 봉안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몸에 새겼으되 아직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한 비밀은 또 무엇이 있을까. 은근한 호기심에 석탑 주변을 돌며 사방의 풍경을 굽어본다. 그 옛날 중원의 격전은 까마득한 이야기다. 1970년대 홍수가 나서 마을을 복구하며 불도저로 절터를 밀어 한층 소원한 일이 되었다. 탑평리 칠층석탑 일대는 1992년 사적공원을 조성하며 남한강 변의 쉼터로 변모했다. 너른 잔디밭과 푸른 나무 사이로 ‘문화재와 호반 예술의 만남’이라는 테마의 조각 작품 26점이 자리한다. 충북 최초의 야외 조각 공원이다. 그러나 작품에 붙은 제목과 형상은 중원의 영욕이 무심하다. ‘풀밭에 누워’, ‘온유한 사랑’이나 ‘바다의 하늘’을 그린다. ‘중원(中原)의 꿈’이라 이름 붙인 작품이 심심한 위로를 건넨다. 사람들은 공원을 느리게 걷고, 편안히 누워 하늘을 본다. 탑평리 칠층석탑도 가장 평온한 시간을 지난다. 세상의 중앙이 아니라 심상 한가운데로 스민다. 그러고 보면 과거의 격동보다 현재의 평온이 큰 영화일지 모른다. 그것이 중원, 본토의 진짜 의미는 아닐까. 충주는 이제야 간섭받는 변경의 중원에서 벗어나 한적한 본토로 권토중래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탑평리 칠층석탑과 사적공원을 돌아본 뒤에는 충주박물관에 들러도 좋다. 충주박물관은 건물 두 동과 야외 공간으로 나뉜다. 제1관은 역사실과 민속실로 구분해 불교미술과 민속품을 전시한다. 제2관은 선사시대부터 이어온 충주의 역사를 설명한다. 충주 각지에 서린 역사의 궤를 하나로 엮어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역사는 거대한 흐름인 양하지만, 박물관을 채운 유물은 개인의 삶과 행복을 묻는다. 박물관 주변으로 흥미로운 장소가 여럿 있다. 세계술문화박물관 리쿼리움이나 충주조정체험학교 등이다. 충주에서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낭만이다.

☞ 북창삼우의 풍류에서 향음주례의 주도까지
세계술문화 박물관 리쿼리움
아이와 어른이 함께 찾을 수 있는 세계 술 문화의 장이다. 와인과 코냑, 맥주 등 서양 술부터 우리 전통주까지 다채로운 맛과 멋을 누릴 수 있다. 그 안에서 배우고 누리는 향음주례의 예절과 진정한 의미의 풍류다. 술의 풍미에 취하고, 탄금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취한다.

   ▲ 세계술문화박물관 리쿼리움
술, 문화에 녹아들다
북창삼우(北窓三友)는 당나라 시인 백거이가 북쪽 창 아래 벗한 세 가지, 술과 시와 거문고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의 시를 빌리면 거문고를 뜯다가 문득 술을 마시고(琴罷輒擧酒), 술을 마시다가 또 시를 읊는다(酒口輒吟詩). 충주는 그의 노래 못지않은 풍류의 고장이다. 아름다운 산이 있고, 맑은 강이 흐르고, 탄금대를 울리던 우륵의 가야금 소리가 남았다. ‘충주 창동에서 마신 술이 문경새재를 넘어야 깬다’는 청명주가 괜히 나왔을까. 술은 풍요로운 땅의 너그러운 노래라 하겠다. 세계술문화박물관 리쿼리움은 그에 걸맞게 탄금호 변에 위치한다. 중앙탑사적공원의 북쪽 끝자락이다. 술을 뜻하는 리쿼(liquor)와 전시관을 의미하는 리움(rium)을 합친 이름이니, 술문화의 전시관이자 박물관이다. 리쿼가 라틴어 ‘liquefacere(녹다)’에서 왔으니 리쿼리움은 곧장 입가로 가져가 몸으로 들이는 술이기도 하지만, 그 문화에 녹아드는 과정이라 할 수 있겠다. 달리 말해 우리 조상들이 술의 풍류와 더불어 귀히 여긴 술의 예절이다. 술 한잔의 풍류에 더한 사색으로 이종기 관장이 강조하는 ‘향음주례’의 정신이다. 향음주례는 《예기》에 근거한 주연(酒宴)의 의례다. 삼국시대에 전래되어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자들에게 《국조오례의》에 기재하도록 했다. 해당 관청의 수령이 나이가 많고 덕과 재주가 있는 이를 손님으로 청해 술을 나누며 충과 효, 경 등을 깨우치도록 하는 의례였다. 리쿼리움은 이 시대에 걸맞은 향음주례로 방문객에게 말을 건다. ‘알고 마시는 술’에 관한 이야기다. 그 안에는 동서양을 막론해 술이 만들어지는 과정부터 술을 즐기는 예절까지 술에 관한 모든 것이 고스란히 담겼다. 그러므로 조금은 다채롭고 조금은 진지한 주도의 여정이다. 미감이 아니라 심상으로 누리는 그윽한 색과 향의 정취다. 초등학생과 청소년이 입장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취기 어린 탄금호의 강바람
리쿼리움에 가면 거대한 증류기 두 대가 방문객을 맞는다. 깔때기를 엎어놓은 모양의 증류기가 관으로 이어진 대문이다. 실제로 스코틀랜드 위스키를 증류할 때 쓰던 기계다. 증류 시설을 지나면 왼쪽으로 전시관 입구가 드러난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가져온 오크통 61개가 피라미드를 이루는 지붕이 이채롭다. 슬며시 탄금호 쪽으로도 시선이 옮겨간다. 한창 건설 중인 풍류관 때문이다. 전통 한옥에서 내외국인을 상대로 전통 술 문화와 강좌, 연회 등을 개최할 예정이다. 풍류관의 먼 기다림을 뒤로하고 전시관에 들어선다. 술의 신 바쿠스가 권주의 표정과 몸짓으로 반긴다. 첫 번째 공간은 지하 1층의 서양 술 문화관이다. 와인과 위스키, 코냑, 맥주 등의 문화를 다룬다. 두 번째 공간은 1층의 발효 과학관과 동양 술 문화관이다. 한 가지 술에 관한 박물관은 많지만, 종류별 술을 다루는 박물관은 세계에서 유일하다는 게 리쿼리움 김윤경 교육팀장의 설명이다. 서양의 술은 와인 역사관에서 출발한다. 세계 각국 와인의 역사와 와인별 특징, 제조ㆍ보관 방법 등을 알 수 있다. 유리 세공에 따른 와인병의 변화, 디캔터의 변신, 맛을 표현하는 도표의 표현도 흥미롭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마스터 블렌더 이종기 관장이 오미자로 만들었다는 오미로제도 눈길을 끈다. 핵안보정상회의(NSS) 만찬주로 탄생한 에피소드가 곁들여진다. 코냑 증류기나 오크통 제조기 같은 비교적 큰 양조 기계도 전시한다. 오크통 제조기는 무게 때문에 건물의 천장을 완공하기 전에 들어와 자리 잡았다. 가장 큰 인기를 끄는 건 ‘천사의 몫’이라 불리는 위스키의 숙성 과정 전시다. 오크통 네 개가 첫해, 12년, 17년, 21년으로 나뉘는데, 숙성 단계에 따라 변하는 색깔이 두드러진다. 오크통 상단에는 자그마한 구멍이 뚫려 향을 비교할 수 있다. 그에 관한 재미난 이야기도 적혔다. 해가 거듭될수록 위스키가 줄어드는데, 숙성 정도를 확인하기 위해 천사가 마신 술의 양이란다. 물론 천사의 몫은 술을 사 먹는 사람이 지불해야 한다. 그래서 위스키의 본향 스코틀랜드에는 천사가 많다던가. 지하 1층을 나와 지상 1층으로 가는 길목에는 음주 습관 사다리 타기 코너가 있다. 그 정도에 따라 골든벨 혹은 징(경)을 치거나, 바가지를 긁는 벌칙이 주어진다. 종종 부부 사이의 정겨운 실랑이가 펼쳐진다. 남편은 자신의 음주 습관을 골든벨이라 하고, 아내는 징이라 한다. 이어진 전통주관은 우리나라 술제조 과정과 방법, 남북한을 아우르는 술의 역사를 전시한다. 그 연장선에서 만나는 발효 음식이나 유물, 중국과 일본의 술도 관람할 수 있다. 여정은 아트 홀에서 마무리한다. 문화로서 술을 향유한 뒤 혀끝으로 풍류를 즐길 차례다. 칵테일이나 와인, 전통주 만들기 같은 체험은 물론, 향음주례의 예절도 배운다. 느긋하게 와인을 마시는 기쁨도 빠뜨릴 수 없다. 탄금호 쪽으로는 전면 유리창인데, 호수와 음악 분수가 운치를 더한다. 야외로도 나갈 수 있다. 강바람을 맞으며 서 있노라면 권유와 사양을 되풀이하며 잔을 들 때마다 덕담을 건네고 시를 읊었다는 선조들의 풍류가 술 없이도 느껴지는 듯하다. 결국 술은 거들 뿐, 취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인 것이다.

☞ 영토 확장을 위한 진흥왕의 귀족 이주 정책
충주 누암리 고북군
한강 유역을 점령한 진흥왕은 신라의 귀족과 부호들을 충주로 이주시켰다. 영토 확장을 위한 거점 지역으로 충주를 선택한 것이다. 당시 충주로 옮겨온 신라 사람들이 충주 누암리 고분군의 주인이다.

   ▲ 누암리 고분군
신라 귀족의 무덤
충주박물관 제2관 선사/삼국실에 전시된 토기 중 ‘가야 굽다리접시’가 눈에 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군웅할거 하던 시절, 한반도 남부에 있던 가야의 생활 도구인 굽다리접시가 충주에서 발견된 것이다. 가야는 충주와 무슨 연관이 있을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찾아간 곳은 충주 누암리 고분군(사적 463호)이다. 누암리 고분군은 남한강 변 중앙탑면 누암리 산 41을 중심으로 반지름 약 1.5km 안에 있는 고분 230여 기다. 경주의 대릉원에서 볼 수 있는 크기는 아니지만, 보통 무덤보다 훨씬 큰 고분이 많다. 고분군이 있는 마을에는 ‘무지고개’라는 지명이 있다. ‘무지’란 ‘무덤’을 말하는데, 예부터 이곳에 무덤이 많아서 붙은 이름이다. 무지고개 주변의 많은 무덤들이 고분임을 확인한 것은 1980년 지표 조사에서다. 이후 1989년, 1990년, 1991년에 진행된 발굴 조사에서 누암리 고분군은 신라 고분군 밀집 지역으로 확인됐다. 고분은 대부분 도굴된 상태였지만, 몇 가지 중요한 유물을 수습할 수 있었다. 누암리 고분군 초입의 안내판에는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이 기록되었다. 짧은굽다리접시, 바리, 합, 항아리 등 토기와 철기, 금동제 귀고리 등이 출토됐다. 이중 눈에 띄는 것은 짧은굽다리접시 (단각고배)다. 짧은굽다리접시는 6세기 중엽 신라에서 유행한 대표적인 유물이자, 가야에서도 사용한 생활 도구다. 이 무덤의 주인을 신라 귀족이나 가야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라고 보는 이유다. 금동제 귀고리 같은 장신구가 함께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이 고분군은 사회적인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무덤이라 추정한다.

신라 귀족의 자제와 호족, 충주로 이주하다
신라가 충주 지역을 점령한 것은 진흥왕 때다. 550년(진흥왕 11)에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지금의 천안)을 빼앗자, 고구려는 백제의 금현성(지금의 세종시 전의면·전동면 일대)을 빼앗았다. 이때 신라는 양국 군사들이 피로한 틈을 타 도살성과 금현성을 모두 빼앗고, 성을 증축한 뒤 군사 1000명을 주둔시켰다.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고자 한 진흥왕의 계책이었다. 당시 신라와 백제는 동맹을 맺고 백제의 옛 땅인 한강 유역을 되찾았다. 그러나 진흥왕이 백제가 되찾은 한강 하류의 6군을 빼앗으면서 나제동맹은 깨지고 말았다. 이렇게 한강 유역을 점령한 진흥왕은 557년(진흥왕 18) 충주에 국원소경을 설치했다. 이듬해에는 국원소경의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경주에 있는 귀족의 자제와 힘 있고 부유한 사람들, 합병한 가야사람 중 일부를 충주로 이주시켰다. 국원소경은 원주ㆍ김해ㆍ청주ㆍ남원의 소경보다 120~130여 년 전에 설치되었다. 신라 조정에서 중원 지역에 관심을 보인 것은 충주가 철생산지인데다 계립령, 죽령 등 육로와 한강을 끼고 있어 수륙 교통이 편리했기 때문이다. 국원소경이 다른 소경에 비해 군사ㆍ정치ㆍ행정ㆍ문화면에서 일찍 발전한 이유다. 이 시기에 충주로 이주한 사람 중에 악성 우륵도 있다. 진흥왕은 신라 주변 가야를 하나씩 병합한다. 신라로 합병된 가야는 신라가 되었다. 나라를 잃은 우륵도 이제 가야 사람이 아니었다. 진흥왕은 우륵을 충주에 살게 하고, 우륵의 가야금 곡조를 장려했다. 우륵에게 제자를 양성하고 새로운 가야금 곡조를 만들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우륵의 가야금 곡조는 신라의 대표적인 음악으로 발전했다. 후대 사람들은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곳을 탄금대라고 불렀다.

생활 터전과 함께하는 신라의 고분
충주박물관에 있는 가야 굽다리접시를 보며 누암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짧은굽다리접시의 생김새를 유추해본다. 1500여 년 동안 고분에 묻혀 있다가 세상의 빛을 본 토기는 충주 누암리 고분군이 들려주는 옛이야기다. 누암리 고분군은 마을 사람들이 밭을 매고 농사짓는 생활 터전과 한곳에 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고분군 앞에 선다. 고분군 주변에 난간을 만들고, 고분군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도록 길을 냈다. 길을 따라 고분군을 한 바퀴 돌아본다. 고분군 둘레에 난 길 맨 위에 서면 고분군과 그 옆에서 밭 매는 사람들, 저 멀리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6세기 신라 진흥왕의 영토 확장 계획에 따라 이주한 사람들의 무덤에 핀 작은 꽃과 풀들이 땡볕에 앉아 김매는 농부의 밭고랑 옆까지 푸르게 번져간다.

☞ 아! 고구려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

충주는 계립령과 죽령, 남한강 등이 있어 육로와 수로의 요지였다. 무기와 생활 도구는 물론, 문화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질 좋은 철이 생산됐다. 충주를 손에 넣는 나라가 삼국 통일의 교두보를 확보하는 셈이었다. 고구려는 70년 넘게 충주를 지배했으나 신라에게 빼앗겼고, 신라가 마침내 삼국을 통일했다. 고구려의 충주 점령을 상징하는 충주 고구려비가 강한 나라 고구려의 기상을 품고 충주 땅에 서 있다.

   ▲ 충주 고구려비
선돌마을에서 찾은 국보 비석
돌이 하나 서 있어 마을 이름이 선돌마을이었다. 한자로 옮기니 입석마을이 됐을 뿐, 그 돌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도 관심을 두는 이도 없었다. 설화에 따르면 조선 시대 숙종이 이곳을 지날 때 마을에 사는 전의 이씨에게 두 돌기둥을 기준으로 안쪽의 산과 밭을 하사했는데, 돌기둥 하나가 충주 고구려비다. 숙종도 이 비석이 무엇인지 모르고 흔한 돌기둥으로 여긴 것이다. 그 돌기둥은 고구려 장수왕 때 남진 정책으로 충주가 고구려 땅이 된 뒤에 세운 고구려비다. 판독 가능한 비문만 모아도 그동안 공백으로 남았던 충주 지역에서 삼국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충주 고구려비는 고구려의 한강 이남 진출을 입증하는 유물이자,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은 고구려 비석이다. 국보 205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충주 고구려비전시관에 있다.

충주에서 고구려를 만나다
충주고구려비전시관 앞에 고구려의 상징물인 삼족오 조형물이 있다. 태양에 산다는 전설의 새 삼족오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며, 강인한 고구려의 기상을 나타낸다. 고구려의 기상은 충주고구려비전시관 안에서도 만날 수 있다. 전시관으로 들어가다 보면 벽화를 재현한 전시물을 따라 복도를 지나는데, 말을 타고 달리는 ‘개마무사’ 조형물이 여행자를 반긴다. 개마무사는 고구려의 주력부대였다. ‘개마’는 말에 갑옷을 입힌 것을 말하며, 그 말을 탄 무사와 기병대를 개마무사라고 불렀다. 개마무사는 앞장서서 쳐들어가는 돌격대이자, 마지막 방어책이었다. 화살도 뚫지 못하고 창날에도 끄떡없는 철갑옷을 입은 개마무사는 승전의 수호신이었다. 광개토대왕이 영토를 확장할 때 개마무사가 5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전시관 통로 벽에 남진 정책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의 역사, 당시 주변 국가와 관계 등이 적힌 기록이 여행자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한 걸음 한 걸음 지날 때마다 고구려에 대해 알게 된다. 고구려는 알면 알수록 강한 나라였다. 드디어 강한 나라 고구려의 최고 상징물, 충주 고구려비를 만난다.

   ▲ 충주고구려비전시관 개마무사 조형물
고구려가 지배한 충주 역사 70여 년
충주 고구려비를 건립한 연도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문자명왕(재위 491~519년) 시절인 495년 전후, 장수왕이 남진 정책을 펼치며 충주를 점령한 뒤 등 두 가지 설에 무게가 실린다. 충주는 철을 생산한 고장이며, 남북을 왕래할 때 계립령과 죽령 같은 육로와 남한강을 이용한 수로 등이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이에 충주는 삼국의 각축장이었다. 삼국이 군웅할거 하던 시절 충주 지역을 점령한 주인은 백제, 고구려, 신라 순으로 바뀌었다. 백제 근초고왕(재위 346~375년)이 지금의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낙동강 중류 지역, 강원도, 황해도 일부까지 포함하는 영토를 확보했다. 그러나 백제는 5세기 말에 이르러 광개토대왕(재위 391~413년)이 한강 유역에 진출하고, 장수왕(재위 413~491년)이 남진 정책을 펼침에 따라 475년 한강 유역을 잃는다. 당시 전투에서 개로왕까지 죽는다. 충주 안림동에 어림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이 이궁지라는 설이 있다. 개로왕(재위 455~475년)이 죽기 전에 위기를 느끼고 한성에서 충주(안림동)로 도읍을 옮기려고 궁궐을 지었으나, 천도하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개로왕의 아들 문주가 잠시 충주에서 머물렀다가 공주(웅진)에 수도를 정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위기를 느낀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나제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고구려의 남진은 계속됐고, 조령과 죽령, 평해, 영덕으로 이어지는 선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고구려는 충주를 장악한 뒤 신라 왕을 매금으로 칭하는 등 신라와 관계에서 우위를 과시하는 한편, 충주 지역을 삼국 통합을 위한 남방 기지로 삼았다. 이는 충주를 점령한 뒤 부도의 성격을 띠는 국원성으로 삼은 점이나 충주 고구려비를 세운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이후에 충주 지방은 고구려의 영토가 되어 70여 년간 고구려의 지배를 받는다. 이후 신라 진흥왕 때인 6세기 중엽에 고구려는 신라에게 충주를 빼앗긴다. 고구려는 이 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펼친다. 영양왕(재위 590~618년) 때 온달 장군이 전쟁에 나서면서 “계립현과 죽령 이북의 땅을 우리 것으로 회복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한다. 642년(선덕여왕 11) 김춘추가 백제를 치기 위해 고구려에 입국, 구원병을 요청했을 때 보장왕(재위 642~668년)은 “네가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준다면 원병을 보내겠다”는 말을 남겼다고도 한다. 현재 입석마을 주변에는 용전리, 봉황리, 천룡산, 을궁산, 태자뜰 등 고대 왕실이나 최고 지배층을 연상케 하는 지명이 있다. 충주 고구려비가 세워진 고구려의 최전선이자 고구려 제2의 도성이던 국원성의 명맥이 이어지는 것이다.

삼국은 전성기에 충주를 손에 넣었다
백제의 전성기

백제는 근초고왕 때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근초고왕은 정복 사업을 펼쳤다. 남으로는 마한 지역을 정복하면서 전라도와 남해안까지 그 세력이 이르렀고, 낙동강 유역에 자리잡은 가야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고구려를 공격해서 고국원왕(재위 331~371년)을 죽이기도 했다. 당시 백제는 지금의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낙동강 중류 지역, 강원도, 황해도 일부까지 포함하는 영토를 확보했다. 한편 동진과 외교를 맺고 중국의 랴오시와 산둥, 일본의 규슈까지 진출해 상업망을 형성하는 등 대외적인 활동도 펼쳤다. 고구려의 전성기 광개토대왕은 영토 확장 전쟁으로 한강 유역까지 진출했으며, 장수왕은 남진 정책을 펴 충주를 점령하고 조령과 죽령, 평해, 영덕으로 이어지는 선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위기를 느낀 신라와 백제는 나제동맹을 맺었지만, 고구려의 남진은 계속됐다. 고구려는 충주를 장악한 뒤 신라 왕을 매금으로 칭하는 등 신라와 관계에서 우위를 과시하는 한편, 충주 지역을 삼국 통합을 위한 남방 기지로 삼았다. 이는 충주를 점령한 뒤 부도의 성격을 띠는 국원성으로 삼고, 중앙탑면에 충주 고구려비를 세운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신라의 전성기 백제가 550년(진흥왕 11)에 고구려의 도살성(지금의 천안)을 빼앗자, 고구려는 백제의 금현성(지금의 세종시 전의면ㆍ전동면 일대)을 함락했다. 이때 신라는 양국 군사들이 피로한 틈을 타 도살성과 금현성을 모두 빼앗고, 군사 1000명을 배치했다. 신라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할 교두보를 마련한 셈이다. 이어 551년에 낭성(충주)을 돌아보고 한강 상류 지역으로 진출, 죽령 이북 고현 이남의 10개 군을 빼앗았다. 557년(진흥왕 18) 소경(국원소경)을 설치하고, 이듬해 경주의 부호들과 귀족 자제들을 충주로 이주시켰다. 충주는 신라의 5소경 중 가장 먼저 설치되었으며, 정치와 군사,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맡았다. 문무왕 때는 국원성을 축성하고, 경덕왕 때는 중원경으로 이름을 바꿨다.

☞ 별을 헤던 추억이 반짝이던 곳
충주 고구려 천문과학관

옛날에는 고개 젖혀 하늘을 올려다봤다. 쨍쨍 뜬 해도 보고, 낮달도 보고, 밤이 되면 별도 보고, 별자리도 그렸다. 밤하늘에 강처럼 흐르는 은하수는 참 신기했다. 지금도 그 별들은 그렇게 빛나고 있을 것이다. 충주고구려천문과학관에 가면 별을 헤던 추억이 별과 함께 빛난다.

고구려 밤하늘에 빛나던 별자리를 보다
2014년 7월 1일 밤 충주에서 본 북두칠성은 1000년 전인 1014년 7월 1일 밤 고려 시대 충주에서도 볼 수 있었고, 그보다 500년 전인 514년 충주가 고구려 땅이었을 때도 7월 1일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어떤 사람에게 똑같이 보였다. 같은 공간 다른 시간, 고구려 시대 충주에 살던 아이가 올려다본 하늘에서 빛나던 북두칠성은 1500여 년을 관통해서 2014년 대한민국에 사는 어떤 사람 눈에도 비쳤을 것이다. 그리고 1500여 년 뒤 충주에 사는 어떤 아이의 눈에도 북두칠성은 그렇게 빛날 것이다. 밤하늘 바라보며 별을 헤던 시절이 아름다웠다. 모깃불 피워놓고 드러누워 바라보던 밤하늘에는 별이 참 많았다. 별 무리가 강처럼 흐르는 은하수를 보면 왠지 모르게 가슴 한쪽이 시려왔다. 휘황한 도심의 불빛에 사라진, 흐린 하늘 뒤에 숨은 별들은 아직도 그대로 반짝일 것이다. 충주에 가면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볼 수 있는 천문과학관이 있다. 충주를 찾는 여행자라면 충주고구려천문과학관에서 하늘을 바라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무렇지도 않던 마음이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만큼은 어린 시절 추억처럼 설렌다. 망원경 없이 바라보는 밤하늘도 아름답고, 망원경으로 찾아보는 별도 아름답다.

   ▲ 천체망원경에 DSLR카메라를 장착해 찍은 태양사진
낮에는 태양, 밤에는 별을 보다
충주고구려천문과학관 자료에 따르면 북두칠성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별자리의 이음선이 같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보는 북두칠성을 고구려 사람도 보았을 것이다. 북두칠성의 반대편인 남쪽 별자리에는 남두육성(서양의 궁수자리)이 있다. 남쪽에 국자 모양으로 모인 여섯 개 별이 남두육성이다. 지금도 밤하늘의 별들은 반짝인다.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강처럼 흐르는 은하수를 찾아보고, 손가락으로 별자리를 짚어가며 별 이야기도 해본다. 천문과학관에서는 별만 보는 게 아니다. 낮에는 태양을, 밤에는 별을 본다. 하지만 날씨가 좋아야 해나 별이나 달을 볼 수 있다. 흐린 날에는 그 아쉬움을 대신해줄 ‘천체투영실’을 이용하면 된다. 충주 인근의 밤하늘과 세계의 밤하늘 등 다양한 영상을 볼 수 있다.

천체망원경으로 태양 사진을 찍다
맑은 날에는 천체관측실에서 태양을 볼 수 있다. 보조관측실에는 지름 12cm 굴절망원경과 지름 40cm 반사 굴절 복합식 망원경 등 천체망원경 다섯 대가 설치됐다. 낮에는 태양을 주로 관측하고, 밤에는 천체망원경으로 여러 사람이 밤하늘을 관측할 수 있다. 주관측실에서는 지름 60cm 반사망원경으로 성운이나 성단, 태양계의 행성이나 달 등을 관측한다. 천체망원경으로 바라보는 태양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불타고 이글거리는 태양 대신, 붉은 원이 전부다. 태양 빛이 무척 강하기 때문에 렌즈 앞에 빛을 줄여주는 필터를 장착해야 볼 수 있다. 그 필터가 없으면 우리의 눈은 태양 빛에 탄다고 한다. 필터를 제거한 천체망원경 접안렌즈 쪽에 눈이 그려진 종이를 대니 그대로 종이에서 연기가 난다. 우리가 TV 과학 프로그램에서 보는 이글거리는 태양 사진은 우주선에서 찍은 거란다. 가져간 DSLR 카메라를 천체망원경에 연결해서 태양 사진을 찍는다. 어댑터로 천체망원경과 카메라를 연결한 뒤 천체망원경의 초점 레버를 돌려 초점을 맞춘다. 찰칵! 설레는 마음으로 셔터를 눌렀다. 충주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을 카메라에 담고 가슴에 품은 것만으로 행복하다. <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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