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한 개인이나 단체 등이 국가나 혹은 어떤 분야에서 권력을 남용하여 모든 일을 단독으로 지배ㆍ처리하는 정치행태를 독재라 하고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을 독재자라고 한다. 서 아프리카의 소국, 토고(Togo)에서도 한 독재자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거나 굶주림에 허덕여야 했던 정쟁이 있었다.


토고 역사

아프리카 서부 기니(灣) 연안의 남북으로 좁고 긴 형태로 자리 잡고 있는 토고 공화국(Republic of Togo), 우리에겐 낯 설은 국가지만 독일 월드컵에서 우리와 한조를 이루면서 친숙해진 나라이다. 다소 생소하긴 하지만 이 나라에도 암울했던 격변기가 있었다. 북쪽으로 부르키나파소, 동쪽은 베냉, 서쪽은 가나와 접하고 있는 토고는 15세기 포르투갈이 침략한 이래 프랑스, 독일 등의 지배를 받아왔다. 영국과 프랑스가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던 토고 해안을 지배하게 된 국가는 독일이었다. 독일은1865년 포르토세구로에 무역기지를 건설하고 1884년 해안부족의 추장과 보호령 조약을 맺었고 그 이듬해 베를린 회의에서 토고 해안에서의 독일의 지배권이 국제적으로 인정되었다. 그 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과 프랑스에 점령되었다가 1919년 7월 영국-프랑스 협정으로 영토는 분할되었다. 다시 말해 서부의 토골란드와 골드코스트는 영국령으로, 동부의 토골란드 지역은 단독으로 행정단위를 이루며 프랑스령으로 나뉘어 진 것이다. 그 후 이곳은 1946년 국제연합(UN)의 신탁통치령이 되었다가 1955년 프랑스령 토고는 토고자치공화국으로, 1957년 영국령 토고는 가나로 각각 분리되었던 것이다. 1958년 4월 UN 감시 하에 독립을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는데 선거에서 독립파가 대승하여, 1960년 4월27일 프랑스령 토골란드 지역이 토고 공화국으로 정식 독립하게 되었다.

분쟁요인

토고 분쟁은 카베야(Kabeya)족 출신 에야데마(Eyadema) 대통령의 독재와 이에 반발한 에웨(Ewe)족 중심의 재야세력과의 갈등에서 비롯된 정쟁이다. 1960년4월 프랑스와 UN으로부터 완전 독립한 토고는 처음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올림피오(Olympio)’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집권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정치는 점차 독재적인 성향을 띄기 시작하면서 1962년 1월 야당을 해체하고 일당 독재체제를 실시하기에 이른다. 1963년 1월 결국 그의 일인독재체제는 군부 구테타에 의해 무너지고 올림피오 대통령은 암살당하고 만다. 대통령이 피살되자 그의 정적이었던 ‘그루니츠키(GrUNitzky)’가 망명지에서 돌아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다. 그루니츠키(GrUNitzky)가 집권하면서 토고는 다시 다당제로 복귀 하였고 이로 인해 정국은 일시적으로 안정을 되찾는 듯 했다. 그러나 1967년 1월 ‘그루니츠크’ 정권은 ‘에야데마(Eyadema)’ 대령이 이끄는 군부에 의해 무너졌고, 무혈쿠데타로 정권을 잡은‘에야데마’는 또다시 일당 독재체제를 구축함에 따라 토고 정국은 다시 불안정한 형국을 띄기 시작했다. 이는 35개의 다 부족으로 구성된 상황에서 에야데마 대통령이 자신의 출신 부족인 카베야족 중심의 독재체제로 돌변하면서부터 이에 반발한 에웨족 중심의 반정부세력들이 중심이 되어 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1986년 9월 반정부 무장 세력들은 수도인 로메를 침공하는 등 에야데마 정부에 대해 지속적인 투쟁을 벌여 왔다.

잡히지 않는 민주화

에야데마는 1967년 집권 이후 1972년, 1979년, 1986년 단독 출마라는 형식적인 방법을 통해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그러나 탈냉전 이후 아프리카에까지 불어 닥친 민주화 열풍에 일당독재로는 정권을 유지하는데 한계를 느끼고 1991년 4월 복수정당제를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국민회의를 개최하고 토고민주동맹과 같은 야당의 합법화를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1991년 6월에 개최된 국민회의에서 의회를 해산하고 고등평의회를 설치해 잠정적 입법부로서 대통령의 임기를 7년에서 5년으로 단축하고 1992년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 후 에야데마의 조정을 받은 잠정내각은 임기연장을 반복하였으며, 정정 불안을 핑계로 의회선거 및 대통령 선거를 무기한 연기하였다. 이로 인해 에야데마의 민주화 추진 계획 발표와 함께 일시적으로 안정되었던 토고정국은 1992년 2월 이후부터 다시 불안정한 양상을 띄기 시작하며 에야데마 대통령의 지지 세력인 카베야족과, 대통령의 퇴진을 압박하는 에웨족간의 대립과 폭동이 재발되었고, 수도인 로메 시가지에서 총격전이 난무하는 등 혼란의 불씨는 가중되어 갔다.

영원한 독재

에야데마 대통령은 날로 심각해져가는 이러한 국내의 정쟁을 무마하고 정국의 경색을 타개하고자 1993년 8월25일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였다. 에야데마는 선거를 통해 재당선됐지만 그러나 선거직후인 1994년 1월부터 자신의 정국 운영에 걸림돌이 되어 온 반정부 세력에 대해 소탕을 개시하였다. 이 사건으로 40여명의 반정부인사들이 사망하는 등 토고의 정국은 꼬리를 물고 혼란 속으로 또다시 빠져들고 만다. 그 다음해인 1994년 2월에 실시된 선거에서 에야데마가 이끄는 ‘토고인민연합(RPT)’은 야당 제2당인 혁신행동위원회(CAR)에 패함으로 제2당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에 기로에선 에야데마 대통령은 고심 끝에 제3당인 ‘토고민주연합(UTD)’의 고죠 당수를 수상에 임명하는 조건으로 연립정권을 형성했다.

토고는 1998년 6월 21일 대통령선거를 실시했다. 31년간에 달하는 장기 정권을 유지해 온 에야데마 대통령, 그는 이 선거에서 또다시 임기 5년의 대통령에 선출된다. 그가 당선되자 독재자에 대한 반정부 세력들의 반발은 일층 강화되었고 또한 부정의 의문이 다분한 대통령 선거의 후유증은 새로운 정치적 갈등의 소지를 제공하고 있었다. 토고 정부는 EU의 선거 감시단이 야당측에게 유리하도록 했다고 비난하는 한편, EU측은 정부쪽에서 선거를 조작 했다고 서로를 비난하였다. 야당측은 아예 선거 결과에 불복, 장외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반정부 세력의 거센 항전에도 불구하고 토고 군부의 장교와 사병 대부분이 에야데마 대통령의 출신 부족인 북부 카베야족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에야데마정권은 좀처럼 흔들리지 않고 재야세력과의 계속된 충돌로 정쟁은 지속되어갔다.

정권은 세습으로 이어지고

서아프리카 소국 토고를 38년동안통치해온 ‘에야데마 그나싱베’ 대통령의 급작스런 죽음은 토고정국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가 죽자 정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에야데마의 군부 충성파들은 즉각 아들 ‘파우레’를 후계자로 내세웠다. 그러나 그의 대통령직 승계가 군사 쿠데타에 의한 것이라고 비난하는 아프리카 주변국들과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내부의 압력에 직면한 파우레는 대통령직을 사임, 여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했다. 2005년 4월24일 치러진 선거에서 아들 ‘파우레 그나싱베(39)’는 새 대통령에 선출된다. 독재자의 아들이 당선됐다는 소식을 접한 성난 야당 지지자들은 울분을 토하며 수도 로메 거리에 쏟아져 나와 불이 붙은 타이어로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통행 차량에 돌을 던지는 등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선거결과에 불복, 대항했다. 이에 정부 보안군은 거리 시위를 벌이는 야당지지자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1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혼란을 겪기도 했다.

분쟁의 영향

분쟁으로 인해 아픔을 겪는 것은 국민들이다. 또한 분쟁의 발발로 인해 굶주림에 허덕이는 많은 난민들이 발생하는 것은 비극일 수밖에 없다. 토고는 1986년 이래수천명이 다치거나 사망했으며 1993년엔 당시 정부군과 재야세력간의 충돌로 약30만명의 난민이 발생하였다. 그들은 조국을 떠나 이웃나라인 가나와 베냉으로 피난하는 등 토고 역사상 최초, 최대 규모의 난민들이 죽음에 직면했다. 그들은 조국을 원망하며 이국땅을 방황 하는 한편, 이들 난민은 1994년 UNHCR(국제연합 난민사무소)의 도움으로 88,000명이 본국으로 귀환하기도 했다. 지금의 토고정국은 진정국면에 접어들어 있으나 민주적인 개혁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지 않는 한 무력분쟁뿐만 아니라, 정치적 상호간의 갈등으로 인한 정쟁역시 언제든 재발될 수 있는 여지가 다분하다.NP

1935년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에야데마는 1967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뒤 72년 국민투표를 통해 권좌에 올랐다. 그는 이어 수차례에 걸친 쿠데타 기도에도 불구, 79년과 86년 잇따라 단독 후보로 출마해 대통령으로 재 선출되면서 장기 집권을 이어갔다. 특히 90년대 들어 수백명이 목숨을 잃는 등 토고에 사회적, 정치적 불안이 극에 달한 상황 아래서 93년과 98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승리의 축배를 들었다. 에야데마 대통령의 정적들과 인권단체들은 여러 차례 부패와 인권탄압 등을 이유로 그의 하야를 촉구했다. 유럽연합(EU)은 92년10월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고 있다는 이유로 토고에 대한 경제지원을 중단했다. 이에 에야데마 대통령은 2003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예정이었으나 다시 헌법을 급조해 야당의 선거부정 비난에도 불구, 그해 대통령에 재선됐다. 그는 재선 직후 민족통합 정부를 설립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처음에는 화해노력의 일환으로 1963년 살해된 정적 실바누스 올림포의 아들을 내각에 포함시키기도 했으나 미봉책에 그치고 말았다. 지난 38년 동안 철권통치를 휘둘러온 검은 독재자‘에야데마 그나싱베(69)’,그는 2005년2월5일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사망, 또 한명의 독재자 는 영원히 역사 속으로 묻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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