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충주시, 3부 - 앙성, 엄정권

분위기를 느끼고 운치를 만끽할 수 있는 계절, 겨울이다. 절로 온몸이 움츠러드는 추위로 옴짝달싹하기 싫을 수도 있으나, 이 계절만큼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 또 있을까. 아름다운 풍경이 만들어내는 자연에 흠뻑 빠져 보고 싶다면 역사와 비경, 그리고 문학이 숨 쉬는 충청북도 충주 로 떠나보자.

 
☞ 시인이 사는 숲에 가다
문성자연휴양림

노은면은 충주 북서쪽에 있는 자그마한 마을이다. 조선시대 선비 정경연의 사연을 따와 시처럼 이름을 지었다. 우리나라 현대 시문학을 대표하는 신경림ㆍ함민복 시인의 고향이기도 하다. 문성자연휴양림에서 시인이 자란 마을의 자연을 빌려 하루 묵어보자.

시인의 마을
충주에는 휴양림이 많다. 전국 기초 지자체 가운데 손꼽는다. 저마다 장점이 있지만, 문성자연 휴양림은 가만히 머물러 쉬는 휴양이 아니라 선택의 폭이 넓고 다채롭다. 생태 숲은 기본이고 오토캠핑이 가능하며, 모노레일도 운영한다. 목공 체험을 특화한 행복숲체험원이나 유치원생을 위한 숲속유치원도 장점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노은면이 간직한 인물의 족적이 호기심을 끈다. 충주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노은에 내린다. 면 소재지 시골 마을의 한적한 시가다. 먼발치에는 국망산과 보련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국망산은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가 피란한 곳이다. 매일 산에 올라 한양에서 좋은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다고 해서 국망이다. 노은면의 제법 알려진 사연이다. 가장 이채로운 건 노은면이라는 지명과 관련한 인물이다. 1630년 인조 시절에 청안현감을 지낸 정경연에게서 유래했다. 그가 홀로 된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벼슬을 그만두고 농사를 지으며 은거한 땅이라고 해서 노은현이라 불리던 게 오늘에 이른다. 문성리의 문바위에 관한 전설이 예사롭지 않게 들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효자 농부가 어머니의 병을 고치려고 산삼을 구해야 했는데, 어느 날 숲에서 도둑들이 문을 여닫는 바위를 보고 그 안에서 산삼을 얻었다는 이야기다. 과거의 인물들만 노은면의 자랑일까. 우리 귀에 익은 시인의 서정도 노은이 고향이다. 문바위 못미처 노은초등학교엔 2014년 6월 시비 하나가 세워졌다. 신경림 시인의 ‘농무’ 시비다. 노은면은 신경림 시인이 태어난 고향이고, 노은초등학교는 그의 모교다. ‘국망산 기슭에 뜻을 심었다’로 시작하는 노은중학교 교가도 그가 작사했다. ‘농무’의 배경 역시 노은면이다. ‘눈물은 왜 짠가’로 유명한 함민복 시인도 노은에서 태어났다. 어느 글엔 마을에 살던 네 집이 제일 맑은 샘물을 번갈아 떠먹던 정겨운 이야기도 적혔다. 문성자연휴양림에서 하룻밤 묵을 때 괜스레 시상이 떠올랐다면 아마도 시인들의 영감일지도 모른다.낮에는 목수로, 밤에는 별빛의 시인으로
문성자연휴양림 가는 길은 신경림 시인의 노은초등학교와 함민복 시인의 문성리 문바위 사이에 난 샛길이다. 두 시인을 뒤로하고 자주봉산으로 향한다. 면사무소 인근에서 2.5km 거리다. 북충주 IC에서 지척이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이들은 적당한 걷기의 즐거움도 누려볼 일이다. 휴양림에 다다르면 사방으로 초록의 산세가 푸근하게 안는다. 시인을 낳은 지역의 정취답다. 각자 선택에 따라 조금 더 동적으로 누려볼 수도 있다. 첫 번째 갈림길에서 왼쪽 언덕은 목재문화체험장이다. 문성자연휴양림에서 제일 인기 있는 공간이다. 목재문화체험장은 전시동과 체험동, 3D 영상실 등으로 구성된다. 아래쪽은 전시동이다. 나무로 만든 각종 가구와 악기, 공예품 등을 전시한다. 편백방, 소나무방, 낙엽송방은 각각의 나무로 만들어 짧게나마 삼림욕을 경험하는 공간이다. 전시실 옆은 목공예 체험장이다. 재료비를 내고 나무 목걸이와 메모판 등을 만들 수 있다. 3D영상실에선 숲 홍보 영상은 물론, 종종 흑백영화도 상영한다. DIY 가구 만들기는 좀 더 본격적인 목공 체험이다. 위쪽 체험동에서 진행하는데, 다과상이나 의자 등 가구를 제작한다. 목재문화체험장 뒤쪽으로 숲속산책로와 오토캠핑장 등이 자리하는데, 걸어서 숲을 산책하거나 모노레일을 타고 돌아볼 수 있다. 모노레일은 해설사가 동승해 숲 해설을 들려주며, 1시간 코스와 30분 코스로 나뉜다. 갈림길에서 직진하면 관리소다. 왼쪽에는 야외 수영장과 숙박동이 있다. 오른쪽으로 올라가 다시 우회전하면 생태 숲으로 접어든다. 생태 숲에는 모과나무, 배롱나무, 매실나무 등 아홉 가지 상징숲이 있다. 느릿하고 풍성한 숲의 숨결이 깃든다. 숲길 산책로 외에 아이들을 위한 숲속생태관이나 숲속도서관 등도 자리한다. 무당벌레 모양으로 만든 곤충체험관이나 생태연못도 그 못지않은 공간이다. 으뜸은 숲속유치원이다. 옹달샘에서 올챙이와 개구리도 만나고, 흔들다리나 기차놀이도 즐긴다. 해설사의 말을 빌리면 “집에 가기 싫다는 아이들이 부지기수”라고 한다. 유치원 단위로 단체 예약만 가능한 점이 아쉽다. 생태 숲 맞은편에서 노은면에 뿌리내린 또 한 사람을 만난다. ‘고도원의 아침편지’로 유명한 고도원 씨다. 그는 300만 명이 넘는 독자에게 이메일로 아침편지를 전한다. 명상센터 깊은 산 속 옹달샘은 고도원 씨가 지난 2003년부터 그려온 공간으로, 휴양림 내에 있지만 휴양림과 별도로 운영한다. 날 돌아보고 내 안을 들여다보는 여러 가지 힐링 프로그램이 있다. 휴양림의 밤하늘도 빠질 수 없다. 맑은 자연의 품에서 누리는 호사다. 문득 시상이 떠오르는 것은 시인의 마을 노은면이 주는 특별한 감흥이다.

   ▲ 문성자연휴양림
☞ 시간은 강물 따라 흐르고 이야기만 남았네~
목계나루
배 수십 척이 오가고, 전국에서 모인 사람들의 목소리가 강물 위로 번지는 곳이다. 자동차가 무심히 오가고 인적이 드문 나루터에서 유장한 남한강 물결을 바라보면 가고 없는 세월 대신 어제처럼 생생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목계나루가 들려주는 이야기
태백산맥 남쪽 준령 사이를 타고 내린 물이 충주호에 잠시 안겼다가 남한강이라는 이름을 얻고 조금씩 품을 넓힌다. 중부 내륙 들판을 적시며 느리게 흘러온 달천을 합치고 한강으로 나가기 위해 서쪽으로 몸을 돌리며 잠시 숨을 고르는 곳, 목계나루다. 하늘을 담은 넉넉한 물빛과 그 곁에 서 자라는 울창한 수목은 이 유장한 물길이 어느 것 하나 내치지 않고 알뜰하게 보듬고 있음을 말해준다. 강원도 정선 아우라지에서 소나무를 싣고 내려온 뗏목이 고된 노를 멈추고, 서해안에서 올라온 젓갈 항아리가 신바람 난 아낙들에 둘러싸여 뚜껑을 열던 곳이다. 우시장으로 팔려가는 소들이 배에 실려 구슬픈 울음을 내던 곳이기도 하다. 방학을 맞아 서울에서 내려온 아들과 흰머리 성성한 어머니의 벅찬 만남이 있고, 뜨내기 방물장수와 부끄럼 많은 처녀의 무심한 이별도 있었을 것이다. 한 세기를 거슬러 올라 그려보는 목계나루의 풍경은 어느 단편소설의 첫 장면으로 쓰여도 좋을 소소한 단상을 담고 있다. 말없이 흐르는 강물은 무수한 풍경을 세월 속으로 흘려보내고 멀리서 온 여행자를 반갑게 맞이한다. 내륙에서 모인 물자가 한강 뱃길을 따라 한양으로 가자면 반드시 거쳐야 했던 목계나루는 충북선 철도가 개통되고 도로망이 발달하기까지 번성을 누린 상업의 중심지였다. 조선 시대 내륙에서 거둔 쌀을 보관하던 가금창이 목계나루 건너편에 있어 수참선과 상선 수십 척이 정박한 풍경이 장관이었다. 배가 들어오면 사흘이고 나흘이고 장날처럼 북적였다. 1972년 충주시 가금면과 목계리를 잇는 목계교가 놓이기 전에 목계리 주민들은 나룻배로 남한강을 건넜다. 1년 치 도선료를 미리 내고 수시로 강을 건너기도 했다. 이렇게 모인 돈은 마을 기금으로 쓰였다. 한때 800여 명에 이르던 주민은 1973년 대홍수 때 뿔뿔이 흩어지고, 음식점과 여관이 즐비하던 거리 풍경도 쓸쓸해졌다. 수변 공원으로 꾸며진 강변이 시원스럽고 물빛 또한 더없이 고요하지만, 왁자한 나루터에 인정이 오가고 사람의 꽃이 피던 옛 시절이 그립다.

시가 맞아주는 나루터의 풍경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충주의 시인 신경림은 목계나루에 서서 구름처럼, 바람처럼 떠도는 자유로운 삶을 꿈꿨을까. 나루터의 왁자한 풍광은 사라지고 목계나루터 표석만 우뚝하지만, 나란히 선 ‘목계장터’ 시비를 보며 천천히 숨을 고른다. 노래처럼 읽히는 시어 하나하나 강물이 되어 마음속을 흘러간다. 욕심이 없는 방물장수, 떠돌이 바보 천치로 살아가라고, 들꽃이 되고, 잔돌이 되고, 바람이 되라고 강물이 넌지시 말을 건넨다. 나무 데크로 이어지는 수변 공원에 내려서 강변을 따라 걸으면 나루터의 영화롭던 시절을 상상하게 해주는 나룻배 한 척이 보인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가을이면 전국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목계별신제’가 열린다. 마을의 무사 안녕과 뱃길이 무탈하기를 빌던 목계별신제는 일제강점기에 명맥이 끊어졌다가, 서울올림픽대회 이후 다시 이어져 오늘에 이른다. 마을 주민들이 새끼를 꼬아 치르는 ‘목계 줄다리기’는 별신제 마지막 날 대미를 장식한다. 강 건너 바라보이는 솔밭에는 마을의 전설이 깃들어 있다. 조선 헌종 때 오랜 가뭄이 들었는데, 목계 촌장의 꿈에 신령이 나타나 용이 머물 수 있도록 저우내에 소나무를 심으라 이르고 사라졌다. 저우내는 목계나루 건너편 둔덕이다. 저우내의 촌장도 같은 꿈을 꿨다. 두 마을 주민이 합심해 둔덕을 넓히고 소나무를 심으니 거짓말처럼 비가 내리고 해갈이 됐다고 한다. 목계별신제 때 용을 상징하는 줄다리기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목계문화마을 가운데 자리한 중원목계문화원으로 가면 목계나루터와 목계별신제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용이 쉴 자리로 만들어진 목계솔밭은 목계나루를 오가는 떼몰이꾼과 상인들이 그늘 아래 자리 잡고 달콤한 낮잠을 즐기던 곳이다. 강 건너 북적이는 나루터의 전경을 바라보며 들꽃이 되고, 바람이 되고, 잔돌이 되던 나그네의 그림자가 소나무 향 그윽한 언덕에 언뜻 비친다.

☞ 생활 속에 녹아든 예술을 만나다
충주민속공예거리
정겹고 소박한 민속공예품과 남한강에서 난 수석을 만나는 거리다. 소원을 담은 나만의 솟대도 만들어보고, 한지와 칠보 등 다양한 공예 체험을 할 수 있는 충주공예전시관도 특별하다. 무심한 듯 보이는 크고 작은 상점들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충주 민속공예거리가 만들어진 이야기
‘우리가 먹고 쉬는 살림집처럼 일상생활보다 한국의 고유한 체취를 강하게 발산하는 곳은 없다. 이 요람에서 한국의 멋과 미가 오랫동안 자라온 것이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쓴 최순우 선생의 말이다. 장을 담는 항아리에 무심한 듯 구름 한 조각을 그리고, 선비의 필치인 양 난을 새기는 것을 잊지 않던 도공, 나뭇가지 하나를 이리저리 다듬어 솟대를 세우던 노인, 푸른 하늘 한 자락을 감은 듯 쪽물을 들여 고운 치마저고리를 해 입던 여인네, 쓰임새 가늠하고 모양새를 다듬어 작품 하나를 생활공간 속에 들이던 선조의 멋을 충주 민속공예거리에서 만난다. 목계나루가 있는 목계교를 중심으로 엄정면 목계리와 가흥면에 이르는 약 5.3km는 충주민속공예거리로 불린다. 길목에 선 커다란 장승들이 이정표인 셈인데 가흥면 쪽에는 골동품과 목공예 점포가, 목계리 쪽에는 수석 상점이 모여 확연히 구분된다. 먼저 자리를 잡은 것은 목계리 쪽의 수석 거리다. 1970년대 후반 충주댐 건설이 시작되면서 남한강 변에서 수석이 많이 나왔다. 관상용 가치가 있는 것을 수석이라 하는데, 남한강의 수석은 전국에서도 알아줬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수석을 판매하는 상점들이 들어섰고, 수석을 취미로 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1990년대까지도 호황을 누리던 이 거리는 수석 인구가 줄고 경제 여파가 더해져 지금은 20여 곳이 문을 열고 있다. 자연이 빚은 작품이기에 수석을 올려놓을 좌대가 필요하다. 좌대는 주로 돌이나 나무를 깎아 만드는데, 목계교 건너 중앙탑면 쪽에 좌대만 전문으로 만드는 목공예 공방이 하나둘 들어섰다. 충주 민속공예거리가 만들어진 배경이다.

   ▲ 충주민속공예거리
볼수록 정감 있는 충주 민속공예거리 탐방
충주 민속공예거리는 인도가 없는 도로변을 따라 이어진다. 상점이 한 집 두 집 떨어져 있다 보니 거리를 걸으며 돌아보기는 쉽지 않다. 옹기 수백 개를 모아놓은 집, 골동품만 있는 집, 한국의 민화만 판매하는 집이 조금씩 떨어져서 자리한다. 상점 밖에 있는 물건들은 평범해 보이지만, 걸음을 멈추고 들어가 찬찬히 둘러보면 손때 묻은 공예품, 멋스런 수석 좌대 등이 빼곡하다. 야외 공간을 운치 있게 장식할 물레방아와 문인석이 주인 대신 인사를 건네고, 서울 황학동 벼룩시장에서 보았음 직한 장식품을 아기자기하게 모아놓은 상점도 눈길을 끈다. 충주 민속공예거리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공간은 수많은 솟대 작품을 전시ㆍ판매하고, 탐방객이 솟대 만들기 체험도 할 수 있는 솟대나라다. 솟대 수백 개가 하늘을 향해 서 있는 솟대나라에 들어서면 크고 작은 솟대 5000여 점이 빼곡하다. 수천수만 마리 나무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모습을 조각한 사람은 솟대나라 김재철(62) 대표다. 대한민국 솟대 명인으로 불리며, 창작 솟대 200여 개는 특허까지 받았다. 장대 끝에 나무로 조각한 새를 꽂아 마을 입구에 세우는 솟대는 마을의 풍요와 안녕을 비는 의미다. 새가 하늘과 땅을 연결해준다고 믿은 것이다. 솟대를 세운 곳은 ‘소도’라 해 신성한 공간으로 여기기도 했다. 솟대나라에서는 크기에 따라 체험비를 내면 나만의 솟대를 깎아 가져갈 수 있다. 민간신앙이자 예술이던 솟대 공예가가 되어보는 것이다. 한 명이든 열 명이든 솟대를 만들겠다고 방문하는 이를 반갑게 맞는 명인의 얼굴이 자부심으로 빛난다.

☞ 꾸미지 않고 때 묻지 않은 멋
비내길과 비내섬
어린 시절 미역 감으러 뛰어가던 흙길과 농부의 땀이 밴 들길을 엮었다. 열병을 앓던 청년 시인의 눈물을 감춰준 갈대숲과 세월을 낚는 선비의 어깨에 노을을 걸쳐주던 여울이 길의 소품이다. 그 길에 수놓인 삶을 뚜벅뚜벅 밟는 순간, 나그네는 살아온 날을 잊고 강물이 된다. 마을과 하늘과 사람을 품은 넉넉한 남한강이 된다.

남한강 풍경따라 유유히 걷는 비내길
낚싯대를 드리운 이의 눈길이 멀리 강물에 머물렀다. 아담한 마을과 나지막한 산자락이 비치는 강물이 깊은 눈 속에 고요히 차오른다. 물결은 구름을 거느린 하늘이 내려와 쉴 만큼 잔잔하다. 세월마저 멈춘 풍경을 흔든 건 사람이다. “이제 그만 한양으로 가시지요”, 무섭게 몰아치던 개혁의 칼바람을 피해 낙향한 김익창에게 복직을 권유하러 찾아온 이는 우암 송시열이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지만 자신이 없었다. 송국당 김익창은 미동도 없이 시를 읊었다. ‘동강칠리탄 부청산조대(洞江七里灘 富靑山釣垈)’, 한나라 광무제가 내려준 벼슬을 마다하고 동강칠리탄에서 낚시로 생을 마친 엄자릉처럼 살고자 하는 그의 뜻에 말을 잃은 송시열은 한가로운 남한강의 풍경 앞을 쉬이 떠나지 못했다. 300년 전 세월을 낚으러 마을과 강을 오가던 그 길이 고스란히 우리에게 왔다. 낚싯대를 드리운 채 하염없이 바라보던 풍경을 이어 만든 ‘비내길’이다. 요즘은 자고 나면 새로운 길이 생겨날 만큼 걷기 열풍이 뜨겁다. 그러나 열풍에 휩쓸려 만들어진 길 가운데 하나라고 여기면 오산이다. 비내길은 어린 시절 놀던 흙길과 마을 사람들이 과수원으로 가던 농로, 강으로 미역 감으러 가던 오솔길을 이어 만들었다. 걷기 편하라고 놓은 나무 데크도, 호화로운 전시물도 없다. 인공적인 손길을 최대한 물리치고 어린 시절부터 드나들던 길을 그대로 살리고자 노력한 고마운 길이다. 트레킹 시작점인 앙성온천광장을 출발하면 논과 밭, 과수원이 어우러진 시골 풍경이 펼쳐진다. 어릴 때 친구들과 놀던 고향 풍경이다. 가슴에 훈장처럼 달고 군인 놀이를 하던 환삼 덩굴잎도 만나고, 곱게 접어 이로 깨물어 무늬를 만들던 칡잎도 만난다. 어린 시절처럼 칡잎을 깨물자 입 안 가득 풀 향기가 퍼진다. 가끔 4대강 자전거 길의 포장도로와 겹치기도 하지만, 고향 마을처럼 정겨운 풍경이 둑길로 이어진다. 가을이면 곱게 물들 단풍나무가 길 양쪽으로 줄지어 있다. 발끝에는 냉이, 현호색, 애기똥풀, 개망초 무리가 계절 따라 피었다 지고, 앙성천 갈대밭 풍경이 걸음을 느리게 한다. 평화로운 둑길이 끝날 무렵 벼슬바위가 나타난다. 태자산 끝자락에 놓인 봉우리 아래 솟은 바위가 수탉의 볏을 닮았다. 옛날부터 벼슬길에 나가고자 하는 이들의 소원을 들어준 기도 명당이라 한다. 마고할미가 치마폭에 싸서 들고 가던 수정을 떨어뜨려 영험한 바위가 됐다는 전설이다. 벼슬바위 위쪽으로 슬픈 이야기가 전해오는 상여바위도 있다. 영남의 조 선비가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던 중, 이 바위에 와서 기도하고 밤이 늦어 김 진사 집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그 집 외동딸과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졌다. 며칠 뒤 선비는 과거를 보러 떠났고, 김 진사의 딸은 날마다 벼슬바위에 와서 기도했다. 덕분에 장원급제해 암행어사가 된 조 선비는 바쁜 나날을 보내며 김 진사의 딸을 잊었고, 날마다 치성을 드리던 딸은 결국 죽고 말았다. 김 진사는 딸의 꽃상여를 선비가 있는 한양으로 보내주려고 남한강에 띄웠다. 그러자 갑자기 돌풍이 일면서 상여가 벼슬바위 꼭대기로 올라갔다. 죽어서도 선비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이 변치 않은 여인의 사랑이 바위가 돼 남았다는 이야기다. 상여바위가 슬픔을 안고 내려다보는 곳은 합수머리다. 앙성천이 남한강의 넓은 품에 안기는 순간이다. 두 물이 만나는 곳에 철새들의 보금자리인 봉황섬이 자리한다. 망원경이 설치된 철새 전망대에 오르면 남한강이 한눈에 들어오고, 백로와 두루미가 노니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철새 전망대부터는 넉넉한 남한강 풍경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다. 이곳에서 조대나루터까지 비내길 최고의 풍경이 펼쳐진다. 잔잔한 물결 너머 소태면의 작은 마을들이 나지막한 산을 배경으로 그림처럼 들어앉았다. 세월마저 멈춘 듯 느리게 흐르는 강물 따라 발걸음도 한껏 느려지고, 풍경 하나하나가 온몸으로 전해진다. 자연이 주는 느림의 미학이다. 오솔길이 끝나는 비내섬이 코앞에 다가온 자리가 조대나루터다. 조대나루터에 앉아 수심이 얕은 여울을 따라 다슬기 잡고, 고기 잡는 사람들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그 옛날 소태면에서 서울로 향하던 발길이 끊이지 않던 나루터는 이제 흔적조차 없지만, 동네 꼬마들의 웃음소리는 여울 물소리처럼 맑게 흘러간다. 조대나루터를 지나면 아담한 조대마을이다. 조선 숙종 때 사관을 지낸 김익창이 낙향해 낚시를 하던 이곳은 그가 읊은 시구를 따서 조대마을이라 불린다.

   ▲ 가장 자연에 가깝게 꾸민 비내길
자연이 살아 숨 쉬는 비내섬
갈대가 무성한 비내섬은 비내길의 하이라이트다. 99만 2,000㎡ 면적에 사람을 위한 시설은 아무것도 없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갈대가 무성하다. 갈대 사이로 난 작은 길과 강을 배경으로 선 버드나무가 전부다. 그 풍경 덕분에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 인기가 높다. 비내는 갈대와 나무가 무성해 비어(베어)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도 하고, 큰 장마가 지는 바람에 내가 변했다 해서 비내라 불린다고도 한다. 비내길에 있던 시구가 마음을 흔든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열병을 앓던 시인도 이곳에서 울음을 감췄을지 모른다.

갈대는 /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 그는 몰랐다. - 신경림 ‘갈대’ 중에서 -

비내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가면 비내마을이다. 20여 가구 주민이 사는 소담스런 마을 입구에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가 정겹게 맞아주고, 낮은 담이 푸근하게 감싸준다. 마을을 지나면 오솔길이 새바지산 전망대로 이어지고, 새들의 합창 소리와 향긋한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능암온천휴게소가 보인다. 길은 끝났지만 마을과 산과 하늘을 품은 남한강이 마음을 적시며 끝없이 흐른다.

☞ 몸과 마음 녹이는 온천 사용 설명서
앙성온천
앙성온천은 세계에서 희귀한 탄산 온천이다. 탄산음료처럼 톡 쏘는 맛과 보글보글 기포가 생기는 탄산수가 유쾌 상쾌하고 통쾌하다. 지긋지긋한 고혈압이 사라지고, 아토피로 고생하던 사람도 ‘꿀피부’가 된다. 앙성온천에서 되살아난 몸과 마음에 청춘을 고한다.

   ▲ 26도 내외의 탄산수는 열탕과 번갈아 입욕하면 효과가 더욱 좋다
젊고 아름다워지는 탄산 방울의 비밀
산 좋고 물 좋은 곳이 살기도 좋다던가. 오갑산과 보련산, 국망산이 아늑하게 둘러싼 땅에 앙성천과 목미천이 촉촉이 적시며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그 곳, 충주에서도 살기 좋다고 소문난 앙성면이다. 산과 물이 좋으니 복숭아며 옥수수, 사과는 심는 족족 풍년이다. 70~80년 전 충주 시내와 함께 전기가 들어올 만큼 풍족하고 잘살았다는 앙성 사람들은 수많은 자랑거리 중에서도 온천 자랑이 단연 으뜸이다. 앙성온천은 탄산 온천수로 유명하다. 탄산 온천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희귀하다. 앙성 온천수에는 탄산이 무려 2800mg 함유됐다. 탄산 온천에 몸을 담그면 탄산음료를 컵에 부었을 때처럼 온몸에 방울방울 기포가 맺힌다. 더불어 피부가 간질간질하고 조금씩 따끔거리다가, 10분 정도 지나면 점점 붉어지면서 몸에 열이 난다. 탄산가스가 피부를 자극해 혈관이 열리면서 혈류량이 빠르게 증가하기 때문이다. 2009년 연세대학교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이 고혈압 환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 따르면, 탄산수의 이산화탄소가 피부 속으로 빠르게 들어가 모세혈관을 확장해서 혈압을 내려주는 것으로 확인됐다. 일반 담수욕과 비교해 6% 이상 효과가 있다고 한다. 고혈압뿐만 아니다. 가장 눈에 띄는 효과는 빛나는 피부다. 탄산 온천은 모세혈관을 자극해 놀라울 정도로 촉촉하고 윤기 나는 피부를 만들어준다. 친척 집에 왔다가 우연히 가까운 앙성온천에 들러 아픈 무릎을 고치고 갔다는 손님, 갱년기 우울증으로 고생하다가 꾸준히 다녀서 좋아진 단골 등 치료 효과를 본 사람들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단다. 탄산수는 마셔도 좋다. 탄산음료처럼 톡 쏘는 맛이 나는데, 위장 활동이 왕성해져서 소화가 잘된다. 특히 식후에 마시면 복부의 압박감이 제거되며 이뇨 작용이 원활해진다. 인공 탄산수보다 천연 성분이 많아 숙취 해소에도 탁월하다. 탄산욕은 호르몬 분비를 조절하고 자율신경을 자극해 피로 회복과 정신적 안정에도 큰 효험이 있다. 이 외에 탄산 온천은 심장을 튼튼하게 하고, 신경통이나 어깨 결림을 풀어주며, 빈혈과 변비에 효과적이다. 탄산 온천수는 수온이 25~38℃로 비교적 낮다. 열탕이 따로 마련돼 탄산수와 열탕을 오가면 효과가 두 배다. 다만 피부가 약한 사람은 10분 이상 물속에 있지 말고, 짧게 자주 입욕해야 한다.
   ▲ 욕조 옆에 마련된 탄산수 음수대
☞ 옛 절터의 숲길을 거닐다
청룡사지
충주의 세 가지 국보 가운데 하나인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이 자리한 옛 절터다.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이나 충주 고구려비보다 덜 알려졌으나, 옛 절터의 기품은 슬그머니 깨달음을 청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 청룡사지
고려의 미륵대원지와 조선의 청룡사지
충주는 늘 당대의 중원이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까지 시대가 요동치는 격변의 흔적이 곳곳에 어렸다. 충주의 대표적인 두 절터도 마찬가지다. 하늘재 입구 미륵대원지는 고려 건국을 전후해 태동했다. 태조와 혼인을 맺은 충주 유 씨 집안에서 창건했다. 북서쪽에는 청룡사지가 있다. 신하가 왕을 위해 지은 절터가 미륵대원지라면, 청룡사지는 반대로 왕이 신하를 기려 지은 절터다. 태조의 스승이라고도 불리는 보각국사 환암 조혼수가 그 주인공이다. 나옹화상의 법을 이어받은 승려로, 고려 공민왕을 가르칠 만큼 불법에 조예가 깊었다. 그러나 왕의 청에도 불구하고 한곳에 머물지 않고 떠돌았다. 우왕은 1383년에 그를 국사로 책봉하고, 충주 개천사에 머물도록 했다. 해적이 침범하자 광암사로 옮겼다가, 1388년 창왕이 즉위하자 개천사로 돌아왔다. 이듬해 공양왕이 즉위하자 치악산으로 들어갔고, 재차 국사에 봉해져 개천사로 돌아왔다. 그럼에도 마지막은 조선 태조와 뜻을 같이했다. 1391년(공양왕 3) 서운사에서 이성계와 대장경을 봉안할 만큼 관계가 깊었다. 그가 조선왕조를 개창하자 표문을 올려 축하하고 청룡사로 들어갔다. 청룡사는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려지지 않고 전설만 떠돈다. 어느 도승이 소나기를 피하는데,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걸 봤다. 그 중 한 마리가 떨어진 여의주를 따라 내려오다 청계산에서 사라졌다. 이에 용의 꼬리에 해당하는 곳에 청룡사를 지었다. 보각국사는 청룡사 옆에 연희암이라는 암자를 짓고 지내다 1392년(태조 1) 청룡사에서 입적했다. 그가 머물던 시기에 청룡사는 보물 700호 <선림보훈>, 보물 720-2호 <금강반야경소론찬요조현록> 등 불교 서적을 간행했다. 그러나 조선 말기 그 명당이 화근이 돼 사라졌다. 판서 민대룡이 청룡사 부근에 묏자리를 쓰며 사찰에 불을 질렀다. 이때 사찰 지붕에서 내려온 뱀이 사람들을 죽여 이장했다고 전한다. 지금의 청룡사는 보각국사가 머물던 암자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 청룡사지
최고의 탑, 최고의 비, 최고의 부도
현재 청룡사는 소태면 청룡사지길 끝자락에 위치한다. 목계나루에서 북쪽으로 8km 남짓한 거리다. 소태면 주민센터를 지나 오량마을 전에 청룡사 방면으로 난 도로가 보인다. 갈림길에는 느티나무 고목이 마을 표지판과 함께 반긴다. 봄날에는 철쭉이 화사한 단층집과 길 건너 논밭 가운데 노거수 한 그루가 고즈넉함을 더한다. 그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청룡사지로 향한다. 길은 다시 두 갈래로 나뉘는데 오른쪽 오르막이 새로 지은 청룡사 방면이고, 왼쪽이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이 자리한 청룡사지다. 청룡사지는 제법 너른 주차장을 지나 숲길로 접어든다. 짙푸른 산길에서 느릿한 산책이나 삼림욕을 즐겨도 손색이 없다. 청룡사지 보각국사탑까지 짧은 구간이지만, 적당한 간격으로 자리한 유적이 옛 절터의 삭막함을 지워내기에 충분하다. 충주 청룡사 위전비(충북유형문화재 242호)가 첫인사를 건넨다. 1692년(숙종 18) 청룡사 중창에 도움을 준 신도들이 기증한 내용이 담겼다. 옥개에 새긴 용 문양이 청룡사의 전설과 어우러져 이채롭다. 숲길을 조금 더 오르면 충주 청룡사지 석종형승탑(충북문화재자료 54호)이 나온다. 잠깐 숨을 고르며 사찰의 지난 영화를 그린다. 곧이어 숲의 가장 안쪽에 청룡사지가 자랑하는 보각국사의 자취가 드러난다.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국보 197호) 전후로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앞 사자 석등(보물 656호)과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보물 658호)다. 청룡사지 보각국사탑은 보각국사의 부도로, 태조 이성계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세웠다. ‘청룡 사 보각국사 정혜원륭탑’이라고도 불리는데, 보각이라는 시호와 정혜원륭이라는 탑호 역시 그가 내렸다. 옛 청룡사의 북쪽 봉우리에 해당한다. 보각국사탑은 팔각으로 위아래 받침돌에는 연꽃무늬를, 가운데 돌에는 사자와 구름에 휩싸인 용을 조각했다. 탑신에는 신장상을 새겼다. 조선 초기는 석종형승탑처럼 종 모양 부도가 주를 이루던 시절이라 더욱 가치 있다. 탑비는 태조의 명을 받아 권근이 비문을 짓고, 승려 천택이 글씨를 썼다. 석등은 조선 시대 초기 양식을 잘 보여준다. 잠깐 여유를 가지고 보각국사의 깨달음을 흉내 내도 좋겠다. 청룡사지 인근에는 다른 탑과 비도 많다. 대지국사의 공적을 기린 충주 억정사지 대지국사탑비(보물 16호)는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와 비슷한 시기 유물로 비교해볼 만하다. 조선 경종의 태를 묻은 충주 경종 태실(충북유형문화재 6호)이나 통일신라 시대(혹는 고려 시대 추정) 불상인 충주 백운암 철조여래좌상(보물 1527호)도 지척이다. 이들 유적을 돌아보면 새삼 충주에는 탑이나 비처럼 상징성이 강한 유물이 많음을 느낀다. 공교롭게도 충주의 세 가지 국보도 모두 탑과 비다. 통일신라시대 가장 큰 석탑인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한반도의 유일한 고구려비인 충주 고구려비, 고려에서 조선을 넘나드는 불교 조형예술의 표본인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이다. 저마다 다른 시대 유물인 것도 특징이다. 그 안에 다른 고도에 없는 충주의 색이 묻어난다. 한 나라의 수도가 갖지 못한 중원의 문화와 시간을 새긴 다채로운 스펙트럼이다. 그래서 충주는 경주이자 공주이며, 부여이자 개성이며, 서울이다. <NP>
   ▲ 앙성천이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합수머리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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