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부여군 1부

이른 무더위로 지치기 쉬운 6월, 더위를 피해 어디로든 떠나고 싶다. 백제의 문화와 역사가 펼쳐져 있는 부여에서 자연과 더불어 왕도(王都)를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백제의 숨결을 마주하는 충청남도 부여군으로 ‘역사여행’을 떠날까 한다.

 
☞ 부여 여행의 대전제 능산리 고분군(백제왕릉원)
저 여린 듯 부드러운 곡선 넘치는 감정이입으로 그저 ‘백제의 곡선’이라 명하고 싶다. 아무것 하나 남지 않은 옛 절터에서 찬란했다는 백제의 문화와 심오한 백제불교의 미학을 느끼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부여의 진산 부소산은 사비 백제의 중심부임이 분명하지만, 천년도 훨씬 더 지난 오늘날 확인할 수 있는 백제의 흔적이란 산성 둔덕과 집터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여에서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느끼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 능산리 고분군(백제왕릉원)
백제의 왕도, 부여를 만나다
부여에 들어서 섣불리 부소산이나 절터로 서툰 발걸음을 뗐다간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온몸으로 느껴보리라’는 당찬 의지와 기대가 금세 식어버릴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부여에 들자마자 부여박물관으로 직행하거나 부여 답사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정림사지로 달려갈 수도 없는 노릇. 영화가 궁금하다고 영화의 절정부터 감상하는 것이나, 영화의 편집필름만을 보는 것과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백제의 찬란했던 역사와 문화를 마주하기 위해 가장 먼저 들러야 할 곳은 바로 ‘능산리 고분군’이다. 커다란 왕의 무덤 앞에서 이름 모를 왕을 먼저 알현하고, 번지 없는 왕릉으로 불어드는 바람을 맞아야 한다. 그래야 백마강 유유히 흐르는 이곳 부여가 ‘123년 간 사비 백제의 절정을 이루었던 백제의 왕도’였다는 부여 여행의 대전제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능산리 고분군(사적 제14호)은 백제왕릉으로 추정하는 고분군이다. 이는 옛 문헌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관아동십리허유왕릉(官衙東十里許有王陵) 관아 동쪽 10리에 왕릉이 있다” - 공주읍지 <구 공산지> 또한 이곳의 이름은 능뫼, 즉 능산(陵山)이다. 언어는 쉽사리 소멸되지 않기 때문에 대상의 실체를 규정하기에 가장 좋은 길잡이다.

백제의 왕들이 고이 잠들어 있는 곳
왕릉치고는 소박한 입구에서 좌측으로 길을 잡는다. 입구에서 보는 시야는 그다지 시원치 않다. 남쪽을 바라보고 자리 잡은 왕릉원의 서남쪽 입구에서 북쪽으로 들어서는 것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능을 품고 있는 능산의 서쪽 줄기가 시야를 가로 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시 후 펼쳐질 멋진 반전을 기대해도 좋다. 입구를 지나 왼편으로 바로 ‘백제고분 모형전시관’을 만난다. 고분 안에 들어갈 수 없으니 왕릉원을 답사하기 전, 들러서 공부하고 가야한다. 그보다 먼저, 전시관에 들어서기 전에 반드시 전시관 맞은 편 안내판을 꼼꼼히 읽고 주변 지형을 유심히 살펴야 한다. 전시관 맞은편 발굴현장이 바로 백제의 예술과 사상, 문화의 정수(精髓)라 할 수 있는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가 출토된 능산리 절터이고, 절터 건너 편 나지막한 야산처럼 보이는 것이 부여를 둘러쌌던 부여나성(사적 제58호)이다. 이곳의 지정학적 위치를 구조적으로 종합해 보면, 왕도 부여를 둘러쌌던 부여나성의 동쪽 밖에 백제의 왕들이 잠들어 있는 왕릉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이웃한 곳에 선왕의 영혼을 기리는 절터가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 능산리 고분군(백제왕릉원)
여린 듯 부드러운 백제의 곡선
전시관에서 관람객의 시선을 한눈에 잡는 것은 역시 ‘백제금동대향로’이다. 전시되어 있는 것은 복제품이며, 백제대향로 진품에서 느끼는 감동과 기쁨은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이 전시관에서는 벽면을 따라 전시된 백제 왕릉의 모형과 각종 자료를 꼼꼼히 살펴보길 권한다. 해설사의 설명은 능산리 고분군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이곳의 7기 고분은 모두 입구에 진입굴이 있는 굴식 돌방무덤(석실분ㆍ石室墳)이라는 이야기, 동ㆍ서편에 9기의 고분이 더 있다는 이야기, 능산리 절터의 목탑 심초석에서 발견된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의 명문 이야기, 동하총(東下塚 동쪽 아래쪽 무덤, 1호분)의 사신도 이야기 등 백제 왕릉과 관련된 보다 전문적이고 재미난 이야기들을 일목요연하게 들을 수 있다. 전시관을 나오면, 동하총(1호분)을 축소 복원한 고분 모형이 있다. 내부에 조명을 쏘아 동하총 벽화의 신비로운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실제 동하총은 보존을 위해 개방하고 있지 않으니, 이곳에서 사신도를 꼭 보아야 한다. 의자왕의 설단(일종의 가묘)을 지나 능원에 오르자 예고됐던 반전과 같은 풍경을 만난다. 좌측 북쪽 언덕에 봉긋봉긋 봉분이 솟아 있다. 저 여린 듯 부드러운 곡선은 경주 왕릉에서 본 당찬 곡선과 형식 안에 놓인 조선 왕릉의 봉분과 분명 다르다. 분명 어디에선가 스친 곡선이다. 백제의 항아리에서, 아니면 백제의 기와에서, 전돌이나 박물관의 석조에서 본 곡선일 수도 있다. 사실 저 완만하면서도 봉긋한 여성의 선은 봉분을 새로 단장하며 후대에 만들어진 곡선이겠지만, 넘치는 감정이 입으로 그 선을 명명하라면, 그저 ‘백제의 곡선’이라 명하고 싶다.

명패 없는 능들의 조용한 외침
봉분 아래에 난 길을 여유롭게 걷는다. 각 봉분을 지날 때, 백제의 왕들과 눈인사라도 나눠야 하는데, 안타까운 것은 저 고분이 누구의 무덤인지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단지 아랫줄 가운데 중하총(中下塚, 2호분)을 성왕의 능으로, 그 오른쪽 동하총(東下塚, 1호분)을 그의 아들, 위덕왕(威德王-창왕昌王)의 능으로 학자들은 추정할 뿐이다. 도굴이라는 무례하고 난폭한 행위로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방법이 사라지고 말았다. 버르장머리 없는 꼬챙이 질 몇 번과 새벽녘 두어 시간의 삽질로 천년을 지켜온 왕의 처소가 누구의 처소인지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후손들은 무덤 안 몇 개 남지 않은 유물 몇 점으로 그저 무덤의 주인을 어림잡을 수밖에 없다. 돌방의 네 벽면에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는 고분군의 동단 ‘동하총(1호분)’에 이른 다. 동, 서, 남, 북면에 각각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그림을 그려 넣었다. 이 사신들이 무덤을 지켜 주리라 그들은 믿었다. 석실 천정에는 연꽃과 구름무늬(연화운문)를 그렸다. 도교와 불교 가 융합된 백제의 정신문화와 벽화문화가 발달했던 고구려와 백제가 교류했음을 알 수 있다. 도교와 불교의 조화로운 융화는 백제금동대향로에서 그 절정을 이룬 것이다.

☞ 한적하고 유아한 매력, 부소산
편안하되 격이 있는, 또한 사연이 있는, 부소산은 그런 전학생 같은 산이다. 평온한 부여의 그 어느 곳 보다 호젓한 부소산. 그 곳에서 고요한 산책은 백제를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다. 무너진 성(城)을 다시 쌓고, 초석 위에 건물을 세우고, 그 안에서 1,400년 전 백제인을 다시 만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다소 어렵게 느껴진다면 어느 시조시인의 말처럼 그저 ‘이 숲속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며 부소산의 한적하고 유아한 맛’을 느끼는 것도 부소산을 즐기는 훌륭한 감상법이 될 것이다.

   ▲ 부소산성 백화루
편안하되 격이 있는 부여의 진산, 부소산
부소산(扶蘇山)은 부여의 배경이자, 사비 백제의 최후 보루, 백제왕실의 후원(後園) 역할을 했던 곳으로 서울로 치자면, 경복궁의 백악산과 창덕궁의 후원에 빗댈 수 있을 것이다. 입구를 지나자마자, 큼지막한 박석과 만만치 않은 비탈이 관람객을 처음 맞는다. 부소산은 해발 106m의 낮은 산이지만 그리 만만하지 않을 거라 경고라도 하는 듯하다. ‘어슬렁거리며 이 산의 한적하고 유아한 맛을 느끼겠다’는 가람 이병기(1891~1968) 선생도「낙화암 가는 길」에서 부소산을 두고 ‘멀리서 바라보기엔 조그마한 단조한 산인 듯하더니, 이제 올라 와 보니 적으나 복잡하고 아득한 산’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샌들 신은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하이힐 신은 처자가 연인의 팔짱을 끼고 가는 걸 보니, 장비까지 챙겨야 하는 까칠한 산은 아닌가 보다. 편안하되 격이 있는, 또한 사연이 있는, 부소산은 그런 전학생 같은 산이다. 거친 박석 위로 걸음을 뗀지 5분이나 됐을까. 산 초입부터 번듯한 사당을 만난다. 백제의 세 충신 성충, 흥수, 계백을 기리는 삼충사(三忠祠)다. 삼충사의 터는 처음부터 삼충사의 것은 아니었다. 이 자리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신사(神社) ‘부여신궁’을 조성했던 터다. 공사는 대단하여 1937 년 7월 31일 일본 천황이 직접 부여신궁의 공사를 발표했다고 한다. 일본은 아마도 ‘조선과 일본은 본래 하나이기에 조선이 받는 착취는 정당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고대 일본에 선진문화를 전파해준 백제의 왕도 부여는 이러한 내선일체의 논리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그것을 위한 신사를 짓기에 매우 적절한 곳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패망으로 부여신궁을 완성하지 못했고, 1957년 그 자리에 삼충사를 세웠다.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모르나, 지혜로운 용도 변경이다. 그 반전이 갖는 상징성 또한 크고 깊다. 다시 걷는다. 오르막이 이어져 숨이 턱 밑에 왔을 즈음, 영일루(迎日樓)를 만난다. 말 그대로 ‘해를 맞는 누각’이다. 백제의 왕이 이곳에 올라 멀리 계룡산 연천봉으로 떠오르는 해를 맞았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지금의 누각은 1964년 홍산관아의 집홍루를 옮겨온 것이다. 영일루를 지나니 군창지와 수혈병영지가 있다. 산 정상 부근 비교적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는 이곳은 부소산성 안쪽 지역이다. 군창지와 병영지, 산성(山城) 모두 군사와 관련한 유적지다. 부여 방어의 최후 보루로서 부소산의 중요성을 가늠해볼 수 있다. 부소산성은 산 정상 7~8부 능선에 머리띠(테뫼)처럼 산성을 두른 테뫼식 산성과 골짜기를 포함한 포곡식(包谷式) 산성을 합쳐놓은 복합식 산성이다.

아련히 느껴지는 백제의 흔적
수혈병영지를 지나 군데군데 부소산성의 성벽을 확인하며 반월루(半月樓)에 오른다. 가까이, 또 멀리 백마강과 함께 부여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반월루는 1972년 새로 지은 2층 누각이지만, 누각에 올라보면 백제 때에도 분명 누각이나 망루가 있었음을 직감할 수 있다. 좌측으로 정림사지가 보이고, 남으로 곧게 뻗은 대로가 시원하다. 우측 멀리 백마강이 흐르고, 강 건너에는 부산(浮山)이 눌러 앉았다. 부산 하단에 대재각도 보인다. 반월루는 부여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니 만큼 관광지도를 펼쳐놓고 동행인과 함께 지도를 손으로 집어가며 부여의 명소 찾기 놀이를 해도 좋다. 훌륭한 백제 공부가 될 것이다. 반월루 아래 옛 부여박물관 주변은 사비왕궁터로 추정하는 관북리 유적(사적 제428호)이다. 이곳에서 ‘수부’(首府: 으뜸이 되는 관청)가 새겨진 기와와 ‘중부’(中部, 백제 다섯 행정구역 상, 중, 하, 정, 후부 중 하나)라고 쓴 목간(일종의 나무 문서) 등 사비백제의 행정체계를 알 수 있는 유물이 발굴됐다. 연못과 배수로, 저장시설 및 공방시설, 도로망 등 왕궁과 수도의 핵심시설도 발견돼 현재 발굴이 한참 진행 중이며 백제 왕궁의 모습은 백제문화단지에 복원, 재현해 놓았다. 부소산의 가장 높은 곳, 사자루로 바람이 든다. 절벽 아래에 백마강은 유유히 흐른다. 원래 이곳에는 송월대(送月臺)가 있었다. ‘달을 보낸다’는 뜻이다. 앞서 영일루(迎日樓)에서는 해를 맞았는데, 이곳에서는 달을 보낸다고 전해진다.

   ▲ 부소산성
삶에 스며든 전설과 함께
- 무심히 흐르는 백마강
사자루에서 내려와 낙화암으로 가는 길, 시계(視界)를 위해 소나무의 잔가지들을 쳐 놓았다. 몇 해 전만해도 길이 덥수룩하여 답답했는데, 가지를 쳐놓으니 시원시원하고 나무 사이로 백마강의 물결도 힐끔힐끔 볼 수 있다. 그 수고 덕에 낙화암 가는 길이 훨씬 산뜻해졌다. 부소산의 절정, 낙화암 정상에 정자 하나 서있다. 해넘이를 준비하는 백마강이 아름답다. 나무 계단을 백화정 아래 낙화암 끝단까지 설치해 놓았다. 절벽 바로 위에서 백마강을 내려다 볼 수 있다. 그 때 그녀들의 시선으로 백마강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주변 바위는 유난히 거칠다. 천년 넘는 세월에 짚신과 고무신, 때론 운동화와 등산화에 바위 끝은 닳고 닳아 이제 위협적이지 않지만, 마지막 그날은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가죽신 벗겨지고 버선 찢어진지도 모른 채 백제 여인들은 허위허위 이곳까지 쫓겨 왔을 것이다. 희고 여린 발에 검은 피와 붉은 멍이 졌다. 더불어 이곳에 서서 무심히 흐르는 백마강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봤을 것이다. 이제 더 갈 곳이 없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거나, 아니면 낙화암에서 떨어져야 한다. 그러지 못하니 고란사로 내려가 약수 한 모금 마시고 유람선을 타고 구드래로 가려한다. 고란사는 물과 풀이 유명한 곳이다. 절 뒤편에 한 잔 마시면 3년 젊어진다는 전설의 약수가 있다. 한 노인이 물을 길러 갔다가 이 ‘고란수’를 너무 많이 마셔서 아기로 변했다는 신기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약수터 유리함 속에는 ‘고란초’라는 풀이 있는데, 백제 임금께 고란수를 바칠 때 이를 증명하기 위해 고란수 주변에서만 자란다는 고란초를 뜯어 물에 띄웠다고 한다. 기대와 염원은 전설을 낳고, 전설은 죽지 않고 이어져 삶에 스며든다.
   ▲ 백마강
☞ 옛 절터를 걷다 정림사지
야무지고 당당한 월대 위에 화려하고 우아한 금당이 있었을 것이다. 660년 그날 이후 정림사는 어둠 속에 있었다. 그의 몸에 새겨진 상처를 보고 사람들은 그를 평제탑(平濟塔)이라 동정했다. 제 이름을 찾은 지 70년, 정림사는 다시 아침을 기다리고 있다.
   ▲ 정림사지 전경
마음으로 복원해 보는 정림사
높은 빌딩숲에 둘러싸여 있으면 폭 안긴 느낌이라도 들겠지만, 고만고만한 부여 건물 사이에서 정림사는 혼자만 넓은 독방을 쓰고 있다. 왠지 주변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듯한 모습이다. 마치 미운 오리새끼처럼. 그러나 오리가 아닌 백조임을 아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는다. 정림사지 박물관 옆 야외공연장이나 정원 계단에 앉아 미리 공부 한 정림사의 가람구조를 머리에 넣고 그 설계도를 바탕으로 건물을 세워 본다. 친절하게도 연못은 복원되어 있다. 머릿속 복원은 중문에서 시작된다. 중문을 세우고 석탑 뒤에 금당을 짓는다. 강당은 복원되어 있으니 회랑으로 이들을 두른다. 회랑을 둘렀더니 정림사탑 꼭대기만 보인다. 그렇다면 잘 복원한 것이다. 이제야 절터 동쪽 담을 남쪽으로 돌아 중문께로 간다.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탑을 보고, 허리를 약간 굽혀서도 탑을 본다. 탑 뒤 강당 건물의 용마루가 조금 올랐다가 내려가는 변화 외에 큰 변화는 없다. 그러나 이는 매우 큰 심리적 앵글의 변화임을 느낀다. 불자라면, 탑을 경배의 대상으로 느끼는 자라면, 그 변화는 더욱 더 크게 다가올 것이다. 탑으로 조금 더 다가가 중문과 탑 사이 중간 지점으로 간다. 바라보는 위치를 겨우 5m정도 옮겼을 뿐이지만, 탑은 더욱 더 큰 존재로 다가온다. 당시나 지금이나 경배자의 거리는 대략 이 정도였을 것이다.
   ▲ 정림사지
세월의 흔적 고스란히 담긴 석불좌상
불상이 있기에 금당터로 생각할 수 있으나, 백제 때의 가람배치로 볼 때 이곳은 강당터이다. 고려 때 강당터에 석불을 모시고 금당으로 사용한 것이라고 학자들은 설명한다. 뒤집힌 연꽃(覆蓮, 복련)과 위를 바라보는 연꽃(仰蓮, 앙련) 사이에 팔각기둥을 세워 좌대를 만들고, 그 위에 두루뭉술한 석불 하나를 모셨다. 한눈에 보아도 모진 세월의 풍상과 그 고난의 내력을 짐작할 만하다. 저 마모와 상처의 미학은 석공의 예술혼이 빚어낸 것이 아니다. 숱한 전란과 화재, 햇빛과 이슬, 비와 바람 등 천년의 세월이 깎은 곡선이다. 부처님께서 턱받이에 구름 모자를 쓰셨다. 머리와 관은 후대에 만들어 얹은 것이다. 그래서인지 관과 목, 불신의 비례와 조화가 영 어색하다. 고려 때 만든 석불로 그들의 과감한 변형과 창의 적인 발상이 인상적이다. 연꽃좌대 곳곳과 가부좌를 튼 석불 오른쪽 무릎도 깨져나가 버렸다. 희소성과 독특함으로 보자면 매우 귀한 석불이다. 모든 가치가 미추에서 나오지 않음을 깨닫는다. 모진 역사를 견딘 그 인내가 진정 귀한 석불이다.

☞ 선사부터 고려까지 시대를 넘다
송국리 유적 산직리 지석묘 장하리 3층석탑

마치 무령왕릉의 입구를 열었을 때 느꼈던 경이와 흥분이 재연된 듯 가슴 뿌듯함을 느껴진다. 시선 닿는 곳까지 펼쳐진 초록의 들이 있고 거기서 나오는 풍요로움이 있는 곳, 시원한 바람 한 줄기, 욕심만큼 쉬어갈 수 있는 곳, 부여의 송국리와 장하리는 바로 그런 바람과 햇빛, 돌과 탑이 있는 곳이다.

청동기시대의 새로운 발견 송국리 유적 자료관
초촌면 송국리 일대는 20~30m의 낮은 구릉과 넓은 대지로 이뤄진 평야지대다. 마을 서쪽과 동쪽에 금강 지류인 연화천과 우교천이 V자 형태로 흐르다 금강으로 합류하고, 주변엔 기름진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다. 그 옛날 청동기시대부터 송국리 이곳엔 사람들이 정착해 살았다. 송국리 유적지는 우리나라 청동기 역사를 다시 쓰게 했던 곳이다. 한 보고서는 1974년 송국리 석관묘 첫 발굴 당시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마치 무령왕릉의 입구를 열었을 때 느꼈던 경이와 흥분이 재연된 듯 가슴 뿌듯함을 느꼈다”, 이곳 송국리가 이토록 중요한 것은 전기와 후기로 나뉘었던 우리나라 청동기시대가 송국리로 인해 ‘중기’라는 한 마디가 생겼기 때문이다. 전, 후기와 분명 다른 송국리만의 스타일이 발견된 것이다. 실제로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을 온전한 상태로 발굴 현장에서 직접 수습한 것은 1974년 송국리 석관묘 발굴이 처음이었다. 또한 비파형청동검과 함께 청동도끼 거푸집(銅斧鎔范, 동부용범)도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한반도 남쪽지역에서 청동기를 직접 제작했다’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 완벽한 유물로 입증된 것이다. 그 중요성을 고려, 송국리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모셔져 있다. 송국리 유적지의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주거지와 함께 방어시설과 분묘시설이 세트로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중기 청동기시대의 생활상을 보다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주거지 외곽을 둘렀던 나무울타리 ‘목책(木柵)’과 방어 웅덩이인 ‘환호(環濠)’, 그리고 V자 단면의 환호 벽에 꽂았던 ‘녹채(鹿砦, 사슴뿔 모양의 방어시설)’ 등은 누구로부터 무엇을 지키겠다는 공동체의 의지였고, 이는 그 공동체에 지켜낼 무엇, 즉 잉여생산물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방어시설을 만드는데 노동력을 투입했다는 것은 인력 동원이 가능했던 권력이 있었다는 방증이다. 즉 계층의 분화가 발생했다는 얘기고, 그것은 석관묘와 그 속의 여러 부장품, 청동검에서도 거듭 증명된다. 또한 주거지에서 발견된 탄화미(불탄 쌀)는 벼농사의 증거이다. 이러한 송국리 문화는 영남지역에서도 발견되며, 일본 야요이 문화 형성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이쯤 되면 부여 촌구석의 이 나지막한 야산이 선사시대의 문화유산이 가득 매장된 금광 정도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낀다는 누구의 명언이 참이 되는 순간이다. 고무적인 것은 1974년 첫 발굴 이후 지금까지 12차에 걸쳐 발굴을 진행했지만, 앞으로 더 많은 조사가 남았다는 것이다. 동시에 또한 아쉬운 점은 송국리 전체 유적지 27만 평 중 이제 2천 평 정도의 토지를 매입해 발굴조사를 마쳤다는 점이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어느 발굴현장도 마찬가지인데, 사실 유적지 현장에는 볼 게 없다. 유물이야 박물관에 가 있거나 보존처리 중이고, 현장의 유적이야 복원 전이라면 전문가가 아닌 이상 그 전체적인 윤곽을 명확하게 파악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사유물관과 동영상 상영관에 꼭 들러서 자료를 꼼꼼히 살피고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현장에 들러 배운 것을 확인하고 주변 입지 조건을 꼼꼼히 살펴야 한다. 그러면 그보다 더 좋은 선사시대 공부는 없을 것이다.

   ▲ 송국리출토유물 청동검과 토기
고요히 잠든 시대의 유물 산직리 지석묘
송국리 유적지를 봤으면 가까이 있는 산직리 지석묘도 함께 봐야 한다. 2km가 채 안 되는 거리로 보아 둘 사이에 분명 무슨 연관이 있어 보이나, 그 명확한 관계나 연대 차이를 알 수 없다. 학자들은 이 고인돌이 송국리 지배층의 무덤일거라 어렴풋이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학자들은 송국리의 묘제를 취락지에서 발견된 ‘석관묘, 토광묘, 옹관묘’로 규정하면서 지석묘는 그 범주에 넣지 않고 있다. 그리고 송국리 묘제의 특징을 ‘석관묘와 고인돌이 함께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이를 향후 연구과제로 삼고 있다. 그런데 분명 송국리의 석관묘와 산직리의 고인돌이 가까이 있지 않은가. 그 둘을 다른 곳으로 보는 건가? 같은 영역 안에 밀집해 있지 않다는 건가. 선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산직리 고인돌은 그 모양부터 남다르다. 4만 여 기나 되는 우리나라의 고인돌 중 아마 저렇게 삐딱한 자세를 가진 고인돌은 그리 흔치 않으리라. 괴임돌에 의지한 채 기울어져 있는 고인돌. 전문지식이 없는 자는 조심스럽다. 원래 기울어져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이후에 훼손된 것인지 고인돌 주위를 돌며 돌을 천천히 살핀다. 고인돌 등판에 난 작은 구멍을 발견한다. 구멍은 일렬로 규칙적이며, 그 크기는 나무쐐기 두께만하다. 일제 강점기 때 이 돌을 깨서 근처 연화천의 제방을 쌓고, 돌다리도 놓았다고 설명한다. 농사와 통행을 위해 제방과 다리는 분명 필요했을 것이고, 먼 곳에서 돌을 공급하기 힘드니, 가까이 있는 이 돌을 쪼개서 사용하는 게 합리적이었을까. 아니면 예부터 마을을 지키며 기우제를 지내는 등 제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던 돌이니 보존했던 것이 옳았을까. 이후 발굴 조사를 실시했으나 이미 도굴 및 훼손된 상태이고, 망치돌과 숫돌 외에 특별한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고 제사의 흔적만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산직리 고인돌은 조용하다. 나무 그늘도 널찍하고, 너른 평야를 한눈에 담을 수 있어 답사 중 잠시 쉬어가기에 그만이다. 말끝이 유난히 부드러운 이곳의 옛 사람들도 여기에 앉아 고무신 바닥에 묻은 흙도 털어내고, 풀매고 밭 일구던 호미와 쟁기의 흙도 탕탕 털어내며 쉬어 갔으리라. 예전에는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나 지금은 지내지 않고, 1년에 한번 씩 송국리 풍년기원제를 지내고 있다.
   ▲ 낙화암(돛단배)
백제의 여운 장하리 3층석탑
차에 올라 장하리로 향한다. 송국리에서 장하리로 달릴 때에는 거리에 따라 연도도 함께 올려야한다. 그래야 송국리와 장하리 사이의 엄청난 연대적 거리를 부드럽게 이을 수 있다. 장하리 3층석탑은 선사시대에서 건너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를 지나 고려 초기(혹은 중기) 때의 문화유산이다. 작은 마을 깊숙한 곳에 늘씬한 석탑 하나가 놓여있다. 마을은 예전부터 탑리 또는 탑골이라 불렸고, 탑이 있는 이곳은 옛날에 한산사(寒山寺)가 있었다고 전해 온다.노부부의 조촐한 농가 옆, 도톰히 오른 둔덕 위에 돌탑은 반듯하게 서 있다. 멀리서도 그랬는데, 가까이 봐도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이다. 정림사지 5층석탑이다. 그런데 정림사지 5층석탑보다 더욱 단순해졌다. 정림사지 5층석탑이 목탑을 계승하면서도 그 외관을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이를 생략하고 형상화했던 것처럼, 장하리돌탑 역시 정림사탑의 정수(精髓)만을 뽑아 그것을 단순화하고 또한 축소하였다. 허식과 허례는 없다. 간편히 차려입고 산책을 나선 늘씬한 여인처럼 탑은 세련되었으며, 군더더기는 없다. 탑을 보다 자세히 뜯어본다. 1층의 기둥석은 올라갈수록 약간 좁아져 상승감을 더한다. 각 층의 얇고 평평한 지붕돌은 언뜻 선비의 갓이나 챙이 넓은 숙녀의 왕골모자를 연상하게 한다. 지붕돌 앞뒤에 주렴을 단다면, 흡사 면류관 같은 느낌도 들 것이다. 하늘로 살짝 올라간 지붕돌의 마지막 반전은 역시 정림사의 그것과 닮았다. 3층 몸돌에서 특이한 점은 기둥과 면석을 명확하게 구분하여 설치한 1, 2층과 달리 기둥돌의 표현을 위에서 아래까지 다 표현하지 않고 반만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3층 몸돌의 각 면은 ‘요凹자’ 모양을 취하고 있다. 일종의 불균형이다. 또한 긴장이다. 이를 석공의 기발하고 창의적인 시도로 볼 수도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전형미에서 벗어난 불완전성으로 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탑을 보는 감상 포인트 하나가 더 생겼다는 점 아니겠는가. 1931년과 1962년 해체 복원 시 1층, 2층 몸돌에서 사리구와 상아불상, 목제소탑 등이 발견되었으며 유물은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보물을 찾아 안목을 높이는 여행 국립
부여박물관 ‘백제의 미소’ 밋밋하지만 담백한, 상상의 여지를 남기는 명명이다. 4개의 국보와 17개의 보물, 21군데의 사적, 지방자치단체가 아닌 중앙 정부에서 지정하고 관리하는 부여의 문화재 숫자이다. 나라가 직접 나서서 챙기는 보물이라는 의미다. 부여의 국보와 보물 스무 개 중 절반이 국립부여박물관에 모여 있다. 귀한 것들을 만나고, 보고, 누릴 수 있는 국립부여박물관은 부여 여행을 더욱 풍부하게 채워준다.

   ▲ 부소산성 낙화암 가는길
백제예술의 절정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
제2전시실 백제금동대향로를 만나는 순간, 절정을 너무 일찍 만나는 것이 아닌가하는 아쉬움마저 든다. 미술사가들이 왜 그렇게 화려한 찬사와 수사, 격찬을 쏟아내지는 바로 이해가 된다. 1993년 12월 12일 능산리 고분군 주변 사찰인 ‘능사’ 서쪽 공방지 진흙 속에서 마치 누가 꼭꼭 숨겨 놓은 것 같은 대향로를 발견했다. 능사가 만약 백제 최후의 날 나당연합군에 의해 파괴되었다면, 저 행위는 그 위기의 순간에 누군가가 대향로를 보호하기 위해 행한 궁박한 처사였는지도 모르겠다. 발굴 그 순간만큼은 금세기 한국발굴사상 가장 위대한 발굴이라는 과함도 허용됐을 것이다. 승천하는 용 한 마리가 받침이 되어 연꽃 모양의 향로 몸체를 떠받치고 있고, 봉래산을 표현한 뚜껑 최정상에는 봉황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진정 백제 예술과 공예술의 최고봉이자 완벽한 구성과 조화의 결정체이다. ‘천상과 지상의 공존’, ‘음과 양의 조화’, ‘도교와 불교의 융화’, ‘신선과 사람-동물의 공생’·금동대향로는 이러한 백제의 조화와 포용의 철학과 미학을 완벽하게 담아냈다. 그러나 절대 투박하거나 기계적으로 담지 않고 예술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창의적이고 세련되게 표현해 냈다. 백제대향로는 중국 한나라에서 유행한 박산향료와 비교되기도 하지만 조각수법이 훨씬 입체적이며 사실적의 그 완성도와 구성미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월등한 걸작이다. 대향로 전시실 앞, 동영상으로 백제대향로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를 충분히 숙지한 후, 대향로를 천천히 돌아가면서 관람하고 의자에 앉아 차분하게 백제예술의 최고봉이자 정수인 금동대향로를 감상해보자. 그 하나만으로 부여 여행이 아깝지 않을 것이다.

백제의 미소 금동관세음보살입상(국보 제293호)
제 3전시실 중앙, 조그마한 금동상 하나가 무심한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도톰한 받침대 위에 늘씬한 여인이 서 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귀티가 흐르는 것이 마치 권위 있는 트로피를 연상하게 한다. 도톰한 받침대는 연꽃을 뒤집어 놓은 복련대좌(覆蓮臺座)이고, 늘씬한 여인은 관세음보살이다. 백제의 불상은 인간적인 친근함을 물론, 조형적인 아름다움도 최고의 수준이다. 서산마애불을 비롯해 금동관세음보살상 등 백제불상의 이 푸근하고 온화한 미소를 누군가가 ‘백제의 미소’라 명했다. 밋밋하지만 담백한, 상상의 여지를 남기는 명명이다. 보살상을 본다. 머리에 관을 쓰고 있으며 손에는 보주(寶珠, 석탑이나 불상을 장식하는 구슬)를 쥐고 있다. 관에는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다. 자유로우면서도 자연스러운 옷자락 선과 우아한 자태, 부드러운 미소에서 백제불상의 완숙함을 느낄 수 있다. 길고 가는 몸 양 옆에 하늘거니는 옷자락이 표현되어 있어 가냘픈 몸에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왼손은 내려서 옷자락을 잡고 있다. 몸의 앞뒷면에는 구슬을 꿰어 만든 장신구 영락(瓔珞)을 하고 있다. 가냘픈 몸에 비해 풍만하고 둥근 얼굴에 밝고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다. 금동관세음보살입상은 7세기 전반기의 불상으로 1907년 부여 규암면에서 발견됐다.

백제사 연구의 새로운 지표
-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 제 288호)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은백제 때 사리를 보관하는 용기로, 능산리 절터의 중앙부에 자리한 목탑 아래에서 비스듬히 놓인 채 발견됐다. 높이 60㎝, 너비 50㎝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발견 당시 내부의 사리장치는 이미 남아있지 않았다. 내부에 사리 장치를 놓고 문을 설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리감 표면에는 ‘567년(위덕왕 13), 성왕의 따님이자 창왕의 여동생인 공주가 만들어 사리와 함께 봉안하였다’는 명문(銘文)이 무령왕릉 지석(誌石)과 비슷한 남북조시대의 서체로 새겨져 있다. 이 사리감은 사리를 봉안한 연대와 공양자가 분명하고, 백제 절터로서는 절의 창건연대가 당시의 유물에 의해 최초로 밝혀진 작품이다 백제 역사 연구에 새로운 자료로서 백제와 중국과의 문화교류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백제의 섬세한 예술 감각 8무늬 벽돌(보물 제343호)
제3전시실을 나가기 전, 바닥에 있어야할 보도블록이 벽에 전시되어 화려한 조명을 받고 있다. 여덟 가지 무늬가 있는 벽돌로 바닥에 깔았던 전돌들이다. 그 크기도 지금의 보도블록과 비슷하다. 이런 것을 바닥에 깔고 살았다고 하니 백제인의 건축 수준과 감각을 짐작할 만하다. 양각의 디테일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걸보니, 아마 사람이 그렇게 많이 밟고 다닌 것 같지는 않다. 누구나 다녔던 곳에 깔린 것은 아닌 듯하다. 설마 저자에까지 저런 전돌을 깔지는 않았을 것이다. 1937년 부여 규암면 외리에서 한 농부의 제보로 발굴이 되었고, 무늬벽돌과 함께 와당(막새), 치미, 토기, 도기, 철기 등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발굴한 장소는 절터였을 것이다. 여덟 벽돌 중 그 유명한 산수문전(山水文塼, 산경치무늬벽돌)에 유독 눈길이 간다. 백제인이 이해했던, 그리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그들이 표현했던 자연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귀한 유물이다. 그 자연이 실경(實景)인지 상상의 선경(仙境)인지 명확히 규정하기가 쉽지 않지만, 백제인의 자연에 대한 이해와 표현, 바닥돌조차 이토록 섬세하게 장식한 그들의 예술 감각에 감탄할 뿐이다.

눈길을 잡는 유물들
박물관에는 화려한 금동불상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시실 벽면에 정림사지와 부여의 수많은 절터에서 발굴된 훼손된 불상 파편들이 전시되어 있다. 반대로 얼굴만 남아있는 인물상도 있다. 학자에 따라 나한상(羅漢像, 부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성자)으로 보기도 하는 부여 구아리 인물상. 저 오묘한 표정을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하면 좋을까. 훼손된 불상과 인물상이 주는 가장 큰 미적 효용은 아마도 대상에 대한 기초정보가 제거된 상태에서 보는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 해석은 진위와 가치를 넘어 광범위하게 열려 있다는 점일 것이다. 정확히 언제, 어떤 이유에서 만들어져 어떤 사연으로 훼손되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그렇기에 매력 있는 존재들이다. 왕흥사지 사리함과 사리병(복제품, 2007년 10월 발굴)을 지나 뒤편 구석에서 정말 소박한 유물을 발견한다. 마치 더부살이 하는 행랑채 손님처럼 전시실 한쪽에서 다소곳하다. 무량사 김시습 부도에서 나온 사리 장치이다. 백제의 예술혼과 1,000년 후의 예술혼이 이처럼 차이가 나는 것인가. 그 차이는 단지 시간의 간극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화려함의 있고 없음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김시습의 삶이 배어나오는 무게감 있는 유물이다. -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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